동방팬픽

Eden of Idola Deus

교토대동방학과 2021. 2. 14. 22:43

Eden of Idola Deus

제 3회 모티브 팬픽대회 출품작

 

-1-

 

아침부터 명련사가 소란스럽다. 아침 법회가 시작되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안에서 누가 염불을 외거나 수행에 임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요괴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절 이곳저곳을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중엔 삽이나 양동이 따윌 잔뜩 이고 옮기는 이도 있었고, 밖에 몰려든 마을 사람들을 하나하나 타일러 돌러보내느라 진땀을 빼는 이도 있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아침 모습, 그 소란의 한가운데에 히지리와 이치린이 나란히 서있었다. 둘은 시선은 절의 강당을 향해 있었다. 천장 일부가 무너져 내리고 기둥이며 벽 곳곳이 불타 있는 처참한 모습의 건물. 이는 화마의 흔적이었다. 밤사이 찾아온 화재라는 이름의 재난, 이 명련사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바로 아침부터 절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은 소란의 원인이었다.

 

이치린이 발견했을 땐 이미 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뒤였단 말이지?”

 

네에 ... 면목 없습니다. 저희 삶의 터전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다니 ... ...”

 

아니야, 너희들이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내겐 건물 한 채보다 너희들 한명 한명이 훨씬 소중하단다.”

 

의기소침해진 이치린을 다독여주며 히지리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런 다정한 위로에도 불구하고 이치린의 시선은 불안하게 헤엄치며 자신들 때문에 벌어진 참상과 히지리의 눈치를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둘은 강당 안으로 들어가 검게 그을린 다다미 위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까만 재와 물기로 뒤덮인 축축한 다다미는 발을 옮길 때마다 찐득한 검댕이 발에 묻어나왔다. 다다미뿐만이 아니었다. 한 때 든든하게 이 방을 지탱해주었을 기둥과 들보는 타다만 거대한 장작이 되어 움푹 패인 바닥위에 널부러져 있었다. 화려한 탱화가 가득했던 벽은 전부 검게 덧칠해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자애로운 미소로 매일 수행자들을 지켜봐주던 부처의 좌상은 지옥 업화에 고통 받는 죄인의 모습마냥 뒤틀려 바스라지고 있었다.

 

본디 재난이란 예측하지 못한 우연들이 겹쳤을 때 불운하게 발생하는 법. 마을에서 병사한 아이의 장례식이 열린 날 밤 우연히 뇌우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우연히 명련사의 주지승과 본존이 장례식을 치루기 위해 자리를 비우지 않았더라면, 우연히 그 날 몰래 금단의 연회를 벌인 수행원들이 잔뜩 술에 취해 죄다 곯아떨어져 있지 않았더라면 일이 이 정도로 커지진 않았을 것이다. 결정적인 원인은 우연히 명련사에 떨어진 한 줄기 낙뢰 때문이었다. 겨우내 바싹 말라있던 정원의 나무와 풀들은 낙뢰에게 있어 훌륭한 땔감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치 호랑이가 울부짖는 것 같은 우렁찬 폭음과 함께 수목이 불꽃에 휩싸였다. 하지만 절 안에서 누군가 나와 상황을 확인하는 일은 없었다. 독한 알코올을 한계까지 들이붓고 강당에 대자로 뻗어 있던 절의 요괴들은 갑작스럽게 환해진 바깥도, 천지가 개벽하는 소음과 진동도 느끼지 못했다. 그 틈을 타 화마는 목줄 풀린 개 마냥 화마는 있는 대로 날뛰고 주위를 집어삼키며 그 기세를 불려나갔다.

 

뒤늦게 뜨거운 열기를 느낀 요괴들이 하나 둘 눈을 뜨기 시작했을 때 불길은 이미 강당의 일부를 막 집어삼키던 참이었다. 술기운이 확 달아난 그들은 눈앞에 닥친 비상사태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들 중 물을 다루는데 도가 튼 요괴가 있었던 덕분에 불을 빠르게 제압하여 다른 건물로 옮겨 붙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지만 대처가 늦었던 탓에 피해가 이 지경으로 커지고 말았다. 모두가 힘을 합쳐 정리하고 가꾼 정원은 절반 가까이가 소실되었고, 법회를 드리는 불전은 무사했지만 그들이 생활하고 수행을 쌓는 장소가 불타 없어져버렸다. 수행자들이 염불을 외우며 극락왕생과 깨달음을 기원하곤 했던 장소는 이제 지옥도처럼 변해버려 가까스로 그 흔적만 알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비가 내리긴 했지만 번갯불을 다스릴 정도는 아니었나보네. 우리 쪽에 미나미츠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렇죠...? 불이 난 걸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물을 있는 대로 끼얹어줬으니까요. 미나미츠가 아니었으면 강당 하나로 끝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랬겠지. 그렇지만 이상한걸. 이 정도의 화재가 일어날 정도면 규모도 소리도 엄청났을 텐데. 너희들이라면 불이 커지기 전에 더 빨리 알아차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 그건 ... ... 수우...! 수행 때문이에요, 언니! , 그런 말도 있잖아요? 명경지수를 깨우치기 위해선 주변의 소리를 지우고 오직 마음의 다스림에만 집중해야 한다고요! 다들 언니가 안 계신 동안에도 수행에 힘쓰다가 번개 떨어지는 소리를 못 듣고 만 것이에요!”

 

횡설수설하며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는 이치린. 히지리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그녀나 미나미츠면 몰라도 장난꾸러기 누에나 쿄코 같은 녀석들이 그녀가 없는 새에 자발적으로 수행에 참여하다니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히지리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치린의 말이 급조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필시 어디 연회에 놀러나가거나 이상한 장난을 치다 한눈을 판고 만 것이리라, 자세한 경위는 몰라도 일이 이 정도로 커진 데에 그녀들의 책임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하아 ... 이치린, 이 이상 추궁은 하지 않을게. 대신 너희들이 책임지고 정원과 강당을 재건해 주렴. 이 일은 모두의 책임이니 누구 하나 빠질 생각 말고 협조하라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전해 주겠니? 당분간 법회를 여는 것은 무리인 듯하니 공사하는 동안은 다 같이 불전에서 모여 지낼 수밖에 없다는 것도. 불편하겠지만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원래의 명련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모두 노력해보자. 할 수 있겠지?”

 

그럼요, 언니! 믿고 맡겨만 주세요.”

 

그리고 거짓말은 하지 않도록. 망어(妄語)는 십악(十惡) 중 입으로 짓는 4가지 구업(口業)중 하나이며, 네가 변명을 함으로써 어겨버린 불망어의 자세는 수행자가 기본으로 지켜야 할 오계. 잘못된 행동으로 업을 쌓았음에도 이를 반성하지 못하여 또 다른 업을 쌓다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너희 스스로 치암중죄금일참회(痴暗重罪今日懺悔), 망어중죄금일참회(妄語重罪今日懺悔)하여 그 업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도록 정진하렴.”

 

... ... 죄송합니다.”

 

, 그럼 이제 가서 이야기를 전해주렴. 너희가 힘쓰는 동안 나는 불타버린 불상을 어디서 다시 구해야할지 생각해봐야겠어. 수행자들을 지켜보는 부처님의 상은 수행자들의 마음을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는 중요한 것. 이것만큼은 내가 직접 나서야 할 것 같아.”

 

잘못을 범한 것에 대한 사죄, 그리고 잘못을 용서해준 것에 대한 감사를 담아 고개를 꾸벅 숙인 이치린은 종종걸음으로 화재의 현장에서 빠져나갔다. 그런 그녀와 엇갈려 회랑을 지나쳐온 훤칠한 그림자 하나가 발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성큼 걸어 들어와 히지리의 뒤에 섰다. 분노가 서려 힘이 담긴 발걸음, 그 기척만으로도 누군지 알 것 같다는 듯 등진 자세 그대로 히지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화가 나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 아이들을 용서해주세요, . 절의 본존이 이런 일로 은인자중(隱忍自重) 하지 못하고 격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히지리가 없는 틈을 타 허랑방탕(虛浪放蕩)해진 것도 모자라 신성한 수행의 장소가 잿더미가 되도록 놔두다니, 아무리 한 가족이라 해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입니다. 이번 일은 엄중히 벌하시어 본보기를 보이지 않으면 ... !”

 

이곳은 화합하는 자세를 배우고 깨달음을 얻기 위한 장소, 상벌을 통해 위계를 확립하고 강제로 행동을 교정하는 그런 장소가 아닙니다. , 이번 일의 원인은 어디까지나 불운한 사고였잖아요? 우리가 있었다 한들 벼락이 떨어지는 것까지 막지는 못 했을 겁니다. , 그 아이들도 충분히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지 말아주세요. 수행이 부족한 것은 저희가 이끌어주면 됩니다. 하지만 한 번 생겨버린 감정의 골은 언제까지고 흉터로 남아 공존과 화합을 방해한답니다. 힘겹게 천년의 시간을 기다려 다시 모인 우리가 이런 일로 틀어져버리는 것은 원하지 않아요.”

 

뭐라고 더 말하려다 입을 굳게 다무는 비사문천의 대리인. 이 침묵은 그녀가 일단 히지리의 말을 납득했다는 사인이었다. 히지리는 감사의 인사를 담은 눈웃음을 지으며 뒤돌아 쇼를 마주보았다. 히지리가 보내는 자비롭고 온화한 시선에 토라마루의 표정이 더욱 누그러졌다.

 

그나저나 곤란하네요. 건물은 수복하면 된다 하여도, 여기 있던 불상은 제가 봉인되기 이전, 묘우렌이 살아있던 시절부터 있었던 것. 이제 와서 다시 똑같은 것을 구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렇다고 마을 분들에게 이걸 복원해달라고 부탁드리자니 그분들께 너무 어려운 부탁일 것 같기도 하고요.”

 

꼭 이전과 똑같은 것으로 구해야 하는 겁니까?”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 여기 있던 불상은 저와 묘우렌이 함께 수행을 하며 기도드리던 것이었답니다. 다른 분들께는 널리고 널린 불상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만 제겐 묘우렌과의 추억이 담긴 둘도 없는 불상이랍니다. 그래서 저는 이 방에서 염불을 외고 있으면 특히 더 명상이 잘 되었답니다. 마치 묘우렌이 지켜봐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더 마음이 편안해졌거든요. 그런 이 곳이 원형을 잃고 달라지는 건 묘우렌의 일부를 잃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아요. 그래서 가급적 원래의 모습 그대로 복원하고 싶어요. 미안해요. 모범을 보여야 할 제가 이런 고집을 부리고 있어서.”

 

아닙니다. 저도 히지리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 절은 히지리의 소중한 기억을 담긴 곳이기도 하지만 히지리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저희들의 기억이 담겨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런 장소가 이질적인 풍경으로 달라지는 것은 저도, 그리고 다른 식구들도 원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히지리가 원하는 대로, 최대한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도록 저도 힘쓰겠습니다.”

 

말은 쉽지만 힘든 문제라는 것은 쇼도, 히지리도 잘 알고 있었다. 절의 다른 불상들을 참고삼는다 해도 천년도 전에 만들어진 것을 원래 모습 그대로 완벽히 복구할 수 있는 인재가 이 환상향에 얼마나 되겠는가. 설령 그런 인재를 운 좋게 찾는다 해도 완성까지 얼마나 걸릴 지도 모르는 일이며, 완성된 작품 이전과 100% 똑같은 모습이 될 거라는 것도 보장할 수 없다. 만들어주는 쪽은 몰라도 히지리라면 아주 작은 차이라도 금세 알아채고 아쉬워할 것이다. 쇼는 묘우렌의 존재가 히지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소중한 추억을 잃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미련, 집착, 수행자로서 이런 것들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히지리를 생각하는 쇼의 감정은 그녀의 이성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교리나 계율이 어찌 되었건, 지금은 일단 히지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주고 싶었다.

 

히지리와 쇼가 절 마당으로 내려오자 불탄 부분을 보수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명련사 식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엔 잔꾀 부리며 모습을 감추기 바쁜 누에마저 진지하게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히지리의 뜻이 모두에게 제대로 전달된 모양이었다. 적극적으로 반성하고 잘못을 수습하는 모습에 히지리와 쇼의 얼굴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렇게 노력하는 식구들을 봐서라도 자신들도 힘을 내 해야 할 일을 하자고, 그렇게 둘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을 때였다.

 

다들 정신없군. 이렇게 바빠 보이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모두가 열심인 와중에 주인님은 돕지 않는 건가?”

 

마치 남의 일인 양 느긋하게 계단을 올라와 손을 흔드는 작은 체구의 요괴. 토라마루 쇼의 감시자이자 비사문천의 부하인 나즈린이었다. 한쪽 어깨에 치즈조각을 맛있게 갉아먹는 부하 쥐를 대동하고 찾아온 나즈린은 분주히 움직이는 다른 식구들을 지나 히지리와 쇼 앞에 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비사문천님을 모신 절이 불탔는데 그 대리인이 이렇게 손 놓고 있어도 되는 건가. 비사문천님께서도 탐탁치 않아하실거야.”

 

놀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선 히지리와 이야기가 끝나는 대로 나설 생각이었어요. 나즈린이야말로 제가 마을로 보낸 이유를 잊은 건 아니겠죠? 제가 말한 조건의 인물은 찾았나요?”

우수한 실력의 조각가 말이지? 그에 대해선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두 가지를 가져왔지. 어떤 것부터 듣고 싶어?”

 

나쁜 소식부터 부탁드리죠.”

 

마을 전체를 뒤져봤지만 주인님이 말한 것이 가능할 정도로 유능한 인간은 없었어. 그 자들이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색이 바랜 부분을 고치거나 그럴싸한 모조품을 만드는 정도지, 1000년이란 시간을 건너 뛰어넘어 과거의 유물을 그대로 재현 가능한 실력자는 없었다. 부하들이 알려준 정보를 토대로 내가 발로 뛰면서 다 물어봐서 확인한 뒤에 말해 주는 거야. 괜히 한 번 더 다녀오라거나 하진 말아줬음 좋겠군.”

 

너무 무심하시군요. 우리들의 소중한 장소를 재건하는 일인데.”

 

내 잘못은 아니잖아. 난 그 날 주인님을 따라 같이 장례식을 치루고 있었어. 바보들 때문에 나까지 고생할 이유는 없다고.”

 

, 둘 다 그만. 이 사고의 책임 문제는 더 이야기 하지 않기로 했죠? 나즈린, 그럼 좋은 소식은 뭐죠?”

 

그거라면 이 녀석이 알려줬어. 거의 포기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꽤 흥미로운 정보를 물고 왔길래 특별히 상을 줬지.”

 

자신의 어깨에 앉은 쥐를 톡톡 쓰다듬어주며 나즈린은 말을 이었다.

 

최근 마을에 떠돌이 조각가가 찾아온다는 모양이야. 2~3일에 한 번 마을에서 본 적 없는 녀석이 나타나 이것저것 만들어준다는데, 그녀가 만들어 낸 조형물들은 하나같이 살아 움직일 것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워 사람을 홀리게 만들 정도라고 하더군. 뿐만 아니라 온갖 시대의 온갖 작풍이란 작풍은 다 섭렵하고 있다고 해. 그 정도로 출중한 재능을 지닌 자가 누구고,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몰라. 정체를 숨긴 요괴라는 소문도 있고 신이라는 소문도 있었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건, 어떤 부탁이든 거의 무보수로 들어준다는 거야. 그 때문에 수상한 녀석임에도 그 자가 찾아오는 날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하더군.”

 

그러고 보니 일전에 마을에서 천재 예술가라고 하던가, 그런 소문을 들어본 적 있는 것 같네요. 틀림없이 마을 장인 분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을 밖에서 온 존재인가요. 히지리, 그 자가 인간이 아니라면 혹여 저희들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밑져야 본전이겠죠. 나즈린의 말대로라면 마을 분들 중에선 저희의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는 분이 안 계시지 않나요. 그렇다면 그 소문의 조각가에게 걸어볼 수밖에 없어요.”

 

 

만나보고 싶다면 서두르는 게 좋을거야. 마지막으로 마을에 나타난 게 엊그제라고 했으니 오늘 쯤 슬슬 나타날 거고, 너무 늦으면 마을 인간들이 줄을 서서 한참 뒤로 밀려나게 될 걸?”

 

“ ... 좋습니다. , 그럼 그분을 모시러 제가 마을에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쇼는 여기서 나즈린과 함께 모두를 도와주며 지켜봐주세요.”

 

, 잠깐. 나도 도우란 말인가?!”

 

히지리, 제가 가도 되는 일입니다. 히지리는 이곳에서 모두를 지휘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요?”

 

아뇨, 애당초 제가 원해서 시작한 일입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것이 맞지 않겠나요. 나즈린이 말한 분을 오늘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 때문에 그런 고생을 쇼에게 시키고 싶지 않아요.”

 

아니, 내 이야기는 듣지 않는 건가? ?”

 

어쩔 수 없네요. 너무 무리해서 찾아다니시지 말고 못 찾겠다 싶으면 늦지 않게 돌아와주세요. 그리고 나즈린, 잘 됐네요. 일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하잖아요. 마침 나즈린은 제 감시역이니 꼭 붙어 있어야 하고, 감시를 하면서 놀고 있을 순 없잖아요? 모두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말이에요. 히지리가 마을에 가 있는 동안 저희는 같이 다른 분들을 도와드립시다.”

 

이이이이 ... 고생하고 돌아온 날 이렇게 이용하다니!!”

 

쇼와 그녀에게 붙잡혀 이를 바득바득 가는 나즈린을 뒤로 하고 히지리는 계단을 내려가 마을로 향했다. 이대로 히지리를 보내는 건 탐탁지 않았지만 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히지리한테서 절박한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에 쇼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쇼우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저 히지리가 원하는 인물을 찾길 기도할 뿐. 그녀가 소중한 추억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2-

 

마을은 평소보다 들뜬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찻집, 포목점, 서당,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대화 주제는 온통 수수께끼의 조각가에 대한 것 뿐, 이런 유명인사를 지금까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던 히지리 쪽이 오히려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저마다 손에 점토나 나무토막 따위를 으레 챙겨들고 혹여 조각가가 이곳에 오지는 않았나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여느 때보다 활력 가득하고 행복해 보이는 마을의 일상이었지만 동시에 왠지 모르게 위화감이 드는 풍경이었다. 이름 모르는 이의 은총을 받기 위해 자신의 일과마저 내던지고 온종일 마을을 방황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온 신앙심을 바쳐 기도를 드리는 것과도 같은, 살아있는 우상으로 떠받들어 숭배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 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한 사람의 작품이 이렇게 많은 이들을 강하게 매료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히지리는 아직 본 적도 없는 그 조각가에 대한 강한 경외심을 느꼈다.

 

얼마나 마을을 돌아다녔을까,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고 주변의 풍경이 주홍빛으로 물들어 갈 때까지 온 마을을 헤집고 다녔지만 소문의 조각가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오늘은 날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지난 번 방문이 그 자의 마지막 마을 방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경우의 수가 생각났지만 어찌 되었건 오늘이 날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기대를 가득 안고 마을을 배회하던 사람들도 슬슬 포기하고 있는 건지 눈에 띄게 거리가 한산해져 있었다. 더 돌아다녀볼까 했지만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무의미한 일에 허비해버렸다. 정체 모를 소문에 언제까지고 매달리는 것은 히지리에게도 명련사에서 기다리는 모두에게도 결코 득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대로 발을 돌리기엔 아쉽지만 쇼와 한 약속도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히지리는 탐문을 포기하고 마을을 빠져나갔다.

 

명련사로 향하는 동안 해는 완전히 산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어둠이 짙게 내리깔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희망마저 연기처럼 흩어져버린 히지리의 머릿속은 초조함으로 가득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또 기다리는 식구들에겐 무어라 말해야 할지 고민들이 번뇌처럼 마음을 옭아매고 괴롭혔다. 그렇게 착잡한 마음으로 길을 걷던 그 때, 어둠 속에서 히지리를 향해 다가오는 작은 불빛과 낯선 그림자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요괴인가 인간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들은 일정한 속도로 히지리를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둘 사이 거리가 10척 정도로 가까워졌을 무렵, 타오르는 불꽃이 비추는 형체가 선명해짐과 동시에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히지리에게 들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은 듯합니다. 이만 돌아가시고 내일 다시 오시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만~ 왔다 갔다 하는 데 시간을 너무 써버리면 작업 시간이 줄어드는걸?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출발했어야 했나.”

 

검은 마법사의 집에 너무 오래 머무르셨습니다. 그 인간이 그렇게 회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요?”

 

그 아이들은 귀중한 원석이야. 비록 지금은 흙 속에 파묻혀 그 빛을 다 발하지 못하고 있지만 조금만 다듬어주면 아름다운 광채를 뿜어내는 보석이 될 수 있는 존재란다. 그런 아름다운 보석을 누군가에게 빼앗기고 싶진 않은걸. 보석은 화려한 보석함에 담듯, 아름다움이 가득한 내 낙원에 그 아이들을 데려가고 싶어.”

 

케이키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말릴 수 없네요. 저는 케이키님께 충성을 바치는 존재니까요.”

 

, 그렇지만 확실히 피곤하긴 하네. 지금 사람들한테 부탁을 받으면 아마 철야 작업을 해야 할 거고~ 그럼 내일 엄청 피곤하겠지? 하지만 또 돌아갔다가 다시 오기는 귀찮으니까, 오늘은 숙소라도 잡을까? 아니면 노숙? 후후후... 지금 이 자리에 머물 곳을 지어버려도 괜찮고.”

 

낯선 이는 모두 두 명이었다. 딱딱하고 절도 있는 발걸음으로 앞장서서 시종일관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을 받는 쪽은 전신을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대화를 하면서도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는 히지리를 끊임없이 경계하며 허리에 찬 검에 손을 얹는 모습은 그녀의 임무가 호위라는 것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갑옷을 입은 이 뒤에 따라오는 존재는 화려하고 하늘하늘한 노란 옷 위에 앞치마와 머릿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첫인상은 어디의 고귀한 귀족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가벼운 행동거지하며, 앞치마에 주렁주렁 달린 주머니와 그 안을 빼곡하게 채운 작업도구들이 곧 그런 이미지를 지워주었다. 작업도구를 잔뜩 매달고 호위무사와 함께 밤길을 걷는 이방인, 그녀들이 자신의 옆을 스쳐지나가는 순간, 히지리의 머릿속에 어쩌면 이들이 소문의 천재 예술가 일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걸음은 멈춘 히지리가 고개를 돌리며 다급히 소리쳤다.

 

저기...! 실례합니다. 혹시 마을 분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한 천재 예술가 분이 아니신가요?”

 

히지리의 외침에 멀어져가던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호위무사 쪽은 여전히 히지리를 경계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바로 검을 뽑아 들이댈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사의 움직임은 그녀의 주인, 히지리가 말을 건 인물의 손짓으로 저지되었다. 자신의 무사를 멈춰 세우곤 놀라울 정도로 친근하게 웃으면서, 그 인물은 선뜻 자신을 부른 히지리를 향해 다가갔다.

 

지금 날 부른 거지? 그치? 천재 예술가라~ 그렇게 불리고 있었던 건가? 살짝 표현의 정도가 아쉽지만 그런대로 마음에 드는걸. 마유미, 어때? 천재 예술가라니, 저쪽에선 누구도 그렇게 부를 생각을 못했으니 이런 호칭도 나름 괜찮지 않아?”

 

케이키님이 어떤 분인지 생각해보면 오히려 너무 초라한 호칭이 아닐까 합니다.”

 

얘도 참, 모르는 입장에선 그럴 수 있지. ~ 거기다 소문도 났었구나. 어쩐지 요즘 갈 때마다 점점 줄이 길어지는 것 같더라니.”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호들갑떨며 기뻐하는 예술가로 추정되는 인물.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과 다르게 칭찬 한 마디에 우쭐해지는 모습이 어째 불안하긴 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겨우 붙잡은 구원의 거미줄을 놓칠 순 없었다.

 

초면에 이런 말씀 드리는 것이 무례하게 보일 지도 모르겠지만, 소문을 듣고 그 경이로운 솜씨에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 온종일 당신을 찾아다녔습니다. 저는 이 근처의 명련사라 하는 절의 주지를 맡고 있는 히지리 뱌쿠렌이라고 합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 절로 와주시어 제가 부탁드리는 것을 만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들어주신다면 머물 장소와 식사는 물론,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도 반드시 하겠습니다.”

 

어찌할까요, 케이키님? 명련사라면 분명 요괴들이 가득한 절이라고 하던데요. 위험한 곳일지도 모릅니다.”

 

비록 요괴이긴 해도, 그 아이들은 모두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귀의하여 제 가르침을 따르고 화합하는 자세를 실천 중인 자들입니다. 이 제가 있는 이상 어떠한 일이 있어도 두 분께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 보장할 수 있습니다.”

 

괜찮지 않아? 어차피 오늘은 지상에서 자고 가기로 했잖니. 좋아, 그 부탁 들어줄게. 절에서 요괴들과 지내보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 될 것 같고 지상에 온 것도 모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니까. 대가를 바라고 하는 건 아니니 너무 부담가지지 않아도 좋아.”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 없이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게 히지리는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면식 없는 이가 뜬금없는 길거리에서 부탁한 것을 이렇게 쉽게 받아줄 수 있는 이가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마치 부처의 마음과도 같은 넓은 아량에 히지리는 절로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소개가 늦었네. 나는 하니... 아니, 케이키라고 불러~. 이쪽은 내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인 마유미. 귀여운 이름이지?”

 

케이키님과 마유미님, 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너무 딱딱하네. 오히려 이쪽이 손님이니까 이쪽에서 주지스님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지 않을까? 편하게 케이키씨라고 불러주겠어?”

 

그럼 케이키씨...?”

 

그거면 좋아. 그럼 주지스님, 절로 안내해주겠어? 부탁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가면서 이야기 하고.”

 

자신들을 소개하는 말에서 어색함이 느껴졌지만 명랑하고 호감 가는 케이키의 태도는 순식간에 그런 부정적인 감상을 지워버렸다. 조금 엉뚱하지만 재미있는 분들, 이라고 생각하며 히지리는 자신이 돌아오길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식구들이 있는 곳으로 케이키 일행을 안내했다.

 

밤이 되도록 오지 않는 히지리를 걱정하며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모두는, 그녀가 돌아오자 일제히 뛰쳐나가 그녀를 맞이했다. 함께 온 케이키 일행은 히지리가 그녀들을 소개하는 내내 모두의 시선을 휘어잡았다. 혹자는 기대의 시선으로, 혹자는 의심의 시선으로, 혹자는 흥미 가득한 시선으로, 시선마다 다른 감정이 실려 있긴 했으나 그 관심의 대상은 전부 동일했다. 그런 요괴들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케이키는 태연히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곤, 당당한 발걸음으로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히지리가 안내한 강당에 들어섰다. 히지리가 자리를 비운 동안 식구들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내부가 수습되긴 했지만, 검댕 투성이의 벽과 처참히 갈라진 불상의 잔해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화재의 참혹함을 케이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오면서 말씀드렸듯이, 어젯밤 불행히 발생한 회록지재(回祿之災)로 인해 저희들의 소중한 수행의 장이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무너진 건물은 다시 고치면 되고, 잃어버린 법구나 경문은 저희 손으로 다시 만들면 됩니다. 하지만 이 절이 세워지기 전부터 있어왔던 이 불상만큼은 도저히 그럴 수 없겠더군요. 이 안엔 제 소중한 가족과의 기억이 담겨 있습니다. 이전과 모습이 달라지면 그 소중한 기억마저 잃어버릴 것 같아 아무에게나 복원을 부탁드릴 수 없겠더군요. 아시다시피 무언가를 완벽하게 복원한다는 것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어려운 작업이 아닙니까.”

 

그렇지. 끔찍하게 타버렸네. 이전의 모습은 거의 남지 않아있어. 원형도 알 수 없는 유물을 똑같이 만들어 달라니, 이런 건 인간들에겐 너무 가혹하고 부담스러운 일이야.”

 

그래서 마지막으로 케이키씨를 찾아 부탁을 드리려 했던 것입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케이키씨가 만든 작품은 하나하나가 시대를 초월한 미와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생동감을 지녀 보는 이의 입장에서 신의 경지가 느껴지는 것들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능력을 가진 분이라면 다소 무리한 요구더라도 이 일을 받아주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기에 어떠신가요? 강요는 하지 않겠습니다. 저희로썬 이렇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무지(感謝無地)한 일입니다. 역시 무리라 생각되신다면, 그저 최선을 다해주시기만 하셔도 ... ...”

 

걱정 마. 할 수 있어. 나니까 가능한 일이지. 그 전에 가능하면 이 절의 다른 조각상들을 둘러봐도 될까?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도 많겠지? 그걸 보면 좀 더 만들어야 할 작품의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그려질 것 같아.”

 

확신 가득 찬 대답에 히지리의, 그리고 밖에서 둘의 대화를 살피던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물론입니다.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참고 삼으셔도 괜찮습니다! 부담되지는 않으신 건가요? 저희 절에 방문하신 건 오늘이 처음이실 터, 정말 한 번도 본적 없는 천 년 전의 불상을 재현해내실 수 있으신가요?”

 

그럼. 나는 한 입으로 두 말 하진 않아. 대신 몇 가지 조건이 있어.”

 

혹시 사례 말씀이신가요?”

 

사례는 필요 없다고 했잖니. 첫 번째 조건은 이 건물을 내 작업실로 쓰게 해줄 것. 식사나 잠, 씻는 것도 이 방에서 해결 할 수 있도록 해줘. 두 번째 조건은 완성되기 전까지 모두의 출입을 금할 것. 이쪽도 마유미를 시켜서 감시할거야. 집중하는 동안에는 방해받고 싶지 않아. 마지막 조건은 매일 자정, 주지스님 혼자 이 방으로 찾아올 것. 이 세 가지만 들어준다면 그쪽이 원하는 불상을 만들어줄게.”

 

어렵지 않은 조건이네요. 받아들이겠습니다.”

 

후후후, 좋아. 그럼 이 절의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 그리고 조각에 쓸 재료들이 필요해. 나무는 향나무와 은행나무, 잣나무가 필요하고, 이것들은 오는 길에 괜찮은 나무를 점찍어 둔 것이 있으니 내일 해 뜨는 대로 구해오면 될 거야. 마유미한테 위치를 알려 줄테니 아무나 같이 가도록 해. 안료 같은 자잘한 것들은 내일 한 번에 적어서 줄게.”

 

필요하신 것은 얼마든지 말씀해주세요. 저와 저희 식구들이 최선을 다해 보조하겠습니다. 밖에 있는 모두, 손님의 말씀은 잘 들었지? 이치린, 네겐 절의 안내를 맡길게. 미나미츠와 쿄코는 목욕물과 잠자리의 준비를 부탁해. 누에는 나머지를 데리고 들어가 있도록 하고. 쇼는 ... 저와 이야기 좀 하죠.”

 

쥐 죽은 듯 툇마루에 모여 이야기를 엿듣다 히지리의 부름에 하나 둘 반응하는 요괴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두가 히지리가 시킨 각자의 일을 하기 위해 흩어지고, 케이키 일행마저 이치린을 따라 절 안쪽으로 사라진 뒤 검댕 투성이의 강당 안엔 히지리와 쇼,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애써 귀인을 찾아 모셔왔는데 표정이 좋지 않네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건가요?”

 

, 아뇨, 별 건 아닙니다. 손님을 모시는 방이 따로 있는데 이런 더러운 잿더미 속에서 주무시게 두어도 될까 걱정 되어서 그렇습니다.”

 

그 분이 그렇게 해달라고 먼저 요구해 오셨으니 마음에 걸리긴 해도 원하시는 대로 해드릴 수밖에요. 하지만 제가 보기엔 쇼가 그런 표정을 짓는 덴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쇼도 제게 거짓말을 하려는 건 아니죠?”

 

으음 ... 도와주러 오신 분껜 실례지만, 왠지 자꾸만 수상하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가질 않는군요.”

 

수상하다니요?”

 

오랫동안 요괴로, 비사문천님의 대리자로 살아오며 수많은 인간을 만나봤습니다. 동요, 두려움, 의심, 경외, 존경, 숭배, 저를 접하는 인간들에게선 어떤 형태로든 감정의 파동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미나미츠나 이치린을 접할 때도 마찬가지였죠. 결국 저희의 본질은 인외의 존재니까, 다른 존재 앞에서 감정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분은 ... 저희들을 대하는 동안 어떤 감정의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원체 마음의 평정을 잘 유지하시는 분 인건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아아, 저도 비슷한 감상을 받았답니다. 한없이 넓은 포용력으로 저희를 받아들여주는 케이키씨의 맑은 마음, 부처님의 마음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지요. 명경지수의 마음이 이런 것이 아닐까요?”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뭔가 다른 것 같습니다. 분명 그 분의 마음은 맑고 잔잔한 연못과도 같지만, 제가 보기에 이는 너무 맑아서 어떠한 생명도 살아갈 수 없는 곳. 멀리서 보기엔 아름답지만 마시는 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물이라고 제 감이 그렇게 외치는 듯 했습니다. 그 분이 데려온 종자도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것이 아닌 것 같은 공허함. 정말 그 분들은 아무런 목적 없이 순수한 선의를 베풀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일까요? 케이키님은 단순히 유능한 조각가인 것이 맞을까요?”

 

의심암귀에 사로잡혀 마음이 탁해졌군요, . 저와 케이키씨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그건 도저히 계획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또 케이키씨가 위험한 존재였다면 진작 제가 그 분의 말과 행동에서 악의를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에게서 어떤 악한 기운이 느껴지던가요? 쇼도 그분에게서 맑고 깨끗한 마음을 느껴졌다고 하지 않았나요? 만에 하나 위선이라 하더라도 선행은 선행. 타인의 선행을 곡해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제 일로 마음 상태가 혼란스럽다 해도 당신답지 않은 행동이군요. 방금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 ... 죄송합니다, 히지리. 자꾸만 제 위치를 잊고 무례를 범하는군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면, 내일 아침 일찍 마유미씨와 함께 케이키씨가 부탁한 재료를 구하는 걸 도와주세요. 조금 무뚝뚝하신 분이지만 함께 행동하다 보면 그 분들에 대한 경계심을 푸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씁쓸하게 웃으며 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쓴웃음을 본 히지리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위로해 주었으나 그것도 잠시뿐, 도움을 요청하는 쿄코의 부름에 히지리는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히지리마저 떠난 그 자리엔 쇼 홀로 남아 있었다. 멀어져가는 히지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쇼의 입안에서 차마 마지막까지 히지리에게 물어보지 못했던 말이 맴돌았다. 그 질문은 케이키에 대한 것이 아닌 히지리에 대한 것. 히지리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꺼내지 못한 말을 다시 삼키며, 쇼는 자신의 생각이 쓸데없는 기우에 그치기를 기원했다.

 

-3-

 

동이 트자마자 쇼는 히지리와 약속한 대로 케이키가 부탁한 나무를 찾으러 마유미와 같이 절을 나섰다. 절을 떠난 쇼와 마유미가 커다란 나무토막을 한가득 짊어지고 돌아온 것은 정오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이미 케이키가 묵는 강당 앞엔 다른 식구들이 손에 저마다 무언가를 하나씩 챙겨들고 모여 있었다. 색을 칠하기 위한 재료, 부식을 방지하기 위한 재료 등등, 쇼가 나간 뒤에도 케이키의 심부름은 오전 내내 이어졌던 것 같았다. 강당 출입이 통제 되어 공사는 일시 중단 되었으나 명련사의 식구들은 케이키의 보조로 여전히 쉴 틈이 없었다.

 

원하는 재료를 모두 전달 받은 케이키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한 명씩 손을 꼬옥 붙잡고 붕붕 휘둘러 악수하는 과장스러운 방식의 인사를 마친 그녀는 마유미를 문 앞에 세워 두곤 재료들과 함께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쇼와 명련사의 식구들이 그날 본 케이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여태껏 촐랑촐랑 흥미 가득한 눈으로 절 곳곳을 구경하고 다니던 케이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굳게 닫힌 문 안쪽에서 이따금 들리는 끌과 나무의 둔탁한 충돌음만이 그녀가 작업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마유미는 케이키가 작업에 몰두하는 동안 다른 이들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문 앞을 지키고 서서 주변을 통제했다. 오로지 정면만을 무덤덤하게 응시하며, 한눈을 팔기는커녕 미동조차 없는 그녀의 모습은 명련사의 요괴들에게 마치 살아있는 석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 기묘한 2인조의 행동은 처음엔 지나가던 이들의 이목을 끌어 가던 길을 멈추고 흘끔흘끔 상황을 지켜보거나 서로 수군대게 했지만 정지화면같이 재미없는 풍경은 또 금세 그들이 흥미를 잃고 떨어져나가게 만들었다. 오직 히지리 혼자만이 모두가 신경을 끄기 시작한 강당의 모습을 끊임없이 주시하며 초조하게 자정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밤이 찾아왔다. 하루의 절반이 지나가는 동안 케이키는 단 한 번도 방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마유미 또한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약속한 자정이 되어 히지리와 쇼가 찾아왔을 때 마유미는 그제야 비로소 서있던 자리에서 옆으로 물러나 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출입을 허가한 것은 히지리 한 명 뿐, 걱정된 쇼가 뒤따라 들어가려 하자 마유미는 말없이 그녀를 가로막으며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안에서 히지리와 케이키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지만 그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쇼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우두커니 마유미와 같이 서서 히지리를 기다리는 것 뿐. 안에서 둘이 나누고 있을 이야기의 내용에 대해 이리저리 상상해보며 쇼는 히지리가 나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머리 꼭대기에 떠있던 달이 어느덧 기울었다. 달빛이 만들어낸 처마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기 시작할 무렵 드디어 히지리가 방에서 나왔다. 어림잡아 1시간에서 2시간은 있었을 것이다. 낮 동안 내내 안절부절 못하던 모습과 다르게 방에서 나온 히지리는 아주 평온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쇼는 히지리를 반갑게 맞이하며 히지리가 들어가 있던 동안 쌓인 질문을 일제히 그녀에게 던졌다.

 

작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었나요, 히지리? 아까 전까지만 해도 근심이 가득해보였는데 지금 표정은 열반에 이른 것처럼 평화롭기 그지없군요. 그 분의 솜씨는 믿을만한 솜씨였습니까? 안에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나요?”

 

후후, 질문은 한 가지씩 천천히 말해주세요, . 제가 안에서 본 것을 그대로 전한들 쇼는 제 말을 믿지 못할 거예요.”

 

제가 히지리의 말을 의심할 리 없지 않습니까. 히지리가 거짓을 말할 거라 생각되지도 않고요.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는 제가 부탁드린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의 실력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적잖은 부담을 끼쳐드려 작업 속도가 더딜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그 분은 정 반대였습니다. 아직 겨우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 안에선 이미 부처님이 앉아 계실 좌대가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너무 붉지도 새하얗지도 않은 은은한 색과 한 점 모난 곳 없이 유려한 곡선으로 부드럽게 부처님의 자리를 감싸고 있는 연꽃의 형상. 아아,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저희가 이곳에서 매일 염불을 외며 봐오던 부처님이 앉아계시던 곳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 분은 시간을 넘어 과거를 재현하는데 성공하신거에요. 제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저는 케이키씨가 시키신 대로 가만히 앉아서 그 분이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케이키씨가 말씀하시길 이렇게 하면 자신이 제대로 일하고 있다는 걸 증명할 수도 있고, 영감도 더 잘 솟아난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곤 이따금 말동무가 필요하셨는지 절에서 수행하는 생활은 어떤지, 여러분들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묘우렌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런 질문들을 하시길래 답해드렸답니다.”

 

쉴 새 없이 자신의 감상을 줄줄 늘어놓는 히지리를 보며 쇼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어깨에 들어간 힘을 뺐다. 지금까지 케이키를 의심했던 한심한 자신을 마음속으로 책망하며 쇼는 히지리의 말에 답했다.

 

정말 소문대로 대단하신 분이로군요. 이런 출중한 능력과 인품을 가지신 분이 어찌하여 지금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은둔하고 계셨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여러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마미조처럼 최근에 환상향에 오게 된 분일지도 모르죠. 어느 쪽이든 저흴 도와주시는 분의 과거를 캐는 건 옳지 못합니다. , 복원도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저희도 들어가서 쉬도록 할까요? 내일은 이치린에게 좀 더 정성들인 식사를 준비하라고 해야겠네요.”

 

그러죠. 그런데 히지리 ... 케이키님은 휴식을 취하지 않고 계신 것 같은데 괜찮으실까요? 문 밖에 서계신 마유미님도 오늘 저와 나갔다 온 뒤로 쭉 저 상태셨으니 두 분 다 많이 지치셨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 점이 걱정되어 여쭤보았으나 괜찮다고 하시더군요. 특히 마유미씨는 자신의 작품이니 망가질 일이 없다고 하시던데, 저처럼 신체를 강화하는 술식이라도 쓰시는 걸까요? 평범한 분들이 아니니 마법 같은 걸 익히고 계시다 해도 놀랍지 않을 거 에요.”

 

전적으로 둘을 신뢰하는 히지리의 태도에 쇼는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었다. 히지리의 말마따나 자신들은 도움을 요청한 쪽이고, 맡긴 일은 순탄하게 잘 풀리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없었더라면 히지리는 여전히 근심걱정에 시달리며 괴로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부처님이 점지해주신 이 귀한 인연에 은혜를 입어 겨우 자신들의 짐을 덜게 되었는데 어찌하여 자신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번뇌에 고통 받으며 손에 잡은 기회를 버리려 하는 것인지, 쇼는 되먹지 못한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질책했다. 쇼는 히지리처럼 이 순풍에 자신을 맡기고 케이키에게 믿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리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리라. 종국엔 자기들은 소중한 장소를, 히지리는 소중한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쇼는 생각했다.

 

2일째, 케이키는 역시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작업을 이어갔다. 히지리가 모두에게 지난 밤 자신이 본 것을 말해준 덕분에 그때까지 반신반의하고 있었던 명련사 식구들의 기대와 신뢰도는 껑충 뛰어, 전날보다 많은 관심이 굳게 닫힌 방문과 그 앞을 지키고 서있는 호위무사에게 쏟아졌다. 히지리는 전날과 다르게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낮 내내 그들을 지켜보다가 해가 저물자마자 쇼와 동행하여 마유미 앞에 섰다. 잔뜩 들떠 있는 히지리에게 마유미는 약속시간이 되기 전엔 문을 열어줄 수 없다고 전했고, 덕분에 둘은 쌀쌀한 바깥에서 찬 밤바람을 맞으며 몇 시간을 더 서있어야 했다. 자정이 되어 히지리가 안으로 들어가고 홀로 남은 쇼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마유미에게 안부를 묻는 몇 마디를 건네 보았지만.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지극히 딱딱한 단답뿐이었다. 부끄러움을 타는 것이라 생각하며 머쓱해진 쇼는 가만히 서서 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히지리를 기다렸다. 부처의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소식과 함께 히지리가 방에서 나온 건 그로부터 약 3시간이 조금 넘게 흐른 뒤였다.

 

3일째, 여전히 케이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젠 다들 청소건 수행이건 손에서 놓고 삼삼오오 모여 안쪽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쑥덕거리고 있었다. 히지리는 아예 마유미가 서있는 곳 앞에 걸터앉아 있었다. 불공을 드리는 것도, 식사를 하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서 밤까지 기다리려는 듯 했다. 히지리의 모습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쇼였으나,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이는 히지리의 모습에 차마 그 자리에서 그녀를 끌고 나올 수 없었다. 묘우렌이 관련된 일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쇼는 히지리가 손 놓은 절의 일과를 대신 지휘하며 하루를 바쁘게 흘려보냈다. 히지리는 밤이 깊도록 방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약속한 시각이 되자 마유미는 히지리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불상의 몸이 거의 완성되었으며 이목구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소식과 함께 히지리가 방에서 나온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4일째, 쇼가 모두에게 아침 인사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방에 있었던 히지리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절의 본존인 쇼가 전날처럼 히지리를 대신하려 애썼지만 그녀의 노력도 식구들이 히지리가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 채는 것까지 막진 못했다. 분위기가 술렁이고 모두의 표정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황스러운 것은 쇼 또한 마찬가지였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과 절의 재건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불상이 완성되길 기대하며 하루 종일 케이키가 작업 중인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았는가. 그런 히지리가 말도 없이 절을 떠나 자취를 감추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 쇼의 머릿속에 며칠 전 자신이 끝내 히지리에게 털어놓지 못했던 말이 떠올랐다. 명련사에 화재가 발생한 이후 줄곧 히지리한테서 느껴진 이상한 변화와 함께. 쇼는 자신이 기우이길 바랬던 것이 결국 기우에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순풍을 타고 순조롭게 항해를 이어나가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밑바닥이 없는 수렁에 차츰 가라앉고 있던 중이었다고, 거기까지 생각한 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히지리를 찾아 나섰다. 히지리가 있을 장소는 분명했다. 히지리의 추억이 담겨 있는 동시에 미련이 향해 있으며 지금은 오직 그녀만이 드나들 수 있는 만들어진 성역. 무력을 써서라도 돌입할 각오를 마치며 쇼는 불타버린 강당으로 달려갔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쇼의 발이 멈춰 섰다. 석상처럼 매일 꼼짝도 않고 문 앞을 지키던 호위무사는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 마유미는 마루에서 내려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쇼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허리에 찬 무기를 뽑아들고 사명감과 적개심이 가득 불타오르는 눈으로 쇼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 케이키님의 작품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단념하고 돌아가시길.”

 

히지리를 보내준다면 그렇게 하죠.”

 

그 분은 지금 안에서 케이키님의 작품을 감상하고 계십니다. 약속시간이 아님에도 들여보내 주신 것은 케이키님의 결정. 하지만 그 전에 아침부터 안에 들어가고자 먼저 부탁해오신건 히지리님 쪽이었습니다.”

 

당신들은 히지리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거죠?”

 

케이키님은 아무 해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을 뿐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분과 그분의 작품에 매료되는 인간은 지금껏 수도 없이 봐왔으니. 이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거짓말...! 히지리는 평생 불법(佛法)을 따르며 요괴와 인간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몸 바치기로 맹세한 분, 현세의 예술이나 인간에게 매료되어 자신의 맹세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나약한 분이 아닙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케이키님은 그저 자비를 베풀고 계시는 중이라고요. 히지리님은 지금 케이키님의 베풀어주신 자비를 통해 귀중한 깨달음을 얻는 중입니다. 아직 그분과 같은 깨달음을 얻기에 이른 당신들이 이 신성한 순간을 방해하게 둘 수 없습니다.”

 

호랑이가 날카로운 엄니를 드러냈다. 손에 들린 보탑이 번쩍거리는 정화의 빛으로 그녀를 감싸며 비사문천의 힘을 불어넣었다. 그에 반응하듯 마유미도 자세를 바꾸어 금방이라도 들어올 공격을 쳐낼 자세를 취했다. 두 적의가 충돌하며 주변 공기의 흐름을 바꿔놓고 팽팽한 긴장감으로 주위를 짓눌렀다. 일촉즉발의 상황. 어느 쪽이든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곧바로 돌이킬 수 없는 충돌이 벌어지게 될 바로 그때였다.

 

강당의 문이 안에서부터 힘차게 열리며 케이키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4-

 

이런데서 싸우면 작업에 방해되잖니. 마유미, 나는 방해꾼을 적당히 타일러서 보내라고 했지 내 코앞에서 싸움을 벌이라고 하진 않았어. 설득한다, 싸운다. 이 둘이 구분 안 될 정도로 그렇게 어려운 단어였니?”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케이키가 마루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싸늘한 시선은 쳐들어온 쇼 쪽이 아니라 명령을 수행한 마유미 쪽을 향해있었다. 착 가라앉은 케이키의 꾸짖음에 마유미는 다급히 무기를 거두고 케이키 쪽으로 몸을 돌려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케이키님. 토라마루님이 무력을 행사하려고 하시기에 케이키님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 ...”

 

변명하지 마. 마유미, 네가 그런 추잡한 짓거리를 하면 내가 공들여 만든 작품이 더러움으로 물들어버리잖아. 더러워진 작품은 부숴버리고 다시 만들 수밖에 없어. 마음에 드는 작품이 때가 탔다고 파괴하는 건 정말 가슴 아픈 일이야.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걸. 그러니 얌전히 입다물고 물러나 있으렴.”

 

어두워진 낯빛으로 마유미가 쇼로부터 물러나자, 케이키는 마루에서 내려와 그녀에게 다가왔다. 방금 전 마유미를 꾸짖던 차가운 표정은 어디 갔냐는 듯 케이키의 얼굴은 다시 만면에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루만, 아니 반나절만 더 기다렸으면 완성이었을 텐데, 호랑이는 성질이 급한 동물이구나. 마치 내 아버지를 보는 듯 해. 이런 일이 있을까봐 미리 마유미한테 잘 타일러 돌려보내라 일러두었건만, 그 아이는 말재주가 없는 모양이야.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네. 그렇게 보고 싶다면 보여줄게. 너희 주지가 그렇게 원하던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을 말이야. 그래~ 좋은 기회네. 어쩌면 너같이 성질 급한 요괴도 주지처럼 깨달음을 얻게 될 수도 있겠다. , 이쪽으로 들어오렴.”

 

열려 있는 문을 향해 케이키가 손짓했다. 케이키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 쇼는 기다렸다는 듯 눈길도 주지 않고 그녀를 지나쳐 히지리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막무가내라며 케이키가 작게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런 사소한 말은 쇼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지금 쇼에게 중요한 건 오직 히지리의 안위뿐이었다.

 

한낮임에도 창문 하나 없는 방 안은 그을음 때문에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입구에 들어서자 좌우로 배치된 촛불이 방을 가로지르는 통로를 형성하며 은은히 타오르는 주홍빛으로 방 안을 밝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쇼는 거뭇거뭇한 다다미에 발을 올리며 시선으로 촛불들이 만들어낸 통로를 따라 방 안쪽을 훑었다. 그 시선이 통로의 한가운데 멈춰 섰다. 천장이 무너져 생긴 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비추고 있는 방의 정 중앙에 모두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히지리가 정좌하고 있었다. 바깥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히지리는 아무 관심 없다는 듯 같은 자세로 고개를 돌리는 것 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히지리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쇼가 한달음에 그녀에게 뛰어 들어가더니 가만 앉아있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히지리, 괜찮은가요? 제 말 들리시나요?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 겁니까!”

 

히지리는 자신의 정면, 수행장의 가장 안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히지리가 무언가에 의식을 빼앗기거나 신체를 구속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맑고 또렷했으며 손발 또한 자유로웠다. 다만 그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고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 흔적이 또렷이 남아있었다. 양 손을 꼭 움켜쥐고 움츠린 그녀의 모습과 쇼의 손을 타고 전해지는 아련한 떨림은 히지리의 격렬한 감정상태를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쇼는 당혹스러웠다. 대체 이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무슨 말이 오갔던 것일까. 또 히지리는 무엇을 보았길래 자신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감상에 젖어 있는 것일까. 쇼는 고개를 들어 지금도 떨리고 있는 히지리의 시선을 따라 방의 가장 안쪽을 바라보았다.

 

통로를 이룬 촛불보다 몇 배는 많은 촛불이 그곳을 에워싸고 있었다. 대부분은 녹아 문드러져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여전히 많은 수가 자기 몸을 불태우며 그 중심을 밝히고 있었다. 양초무더기가 둘러싼 중앙, 제일 먼저 아름다운 연꽃모양의 좌대가 눈에 들어왔다. 히지리가 첫 날 말했던 모양 그대로 자연의 미를 한껏 살린 좌대는 부드럽게 잎을 펼쳐 안쪽을 감싸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연꽃잎이 감싸고 있는 인물의 조형이 있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깨달음의 상징인 전법륜인(轉法輪印)을 맺고, 한없이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부처의 상이었다. 예술의 경지라는 표현조차 부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실로 아름다운 형상이었다. 촛불이 내는 아른거리는 불빛에 감싸인 부처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입을 열어 중생들에게 자신의 설법을 전파할 것만 같았다. 똑같은 나무로 만들어졌음에도 살갗의 느낌과 옷의 질감이 생생히 살아있었고 그 선명한 색감은 시간을 뛰어넘어 1000여 년 전 쇼가 이 절에 처음 찾아왔을 때 보았던 새 불상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해주었다. 매일같이 이 장소에서 불상을 보며 수행하던 자신이 보기에도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복원이었다. 흠 잡을 곳 없는 아름다운 그 자태에 쇼는 순간 자신의 이곳에 쳐들어온 이유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쇼가 히지리처럼 넋을 놓고 불상을 구경하고 있는 동안, 어느새 그녀의 뒤로 다가온 케이키가 말을 걸었다.

 

마음에 들어? 하지만 이 작품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 이상적인 형태를 갖추려면 조금 더 손을 봐야해.”

 

놀랍습니다. 한 번도 본 적 없으신 조각을 이렇게 완벽하게 이전 모습 그대로 재현해 내실 줄은.”

 

어머, 완벽이라니? 아직 손을 더 봐야 된다니까. 정말 이 작품이 옛날 모습 그대로라고 생각해?”

 

?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너희 주지가 원하는 수준은 고작 이 정도가 아니라는 거야. 거기서 이 작품의 완성을 지켜보고 있어. 그러면 알게 될 거야. 하지만 아쉽게도 이 작품은 오직 주지스님 1명만을 위한 것. 주지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네가 그녀와 같은 진리를 깨닫지는 못 할 거야.”

 

쇼에게 영문 모를 말을 늘어놓으며 그녀를 지나친 케이키는 아직 작업 중인 불상으로 걸어갔다. 목재로 된 발판을 밟고 올라, 부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선 케이키는 손을 뻗어 천천히 부처의 얼굴을 쓰다듬어보더니 자신의 앞치마에서 조각도와 끌을 한가득 꺼내 양손에 쥐었다.

 

절의 요괴들에 대해선 주지스님에게 들었어. 듣자하니 넌 이 절의 본존이라며? 그럼 다른 요괴들보다 수행을 더 많이 쌓았을 테고 아는 것도 많겠지. 그래서 말인데, 구경만 하면 심심할테니 몇 가지 좀 물어봐도 될까?”

 

시선은 불상에 고정한 채 날을 움직여 부드럽게 턱선을 깎아내며 쇼에게 말을 거는 케이키. 갑작스러운 질문에 쇼는 당황하여 반사적으로 히지리의 반응을 먼저 살폈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묻진 않을 거야. 그러니 주지스님은 신경 쓰지 마. 지금 주지의 머릿속엔 온통 이 작품이 완성된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니까. 그러니 이 자리에 없다고 생각하고 편히 대답해. 지금부터 내가 묻는 건 질문인 동시에 네가 품고 있는 의심과 의문들에 대한 답이기도 하단다.”

 

좋습니다. 말해보시죠.”

 

작업에 임하기 전 나는 이 절의 구석구석을 둘러보았어. 너희들이 의식을 치루는 장소에도, 수행을 치루는 장소에도, 그리고 발이 닿는 모든 곳에 크고 작은 부처의 조각이 반드시 하나씩은 있었지. 진짜 부처도 아닌데 너희들이 이런 조각을 그렇게 신성하게 여기고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질문의 의도가 이해가지 않습니다.”

 

어쩌면 너도 주지도, 이 조각들이 신도들을 끌어모으는데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게 아니야?”

 

아뇨, 그렇지 않을 겁니다.”

 

전혀 아니라고 생각해? 듣자하니 지상은 종교들이 짐승들처럼 세력을 확장하느라 여념이 없다고 하던데.”

 

저희의 의도는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호하네. 즉 내가 공을 들여 만든 이 작품도, 다른 것들도 신도를 끌어모으려는 목적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거구나.”

 

절 곳곳에 부처님의 상을 놓아두는 것은 저희들의 수행과 관련이 있습니다. 열반에 이르는데 성공한 부처님에게서 느껴지는 신성함, 그리고 그 표정에서 느껴지는 궁극적인 만족감 등을 간접적으로 느끼면서 모범으로 삼고 마음을 다잡아 수행에 정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케이키님이 말씀하신 그런 저열하고 세속적인 이유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표현이 거칠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냐, 사과할 필요 없어. 오히려 내 작품을 너희들의 장사수단으로 써 먹는 쪽이 훨씬 기분 나쁜걸.”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런 식으로 이용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이 작품이 너희들과 마을의 인간들의 수행에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긴 수행길에 오른 동안 이정표가 되어 흔들리거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줍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것들이 있지요. 부처님이 이 땅에 다시 현현할 날을 그리며 희망을 가지고, 신앙을 바쳐 구원해주기를 기도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 부처님을 예경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는 지혜를 얻을 수 있게 해줍니다. 이는 곧 인간 요괴 할 것 없이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마음, 이를 위해 불도에 귀의하게 만드는 것들이죠. 불상은 부처님을 접하고 그분과 감응하게 만들어주는 매개체입니다. 단순히 화려함으로 포장하여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스스로 귀의하고자 하는 결심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쇼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얼굴선의 정리를 마무리한 케이키가 톱밥이 덕지덕지 묻은 조각도를 탁 탁 털어냈다. 둥글둥글 푸근해 보이던 부처의 얼굴은 아까보다 턱선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 크게 변한 것은 없음에도 인상이 예리해진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케이키는 아까와는 다른 조각도로 바꿔 쥐더니, 이번엔 뭉툭한 부처의 콧날에 그 날을 들이대며 쇼와의 문답을 이어나갔다.

 

인간과 요괴들은 이 조형들을 통해서 부처를 느끼고 마음을 다잡는다는 것이구나. 그러면서 이 조형물에게 기도를 올리고, 공물을 바치고, 의식을 치루지. 그렇다면 너희들과 감응하며 깨달음을 주는 존재는 보이지 않는 부처가 아니라 이 조각상 그 자체라고 봐도 무관하지 않을까?”

 

지금 저희가 하는 수행이 우상숭배랑 다름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를 들어보자. 이 자리에 조각 대신 어떤 가공도 하지 않은 통나무가 그대로 있었다면 너희는 이 나무토막에게 기도를 올리고 이 안에서 부처를 찾아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반대로 흉측한 괴물의 형상이었다면? 그때에도 이전처럼 수행을 이어나갈 수 있겠어?”

 

멋대로 저희들을 판단하고 계시는군요. 마음만 먹으면 자연 그대로의 나무로부터도, 흉측한 귀신의 모습 속에서도 부처를 발견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니, 삼라만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끊임없이 발생하는 변화와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눈앞의 형상, 즉 색에 집착하여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아직 수행이 부족하다는 뜻이겠죠. 분명 저희가 아직 과거의 추억에 사로잡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완벽을 요구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 명련사의 모두가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 저희들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습니다. 불상은 수행을 도와주는 이정표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조각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이지 눈앞의 조각상이 아닙니다.”

 

비단 조각상만 그런 것이 아니야. 나는 오래전부터 너희들이 봐온 것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보아왔어. 이 땅에만 800만 명의 신이 있고 이 세상 곳곳에 있는 신들을 다 헤아리면 그 수를 파악하기 어려울 지경이지. 하지만 그 많은 신앙의 대상들에게도 공통점이 있어. 성서, 성가, 성화, 성상 ... 모든 신앙의 대상마다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있지. 그것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워. 마음을 울리는 글귀와 리듬, 그림과 조각. 그 예술적 가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인간은 더 많은 신앙심을 바치고, 자신들의 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더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고자 하지.”

 

오똑하게 선이 살아 있는 코를 빚어낸 조각도의 날 끝이 이번엔 미소 짓는 부처의 입가로 내려갔다.

 

으음~ 그러니까 말하고자 하는 건 너희들이 말하는 진리, 깨달음이라는 것은 뭔가를 초월해야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멀리 있는 게 아니야.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야말로 모두가 꿈꾸는 진리. 그리고 신을 표현한 작품들은 그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의 진리를 얼마든지 담아낼 수 있는 귀중한 그릇. 즉 우상은 진리를, 신을 담고 있어. 신이 담긴 그 조형에 신앙을 바치는 것을 잘못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니?”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손이 부처의 미소를 바꾸어갔다. 조금 전까지 얇고 도톰한 입술이 그리고 있던 자비로운 미소는 케이키의 손을 거치면서 허망함이 담긴 씁쓸한 미소로 변해가고 있었다.

 

신이나 부처를 직접 본 인간은 거의 없지만, 저마다 마음속에 신이라 생각하는 존재를, 진리와 행복이 가득한 낙원을 하나씩 그리고 있어. 그 이미지는 끊임없이 변화해, 어디에도 없던 새로운 신을 만들어낼 수 도 있고 타인의 설교나 가르침을 통해 여러 인간과 비슷한 이미지를 공유하기도 하지. 그렇게 마음속의 신은, 진리는 점점 자신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미지에 가까워지게 돼. 그래, 개개인의 이상이 담긴 이 이미지들이야말로 바로 각자가 추구하는 진리이며, 자신이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모습에 도달했을 때 우린 비로소 그 인간이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는 거야.”

 

만물은 인연과 조화에 의해 만들어지며 인연이 변하거나 사라지면 그 형체 또한 변하거나 사라집니다. 케이키님이 말하는 우상이라는 그릇도, 아름다움이라는 기준도 필연적으로 변하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무아의 경지에 도달한 이에겐 더 이상 필요 없는 무의미한 기준. 그런 덧없는 것에 삼라만상의 이치가 담겨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너희가 수행을 통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지? 자신을 지우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 바꾸어 생각하면 이 또한 인간의 수준에서 생각할 수 있는 수많은 이상적인 이미지 중 하나야.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 정도의 궁극적인 미. 나라면 그렇게 보겠어.”

 

아까부터 무엇을 말하고자 하시는 겁니까. 저희를 시험에 들게 하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저희를 능멸하고 비웃으려 하시는 겁니까.”

 

흥분한 쇼의 언성이 높아졌다. 쇼에게 대답하는 대신 케이키는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더니, 조각도를 집어넣고 발판에서 내려와 널려 있는 촛불 중 가장 밝게 불타는 것을 집어 들었다. 환한 불꽃을 불상의 턱 아래로 가져가며 그녀는 쇼에게 손을 내밀었다.

 

, 완성되었단다. 자세히 보렴. 이것이 히지리 뱌쿠렌이라는 자가 품고 있는 이상을 담아낸 그녀만의 우상. 히지리 뱌쿠렌의 신이자 진리의 형태.”

 

불빛에 부처의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쇼가 처음 본 불상의 형태가 화재로 불타버리기 전 모습을 100% 재현해낸 것이었다면, 지금 것은 이전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어딘가가 달랐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 모습이 쇼에겐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 원본과의 차이가 가져다 주는 원인모를 친숙함에 의문을 품은 쇼는 몇 번이고 위아래로 조각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그녀는 곧 친숙함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 불상은 히지리를 닮아 있었다. 매일 마주하던 얼굴이니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쇼는 왜 케이키가 멋대로 불상을 히지리와 닮은 모습으로 고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케이키는 자신이 고쳐 만든 모습이 히지리가 바라던 이상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히지리는 부처가 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어했던 것이란 말인가? 이해가지 않는 답이 계속하여 새로운 의문을 만들어 내며 머리가 복잡해진 쇼는 몸을 돌려 히지리 쪽을 바라보았다.

 

... 아아 ... ...묘우렌 ... ...”

 

히지리는 말문을 잃고 입가를 감싼 채, 양 눈 가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히지리한테서 북받쳐 올라오던 감정들의 정체가 쇼에게 느껴졌다. 하나는 쇼에게 매우 익숙한 것, 천여 년 동안 자신을 찾아오는 인간들한테서 숱하게 보아왔으며 바로 며칠 전 히지리를 따라간 장례식에서도 느꼈던 감정. 그것은 상실의 슬픔. 그것도 살을 찣고 심장을 후벼파는 고통 이상이라는 가족의 상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히지리가 부활했을 때 자신이 느꼈던 감정, 즉 잃어버린 소중한 존재를 재회했을 때 느낄 수 있는 환희와 감정이었다.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히지리는 쇼의 존재도 케이키의 존재도 잊은 듯 나지막이 묘우렌의 이름만을 중얼거렸다.

 

쇼에게 며칠 전, 화재가 벌어진 다음 날 히지리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다른 분들께는 널리고 널린 불상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만 제겐 묘우렌과의 추억이 담긴 둘도 없는 불상이랍니다. 그래서 저는 이 방에서 염불을 외고 있으면 특히 더 명상이 잘 되었답니다. 마치 묘우렌이 지켜봐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더 마음이 편안해졌거든요. 그런 이 곳이 원형을 잃고 달라지는 건 묘우렌의 일부를 잃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아요.]

 

그 땐 히지리가 이 장소에 특별히 더 많은 추억을 담고 있어서 그렇게 말한 줄로만 알았다. 동생을 기리며 세운 절이니 그에 대한 감정이 특히 더 강해지는 장소가 한두 군데 쯤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쇼는 히지리의 말을 작은 미련 정도로만 생각했다. 완벽한 복원을 주장한 것도 이 방에 실린 기억을 온전히 상기시키기 위해 그런 줄로만 알았다. 히지리의 모습이 걱정되기 시작한 건 그 직후, 케이키가 절에 찾아오고 나서부터였다. 처음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미련, 그 미련이 집착으로 번져가고 있다는 걱정이 들었을 때 쇼는 히지리에게 자신이 느낀 것에 대해 물어볼까 생각했었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히지리의 집착은 점점 심해져 지금에 이르렀다. 소실된 불상, 히지리의 집착, 케이키가 보여준 히지리의 이상,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답으로 이어졌다.

 

히지리. 당신은 ... 이 조각에 추억만 가지고 계셨던 것이 아니었군요. 이 불상은 당신에게 있어 묘우렌 그 자체나 다름없었어요.”

 

이제 내 말이 이해해주는구나. 보렴, 지금 주지는 감정이 극에 달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잖니? 지금은 상실의 기억이 같이 떠올라 혼란스럽겠지만 곧 사랑하는 가족이 자신이 원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는 기쁨에 고통스러운 기억도 잊게 될 거야. 현세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자신과 주변을 잊고, 이상에 도달한 이 모습이야말로 너희가 말하는 깨달음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 가엾은 중생에게 깨달음을 가져다 준 내 작품은 곧 그녀의 우상이며, 그녀가 찾아 헤매던 진리를 담은 그릇일지니. 꽤 힘든 작업이었어. 아무리 나라도 한 번도 본적 없는 고인을 만들어 내는 건 어려운 일이거든. 재료가 나무라서 더 힘들었어. 그 때문에 매일같이 주지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의 마음을 관찰해 실수 없이 완벽한 우상을 만들 수 있도록 한거야.”

 

당신은 ...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군요. 당신은 도대체 무엇인거죠? 마음을 가지고 노는 요괴인가요? 아니면 부처님과 동등한 격을 지닌 존재인가요?”

 

아직은 드러내고 싶지 않았는데. 떠돌이 예술가 행세를 하며 인간들에게 이것저것 만들어주는 것도 꽤 재밌었는걸. 하지만 그렇게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네. 정식으로 다시 인사하지. 나의 이름은 하니야스신 케이키. 완벽한 우상을 창조하고 우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조형신. 밖에 서 있는 마유미는 이 내가 만들어낸 창조물 중 가장 우수한 아이야. 가장 살아있는 생명에 가까우면서 그 본질은 더러움이 일절 섞이지 않은 내 자신작이지. 넌 감이 좋으니 그 아이가 지상의 생명체와 다른 존재라는 건 이미 눈치 채지 않았어?”

 

소개를 마치며 케이키, 아니 하니야스신은 지금껏 감춰둔 신의 힘을 일제히 드러냈다. 단숨에 그녀를 중심으로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바뀌었다. 요괴의 직감이 본능적으로 쇼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그 정도로 강하게 느껴지는 신성의 힘, 하늘과 땅을 창조하는 모리야의 신님들 혹은 그 이상에 준하는 어마어마한 힘은 그 무게감만으로 그녀가 얼마나 높은 신격을 가진 존재인지 가르쳐주고 있었다.

 

신이나 되시는 분이 직접 마을에 내려오시다니, 설마 당신의 목적은 신앙이었던 겁니까...”

 

그런 시시한 목적으로 왔을 리 없잖니. 지상에 관심이 생긴 인간이 있어서, 내 손으로 잘 다듬어줄까 설득하러 온 김에 겸사겸사 인간들을 도와주러 온 거야. 내 목적은 너희가 섬기는 부처와 같아. 그래, 더러움 가득한 지상의 존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지.”

 

당신의 행위가 무슨 구원이 된다는 거죠?”

 

기본적으로 이 지상도, 축생계도 더러움으로 가득한 곳이야. 너희는 너희를 감싸고 있는 이 대지와 자연이 깨끗하다고, 아름답고 생각하니? 내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아. 깨끗했던 옛 대지에 살해당하고 잡아먹힌 시체가 겹겹이 쌓이고, 생명이 배출해낸 더러운 오물이 쌓여 지금의 대지가 되고 그 오물과 시체를 섭취하고 자란 생명이 대를 거듭하여 지금의 자연이 되었지.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그 본질은 오물과 시체로 이루어진 것. 전혀 깨끗하지 못해. 전혀 아름답지 못해. 이런 더러운 곳에선 진리도, 깨달음도 존재할 수 없어.

 

그러니 난 낙원을 창조할거야. 단 한 점의 더러움이나 흉측함이 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진리의 낙원을. 그리고 그 안에 들어오는 이들은 다 내 손을 거쳐 이상적인 육체를 받게 될 거야. 시체와 오물 따위가 아니라 정토와 증류수만으로 빚어진 최고로 아름다운 육체를. 하나하나 각자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줄 거야. 업 같은 것이 쌓일 일도 없고 모자람이 없으니 부정적인 감정이나 괴로움도 생기지 않겠지. 후후후, 낙원이 완성되면 그야말로 내 일생일대의 걸작이 되겠는걸.”

 

생글생글 웃는 하니야스신의 표정에서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녀의 계획은 쇼에게 뒤틀려있다고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의 세상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낙원을 창조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을 눈앞의 신은 마치 장래희망을 말하는 어린아이같이 너무나도 순수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인간들에게 조각을 만들어주는 것도 그 연장선이야. 너희들을 도와준 것처럼 나는 인간들이 소망을 듣고 그들이 가장 원하는 형태의 우상을 만들어 주고 있지. 더러움에 익숙해진 대부분의 인간들은 진정한 미를 접했을 때 느껴지는 극상의 기쁨을 아직 모르고 있어. 비록 더러운 재료들을 써서 내 기준에서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인간들에겐 이런 더러운 우상조차 신성하게 느껴질걸? 그러다보면 지상이나 축생계의 인간들도 진리에 더 가까워질 수 있겠지? 그들이 이 세상의 더러움을 깨닫고,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때 나는 기꺼이 완전무결한 새 몸을 만들어 줄 거야. 그래, 한 점의 티도 없는 우상으로 모두 다시 태어나는 거야. 이 모든 것은 인간들을 위해. 그리고 내 이상을 위해.”

 

“...제정신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라곤 믿기지가 않는군요. 그런 생각으로 당신은 인간들을 위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지금의 자신을 버리고 삶의 순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너희들의 이념과 크게 다르지 않잖니? 하지만 이쪽은 훨씬 쉬운 방법이야. 독실한 믿음이나 뼈를 깎는 고행 같은 건 필요 없어. 이 조형신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기만 하면 되니까.”

 

그 낙원이라고 하는 곳엔 조화도 화합도 없습니다. 그곳은 당신 개인을 위한 우상 전시회에 불과합니다. 아무 노력 없이 그저 빚어지기만 한 흙덩어리가 세상을 올바른 시선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당신이 말하는 진리 어디에 삼라만상의 원리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까? 고개를 돌려 저 밖에 서있는 당신의 작품을 보십시오.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진리를 깨달아 궁극의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마유미는 누군가의 이상도 아니고, 본인이 품고 있는 이상도 없어. 내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낸 도구고, 그래서 진리에 도달하기엔 한참 부족해. 하지만 저마다 마음속에 신을 하나씩 품고 있는 인간들은 마유미와 달라. 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니? 그럼 너희들의 주지는 어떻게 할래? 기껏 괴로움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미를 찾은 그녀를 다시 번뇌와 더러움이 가득한

현실로 돌려놓을 생각이니?“

 

순간의 아름다움이 가져다주는 거짓 행복에 심취해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 착각하게 두느니 전 히지리를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을 겁니다. 제 선택으로 히지리가 고통 받는다면 제가 옆에서 그 고통을 나누어 받을 것입니다.”

 

꽤 재밌는 말을 하는구나. 그래, 끝까지 나를 부정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베푼 선의를 거부하는 것도 자유니까. 난 자비로운 신이니 이런 걸로 벌을 내리거나 보복하진 않아. 하지만 ... ”

 

하니야스신이 앞치마에서 끌과 나무망치를 꺼내 불상의 목에 갖다 대었다. 조각상에서 가장 가느다란 부분. 제대로 힘을 줘 내리치면 단 몇 번의 망치질만으로 목은 부러져 조각은 아름다움을 잃고, 부처의 머리는 바닥에 나뒹굴게 될 것이다. 이는 곧 이 며칠간의 노력과 기다림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간다는 뜻. 동시에 히지리의 눈앞에서 그녀가 그토록 그리던 존재가 산산조각 난다는 뜻이기도 했다.

 

주지의 고통을 나누어받겠다고 했었지. 그런 네게 선택권을 주겠어. 보면 알겠지만 지금 주지는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이 우상에 완전히 심취해있어. 이미 원하는 것을 손에 넣어 우상 밖에 보이지 않게 된 주지를 정신 차리게 하려면 이 우상을 부숴버리는 방법밖에 없어.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아가고 주지에겐 나를 만나기 전 그녀를 괴롭히던 집착과 괴로운 감정이 물밀 듯이 몰려들 거야. 어쩌면 이 선택을 내린 널 평생 원망할 지도 몰라. 그런 결과까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 우상을 부숴달라고 말하렴. 신중히 선택하도록 해. 쉬운 생각으로 신에게 소원을 빌었다가 후회하게 된 인간을 수도 없이 봐왔으니까.”

 

쇼는 히지리를 바라보았다. 먼 거리에서 닿지 않는 손을 뻗으며 여전히 히지리는 묘우렌을 부르고 또 부르고 있었다. 히지리의 감정에 공감할 수는 있었어도, 지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쇼도 알 수 없었다. 부처가 된 묘우렌이 자신을 구원하러 온 줄 아는 것이 아닐까. 정말 하니야스신의 말대로 궁극의 행복을 느끼고 있는 중은 아닐까. 쇼는 망설이기 시작했다. 우상을 파괴하고 우상에 심취한 히지리를 돌려놓는 것이 옳은 일임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절의 누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도 자신과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 이 행위가 히지리에게도 옳은 행위일까? 중생이 부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지금 히지리는 자신들이 판단을 내리면 안 될 정도로 격이 다른 위치까지 올라간 것은 아닐까. 히지리에 대한 감정이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망설임이 점점 커져가 결정을 내릴 수 없게 되자 쇼는 히지리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그 얼굴을 살폈다. 분명 그 얼굴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정녕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사람의 표정이란 말인가. 히지리의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묘우렌 단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히지리는 죽음을 거부하고 인간의 몸을 포기하면서까지 묘우렌의 의지를 이으려 했다. 동생의 죽음은 히지리에게 뿌리치기 힘든 미련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그녀에게 범인을 초월한 삶의 목표를 부여하고 성인의 경지로 이끌어주었다. 가족의 죽음을 딛고 성인이 된 그녀가 이제 와서 우상 따위의 거짓 진리에 매달려 지금껏 이룬 것을 내던질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본래 인간의 의지란 상황이 절박해지면 주변 모든 것에서 신을 찾으며 매달릴 정도로 약한 법. 지금의 히지리는 그 인간의 마음에 의해 약해져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신이 그녀를 흔들리게 만든 것이라 생각하며 쇼는 마음을 굳혔다.

 

쇼는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돌렸다. 결정은 내렸지만 입술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내린 쓰디쓴 선택의 결과에 히지리가 분출할 절망과 슬픔의 감정, 그리고 자신을 원망할 그녀의 표정이 상상되었다. 상상만으로도 괴롭지만 지금 쇼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쇼는 히지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곧 눈앞에서 벌어질 상황에 폭주할지도 모르는 히지리를 잡아두기 위해서, 그리고 그녀의 감정을 온전히 자신이 받아내 다스리기 위해서.

 

“...부숴주십시오.”

 

그 선택에 후회는 없겠어? 한번 부숴버리고 나면 다신 같은 것을 만들 수 없어.”

 

당신이 뭐라고 말한들, 저는 당신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두에게 전파하고자 하는 히지리의 이상을 더 모욕하지 말아주십시오. 성인을 범인의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마십시오. 비록 맨발로 가시밭길을 걷고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억겁의 시간이 걸린다 해도 진리는 히지리의 손으로, 그리고 우리 스스로 찾아내야 의미 있는 것입니다. 저희는 우상으로 다시 태어나길 거부합니다. 약해진 마음을 우상에 매달려 극복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부숴주세요. 더는 저희에게 필요 없는 것이니까요.”

 

시원하면서도 섭섭함이 담긴 표정으로 하니야스신은 자신의 작품을 위아래로 훑더니, 목에 겨눈 끌에 망치를 휘둘렀다. 끌이 목을 가르고 파고들며 히지리를 닮은 아름다운 부처의 얼굴 전체에 균열을 만들었다.

 

“...! 안 돼 ... 묘우렌! 묘우렌을 부수지 말아주세요! 어찌하여 그것을 부수려고 하시는 건가요! 그만둬 주세요!!!”

 

눈에 초점이 돌아온 히지리가 쇼의 귓가에서 소리쳤다. 아무리 우상이지만 눈앞의 존재는 히지리에게 다시 되찾은 가족이나 다름 없는 것. 지금 그녀는 가족의 죽음을 다시 한 번 겪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쇼는 끌어안은 팔에 힘을 꽉 주어 히지리가 달려들지 못하도록 막았다. 초인의 몸부림에 힘이 부치고 몸 곳곳에 격통이 느껴졌지만 이 모든 것은 히지리를 위한 일이었기에 쇼는 이를 악물고 견뎠다.

 

하니야스신이 망치를 한 번 더 휘둘렀다. 쩌억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나며 상처가 더욱 벌어졌다.

 

제발...! , 케이키씨를 막아주세요! 당신은 어찌하여 저를 막아서고 있습니까. 왜 제게 겨우 돌아 와준 행복을 두 분이 다시 앗아가려 하시는건가요! 어찌하여 제게 똑같은 고통을 다시 안겨주려 하시는 건가요? 싫어요... 묘우렌을 또 다시 잃고 싶지 않아요!”

 

정신 차리세요, 히지리! 저건 묘우렌이 아닙니다! 저 너머에 묘우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것은 우상에 불과합니다. 히지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만들어주는 거짓된 존재, 만들어진 신에 불과합니다! 묘우렌에게 한 맹세를 잊으셨습니까. 저희들에게 한 맹세를 잊으셨습니까. 당신이 추구한 성스러운 고집멸도의 진리가 이런 곳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세 번째 휘두름이 이어졌다. 망치가 끌을 치는 소리, 우지직 하고 아까보다 더 격하게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 그리고 뒤이어 바닥에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부처의 머리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만든 이에게마저 버림받고 살해당한 우상의 갈라진 얼굴에선 이제 더 이상 평화로운 깨달음의 표정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안간힘을 쓰며 몸부림치던 히지리도 이를 보고 체념한 듯 몸부림을 멈추고 고개를 떨구었다.

 

시간이 아깝긴 해도 어차피 더러움이 가득한 재료였으니 아쉬움은 없네. 정말, 지상도 축생계도 한결같구나. 선한 의도로 도움을 주어도 멋대로 의심하질 않나 싸움을 걸지 않나, 이젠 부정까지 당하고 신의 체면이 말이 아닌걸.”

 

당신만의 낙원에 저희들을 끌어들이려 하지 말아주세요. 아무리 당신에게 악의가 없었다고 한들, 저희가 받는 가르침을 부정하고 약한 마음을 현혹하는 이상 당신은 저희들의 적입니다.”

 

나는 너희의 무례를 용서하지만 너는 나를 용서하지 않는구나, 괜찮아, 이해할 수 있어. 제 아무리 남들보다 더 많은 지혜와 덕을 쌓았다곤 해도 내 눈에 너희도 인간들도 다 똑같아. 제각기 품은 더러움을 깨닫지 못하고 혼자 힘으론 결코 아름다워질 수 없는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들. 이런 너희들도 언젠간 나의 뜻을 알게 될 날이 오겠지. 그러니 그 때를 기다리고 있겠어. 몇 만 년이 걸리더라도 기다리고 있을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너희들의 새 그릇을 만들어놓고 말이야.”

 

“...그만 나가주십시오. 당신 같은 신과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흐느끼는 히지리를 품에 안고 돌아보는 것조차 하지 않는 쇼를 뒤로 하고 하니야스신이 방을 떠났다. 신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어질러진 작업과 파괴의 흔적, 그리고 히지리 마음속에 새겨진 또 하나의 상처. 그 상처를 새긴 원인이 자신임을 알고 있었기에 쇼는 더욱 씁쓸했다.

 

죄송합니다, 히지리. 히지리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마르기 시작한 눈물을 소매로 닦아주며 쇼가 히지리를 다독여주었다.

 

아뇨,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제 부족함과 나약함이 여러분을 힘들게 해버렸네요.”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 수행을 통해 마음을 비웠다 해도 어찌 자신의 혈육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감정이 있는 존재는 반드시 마음속에 약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저희들은 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모이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누군가가 약해졌을 때, 서로 보듬고 다잡아주기 위해서요.”

 

“... 저는 믿고 있었어요. 해탈에 이르러 부처의 경지에 도달한 묘우렌이 언젠가 저를 만나러 다시 올지도 모른다고요. 그렇기에 부처님 위에 묘우렌의 모습을 겹치며 수행의 이정표로 삼고 있었죠. 제 딴엔 가족의 죽음을 극복하면서 덕을 쌓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미 사라진 인연에 집착하여 세상의 본질로부터 멀어지는 잘못된 길이었군요.”

 

깨달음을 얻는 길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히지리가 걷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다면 지금이라도 바로잡으면 되는 것입니다. 많이 돌아가게 되더라도 저희에겐 아직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기서 주저앉지 말아주세요, 히지리. 또 오늘처럼 약해지지 않도록 저와 명련사의 모두가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정말 큰 은혜를 입었네요.”

 

히지리가 쌓은 덕과 현재의 인연이 만들어낸 결과이지요. 그럼 우선 이 수행장을 재건하는 것부터 다시 시작할까요? 결국 진척된 작업이 없으니 시간이 꽤 많이 지체되어버렸네요. 일단 불상은 명련사에 있는 것 중 하나를 가져다 쓰는 걸로 ... ”

 

아뇨, 이대로 두죠.”

 

목이 떨어진 불상을 말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미지가 조금 그렇지 않을까요?”

 

저의 어리석음을 반성하고 다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무릇 덕을 쌓은 자라면 세상 만물에서 부처를 찾고 감응할 수 있는 법. 그리고 제가 이 불상에 관한 이야기를 설법으로 만들어 전하다보면 아직 수행이 모자란 분들도 납득하고 수행의 지표로 삼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쉽지 않은 길이 될 겁니다, 히지리.”

 

제가 걸어온 길은 언제나 고행의 연속이었답니다, . 이 정도는 별 일 아니죠.”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 하나 늘긴 했지만 히지리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언젠간 오늘의 상처가 벌어지며 히지리의 마음에 틈을 만들고 또다시 그녀를 약화시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마다 명련사의 식구들이 다시 일으켜 줄 것이다. 히지리야말로 어리석은 요괴에 불과했던 그들을 진리의 길로 이끌어줄 수 있는, 명련사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니야스신이 꿈꾸는 낙원은 이 사실을, 이미 명련사라는 장소 자체가 요괴들이 신을 만들고, 그 만들어진 신이 세운 그들만의 에덴라는 것을 몰랐기에 거부당했다. 앞으로도 이 살아있는 우상을 지키기 위해 요괴들은 몸과 마음을 바쳐 그녀에게 헌신할 것이다. 히지리 뱌쿠렌이란 자의 이름이 전해져 내려오는 한, 이 에덴은 그 명맥을 계속 유지해 나갈 것이다.

 

<Epilogue>

 

인간 빼고 모든 존재들이 찾아온다는 하쿠레이 신사, 이 곳을 지키는 무녀 하쿠레이 레이무는 오늘도 달갑지 않은 방문객을 상대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어쩐지 요즘 요괴 절을 찾아가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네 짓이었어?”

 

그럼~ 이 내가 누군데. 소문이 자자한 목 없는 불상, 그걸 만든 게 바로 나라구, .”

 

신앙을 끌어 모으는 데 도움을 줄 거라면 차라리 이쪽을 도와주지.”

 

어머, 전에 이야기 꺼낸 적 있었는데. 그땐 거절했잖아?”

 

하도 귀찮게 구니까 그랬지.”

 

명련사의 복원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잡념을 떨쳐버리고 다시 지휘에 나선 히지리를 필두로 뭉친 요괴들은 단 며칠 만에 외부 공사부터 내부 단장까지 이전과 다름없는 수준으로 완벽히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경이로운 공사 속도도 마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정말 사람들의 관심을 모은 것은 새로 들어온 목 없는 불상. 목이 없어 섬뜩하지만 목 아랫부분만큼은 아름답기 그지없어 예술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불상은 금세 마을 전체에 소문이 퍼져 평소에 절이나 수행에 관심없던 이들의 발걸음조차 돌리게 만들었다. 이 특수를 노린 듯이 명련사의 주지는 매일 밤 목 없는 불상의 사연을 그 안에 담긴 교훈과 함께 이야기해주는 설법회를 열기 시작했다. 덕분에 불상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자 하는 수행 희망자 또한 대폭 증가. 명련사는 유례없는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신이 되어서 남의 장사도구나 만들어주고 있고 말이야.”

 

어차피 그건 실패작인걸. 내다 버린 폐품을 주워서 써먹는 건 명련사의 자유고, 이미 그쪽에서 불상은 장사도구로 쓰는 것이 아니라고 강하게 못 박았으니까 신경 안 써. 신앙이라면 축생계에서 넘치게 들어오고 있으니 괜찮다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생글거리며 케이키는 주머니에서 무언가 묵직한 것을 꺼냈다. 균열이 쩍쩍 가 미형의 얼굴이 흉하게 변해 있었지만 그 형상은 틀림없이 부처의 모습이었다.

 

기념으로 가질래? 일단은 부수면서 챙겨오긴 했는데 딱히 병사로 만들어 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영장원에 들이기엔 너무 더러운 물건이라서.”

 

필요 없거든! 왜 내 신사에 쓰레기를 투기하려 하는 거야!?”

 

일단은 신의 힘이 깃든 우상의 일부잖아? 이런 걸 두고 있으면 참배객이 늘어날지도 몰라.”

 

안 늘어! 기분 나빠서 오던 사람도 도망갈 거야.”

 

예술을 모르는 사람들인가 봐.”

 

예술을 하는 녀석들은 너처럼 다 이상하고 그래?”

 

이상한 것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이상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지. 다들 너무 매정하다니까. 난 내가 생각하는 이상을 위해, 그저 인간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있을 뿐인데.”

 

마리사한테도 들었어. 요즘 툭하면 찾아와서 스카웃 제의를 한다며. 놀러오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사람들을 돕는 건 이쪽에서도 대 환영인데 너무 귀찮게만 굴지는 마.”

 

후후 ... 그런가?”

 

자신의 손으로 부숴버린 우상의 파편을 만지작거리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케이키가 소리 내 웃었다.

 

있지~ 아직도 생각 없는 거야? 지금 모습 그대로, 최고로 깨끗한 재료만을 골라 부서져도 죽지 않는 몸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니까?”

 

됐네요.”

 

“ ... 다들 아직 이르구나. 가엾은 것들. 언제쯤 이들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지금 뭐라고 했어?”

 

이거, 기념으로 놓고 갈 테니까 제안에 응할 생각이 들면 언제든 영장원에 놀러오라는 얘기였어.”

 

거 됐다니깐!”

 

더러움이 가득한 자연을 몰아내고 만들어낸 최초의 낙원 영장원. 아직 다 완성되지 못한 그 곳에 있는 건 현재 케이키와 그녀의 하니와 병사들 뿐이다. 그녀가 주장하는 이상적인 아름다움만 가득한 낙원이 완성되었을 때, 그곳에 정말 행복한 감정만이 가득할지, 진리를 깨닫고 우상으로 다시 태어난 인간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게 될지, 그런 문제들은 케이키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더러움을 깨닫지 못한 존재들을 가엾게 여기며, 눈앞의 무녀를 바라보는 조형신은 머릿속으로 자신이 이상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