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팬픽

마음을 물들이고 있는 것

교토대동방학과 2021. 2. 14. 22:48

<마음을 물들이고 있는 것>

짭알못 팬픽대회 출품작

키워드 : 애증

 

쿠타카, 며칠간 지상에 출장을 좀 다녀와 줘야겠습니다.”

 

? 출장이요?”

 

상번 보고를 하러 염마의 집무실에 들어온 쿠타카가 어벙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상관을 바라보았다.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되물어봤지만 진지하게 끄덕이는 염마 시키 에이키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제대로 들은 모양이다. 출장이라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옥의 관문을 지키는 수문장이란 중책을 맡고 있지 않은가. 지상과 지옥을 오가는 역할이라면 사신들이 이미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사신들은 언제나 잉여 인력이 하나 둘 쯤 남아돌기에 급하게 지상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들을 보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문지기를 하루도 아니고 며칠씩 자리를 비우게 한다는 건 그만큼 지옥을 무방비하게 방치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거늘, 요즘같이 흉흉한 지옥 정세에 어울리지 않는 판단이었다. 위에서 누가, 왜 이런 지시를 내렸는지 쿠타카의 머릿속에 의문들이 피어올랐다.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쿠타카에게 아침 재판 준비를 끝낸 시키 에이키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하니 혼란스럽겠죠. 그 마음 이해합니다. 저도 지상의 일이라면 가급적 빈둥거리는 사신들을 시키고 싶었습니다만, 위쪽에서 직접 쿠타카를 지목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네요.”

 

혹시 시왕님들의 명령인가요?”

 

아뇨, 그보다 더 위입니다. 마침 명령을 내린 본인이 이곳으로 직접 방문하셔서 자세한 내용을 말씀해주시기로 하셨으니 쿠타카는 여기서 그 분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원래라면 저도 동석해야하는데 곧 교대시간인지라,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어째서인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 시키 에이키. 쿠타카는 깜짝 놀라 고개 숙인 염마에게 손사래 치며 사과할 필요 없다는 의미로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쿠타카를 올려다보는 염마의 눈빛엔 걱정과 연민이 가득했다. 혹시 엄청 고된 일을 시키려는 것이 아닐까, 불안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염마보다 더 위쪽에서 지시한 일에 대놓고 거부의사를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쿠타카는 불안함은 뒤로하고 억지로라도 밝은 웃음을 지으며 시키에이키를 안심시키기로 했다.

 

걱정마세요, 염마님! 위에서 제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여겼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이 니와타리. 제 명예를 걸고 무사히, 완벽하게 완수해 보이겠습니다. 평소처럼 실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약속드리겠습니다!”

 

쿠타카의 씩씩한 다짐에 시키 에이키의 낯빛이 조금은 밝아졌다. 그녀에 대한 신뢰를 담아 고개를 끄덕인 시키 에이키는 재판정으로 가기 위해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자신의 키보다 두세배는 큰 육중한 문을 열기 위해 시키 에이키가 문고리를 잡은 손에 온 힘을 실었을 때였다.

 

“-----?!?!”

 

-벌컥- 하고 집무실 문이 힘차게 바깥으로 열리는 바람에 균형을 잃은 시키에이키의 몸이 그대로 휘청하며 문밖으로 넘어갔다.

 

염마님! 괜찮으신가요!”

 

서둘러 뛰쳐나온 쿠타카가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시비곡직청 복도 한가운데에 염마가 나뒹굴고 있는 안쓰러운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시키 에이키가 넘어지지 않도록 그녀의 몸을 지지해주고 있었다. 그 백옥같이 희고 가녀린 손을 따라 쿠타카의 시선이 팔의 위쪽으로, 시키 에이키를 지켜준 인물을 향했다. 거기엔 화려한 관복을 입은 장발의 여인이 서있었다. 복장도 외모도, 쿠타카의 기억 속에 없는 낯선 인물이었다. 시키 에이키를 떠받친 자세 그대로 눈동자만 움직여 쿠타카와 시키 에이키를 번갈아 보던 낯선 이의 시선이 마찬가지로 자신을 살피던 쿠타카의 시선과 일순 마주쳤다. 아주 잠깐뿐이었지만, 그녀의 눈을 들여다 본 쿠타카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쿠타카는 본능적으로 날개를 움츠리고 그 인물로부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미소 짓고 있는 듯 서글픈 듯 알 수 없는 낯선이의 표정은 겉보기엔 무척이나 평온해보였다. 하지만 그 눈동자 안, 사람의 감정을 직접 보여주는 마음의 거울 안 쪽을 들여봤을 때 쿠타카가 느낀 것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순수한 심연, 검정 그 자체였다. 바닥을 알 수 없는 늪처럼 자신을 집어삼켜버릴 것만 같은 어둠을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이 자의 정체는 누구인 것인가, 본능이 보내오는 경고사인 속에 쿠타카는 어서 빨리 염마를 그녀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고 싶었다.

 

그 때 옆에서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역시 처음 보는 푸른 머리의 여인이었다. 낙원의 최고 재판장을 마치 어린 아이 다루듯 번쩍 들어 일으켜 세워주고 옷까지 탁탁 털어준 그 인물은 염마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신, 허리춤에 손을 얹더니 호들갑을 떨며 염마에게 핀잔주기 시작했다.

 

어휴,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네. 이래서 문에 함부로 기대고 있으면 안 된다니까~ 다치진 않았어? 부하 앞에서 칠칠치 못하기는~ ”

 

“...헤카티아여, 인기척을 살피지 않고 문을 연 것은 그대이지 않은가.”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관복을 입은 여인이 고귀한 귀족 같은 인상을 주었다면 이쪽은 이런 곳에 있어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경박한 느낌이었다. 어깨가 훤히 드러내고 이상한 로고가 대문짝만하게 박힌 헐렁한 티셔츠와 짧고 화려한 치마글 걸쳤으며, 양팔에 쇼핑백 같은 것을 주렁주렁 달고 이마에 선글라스까지 걸친 그녀의 모습은 마치 지옥에 놀러온 관광객 같이 보일 정도였다. 대조적인 분위기의 두 방문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쿠타카가 우물쭈물거리는 동안, 시키 에이키가 자세를 바로잡고 쿠타카보다 먼저 황급히 인사를 건넸다.

 

실례했습니다, 헤카티아님. 낙원(환상향)의 염마 시키 에이키 인사드립니다. 오늘 중으로 오신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예상 못해 본의 아니게 추태를 보이고 말았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다친 곳이 없으면 그걸로 오케이~ 이쪽이 불쑥 들이닥친 책임도 약간은 있지? , 그쪽이 니와타리 양인가? 안녕~ 직접 만나는 건 둘 다 처음이지?”

 

... ! 안녕하십니까, 헤카티아님!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관문을 지키는 니와타리 쿠타카라고 합니다.”

 

시키 에이키의 인사를 듣고 그제야 관광객처럼 보이는 인물이 누군지 알게 된 쿠타카가 허리를 숙였다. 인간들에겐 똑같이 신으로 모셔지고 있음에도 서로를 대하는 둘 사이엔 명백한 계급의 차이가 존재했다. 지옥의 최고 통솔자 중 하나인 여신 헤카티아 라피스라줄리, 쿠타카도 그녀의 이름은 시키 에이키에게 익히 들어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헤카티아의 신격이 자신은 물론 염마나 각 지옥의 시왕들조차도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도. 바깥 세계뿐만 아니라 달과 이계에 존재하는 지옥까지 모두 관리하고 있으며 그 지역의 최고신들조차 그녀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간다고 하는 절대적인 존재. 환상향 같은 변방 구역에서 이렇게 높은 분과 마주하는 것은 평소라면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 지옥의 최고 관리자가 자신을 직접 지목해 일을 맡긴 장본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쿠타카의 정신이 순간 아찔해졌다.

 

, 너무 긴장했다~ 완전히 얼어붙었잖니. 평소에 얼마나 군기를 잡았으면 이렇게 된담. 이러다 눈에 띌라, 군기 잡는 나쁜 여신님이라고 오해 사기 전에 어서 들어가자구?”

 

같이 온 일행의 손을 잡고 성큼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헤카티아를 쿠타카가 재빨리 손님용 테이블로 안내했다. 쿠타카가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시키 에이키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방 안으로 따라 들어오는 대신, 문 밖에 선 그녀는 다리를 꼬고 편하게 의자에 걸터앉은 헤카티아에게 신중한 목소리로 공손하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교대 시간이 임박해서 ... 이 자리에 오래 있을 수 없습니다. 헤카티아님, 먼저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벌써~? 같이 나눠 먹으려고 선물로 이것저것 잔뜩 사왔는데.”

 

늦으면 지금 근무중인 분께 실례가 됩니다. 재판 일정이 꼬일지도 모르고요. 또 염마인 제가 있으면 헤카티아님께서 쿠타카한테 지시를 내리는데 불편함을 느끼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저는 두 분... 아니 세 분을 위해 자리를 비우는 것이 옳은 판단이라 생각됩니다.”

 

어째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가득 있는 것 같은 표정인데. 좋아, 그건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도록 하자? 네 말대로 지금은 니와타리 양에게 전할 용무가 먼저니까. 재판에 늦을라. 어서 가 봐~.”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시는 동안엔 이 방을 편히 사용해주십시오. 그리고 쿠타카, 열심히 하되 무리 가지 않게 당부 드리겠습니다. 쿠타카의 원래 일은 다른 옥졸들에게 맡겨둘 테니 이쪽은 신경쓰지 말고 헤카티아님의 지시를 따라주세요.”

 

헤카티아 일행에게, 그리고 쿠타카에게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시키 에이키는 재판정으로 향했다. 염마가 떠난 방 안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찻잔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낯선 여인, 긴장 속에 평소보다 배는 허둥대며 모두의 잔에 차를 따라주는 쿠타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귀엽다는 듯 흐뭇하게 웃고 있는 헤카티아. 삼인삼색의 인물이 내뿜는 분위기가 서로 섞이지 못하고 정적 속에서 고요하게 소용돌이 치고 있을 때, 정적을 깨고 헤카티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니와타리 양, 앉아서 심호흡이라도 하는 것이 어때? 그렇게 허둥거리면 이쪽도 덩달아 불안해지잖니?”

 

죄송합니다. 이런 자리는 처음이기도 하고, 헤카티아님처럼 높으신 분이 일을 맡기신다니 저도 모르게 당황해버렸군요.”

 

차를 다 따른 쿠타카가 굳은 미소를 지으며 헤카티아 일행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잔 안에서 피어오르는 고급스럽고 향긋한 옥로의 향기를 음미하며 쿠타카가 헤카티아의 말대로 심호흡을 들이내쉬는 동안, 헤카티아는 탁자에 쌓아둔 쇼핑백에서 화려하게 포장된 상자를 하나 둘 꺼내 그녀들의 앞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긴장을 풀 땐 달달한 것이 최고지~ 빈손으로 오긴 미안해서 바깥의 인기 있는 간식들을 사왔어요~. 상하관계 따위 잊어버리고 편한 시간을 가져보자구. 요건 수플레 케이크라고 하는 거고, 이건 카스테라, 요 박스 안에 든 건 에그타르트, 그리고 저건~”

 

신이 나서 상자들의 포장을 뜯는 헤카티아, 하지만 쿠타카의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헤카티아의 말을 끊은 쿠타카가 말했다.

 

... 들으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닭의 신이기도 해서요. 계란이나 닭이 들어간 건 먹지 않습니다만.”

 

어어어어? ~ 맞다, 그랬지! 내 정신 좀 봐. 유행하는 것만 골랐더니 생각이 짧았네. 이건 잊어버리고, 계란이 전혀 쓰이지 않은 선물도 물론 있지~. 찹쌀떡이라면 분명 니와타리 양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지? ~ 요것도 바깥에서 없어서 못 구하는 인기 상품이에요.”

 

유난스럽게 상자들을 이리저리 뒤지던 헤카티아가 알록달록한 상자 하나를 집어 쿠타카에게 건넸다. 상자를 받아든 쿠타카의 눈에 귀여운 동물농장 찹쌀떡이라는 둥글둥글한 글자가 먼저 들어왔다. 뒤이어 글자 아래 투명한 비닐 필름 너머로 상자 속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기자기한 소, 고양이, , 그리고 닭과 병아리 모양의 찹쌀떡. 샛노란 병아리들의 동그란 눈과 눈이 마주친 쿠타카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며 떨리는 손 위에서 상자가 툭 탁자위로 떨어졌다. 일행이 한숨을 내쉬고, 싸늘해진 분위기 속에 실수를 깨달은 헤카티아가 헙 하고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 막았다.

 

"어떡하니... ~짜 미안...! 혹시 기분 상한 건 아니지? 본의 아니게 놀리러 온 것처럼 되어버렸네. 나름대로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한건데 이러면 완전 역효과잖아."

 

"아하하 ... 저는 괜찮습니다. 편하게 대해주시려고 하는 헤카티아님의 의도는 확실히 전달되고 있으니까요. 과연, 염마님께 듣던 대로 유쾌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소에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궁금한데. ,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방금 전의 실례는 다시 한 번 사과할게."

 

쓸모 없어진 선물 상자들을 다시 쓸어담아 한 구석으로 밀어놓은 뒤 자리로 돌아온 헤카티아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부탁하고 싶었던 일 말인데, 니와타리 양? 네가 내 친구랑 같이 붙어 다니며 환상향 안내를 도와줬으면 해. 어라, 그러고보니 아직 내가 소개를 안 했던가? 이쪽은 순호, 둘도 없는 내 오랜 친구야. 순호야, 이름은 아까 들어서 알고 있지? 니와타리 양은 음험한 녀석 가득한 지옥에서도 성격 좋다고 소문난 인재라구. 앞으로 며칠은 같이 지내야 하니까 둘이 사이좋게 지내야 돼?"

 

찻잔에서 눈을 뗀 순호가 쿠타카를 향해 꾸벅,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 ... 잘 부탁드려요, 니와타리 양."

 

"저야말로, 폐가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순호씨.“

 

다소곳이 인사를 건네는 순호에게 쿠타카는 자신도 꾸벅 고개를 숙여 응대했다. 그녀의 예의바른 태도와 부드러운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쿠타카는 아까 느꼈던 두려운 감정이 떠올라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이 위험한 인물이 무슨 이유로 환상향을 방문하고자 하는지, 궁금해진 쿠타카가 헤카티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헤카티아님, 친구분은 무슨 이유로 환상향에 가고자 하시는 건가요? 또 정확히 환상향의 어디로 모셔가야 하는지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정을 설명하자면 긴데, 나와 순호가 얼마 전에 환상향 친구들에게 쪼~금 신세진 일이 있었거든. 순호가 그 때 그 친구들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그 아이들을 만나고 싶대. 하지만 환상향의 지리를 모르는 순호 혼자 거기로 보낼 순 없으니까, 순호가 미아가 되지 않게 이끌어줄 가이드가 필요한 거야. 니와타리 양은 평소엔 지상에서 지낸다며? 이 일에 딱이네~."

 

"그렇다 해도 초면인 저보단 친구이신 헤카티아님이 동행하는게 순호씨에게 더 마음 편한 일 아닐까요?"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어. 그런데 이쪽은 또 일이 생겨서 말이야. 지옥이 예전 같지 못하니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문제가 시도 때도 없이 펑펑 터져서 몸이 세 개여도 모자를 정도라니까? 제대로 관리해주지 않으면 지옥 체계가 무너져버릴지도 몰라.“

 

"하긴 전에 비하면 많이 어수선해진 느낌입니다. 지옥이 침략당하거나 저승의 영혼들이 대거 지상으로 빠져나가는 일은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했을 거예요."

 

"그치 그치~ 환상향이 그 정도인데 다른 곳은 어떻겠니. 그러니까 요 며칠만 부탁할게. 내 일이 마무리 되는대로 합류할거니까 그때까지만. 우리 순호는 먹고 자는 것은 딱히 가리지 않으니까 너무 섭섭하지만 않게 챙겨줘."

 

탁아를 맡기는 부모 같다는 생각을 하며 쿠타카는 헤카티아의 부탁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든든한 그녀의 반응에 헤카티아의 얼굴에 웃음꽃이 방실방실 피어났다.

 

"그럼 신변 정리가 되는대로 바로 출발해줘~ 나도 슬슬 일하러 가봐야 하구. 저기, 순호야. 어디부터 가보고 싶다고 했었지?"

 

"달의 현자가 있는 곳이다. 아직 매듭짓지 못한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지. 그리고 ..."

 

"~ 그 달토끼가 보고 싶구나? 아니, 이젠 지상의 토끼라고 했나.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도 다 이해하는데 솔직하지 못하네. 그런고로 니와타리 양, 목적지까지 우리 순호 잘 부탁해용? 사고 안 나게 조심하구."

 

"혹여 순호씨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이 한 몸 바쳐 막아 내겠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길. 그럼 순호씨, 잠시 기다려주실 수 있나요? 준비해야 할 것들이 좀 있어서, 지상으로 나갈 채비를 하고 오겠습니다."

 

", 그럼요. 기다리는 것이라면 익숙하답니다."

 

"그래, 어차피 서둘러서 좋을 건 없어. 가급적 느긋하게 돌아다니도록 해. 느긋~하게, 마음의 여유를 가지렴. 그럼 순호는 니와타리 양이 챙겨줄테니 이만 난 가볼게. 후후, 믿음직한 부하를 둬서 염마는 좋겠네, 좋겠어~."

 

헤카티아가 자리에서 기지개를 펴며 일어나고, 거의 동시에 쿠타카가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해 뒤따라 일어났다. 순호는 아직 잔에 남아있는 차를 홀짝이며 자리를 지켰다. 앉아있는 순호를 뒤로 하고 방을 나선 두 여신은 텅 빈 복도를 나란히 걸어가며 짤막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때가 되면 내 심부름꾼이 니와타리 양을 찾아 갈 거야. 그 아이가 말하는 곳으로 순호와 함께 와주면 돼."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라 놀랐습니다. 헤카티아님 정도 되는 분이 시키시는 일이라면 좀 더 고된 일이 될 거라고 예상했었거든요.”

 

멋대로 차출당한 것도 억울한데 힘든 일을 맡겨서야 되겠어? 그리고 난 내 일은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하자는 주의라 중요한 부분은 남에게 맡기지 않아. 안 그래도 전에 순호한테 중요한 순간을 빼앗긴 불쾌한 경험이 있으니까.”

 

예전에 두 분이 서로 싸우신 건가요?”

 

~ 그런 것보다도, 지금은 순호가 기다리고 있잖니. 너무 외롭게 두면 불쌍한 우리 순호가 토라질 지도 몰라요? 이런데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서 준비하러 가 봐.”

 

대답 대신 헤카티아는 장난스럽게 쿠타카의 등을 탁 떠밀었다. 휘청거리던 쿠타카가 겨우 균형을 잡고 뒤를 돌아봤을 때 이미 그곳에 헤카티아의 모습은 없었다. 설마 물어봐선 안 될 내용을 캐내려 한 건 아닌지, 말실수를 저지른 것 같아 쿠타카는 마음이 걸렸다. 헤카티아에게 떠밀리면서, 순간 그녀가 정색한 모습을 본 것 같았으나 확실치 않았다. 찝찝한 기분이었지만 헤카티아의 말대로 VIP를 마냥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자신이 느낀 것이 기우이길 바라며 쿠타카는 짐을 챙기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2-

 

지상으로 향하는 길에 쿠타카는 자신의 변장 상태를 다시 한 번 꼼꼼히 체크했다. 붉은 닭벼슬 같은 머리를 가려줄 모자에, 날개와 꼬리깃을 가려줄 위장용 등짐과 마을 사람들의 유행에 맞춘 복식까지. 축생계의 조형신에게 받은 이 변장만 있으면 마을 어디를 돌아다니든 그녀가 신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쓸데없이 이목을 끌어봤자 피곤해질 뿐이라고 생각하며, 변장의 점검을 마친 쿠타카는 안전하고 무난한 여행길이 되기를 마음 속으로 빌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기대는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물거품이 되어 산산히 흩어졌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쏟아지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대는 소리. 지나가던 아이들조차 가던 길을 멈추고 그녀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과분할 정도의 관심의 중심엔 순호의 존재가 자리잡고 있었다. 마치 여왕이 마을에 행차하기라도 한 듯 우르르 몰려나와 구경하는 사람들 속에서 쿠타카는 언제 자신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킬지 몰라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그에 비해 순호는 이런 인간들의 시선 따윈 전혀 신경쓰이지 않는다는 듯, 오직 쿠타카의 뒤만 졸졸 따라오며 태연하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이 많군요. 이 분위기, 이전에도 헤카티아랑 보잘 것 없는 연극에 어울려 주러 왔을 때도 비슷했어요. 환상향은 매일이 축제 같은 분위기인 것 같네요.”

 

늘 이런 것은 아닙니다... 아마 저희가 외지인이라 생각하여 수상쩍어 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데서 정체를 들키면 곤란한데 말입니다.”

 

저런, 연약한 지상의 존재들을 해할 생각은 전혀 없는데 ... ”

 

변장이 필요했던 것은 자기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좀 더 일찍 알아 챘으면 좋았을 것을, 생각이 짧았던 자신을 반성하며 쿠타카는 구경꾼들의 관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순호의 손을 잡고 군중들 사이를 서둘러 빠져나갔다.

 

제일 먼저 월인들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죠?”

 

, 월인과의 협상도 남아있지만, 꼭 만나고 싶은 아이가 있답니다.”

 

대략적인 장소는 알지만, 거기는 길을 잃기 쉬운 곳입니다. 어떻게 찾아갈지 고민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 ...”

 

“...순호씨?”

 

얌전히 쿠타카를 따르던 그녀가 입을 다물고 제자리에 우뚝 섰다. 갑작스러운 순호의 이상행동에 쿠타카도 걸음을 멈추고 순호를 쳐다 보았다. 순호의 시선이 저 앞쪽에 펼쳐진 대로변을 향해 있었다. 무언가 흥미로운 것이라도 발견한 것일까, 궁금해진 쿠타카가 순호의 시선을 좇았다.

 

삼삼오오 뭉쳐있는 군중들과 다르게 홀로 길 한가운데 동떨어져 서있는 인물이 쿠타카의 시야에 들어왔다. 커다란 삿갓을 뒤집어 쓰고 등짐을 짊어진 모습이 꼭 자신의 변장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그 인물은 거리 때문에 얼굴을 자세히 확인할 순 없었지만 그쪽에서도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을 피해 쭈뼛쭈뼛 뒷걸음질 치는 것이 확실한 증거였다. 순호가 성큼 쿠타카를 지나쳐 뒷걸음질 치는 인물에게 다가갔다. 눈 깜짝할 새 거리를 좁힌 순호가 손을 덥썩 잡아채며 도주를 막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붙잡힌 인물에게 눈웃음을 지어보이며 순호가 말을 꺼냈다.

 

찾아갈 수고를 덜었구나, 귀여운 달토 ...”

 

아아아 손님~! 무슨 약이 필요하셔서 오셨습니까! 복통약? 우울증약? 요즘같이 건조한 철엔 피부약도 특히 잘 나가고 있답니다. 아니면 상비약을 받으러 오셨나요?”

 

요란하게 순호의 말을 자르고 영업용 멘트를 읊는 상대. 말하는 것으로 보아 약장수인 모양이었다. 필사적으로 순호를 모르는 체 하려 애쓰고 있었으나 어색함이 철철 넘치는 연기는 쿠타카가 보기에도 안쓰럽게 느껴졌다. 자신을 부정하는 반응에 순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천천히 눈동자만 움직여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곤 허리를 확 굽혀 약장수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지막히 읊조렸다.

 

"왜 아닌 척 하고 있니."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피해 약장수는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려보았지만, 이내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체념한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순호의 말에 답했다.

 

"저어 ... 여기서 정체를 드러내면 지인짜 곤란하거든요. 그보다 환상향에는 또 언제 어떻게 오신건가요. 오시기 전에 연락은 한번쯤은 주시지, 그래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잠적할 시간이..."

 

"널 보러 가고 싶다고 하니 헤카티아가 도움을 주었단다."

 

", 그럼 순호씨랑 헤카티아씨 두 분이 같이 오신 거예요? 헤카티아씨는 안 보이는데요.“

 

"헤카티아는 바쁘니 대신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던걸. 대신 여기 니와타리 양이 안내 해주기로 했단다."

 

"처음 뵙겠습니다~. 헤카티아님의 지시로 순호씨와 동행하게 된 니와타리입니다."

 

"아아, 반갑습니다. 레이센이라고 해요. 아니, 인사 나눌 때가 아니라 ... 그럼 순호씨는 스승님께 용무가 있으셔서 온거죠?"

 

"레이센이 먼저."

 

"... 달의 도시 침략 중단에 관한 협의를 하러 오신거구요?"

 

"대신 레이센을 데려가도 될지 물어볼 거란다."

 

"..님 께 안내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두 분, 저를 따라와 주세요."

 

"니와타리 양, 오늘은 저 영원정이라는 곳에서 하루 묵어도 될까요?"

 

"그건 저보단 저쪽에 허락을 구할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

 

집착에 가까운 호감을 드러내는 순호와, 그 호감을 애써 무시하려는 레이센 사이에 끼어 속이 쓰려오는 쿠타카였다.

 

하늘 높이 솟은 대나무가 빽빽히 들어선 죽림은 한낮임에도 어둑어둑했다. 사방에서 요기와 살기가 느껴지는 이 곳에 겁 없이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인간은 거의 없으리라. 조금 전까지 쿠타카와 순호를 둘러싸고 있던 군중들의 시선과 관심은 어느새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더 이상 주변에 느껴지는 인기척는 것을 확인한 레이센이 한숨을 내쉬며 깊게 눌러쓴 삿갓을 벗고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토끼 귀를 쫑긋 드러냈다.

 

"헤카티아님이 말씀하신 달토끼가 당신이셨군요. 죽림에 월인들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보게 되는 건 처음이네요."

 

"() 달토끼죠. 지금은 어엿한 환상향의 주민이랍니다."

 

방향조차 알기 힘든 죽림 안을 능숙하게 안내하며 레이센은 쿠타카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영원정은 자신을 포함해 달의 도시에 있을 수 없게 된 월인들이 사는 장소라는 것, 자신의 스승이라는 분이 달의 현자라는 전설적인 존재라는 것, 그 달의 현자가 달과 환상향에 닥친 위험을 알아내고 자신을 보내 순호를 저지하게 했다는 것까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환상향을 집어삼킬 뻔한 무력충돌 위기에 대해 알게 된 쿠타카가 아연실색하며 물었다.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 헤카티아님은 저희에게 아무 것도 말해주시지 않으신거죠? 어찌 되든 상관없는 것이었나요?”

 

지상을 침략해 그곳으로 도피하려던 어리석은 달의 주민들은 전부 우리에게 사로잡힌 상태였어요. 그들은 덫에 걸린 무력한 짐승이나 다름없었답니다. 지상의 존재들은 아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 ”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이미 달의 병사들이 쳐들어오기 직전이었다구요? 저희들이 나서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요."

 

나서지 않았다면 이번에야말로 상아를 죽일 수 있었어.”

 

무고한 사람들을 인질로 잡고서요? 그 과정에서 몇 명을 더 희생시킬 셈이셨나요.”

 

"상아만 순순히 나와 주었다면 아무도 희생될 필요 없었을 거야. 어쩔 수 없구나. 레이센이 그렇게 역정을 내니 다음엔 신경 써서 인질극 말고 다른 방법으로 달의 도시를 공격하도록 할게."

 

"요점은 그게 아닌데 ... 여튼, 영원정에 다 왔습니다. 금방 스승님을 모셔올테니 두 분은 밖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어둡고 음산한 죽림 속에서 유일하게 햇빛이 들어오는 널찍한 공간, 그 한가운데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거대한 저택이 우뚝 자리잡고 있었다.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느낌이었지만 한편으론 그 이질적인 분위기가 오히려 편안함을 가져다주고 있다고 생각하며 쿠타카는 레이센을 따라 영원정 마당에 들어섰다. 짐을 풀어둔 레이센은 스승님! 스승님! 하고 다급하게 외치며 복도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잠시 후 백색 가운을 걸친 장신의 여인과 함께 쿠타카 일행 쪽으로 돌아왔다.

 

"약을 팔라고 보냈는데 오히려 달의 적을 끌고 오다니, 우동게 넌 정말 일을 벌이는 재주가 훌륭하구나."

 

"억울해요, 스승님. 우연히 마주친 것뿐이라구요! 그리고 이 분들이 먼저 스승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시길래 ... ... "

 

만나서 내 목을 치려할지도 모르는데 데려왔단 말이니?”

 

"레이센의 말대로야. 싸우고 싶진 않아. 설마 사사건건 나의 복수를 방해하던 달의 현자가 지상에 내려와 있을 줄은, 그것도 모자라 지상에서 우리의 계획을 꿰뚫어보고 지상의 존재들을 이용해 또 저지해 낼 줄이야. 이렇게까지 신세졌으니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어지더군. 여기는 달의 도시가 아니고, 달의 현자를 쓰러트린다고 해서 내 화가 풀리거나 상아가 모습을 드러내주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어. 그래 ... 평화 협정을 맺으러 왔다고 해두지."

 

"평화로운 목적으로 온 것 치곤 우동게가 지나치게 안절부절 못 하고 있는데. 그래서, 같이 온 일행은? 또 새로운 동료를 영입한거야?"

 

"? , 아뇨! 저는 안내인 역할의 니와타리입니다. 지옥에서 명령을 받아 순호씨와 동행하곤 있지만 달 침략 계획하고는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달의 현자는 턱을 괴고 고민하는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녀는 둘을 경계하고 있었다. 쿠타카는 자신이 이변의 원흉 중 하나였던 지옥에서 왔다고 섣불리 털어놓는 바람에 이곳에 온 의도를 의심받게 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현자는 그녀들의 방문을 받아들여 주었다.

 

"우동게, 이쪽 신님을 응접실로 안내해드리렴."

 

"스승님과 순호씨는요?"

 

"따로 방을 잡아야지. 이야기가 끝나는 대로 그쪽으로 보낼 테니 괜히 호기심에 엿듣거나 하는 일은 없도록 하려무나."

 

"주제넘게 엿듣다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죠-. 니와타리 씨, 이쪽으로 와주세요."

 

순호로부터 떨어지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지금부터 둘이 나눌 협상의 주제는 제3자인 자신이 끼어들 일이 아니었기에 쿠타카는 별 수 없이 레이센을 따랐다. 응접실에 자리를 잡고 앉아 미닫이문 밖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카레산스이를 감상하며 숨을 돌리고 있자니 레이센이 간식거리를 챙겨와 그녀의 건너편 자리에 마주앉았다.

 

"얽힌 사연이 많다보니 대화가 꽤 걸릴 수도 있어요. 차라도 드시면서 천천히 쉬다 가세요."

 

"스승님이라는 분, 예리하시네요. 이렇게까지 꽁꽁 숨기고 있었는데 단번에 제가 신이라는 걸 꿰뚫어보셨어요."

 

"제 스승, 야고코로 에이린님의 생각은 감히 저 같은 범인이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에요. 남들이 보지 못하는 멀리까지 내다보시고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한 대책을 미리 고안해내시거든요. 아는 것도 많으시고 또 판단력도 남다르시죠. , 순호씨가 저희 스승님을 잘 알고 계시다는 듯이 말하셨죠? 그게 순호씨가 달을 습격한 일이 이번 한 번만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순호씨가 쳐들어올 때마다 그녀를 저지하고 돌려보낸 게 바로 스승님이라구요. 정말 굉장한 분이시지 않나요."

 

"실로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순호씨는 왜 그렇게 달을 공격하는데 집착하시는 건가요?"

 

"반드시 죽이고 싶은 사람이 달의 도시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까 순호씨가 상아님을 언급하셨죠? 그 분이 순호씨의 원수에요. 공교롭게도 그 분은 달에서 가장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는 죄수이기도 하고, 또 죽이려야 죽일 수 없는 불로불사의 몸이기도 하죠."

 

"단 한 명의 원수를 죽이기 위해서 이런 소동을 벌여 오신 겁니까. 헤카티아님도 그걸 알고 순호씨와 손을 잡은 거죠?"

 

복잡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던 레이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분의 목적도 순호씨와 같습니다. 원한의 내용은 다르지만 대상은 동일하다는 점에서 뜻이 맞았죠. 혹시 헤카티아씨가 한 번도 얘기해주지 않으시던가요?"

 

"전 그런 소동이 있었다는 것조차 오늘 처음 알았으니까요. 아는 바가 전무합니다. 알고 계시는 만큼 다 말해주시겠어요? 왜 상아라는 분을 두 분이 그렇게 죽이고 싶어 하시는지."

 

"순호씨는 과거에 자신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었던 가족이 한 남자의 손에 의해 모조리 살해당했습니다. 그 남자는 가족을 살해한 것도 모자라 순호씨를 아내로 삼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했죠. 뼈에 사무칠 정도로 깊은 원한을 품은 순호씨는 오랜 세월 복수의 칼날을 갈며 때를 기다린 끝에 마침내 남편을 죽여 가족의 복수를 이뤄냈어요. 하지만 그 때 순호씨는 이미 자신이 품은 원한에 집어삼켜져 감정이라곤 오직 증오밖에 남지 않게 되었던 터라, 복수를 끝내도 순호씨를 가득 채운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갈 곳을 잃은 그 증오의 화살이 남편의 첫째 아내, 지금 달의 도시에 유폐되어 계신 상아님께 향하게 된 거예요. 지금의 순호씨는 원한이 순화된 신령이나 다름없습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타오르는 순수한 분노는 그 분노의 이유조차 잊게 만들었기 때문에 아마 지금 순호씨는 자신이 상아님을 왜 죽여야 하는지 명확히 모르고 있을거예요. 아깐 달의 주민들만 무고한 것처럼 말했었지만, 엄연히 따지면 지금껏 순호씨에게 말려든 모든 이들이 아무 잘못 없는 피해자들인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쿠타카는 그제야 순호를 가득 채운 어둠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듯 꿈틀거리는 순수한 분노. 인간을 넘어선 아득한 살의를 품은 순호가 쿠타카는 두려우면서 안타깝고, 또 위태위태하게 느껴졌다. 만에 하나 순호가 제어력을 잃고 자신이 품은 감정을 여과 없이 밖으로 드러내게 되면, 그 때 쏟아져 나온 살의는 피아를 가리지 않고 주변을 모두 파멸로 이끌 것이리라. 상상으로라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 헤카티아님이 달을 노리신 이유는요? 헤카티아님도 복수라는 말을 언급 하셨거든요."

 

뭐더라 ... 전에 스승님께서 이야기 해주신 것 같은데 기억나질 않네요. 있다가 스승님께 직접 여쭤보시는 편이 빠를걸요?”

 

"오늘 처음 뵙긴 했지만 그 분한테서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었습니다. 오히려 굉장히 유쾌하신 분이었달까, 그런 헤카티아님이 순호씨와 비슷한 살의를 품고 계셨다니 믿기질 않네요."

 

"니와타리씨는 아직 모르고 계시네요.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론 날카로운 칼을 꽁꽁 숨기고 있는 분들도 계세요. 그런 분들은 항상 철저하게 본심을 숨기고 경우에 따라선 아군까지 속여 가며 원수를 찢어발길 때를 기다리고 있죠.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랍니다. 이성을 잃고 불처럼 타오르는 분노도 무섭지만 냉정하고 침착하게 파멸을 부르는 차가운 분노도 무서워요. ... 제가 그 원한의 대상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라니까요. 그런 저도 하마터면 죽을 뻔 했지만."

 

"편하게 넘겨도 되는 일인지 모르겠네요, 하하..."

 

잠시 숨을 돌린 둘은 무거운 주제를 내려놓고 가벼운 이야깃거리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농땡이 치기 좋아하는 직장 동료의 이야기나 과도한 업무가 가져다주는 피로감 등등. 중간직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에 공통 화젯거리를 찾고 금세 친해질 수 있었던 둘이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정원의 흰 모래가 주홍빛으로 물들고 레이센이 준비해온 간식거리도 바닥났을 무렵, 응접실의 문이 드르륵 열리며 순호와 에이린이 안으로 들어왔다. 왠지 즐거워 보이는 순호의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에이린의 표정은 한바탕 진상손님에게 시달린 상담사처럼 진이 쭉 빠진 느낌이었다.

 

"... 약속은 확실히 받아냈어. 앞으로 당분간 달의 도시는 안전할거야."

 

"레이센을 데려가 키우게 해주면 레이센이 다 자랄 때까지 상아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는데 거절당했지 뭐니. 아쉬워."

 

"왜 제가 협상테이블에 올라간 겁니까!? 그 전에 저는 이미 다 큰 지 어른이에요!?"

 

"후후, 대신 한동안 달의 도시를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 오늘 밤 레이센이랑 같이 자도 된다고 허락 받았단다."

 

"우동게, 자랑스러워하렴. 네가 달의 도시를 지켜낸 거나 마찬가지야. 덧붙여 환상향의 안녕도. 인형치료 같은 건 종종 사용되는 요법이기도 하니까 오늘 하루 치료용 인형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참아주렴."

 

"세상의 운명을 그런 걸로 결정하지 말아주세요...! 인형취급도 말아주세요!"

 

다행히 레이센을 제외한 모두가 만족하는 방향으로 평화협정이 마무리 된 것 같았다. 처음엔 펄쩍 뛰며 기겁하던 레이센이었지만, 이내 두 거대한 존재 앞에서 자신의 저항 따윈 아무 의미 없음을 깨닫곤 귀를 꾸깃꾸깃 접으며 얌전해졌다.

 

"날도 저물었는데 신님은 어떻게 하겠어? 방이라면 많으니 자고 가도 상관은 없는데."

 

"전 아침이 빠른 편이라 쉬는데 폐가 되지 않을까요? 좀 멀긴 해도 산 위의 제 거처까지 왕래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이곳까지 잘 찾아올 수는 있고? 우동게의 안내 없인 오기 힘들걸?"

 

"그건...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순호씨를 놔두고 자리를 비우는 건 왠지 제 일을 여러분께 떠맡기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기도 하고. 그럼 염치 불고하고 하루만 신세 지겠습니다."

 

"그래, 잘 결정했어. 우동게, 네 옆방에 손님이 묵을 수 있도록 준비 좀 해주겠니. 네 방에도 이불 하나 더 준비해놓고."

 

"네에, 네에... 그럼 지금 바로 저녁식사랑 같이 준비해놓겠습니다."

 

"같이 가서 레이센이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어."

 

"따라오셔도 상관은 없는데 너무 바짝 붙어서 부담 주지만 말아주세요...은근 소름끼친다고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터덜터덜 나가는 레이센과 방금 그녀의 말은 한 귀로 흘린 듯 그녀 뒤에 찰싹 붙어가는 순호의 뒷모습을 보며 쿠타카가 에이린에게 물었다.

 

"사춘기인 딸과 극성부모의 관계를 보는 것 같네요. 레이센씨는 왜 그렇게 순호씨의 관심을 부담스러워 하는 걸까요? 물론 순호씨가 조금 지나치게 가깝게 굴기는 해도요."

 

"순호는 달의 도시를 몇 번이나 파괴하려 시도한 공공의 적 같은 존재야. 아무리 지금은 지상에 적을 두고 있다고 하지만, 그런 위험한 인물에게 호감을 산다는 것이 달토끼인 우동게에게 썩 좋기만 한 일은 아닐 거야."

 

"레이센씨를 만난 뒤로부터 순호씨는 계속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데요. 어쩌면 순호씨가 품은 원한을 레이센씨가 억제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

 

"무리야. 복수조차 달래지 못한 순호의 한을 우동게가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어. 장단에 어울려주면서 일시적으로 분노를 누그러뜨릴 순 있겠지만 순호가 가진 순화의 힘은 다시 모든 감정을 증오로 가득 덧칠해버리고 말거야. 지금은 저렇게 좋아하고 있어도 언제 이성을 잃고 주위를 말려들게 할지 몰라. 이 나조차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덩어리를 저 아이에게 떠맡길 수는 없지."

 

"아까 레이센씨를 통해 들었습니다. 인간이 가족을 잃고 품은 한은 생각보다 무서운 것이었군요. "

 

"배우자를 잃는 것도 상실감이 크지만 자식을 잃은 참척의 고통엔 훨씬 크겠지. 부모가 자식을 잃으면 그 슬픔에 눈물로 눈이 멀어버린다고 하잖니? 순호는 눈물 대신 분노에 눈이 멀어버린 거고."

 

"안타까우면서도 또 두렵기도 하고 복잡한 기분이 드네요. 그러고 보니 저희 쪽의 헤카티아님도 순호씨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손을 잡았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그쪽은 또 다른 사연이야. 본인이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해주진 않았나보네? 도대체 무슨 생각인건지. 순호가 죽인 후예라는 남자는 과거에 너무 많은 태양신들이 내뿜는 태양빛으로 인해 지상에 가뭄이 끊이지 않는다 하여 활과 화살로 각지의 태양신들을 쏘아 죽인 전적이 있어. 고통 받던 지상인 들에겐 영웅과도 같은 존재였지. 하필 그 때 살해당한 태양신 중 하나가 네가 말하는 헤카티아란 자와 같은 지역 출신이었던 모양이야."

 

"그렇다면 헤카티아님은 동료였던 신이 살해당한 것에 대한 원한을 품은 것이로군요."

 

"지옥의 신이 이 일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것도 있고, 관련 정보도 너무나 적다보니 확실한 답은 주기 어렵네. 여러 가지 가설은 있지만 그 여신의 다음 행보를 확인하기 전까진 알 수 없어. 어쩌면 또 모르지. 순호를 보내 평화협정을 맺게 하면서 자신은 다른 계획을 꾸미고 있을지도. 뜬금없이 당신을 순호와 지상에 내보낸 것이 다음 계획을 위한 포석 아닐까?"

 

"설마요~ 전 일개 수문장에 불과하고, 달에 대한 원한이 있지도 않고 분쟁을 좋아하지도 아닌걸요?"

 

"지옥의 문지기 말고도 지상에서 신으로서 맡은 역할도 있지 않았어?"

 

"병을 낫게 해준다든가, 닭들을 돌봐준다든가 하는 것 말씀이시죠? 어느 쪽도 딱히 도움은 되지 않을 겁니다."

 

에이린이 말을 멈추고 시선으로 쿠타카를 훑었다. 쿠타카의 말과 행동에서 숨겨진 헤카티아의 의도를 읽어내려는 듯, 그녀를 관찰하는 에이린의 눈빛은 날카롭고 진지했다.

 

"치밀한 이중 작전으로 달의 도시를 초토화시키기 직전까지 간 자이니, 경계심을 품지 않을 수 없어. 그렇다고 그쪽까지 한 패로 의심하는 건 아니니 안심하도록 해. 그랬다면 자객이 될 지도 모르는 이를 이곳에 들이지 않았을 테니까."

 

단순한 기우겠죠. 전과가 있으니 걱정하시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아무렴, 나도 차라리 둘이 지상에 순수하게 마실 나온 것뿐이라고 믿고 싶은걸. 하지만 한 번 품은 악의가 그리 쉽게 사라질 리 없잖니?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두고 대비해서 나쁠 건 없어.”

 

오랜 세월 지옥에 몸을 담고 일하는 동안 쿠타카는 거의 매일같이 타인이 내뿜는 악의를 접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다양한 고문으로 쉬지 않고 죄수들에게 고통을 새겨 주어야 하는 지옥은 악의 없이는 굴러갈 수 없다. 때문에 쿠타카 같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지옥의 존재들은 하나같이 악의로 똘똘 뭉쳐져 있어 본인이 아무리 감추려 애써도 그 웃고 있는 거죽 밑에 감추어진 끔찍한 악의가 새어나오기 마련이었다. 이는 지옥의 형량과 형벌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지옥의 관리자들 또한 예외는 아니며, 이들은 아랫사람에게 자신이 품은 악의를 감추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기에 윗사람들을 대할 때면 쿠타카는 늘 그들의 악의에 짓눌리는 듯한 갑갑한 느낌이 불편했었다. 하지만 쿠타카가 헤카티아를 처음 마주했을 때, 쿠타카 자신도 놀랄만큼 그녀의 말과 행동에선 어떤 사악한 의도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정도로 깨끗한 사람을 지옥에서 만나는 건 얼마만인가 싶을 정도였다. 장난기 많고, 유쾌하고, 아랫사람들에게 친절한 이상적인 상관의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는 에이린의 태도를 쿠타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쿠타카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헤카티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순간을 몇 번씩 되돌아보았다. 몇 마디 나누지 못해 헤카티아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순호나 자신을 챙겨주는 모습, 자신에게 내린 지시의 내용 등에서 타인에게 위협이 될 요소가 없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딱 한 가지 순호와 있었던 불화에 대해 헤카티아가 언급을 피했던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친구 사이라는게 원래 좋은 일만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어쩌면 이미 한바탕 다툰 뒤 화해하고 끝난 일일지도 모른다며 쿠타카는 적당히 넘겨짚었다. 거기에 아무리 넉넉잡아도 앞으로 하루 이틀이면 지상에서의 용무는 모두 끝날 터. 2.3초 같이 짧은 휴식의 시간 이면에 침략이니 복수니 하는 끔찍한 악의가 숨어 있을 리 없다고 믿으며, 그렇게 헤카티아에 대한 의심은 쿠타카의 머릿속에서 깔끔히 잊혀졌다.

 

-3-

 

~~끼오!!! ~침입니다!!!”

 

쨍한 아침햇살이 대나무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과 함께 죽림의 정적을 깨고 우렁찬 외침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라 잠이 깬 토끼들이 부산스럽게 튀어나와 영원정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 소란 가운데 아침 일과를 마친 쿠타카가 상쾌한 표정으로 지붕에서 폴짝 뛰어 내려왔다.

 

아침이 빠르다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 덕분에 공주가 누가 단잠을 방해했냐며 불만이 장난 아닌걸.”

 

아하하...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전 닭의 신이니까요. 밤의 장막이 걷히고 신성한 태양이 다시 떠올라 만물을 따스하게 비춰주는 이 순간을 누구보다 먼저 알리는 것이 닭의 의무. 그와 동시에 저의 임무인걸요. 언제 어디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에요. 오늘 같이 태양이 밝게 비치는 날엔 더더욱 그렇습니다.”

 

가슴을 쭉 펴며 당당하게 웃음 짓는 쿠타카를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보던 에이린이 고개를 들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원래 오늘은 하루 종일 흐리다가 간간히 비가 쏟아질 예정이었을 텐데, 이런 날씨면 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덕분에 돌아다니는데 지장은 없겠어.”

 

그렇다면 천운이 따라주고 있네요. 잠은 거의 못 잤지만 왠지 오늘은 기운이 넘쳐 환상향 어디라도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라 이런 날 날씨가 받쳐주지 않으면 곤란하거든요.”

 

잘 됐네. 어제 말한 것처럼 별다른 사건 없이 끝나면 좋겠어. 가기 전에 아침은 먹고 갈 거지? 우동게, 일어났니?”

 

...... 부르셨습니까아 스승니임 ...”

 

에이린의 부름에 퀭한 눈으로 좀비처럼 어기적 어기적 걸어오는 레이센. 엇갈려 끼워진 단추와 대충 매다만 넥타이는 지금 그녀가 피로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레이센과 정 반대로, 그녀 뒤에 찰싹 달라붙어 어깨에 매달려 있는 순호의 표정은 며칠 푹 자고 일어난 사람 마냥 개운해보였다.

 

어머, 잠을 설친 거야?”

 

자려고 했는데요... 순호씨가 베개처럼 꽉 안고 놓아주질 않으셔서요. 한숨도 안 주무시고 빤히 바라보고 계시는데 어떻게 편히 잘 수 있겠어요.”

 

잠을 설치는 것 같아서 푹 재워주려고 했단다. 잠 못 드는 아이를 위한 자장가도 불러줬는걸?”

 

그렇게 구슬픈 자장가를 듣고 잠들 수 있는 아기는 없어요!? 애초에 아기도 아니지만.”

 

그럼 내 힘을 써서 재울 걸 그랬나보구나.”

 

잠이 순화되면 죽음 아닌가요, 죽음???”

 

말대꾸 하는걸 보니까 아직 체력은 쌩쌩하네. 그럼 바로 아침 준비를 해 주겠니, 우동게? 공주님도 일어나셨으니 공주님 것까지 포함해서.”

 

스승님, 저 좀 살려주세요 ... ...”

 

우는 소리를 하는 레이센이 안쓰러웠는지 순호는 이번만큼은 순순히 그녀에게서 떨어져 혼자 일하러 갈 수 있도록 배려 해주었다. 딱히 고마워하는 투도 없이 후다닥 도망치는 레이센의 그런 반응조차 귀엽다는 듯 소매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는 순호에게 쿠타카가 다가가 말을 걸었다.

 

즐거운 밤을 보내신 것 같네요. 기분이 좋아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아아, 당신에겐 감사하고 있어요, 니와타리 양. 이렇게 안내를 도와준 덕에 귀여운 토끼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답니다. 정말, 강제로라도 데려가고 싶을 정도에요.”

 

납치는 외교 문제가 됩니다. 죄송하지만 참아주세요.”

 

그래서 오늘은 어디로 갈 예정이죠?”

 

레이센 씨 외에도 순호씨가 찾아가고자 했던 사람들이 누구누구였죠?”

 

레이센 말고도 저를 저지한 지상인은 모두 세 명. 붉은색과 푸른색의 무녀, 그리고 검은 마법사였답니다.”

 

셋 다 기억에 있는 분이군요. 하쿠레이의 무녀와 모리야의 무녀라면 신사에 계실 거고 마법사 쪽은- 마을에서 종종 뵈었는데 어디 사는지 까진 모르겠군요.”

 

그 꼬마라면 마법의 숲 쪽이겠네. 하지만 평소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참견하기 좋아하는 모양이니 마을이나 하쿠레이 신사에서 기다리다 보면 슬금슬금 나오지 않을까?”

 

끙끙 고민하는 쿠타카가 에이린의 조언에 손바닥을 탁 치며 그런 방법이!’라는 감탄사를 터트렸다.

 

곧 있으면 아침식사가 준비 될 테니 들어가서 기다리는 것이 어때. 난 공주님 방으로 식사를 가져다 드리고 올게.”

 

, 알겠습니다. 순호씨, 그럼 오늘은 모리야에 먼저 들르는 것이 어떠신가요? 그곳이라면 제 집도 가까워서 여차하면 거기서 하룻밤 보내고 가실 수도 있습니다.”

 

어디에서 쉬어가든, 누구를 먼저 만나든, 그건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랍니다. 니와타리 양 마음대로 정해도 상관없어요.”

 

레이센이 준비해온 아침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쿠타카는 변장을 챙겨 밖으로 나설 준비를 했다. 식사 때부터 내내 순호가 아쉬워하는 시선으로 레이센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이젠 더 이상 대꾸할 힘도 없는지 그녀한테서 어제처럼 격한 거부반응은 없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레이센을 두고 홀로 배웅 나온 에이린에게 인사를 마친 쿠타카 일행은 레이센을 대신하여 나온 토끼의 안내를 따라 영원정을 나섰다. 아무래도 죽림에 익숙하지 않은 녀석이었던 모양인지라, 꽤 먼 거리를 헤맨 그들이 죽림을 빠져나왔을 땐 이미 태양이 제법 중천에 가까워져 있었다. 계절에 맞지 않게 햇빛이 뜨거운 날이었으나 쿠타카와 순호 누구에게서도 지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쉬었다 갈 필요를 못 느낀 쿠타카는 또 마을 사람들의 이목을 모을 새라, 서둘러 마을을 빠져나가 요괴의 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산을 오르는 길에 순호는 가끔 주변을 훑어보긴 했지만 대부분은 쿠타카만을 시선으로 좇고 있었다. 모처럼 구경 나온 환상향이니 마을의 구경거리나 산의 풍경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질 법도 하거늘 순호는 그런 것에 일체 흥미가 없다는 듯 걷는 도중엔 오직 쿠타카 한 명만을 눈 안에 담고 있었다. 덕분에 도중에 옆길로 샐 일이 없어 안내하기는 쉬웠지만 마음 한편으론 왠지 귀한 시간을 무미건조하게 날리는 것 같아 아쉬운 쿠타카였다.

 

긴 등산길이 끝나고 마침내 정상에 도달했을 때도 순호는 호수와 함께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 경관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곧바로 토리이를 지나 모리야 신사 경내로 들어섰다. 예상치 못한 손님들의 방문에 본전 툇마루에 앉아 햇빛을 피하고 있던 신사의 카제하후리, 코치야 사나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반짝이며 한달음에 그들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모리야 신사에-! 무슨 일로 오셨나요? 참배? 기도? 되게 독특한 조합의 손님들이 오셨네요. 어디, 이쪽은 전에 달에 싸움을 거셨던 순호씨고, 이쪽은 ... 꼬꼬씨?”

 

....입니다. 이웃끼리 제대로 이름 정도는 기억해주세요.”

 

그치만 니와타리씨도 제 이름을 자주 깜빡하시잖아요.”

 

똑똑히 기억하고 있거든요! 코치야 ... ... 카나데씨?”

 

용케 그런 기억력으로 영혼들을 관리하시네요.”

 

일할 때는 똑똑히 메모하고 다니고 있습니다!”

 

사나에입니다. 사나에-아 참. 그런데 어쩌다 두 분이 함께 오신 거예요? 사실 아는 사이?”

 

순호씨가 지난 이변 때 신세진 사나에씨를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셔서 헤카티아님이 제게 지상의 안내를 맡기셨답니다. 저는 헤카티아님의 대리라고 생각해주세요.”

 

지옥의 여신이라는 분 말씀이죠? 똑똑히 기억납니다. 그 이상한 티셔츠의 여자!”

 

아니, 계속 그러다 진짜 지옥에 떨어져요.”

 

전 착하게 살아서 지옥에 갈 일이 없는걸요. T셔츠, 아니 헤카티아씨는 안 오셨네요? 일할 때도 그런 요상한 차림이신건지 궁금했는데.”

 

지옥의 일로 바쁘십니다. 요즘 지옥의 상황이 많이 좋지 않아서 관리에 애먹고 계시나 봐요.”

 

저런- 아쉬워라. 그리고 다시 뵙게 되어서 반가워요 순호씨. 전에 말씀드린 지상의 월인들은 만나보셨나요?”

 

살갑게 순호의 손을 붙잡고 붕붕 흔드는 사나에, 거물급 존재들을 상대하면서 저렇게까지 허물없이 굴 수 있는 인간도 드물 것이라고 쿠타카는 생각했다.

 

그래, 이미 어제 만나 보았단다. 귀여운 달토끼도 말이지.”

 

시비 걸어오지 않던가요? 제 발로 적진에 들어오다니 겁이 없구나! 내 화살을 받아라 이 달의 원수! 하면서요.”

 

나도 전의를 잃은 지 오래고 그쪽 또한 평화협상에 응해 주더구나. 별다른 갈등 없이 이야기는 잘 풀렸어. 이쪽에선 당분간 달을 습격하지 않을 예정이야.”

 

역사적인 휴전 협정의 현장을 직접 보지 못한 게 유감이네요. 날이 많이 덥죠? 아까 보니까 걸어서 올라오시던데 이 날씨에 힘들지 않으셨나요? 저희 신님은 오늘 오기로 한 비가 안온다고 완전히 다운되어서 방에 콕 틀어박히셨는데.”

 

전혀. 좋은 경험이 되었어.”

 

옷이 좀 덥긴 해도 그럭저럭 견딜 만 해요. 매일 오르내리는 길이기도 하고.”

 

날아다니면 시원하고 좋은 걸 굳이 ... 우선 안으로 모실게요. 신님들도 모셔올까요? 안 그래도 제 활약이 과장되었다고 뭐라 하셨거든요. 순호씨가 증언을 해주시면 제가 얼마나 멋졌는지 신님들이 믿어 주시겠죠!”

 

손님들을 안쪽으로 안내한 사나에는 종종걸음으로 나가더니 금방 모리야의 두 주신을 모시고 돌아왔다. 순호는 몰라도 쿠타카에겐 자주 보는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동작 하나하나에서 위엄이 넘쳐나는 키 큰 쪽이 모리야 신사의 얼굴을 담당하는 건신 야사카 카나코, 그리고 혀를 쭉 빼물고 헥헥거리며 투덜거리는 조그만 쪽이 실질적인 모리야 신사의 주인인 곤신 모리야 스와코. 또 허둥거리다가 몰라보는 실례를 저지르지 않도록 쿠타카는 각 신들의 이름과 역할을 재빨리 머릿속으로 떠올려 정리했다. 신사의 주인들에게 공손히 고개 숙여 예를 표한 뒤, 쿠타카는 자신이 데려온 손님을 그들에게 소개했다.

 

그러니까 이 자가 달의 도시 녀석들이 그렇게 치를 떠는 요주의인물이라 이건가. 흥미롭군.”

 

그렇게 위험한 녀석이 환상향이랑 지옥을 제 집 마냥 들락날락 거려도 되는 거야? 문제가 생기면 어쩌려구.”

 

이번엔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니 괜찮답니다. 그저 지상의 인간들에게 흥미가 생겨, 그들의 삶을 조금 엿보고자 이렇게 친구의 힘을 조금 빌리게 되었죠.”

 

이거 완전 권력 남용 아니야? 친구 일을 부하에게 떠넘기다니 지옥도 썩었구만 썩었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고, 또 헤카티아님께선 휴가처럼 같이 즐기다 오라고 하셨으니 나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상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도 하고 여러분과도 면식이 있으니 안내자로 적합하다 판단하신 거겠죠.”

 

맨날 농땡이치는 유명한 사신 녀석 있잖아, 그 녀석을 보내도 되었던 거 아니야? 아니지, 그 사신이라면 딴 길로 새고도 남았겠네.”

 

이죽거리며 비꼬아 말하는 스와코는 아무래도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 속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자리에서 체면까지 차려가며 앉아있어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리라. 혹여 그녀가 순호를 자극하여 감정 싸움으로 번질 새라 쿠타카는 조심조심 스와코를 달래려 했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던 것이겠지요. 자리가 불편하시다면 들어가 휴식을 취하는 것이 어떠신가요. 더운데 괜히 신님들을 이리가라 저리가라 하여 민폐를 끼친건 아닌지 죄송할 따름입니다.”

 

스와코님, 벌써 가시려구요? 아직 순호씨 입으로 제가 얼~마나 멋있고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 증언을 못 들었는데요?”

 

확실히 강렬했지. 헤카티아의 옷을 면전에서 비웃은 인간은 지금껏 본 적 없었어.”

 

호오,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지옥의 신을 디스 했던거냐, 사나에.”

 

, ,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 우리 사나에 답지.”

 

어라?! 아니 이런 거 말고 탄막결투 이야기는요? 얼마나 제가 멋있게 등장했는지라던가, 인간이 이렇게 강한 줄 몰랐다, 감탄했다, 이런 감상 같은 거 있잖아요, 순호씨?”

 

글쎄 .., 그 땐 이미 계획 실패가 확정되어 딱히 흥미도 의욕도 없었던 터라 잘 기억나지 않는구나.”

 

이게 아닌데에 ... ...”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사나에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주며 카나코는 순호쪽을 보며 말했다.

 

순호라고 했나, 그대는 이 곳에 사나에를 만나러 왔다고 했었지. 사나에에게 안부도 전했으니 이제 만족하고 돌아가는 건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조금 더 있어도 될까요? 복수를 잊을 만큼 흥미로운 지상의 인간은 실로 간만이라 시간이 허락한다면 지켜보면서 이야기도 나누고 함께 있고 싶네요.”

 

사나에가 허락한다면 나도 허락하지. 스와코, 너도 괜찮지?”

 

신앙을 바치러 온 것도 공물을 바치러 온 것도 아닌데 뭐. 있든 말든.”

 

이 녀석 심기가 불편한건 양해 부탁하지. 더위에 쥐약인 녀석이라, 기껏 시원해지나 싶었던 날씨가 다시 더워지니 짜증이 꽤 쌓인 모양이야.”

 

이해합니다. 화는 제 때 다스리지 않으면 마음 안에 응어리져 자신을 좀먹게 되죠. 짜증도 푸념도 실컷 늘어놓다보면 누그러지지 않겠나요. 분노로 이성을 잃고 미쳐버리기 전에

 

으음...그렇지. 그러고 보니 그대는 월인들과 휴전 협정을 맺고 왔다고 했지. 그렇다면 마음을 고쳐먹고 더 이상 달의 도시를 침략하는 행위는 그만두기로 결심한 건가?”

 

몇 초간의 정적. 그리고 순호가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 주변의 공기가 불온하게 일렁였다.

 

“... 그럴 리가요. 어디까지나 잠시 동안만입니다. 찢어 죽여도 모자를 불구대천의 원수가 멀쩡히 그 가증스러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데 어찌 이를 두 눈 뜨고 바라보고만 있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얼굴이 절망과 공포로 물들고 피가 끓어오르는 입으로 마지막 숨결을 토해내는 그 순간을 보기를 절실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생각하는 것을 멈추어도 증오스러운 그 이름을 부르짖고 싶어져요. 하지만 그래선 제 스스로 맺은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돼요. 그러니까, 약속이 유효한 동안만큼은 이 기분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질 수 있도록 이 눈으로 계속 지켜보고 있답니다. 니와타리 양이나 사나에 양처럼, 제게 다른 생각을 품게 만드는 분들을 말이죠.”

 

쿠타카는 문득 순호가 지상을 돌아다니는 동안 왜 주변에 일절 관심을 주지 않았는지 그 까닭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타인을 응시하는 행위는 그녀 나름대로 자신을 제어하는 몸부림과도 같았다. 자신이 분노로 이성을 잃고 무고한 이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도록, 호감을 가진 상대를 계속 시선에 담아둠으로써 끊임없이 상대를 증오하는 마음으로 물들어가는 내면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마냥 무섭게만 느껴지는 인물이었지만, 그녀에 대해 하나 둘 알아가게 됨에 따라 쿠타카 안의 연민의 감정이 더욱 깊어졌다. 쿠타카는지금도 필사적으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을 순호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감정을 말이나 행동으로 표할 여유는 없었다. 쿠타카의 반응과 정 반대로 순호가 자신의 진심과 함께 얼핏 흘려버린 살의를 감지한 카나코와 스와코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 살의의 대상은 상아를 향한 것이었지만, 쿠타카가 순호를 처음 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둘은 곧바로 순호를 위험한 녀석으로 판단했다.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두 신이 사나에의 앞을 감싸며 순호를 경계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바로 공격할 기세였다.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네요. 헤카티아님의 부탁도 있고 하니 순호씨가 문제를 일으키거나 위해를 가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본인도 방금 자제중이라고 하셨잖아요? 만약을 위해 저도 같이 동행하고 있고요. 그러니 그렇게까지 사납게 노려보시지 않으셔도 ...”

 

당황한 쿠타카는 상황을 수습하고자 했지만 카나코와 스와코의 반응은 냉담했다.

 

난 저 자를 믿을 수 없다. 니와타리, 그대라면 이렇게 쉽게 살의를 드러내는 녀석이 자중한다는 말을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이성을 잃고 사나에를,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카나코님, 스와코님, 순호씨가 그렇게까지 못 믿을 분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때도 제 말을 듣고 순순히 물러나주셨고, 2:1이라는 비겁한 방식을 쓰시긴 해도 정정당당히 탄막 대결에도 응해주셨고 ... ”

 

사나에, 저 녀석은 원령에 가까운 녀석이야.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원한에 잡아먹히고 싶어?”

 

그렇지만, 저와 있으면 기분이 누그러진다고 말하셨잖아요? 오히려 여기서 순호씨를 자극하는 것이 몇 배는 더 위험할거예요. 전 괜찮아요. 전 순호씨한테 인정받은 달의 영웅이잖아요? 영웅은 그리 쉽게 쓰러지지 않는답니다! 그러니 한 번만 순호씨를 믿어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자신 있게 눈을 빛내며 순호를 변호하는 사나에를 보는 카나코와 스와코는 여전히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이었으나 차마 그녀를 만류하지는 못했다. 한 번 마음을 정한 사나에의 완고함을 알 고 있는 카나코와 스와코는 어쩔 수 없이 경계를 거두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대담한건지 철이 없는건지 모를 사나에의 고집에 두 신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만에 하나 사나에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니와타리, 그쪽과 지옥도 책임을 지게 될 거다. 알아두도록. 사나에, 조심하거라. 아무리 너라 해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있는 법이니.”

 

카나코님도 참~ 전 어린아이가 아니라구요. 순호씨. 괜찮으시면 같이 여기 앞의 호수라도 보러 가실래요? 오늘같이 맑은 날이면 경치가 끝내주게 아름답거든요. 울적한 기분이 들 때 걷기 좋아요.”

 

, 좋아. 나는 상관없단다.”

 

순호씨도 오케이 하셨으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카나코님, 스와코님!”

 

신님들의 허락이 채 떨어지기도 전 사나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순호의 팔을 잡아끌고 신사 밖으로 나섰다. 험악해진 분위기로부터 빨리 순호를 빼내주려는 의도가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마냥 철없이 행동하는 어린아이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려 깊은 그녀의 면모에 감탄하며 쿠타카는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일단은 사나에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믿어주기는 한다만. 어이, 스와코. 너도 설마 나한테 저런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겠지?”

 

~ 아냐아냐, 그럴리가, 지금 네가 죽어버리면 내가 이 더운 날씨에 일해야 되잖아. 여름이 끝날 때까진 살아 있어줘.”

 

아하하... 두 분도 예전엔 사이가 나빴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현재형으로 지금도 사이 나쁘다고? 사나에를 봐서 참아주는거지.”

 

이쪽도 사나에를 봐서 이 녀석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매일 투닥거리고 있으니 그렇게 쌓일 일도 없고~ 싸우다보니 정든 것도...있나?”

 

부정하지는 않겠어. 그건 그렇다 쳐도, 순호라는 자의 감정은 이해하기 힘들군. 저 자도 한 때 인간이었던 자가 아닌가? 무엇이 저 자를 원한으로 가득찬 괴물로 만들어 버린 것이지?”

 

쿠타카는 영원정에서 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두 신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순호의 전 남편이 어떤 자였는지, 무슨 일을 저질러서 그녀와 헤카티아 둘의 원망을 동시에 사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 그녀가 노리고 있는 상아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그녀가 듣고 기억하는 모든 것을 신들에게 털어놓았다.

 

업보가 많은 녀석이었구만. 죽어서까지 분쟁의 씨앗을 뿌리고 가다니 민폐가 따로 없네.”

 

순호 쪽은 분노에 미쳐 자신의 목적을 잊게 되었다 쳐도, 니와타리 그대에게 명령을 내린 헤카티아라는 자는 복수의 대상이 이미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순호를 도와 달을 침략하더니만, 이제와선 그녀의 화를 달래준답시고 휴가를 보내주질 않나,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건지 의심스럽군.”

 

야고코로씨와 같은 의심을 품고 계시군요. 직접 이야기를 나눈 제가 느낀 바로는 지옥에 어울리지 않게 친절하신 분이셨고 ... 뭔가 나쁜 뜻을 품고 순호씨를 지상으로 보낸 건 아닌 것 같아 보였어요. 무엇보다 친구 사이인걸요. 헤카티아님이 친구 관계를 악용할 리 없습니다.”

 

사람 하나 잡겠다고 전쟁까지 벌인 지옥의 최고신이라는 녀석이 난데없이 멀쩡히 일하고 있던 문지기에게 맛이 간 친구의 PTSD 치료를 도우라고 하는데 의심 안하는 게 이상한 거 아냐?”

 

스와코, 실례다.”

 

어디든 한 가닥 한다는 신들은 말이야~ 다 뒤가 구리다고. 겉으로는 엣헴거리면서 신사적인 척 해도 속으로는 어떻게든 자신한테 득이 되게 하려고 애쓰는 중이란 말이지. 도대체가 믿을게 못 돼. 꼬꼬는 예외적으로 너무 순한 거고.”

 

마치 나보고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군 그래.”

 

틀린 말은 아닌데?”

 

얄밉게 조소를 날리며 키득거리는 스와코의 모자를 푹 눌러 강제로 다물게 만들며 카나코는 말을 이었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상관에 대한 험담을 하는 것은 그대의 기분도 편치 못하겠지. 주제를 바꾸도록 하지. 요즘 지옥은 어떠한가? 상황이 어렵다고 들었다만.”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입니다. 전체적으로 혼란스럽다고나 할까요, 죄수들을 벌 주는데 쓰여야 할 악의가 서로를 향하고 있습니다. 권력다툼을 일으키고, 의무를 다하기는커녕 제각각 분열만을 반복하고 있으니 지난번처럼 축생계에서 만만하게 보고 쳐들어오는 일도 생겼죠. 뜻 있는 분들이 나서서 다시 이전의 분위기로 바로 잡으려 노력중입니다만 쉽지 않네요. 고질적인 재정 문제와 부지 확보 문제도 있고요.”

 

죽어서 도달한 곳에도 인간계와 다름없는 문제들이 펼쳐지고 있다니, 거기에 휘말릴 영혼들이 참으로 안타깝군.”

 

옅어진 악의를 틈타 여러 가지 미련이 차오른 것이지요. 헤카티아님도 그 문제를 해결하느라 직접 올라오지 못하시고 지옥에 남아 계신 것입니다. 아마 지금쯤 다른 신님들과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정책이라도 고안해내고 계시지 않을까요?”

 

남들 괴롭힐 생각만 꽉 찬 놈들이 똘똘 뭉쳐서 제대로 된 아이디어가 나오겠어? 그냥 힘센 놈이 반대하는 놈들을 싹 밟아버리고 자기 뜻을 밀어붙이거나 하겠지. 그렇게 되면 피바람이 한 번 불겠네.”

 

최악의 상황이죠. 내란을 틈타 지옥의 영혼들이 대거 밖으로 탈출하기라도 한다면 지상에 지옥도가 펼쳐질 것입니다.”

 

니와타리 그대도 고생이 많겠어. 가뜩이나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양쪽을 다 살피느라 정신 없지 않은가. 지옥에선 문지기로서, 지상에선 신으로서.”

 

나름 견딜 만한걸요. 요즘 같이 신앙이 거의 들어오는 때에도 지옥에서 맡은 일 덕분에 나름대로 신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어서 만족스럽습니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 그런데 신앙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탁자위에 턱을 괴고 늘어져 있던 스와코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 쿠타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찬찬히 자신을 관찰하는 그녀의 시선에 머쓱해진 쿠타카가 답했다.

 

환상향에선 백일해 같은 병으로 앓는 아이도 거의 없고 닭의 취급도 영 좋지 못하답니다. 슬프지만 요샌 겨우 말라죽지 않을 정도로만 신앙이 들어오고 있어요.”

 

그으래? 난 영락없이 최근에 뭐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싶었는데. 닭 축제라던가.”

 

딱히 좋은 일이라고 할 건 없었는데요. 왜 그렇게 느끼셨는지요?”

 

내 착각인가, 아님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꼬꼬가 이렇게 대단한 신격을 가진 녀석이었나 싶어서.”

 

나는 니와타리를 아주 가끔밖에 못 봐서 잘 모르겠는데, 뭔가 달라진 것이라도 있는 건가?”

 

스와코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로 풀어서 설명하려 애쓰는 모습이 어린 외관과 합쳐져 귀엽게 느껴졌지만, 그것을 말로 꺼내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 그래. 사나에가 보던 만화책의 내용으로 따지면 말이야. 지금의 꼬꼬는 시간과 정신의 방을 들어갔다 나와서 필살기를 획득한 느낌이야.”

 

더 이해하기 어려워졌어.”

 

하지만 신이 갑자기 강해졌다고 말하는 건 이상하잖아. 이건 인간들이 단체로 얘를 숭배하는 의식이라도 치루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인걸. 갑자기 닭이 봉황이 되는 일은 없잖아?”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제가 제일 먼저 알아차렸을 거예요.”

 

그래, 그래서 그런 비유를 한 거래도? 무언가가 강제적으로 네 신격을 끌어 올린거지. 일시적인 현상인지 영구적인 변화인지는 몰라도 지금의 너라면 더 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을걸?”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부터 묘하게 몸이 가볍고 기운이 넘쳐나긴 했습니다. 어제의 꼬끼오~가 닭 10마리 분이었다면 오늘의 꼬끼오~는 닭 20~30마리 분? 평소보다 더 뿌듯한 아침이었어요.”

 

아 그쪽 비유가 더 이해 안 되거든?! 영원정에서 얘한테 뭐 이상한 약이라도 먹인 거 아냐.”

 

그런 약이라면 당장 환상향의 모든 신이 구하려 들걸. 여튼 신들도 먹고 살기 힘든 시대에 신격이 상승했다면 좋은 일 아닌가. 니와타리 그대의 존재를 마을에 홍보하여 다시 인간들이 신앙을 바치도록 할 수도 있을 테지.”

 

그렇게까지 욕심은 없답니다. 예전보다 나아졌다면 이 나아진 처지에 만족하며 살아야죠.”

 

정말 마음 편하다니깐. 이것이 자영업과 직장인의 차이일지도.”

 

더위를 잊게 될 만큼 훈훈해진 분위기 속에서 시시콜콜한 신들의 대화가 얼마간 이어졌다. 환상향의 이슈들을 위주로 적당히 이어가던 이야깃거리가 슬슬 바닥을 드러낼 무렵, 밖에서 재잘거리는 익숙한 목소리가 발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산책 나갔던 사나에와 순호가 돌아 왔다는 뜻이었다.

 

카나코님, 스와코님. 다녀왔습니다~!”

 

그래, 사나에. 별 일은 없었느냐.”

 

그럼요! 순호씨에게 온바시라도 보여드리고, 산 아래 풍경이 훤히 보이는 전망 좋은 곳도 알려드렸습니다. 워낙 말수가 적으셔서 혹시 재미없어 하시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막상 이쪽에서 말 걸면 다 받아 주시는 거 있죠? 덥지만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사나에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뿌듯한 표정으로 자랑 섞인 보고를 늘어놓는 동안 뒤따라 들어온 순호가 쿠타카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땀 한 방울, 흙먼지 한 알 묻지 않은 순호의 모습은 정말 밖을 거닐다 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깔끔했지만 미묘하게 들떠 보이는 그녀의 표정이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왔다니 다행이구나. 고생 많았다, 사나에.”

 

저보단 순호씨가 더 힘드셨을 거예요. 이런 날씨에 온 몸을 검정색으로 뒤덮으셔서 ... , 지금 보니 순호씨는 하나도 더워 보이지 않으시네요? 부러워라~”

 

어흠, 일단 앉거라, 사나에. 그럼 이제 만족한 건가, 순호여.”

 

,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이걸로 목적 하나는 달성했네요.”

 

아직 갈 곳이 많이 남았나보군.”

 

이제 겨우 절반이랍니다. 아직 만나고 싶은 이들이 더 남아 있어요.”

 

모처럼 오신 김에 저녁도 드시고 가실래요? 두 분 모두 오늘 잘 곳은 정하신거죠?”

 

제가 사는 곳이 멀지 않으니 거기서 하루 보내려 합니다. 지금 하쿠레이 신사로 가면 도착과 함께 날이 저물어 버릴 테니까요. 순호씨도 하루 종일 걸어다니느라 고생 하셨으니 이만 쉬는게 맞다고 봅니다.”

 

그럼 잘됐네요. 지금 가면 시간이 애매해서 심심하실 테니, 더 있다 가셔요. 그래도 괜찮죠, 카나코님, 스와코님?”

 

나는 이의 없다.”

 

사나에 좋을 대로~”

 

사나에는 쿠타카와 순호를 위한 푸짐한 잔칫상을 차려주었다. 술과 함께 시끌시끌 무르익는 분위기 속에서 모리야 신사의 작은 환영회가 열렸다. 연회가 끝난 뒤, 모두가 멀쩡한 가운데 혼자 빨갛게 취한 사나에에게 요란스럽게 배웅 받으며 쿠타카와 순호는 모리야 신사를 나섰다. 어느덧 태양이 모습을 완전히 감추고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별들이 빛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4-

 

이틀 만에 돌아온 집은 쿠타카에게 마치 극락에 도착한 것 같은 아늑한 기분을 안겨다주었다. 답답하게 몸을 가린 변장도구를 벗어 내려놓으며 쿠타카는 무사히 여정의 절반을 마쳤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헤카티아에게 무사히 귀환 보고를 마치기 전까지 긴장을 풀 순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남은 일정이 다 잘 풀릴 거란 기대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쿠타카는 생각했다.

 

쿠타카가 짐을 정리하고 이부자리의 세팅까지 마치는 동안 순호는 계속 그녀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며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시콜콜한 일 하나 놓치지 않고 쭉 응시하는 시선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이 또한 그녀 나름대로 감정을 제어하는 노력이라는 것을 이해한 쿠타카는 딱히 그녀를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쿠타카는 순호의 마음을 잡아주기 위해 자신이 그녀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것이 헤카티아가 자신에게 기대한 역할이리라. 다른 이들은 헤카티아가 수상하게 여기고 있지만 그녀도 지옥의 여신 이전에 감정을 가진 존재가 아닌가. 원한에 사로잡혀 일상조차 힘들게 된 친구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영혼의 상처를 치유할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라고, 쿠타카는 자신이 생각한 헤카티아의 의도에 확신을 가졌다. 헤카티아가 자기를 믿고 친구의 케어를 맡긴 이상 그 기대에 부응하자는 의지를 굳힌 쿠타카가 순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순호씨, 괜찮다면 잠시 밖에 나갈까요?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좋아요. 니와타리 양이 가는 대로 따르죠.”

 

쿠타카가 순호를 이끌고 데려간 곳은 그녀의 집 뒷마당이었다. 담장이나 문으로 막혀있지 않고 개방된 널찍한 공간엔 횃대나 모이통, 작은 목조 건물 등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고 그 자리들을 날개를 푸득거리는 닭과 삐약삐약 우는 병아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야생 닭들의 임시 보호소 같은 곳입니다. 삶의 터전을 아직 마련하지 못했거나 몸이 약한 아이들이 언제든 이 곳에 와서 머물 수 있도록 해주고 있어요. 야생의 본능을 잃고 가축으로 전락하는 건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아이들이 가혹한 자연 속에서 죽게 놔둘 수는 없으니까요. 신의 가호가 미치는 이곳이라면 천적도 재앙도 함부로 닥쳐오지 못하니 유사시 훌륭한 피난처의 기능도 하고 있습니다.”

 

“... ...”

 

쿠타카만을 좇던 순호의 시선이 마당 한 구석을 향했다. 추위를 타지 않도록 둥지에 옹기종기 모여 몸을 맞대 잠을 청하고 있는 병아리들과 닭들 사이에서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슬프게 삐약거리는 병아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유난히 왜소하고 깃털도 듬성듬성 빠져있는 그 아이는 다리마저 불편한 지 제대로 걷지 못하고 쩔뚝거리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너무 약해 어미를 쫓아가지 못하고 무리에서 도태된 아이임을 알 수 있었다. 이대로 두면 얼마 못 가 죽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저런, 어미를 따라 왔다가 그대로 미아가 되어버린 것 같네요. 저대로 두면 얼마 못 버틸텐데... 저 아이는 따로 챙겨줘야겠네요.”

 

쿠타카가 나서려던 찰나, 순호가 한 발 먼저 그녀를 지나쳐가더니 몸을 웅크리고 오들오들 떠는 병아리를 조심스럽게 손 안에 품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빛이 바랜 솜털에 노랗게 색이 돌아오며 방금 전까지 죽어가던 병아리에게 생기가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가 순식간에 아름답게 부활하는 모습에 쿠타카는 보고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이건 ... 어떻게 하신건가요?”

 

희미하게 남아있던 생명의 힘을 순화시켜 죽음을 몰아냈어요. 이걸로 이 아이는 생을 더 이어갈 수 있겠죠.”

 

놀랐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힘까지 가지셨을 줄은.”

 

그런가요? 바꿔 말하면 죽음의 기운으로 온통 뒤덮어 버리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 되는데요?”

 

하지만 힘이라는 것은 사용하기 나름이잖아요? 방금 순호씨는 생명을 살리는 고귀한 일에 그 힘을 사용하신거구요. 뿌듯하지 않으신가요?”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적어도 지금 상아를 죽이고 싶다는 살의가 타오르고 있지는 않아요.”

 

무미건조하게 들리는 대답이었지만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즐겁게 지저귀는 병아리를 바라보는 순호의 눈엔 애틋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쿠타카는 순호가 흥미를 가졌던 인물들과, 그들을 대하던 순호의 모습을 떠올렸다, 손을 잡고, 함께 잠을 자고, 곁에 붙어있는 일련의 행동들. 그 행동의 기저엔 어떤 감정이 담겨 있었던 것일까? 수천 년간 쌓인 분노를 억누를 수 있는 감정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던 쿠타카의 머릿속에 한 가지 답이 떠올랐다.

 

순호는 가족, 특히 아이와 함께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행동이 아이와 함께 있으며 느낀 모성애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그 동안의 기행들도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일하다 다치지는 않을까, 나가서 넘어지지는 않을까, 한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지켜주고 옆에서 돌봐주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 충분히 일리 있는 추측이었다. 미워하는 감정을 이기는 것은 사랑하는 감정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녀의 모성애를 계속 끌어낼 수만 있다면 그녀가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는 일도 줄어들 것이리라, 쿠타카는 그렇게 자신의 답에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이 해야할 일을 찾아냈다.

 

그 아이, 순호씨가 마음에 든 모양이에요. 아마 엄마처럼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가요? 낳아준 부모는 따로 있을 텐데요.”

 

자신을 돌봐준 존재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이죠. 괜찮으시다면, 혹시 이 아이를 데려가서 키워주시겠습니까? 돌봐줄 부모가 없으니 이대로 풀어주면 금세 천적에게 당할 지도 모르는걸요. 그보단 순호씨처럼 좋은 분이 키워주셔서 천수를 누릴 수 있게 해주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순호가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야생에 풀어두는 것보다 저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위험할거예요. 제겐 원한밖에 남아 있지 않아요. 헤카티아 같은 이면 몰라도, 연약한 생명에겐 자신을 갉아먹는 독기로 느껴질 테죠.”

 

그럼, 끝까지 잘 키우겠다고 저와 약속 하시는 건 어떨까요? 달의 도시를 습격하지 않겠다고 다른 분들과 맺은 약속도 잘 지켜내시지 않았습니까. 전 순호씨 안에 아직 다른 따스한 감정들이 남아 있다고 믿고 있어요. 그리고 이 아이가 그 감정들을 되살려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픈 기억이 자꾸만 떠오른다면, 떠오르지 못하도록 행복한 기억을 계속 만들어 나가야죠. 살의가 끓어오를 때마다 이 아이를 보며 순호씨의 손으로 생명을 살려낸 일을 떠올리면 쉽게 감정이 누그러질 겁니다.”

 

깜빡하지 않고 잘 데리고 다닐 수 있을까요? ”

 

걱정 마세요. 순호씨의 여정을 끝마칠 때까진 제가 데리고 다니겠습니다. 평소에도 지옥에서 일할 때 한두 마리씩 데리고 다니거든요. 보모 역할이라면 맡겨만 주세요.”

 

끈질긴 쿠타카의 설득에 마침내 순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분명 헤카티아님도 이번 여행을 통해 달라진 순호씨의 모습을 보면 기뻐하실겁니다.”

 

헤카티아 ... 그럴 일은 없을텐데.”

 

? 무슨 말씀이신가요?”

 

아뇨, 방금 말은 잊어주세요. 니와타리 양과 한 약속, 지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보죠. 그럼 지옥에 돌아갈 때까지만 부탁드릴게요. 타인을 배려하는 그 마음, 정말 아름답네요.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기 전에 니와타리 양 같은 분을 만났다면 좋았을걸.”

 

손 안의 병아리를 쿠타카에게 전해주며 순호는 그녀에게 싱긋 웃어보였다. 처음으로 쿠타카에게 보여준 아름다운 미소였다. 자신의 행동이 불러온 순호의 긍정적인 변화에 뿌듯함을 느끼며, 쿠타카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도록 도와준 병아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고마움을 표했다.

 

 

~끼오~!!!”

 

밤이 지나고 산 전체에 쩌렁쩌렁한 닭들의 합창이 울려퍼졌다. 산의 존재는 물론 환상향 전체의 밤잠을 깨우고도 남을 활기찬 알림소리였다. 그 외침에 부응하듯, 태양은 전날보다 더욱 화창하게 떠올라 이른 새벽부터 뜨거운 열기로 지면을 데우고 있었다.

 

좋은 밤 되셨습니까, 순호씨. 보니까 거의 주무시지 않고 저와 병아리를 지켜보고 계시던 것 같았습니다만.”

 

저는 괜찮아요. 원래 잠이 적거든요. 니와타리 양은 오늘도 기운차네요.”

 

오늘은 더욱 그러네요. 그러니 팍팍 힘내서 남은 여정을 모두 마쳐볼까요? 오늘은 하쿠레이 신사로 가면 되겠죠? 다른 한 명은 하쿠레이 신사에 자주 놀러온다고 하니 운이 좋으면 두 분을 모두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병아리를 머리 위에 살포시 얹어두고 일찌감치 나갈 채비를 마친 쿠타카가 순호에게 명랑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마을을 거칠 필요 없이 하쿠레이 신사까지 바로 날아갈 예정이었던지라, 무거운 변장을 벗어던지고 날개를 펼친 쿠타카의 모습은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보였다. 순호는 쿠타카의 재촉에 훈훈한 웃음으로 화답하며 둥실 하늘로 떠오른 쿠타카가 내민 손을 잡고 함께 날아올랐다.

 

하쿠레이 신사의 경내로 들어서자 그늘에 늘어져 있는 두 인물의 그림자가 보였다.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손부채질을 하고 있는 하쿠레이 신사의 무녀 레이무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는 레이무에게 무언가 열심히 조잘대고 있는 흑백의 마법사 마리사였다. 아침부터 찾아온 커다란 행운에 기뻐하며 쿠타카는 둘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무씨, 마리사씨. 두 분 다 오랜만이네요-”

 

여긴 왜 왔어. 영업이라면 안 받으니까 돌아가 ... 뒤에 달고 온 녀석은 또 뭐람.”

 

~ 닭신 니와타리구만. 오늘 아침엔 덕분에 신세 많이 졌다구? 어찌나 소리가 큰지 숲까지도 닭 우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라. 깜짝 놀라 잠이 확 달아나버렸지 뭐냐.”

 

일찍 일어나신 덕분에 이렇게 두 분을 한 장소에서 뵙게 되었으니 제게는 잘 된 일이네요. 먼 곳에서부터 두 분을 뵙고자 하는 분이 계셔서 이렇게 모셔왔습니다.”

 

늘어진 둘을 보며 인사 대신 한숨을 내쉰 순호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과연, 지상의 인간들은 더위에 취약한가 보구나. 겁에 질린 달의 녀석들마냥 그림자 속에 숨어 꼼짝 못하고 있으니.”

 

우리를 보러 온 거야, 시비를 걸러 온 거야?”

 

이 이상한 날씨에 멀쩡한 너희가 더 이상하다고.”

 

,~ 두 분 다 진정해 주세요. 싸우러 온 건 아닙니다. 이미 알고 계신 듯 하니 소개는 따로 하지 않아도 괜찮겠죠?”

 

그럼 그럼, 우리가 거기 그 녀석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잊어버릴 수 있나.”

 

순호의 방문을 열렬히 반기던 사나에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시비조에 가까운 순호의 말도 문제였지만, 더위가 가져다주는 짜증과 더불어 뭔가 성가신 일을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경계하는 모습이 둘에게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지상에 달의 현자가 있다 하여 협상을 하러 온 것이다. 온 김에 겸사겸사 강한 힘을 가진 지상인들은 어떤 형태로 지상에서의 삶을 이어가는지 보고 싶어져서 오게 되었거늘. 보아하니 다른 인간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조금 실망하던 참이었다. 오히려 하찮군.”

 

피식 김빠지는 웃음을 짓는 순호. 그런 그녀의 태도가 둘의 심기를 적잖이 건드린 모양이다. 각각 고헤이와 팔괘로를 집어 드는 모습이 꽤 불길하게 느껴지는 쿠타카였다.

 

호오, 다를 바 없다고 ... 우리의 특별한 점은 말이지, 요괴든 신이든 시비 거는 녀석에겐 그에 맞는 응대를 한다는 점이야.”

 

지난번엔 2 1로 비겁하게 싸웠지! 이번엔 우리 쪽에서 2 1로 공격할 차례다! 아니, 그쪽의 닭도 가세하면 2 2려나?”

 

아니 싸우러 온 게 아니라니까요!?”

 

이제 좀 재미있구나. 너희들의 여흥에 어울리는 것도 좋을 것 같으나 지금은 내가 딱히 의욕이 없어. 그러니 거기 좀 앉아도 되겠는가?”

 

대답을 듣기도 전, 순호는 본전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두 사람의 사이에 털썩 앉았다. 너무나 당당한 순호의 행동에 레이무와 마리사는은 할 말을 잊고 그저 그녀를 쏘아보기만 할 뿐이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새전도 안 내는 불청객에게 내줄 차는 없어.”

 

이대로 있기만 해도 만족한다. 그러니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것이 어떤가?”

 

불편해서 이야기가 제대로 되겠냐.”

 

편한 자세가 필요하다면 내 친히 무릎을 빌려주지.”

 

그런 뜻이 아니라고 ...”

 

일부러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며 장난스럽게 둘의 신경을 살살 긁는 순호는 왠지 즐거워보였다. 이것도 그녀 나름의 애정표현 방식이었을 것이다. 아이와 장난치며 놀아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겹쳐 본 쿠타카는 이번엔 딱히 그녀를 말리지 않기로 했다.

 

아무튼 레이무. 날씨가 이상하다니깐? 이거 분명 천인이나 요정 같은 녀석들이 장난치고 있는거라구.”

 

아직 초가을이니까 더위가 찾아와도 어색하지 않잖아. 이런 걸 유카리가 뭐라고 했더라. 이상기후랬나?”

 

여긴 날씨를 뒤집어대는 녀석이 한 둘이 아닌데 이상기후로 퉁치는 게 말이나 되냐. 솔직히 더워서 조사하러 나가기 귀찮은 거지?”

 

잠이 부족한 것도 있고. 누구씨가 시끄럽게 아침부터 울어대서 말이야.”

 

째릿 하고 노려보는 레이무의 시선이 쿠타카를 관통했다.

 

닭이 아침에 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구요? 잠에서 깨어나 태양의 힘을 받아들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데, 감사는 못할 망정 너무 나태한 삶에 물들어 계신 건 아닌지요.”

 

시끄러, 확 잡아먹어버린다.”

 

어떻게 영물인 닭을 잡아먹는다고 말하실 수 있는 거죠. 그것도 신인 제 앞에서!”

 

맛있는 닭고기를 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니 잘 먹겠습니다.”

 

닭고기의 신이 아니래두요!”

 

왜 요즘 무녀들은 신에게 경외를 표하는 대신 놀려먹으려 드는 것인지, 갈 데까지 갔다는 생각에 탄식을 내뱉으며 쿠타카가 이마를 짚었다.

 

더위도 닭고기도 아무래도 좋다 이거야. 난 쉬고 싶을 뿐이라고. 그리고 이 녀석은 진짜 왜 온 거야.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어서 더 기분 나빠.”

 

그러고 보니 헤카티아라는 친구는 어쩌고 저 녀석에게 시종 노릇을 시키고 있는 거야? 지상에 놀러오고 싶다고 법석을 떨었던 건 그 쪽이었는데.

 

헤카티아님은 지옥의 일로 바쁘십니다. 그래서 명령을 받고 제가 대신 온 것이죠.”

 

너도 참 딱하구만. 아무리 상관이라지만 그런 녀석하고 얽히게 되다니. ”

 

그런 녀석이라뇨. 너무 무례한 태도 아니신가요. 헤카티아님이 어떤 생각으로 저를 보내셨는지도 모르시잖아요.”

 

글세, 의도는 몰라도 그 녀석이 어떤 신인지는 알고 있지. 사람을 복수에 미치게 만들고 주변까지 모조리 파멸로 이끄는 무시무시한 녀석이라구.”

 

울컥하는 쿠타카나 잠자코 듣고 있는 순호에게 대놓고 들으라는 듯이 마리사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코스즈한테 부탁해서 좀 알아봤지. 헤카티아는 마술, 주술의 여신으로 여겨지기도 해서 마녀나 마법사들이 주술을 사용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제물을 바쳐야 했던 신이야. 헤카티아는 제물을 바친 녀석에게 강력한 마력을 주지만, 그 힘을 사용한 자는 이상하게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피로 얼룩진 복수에 휘말리게 되었다구. 어떤 녀석은 사랑하던 남자에게 배반당하자 마술을 이용해 남자의 새 가족을 모조리 죽게 만들었고, 어떤 녀석은 자신의 남자를 빼앗아간 상대를 족족 괴물이나 짐승으로 바꿔 버렸지. 헤카티아가 내려준 예언을 따른 한 남자는 예언대로 왕이 되었지만 피로 얼룩진 폭정을 거듭하고 점점 미쳐가다가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남자에게 목이 잘렸다고 해.”

 

헤에 ... 꽤 열심히 공부했네, 마리사. 그럼 마술을 쓰는 너나 다른 마녀들도 위험한 거 아니야? , 있잖아. 앨리스나 파츄리 그런 녀석들.”

 

헤카티아를 섬기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랬다면 이미 복수에 휘말렸거나 언젠간 휘말리겠지? 적어도 난 그 녀석한테 제물을 바친 적은 없다구.”

 

조심해, 원한은 네가 제일 많이 사잖아. 도둑이니까.”

 

... 설마 그 정도로 죽이려들까. 아무튼! 보기와 다르게 위험한 녀석이니까, 지옥과 마술의 여신이라는 이명 뒤엔 복수의 여신이라는 숨겨진 타이틀이 있는 셈이지. 얽혀서 좋을 건 없어.”

 

친구를 비방하는 저 말에 대해 순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나치게 헤카티아에게 적대적인 마리사의 반응에 순호가 자극받을까 불안해진 쿠타카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순호가 입을 가리고 소리 내어 큭큭 웃기 시작했다.

 

후후후 ... 흥미롭구나. 헤카티아는 내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해주지 않았지. 나와 헤카티아가 만나게 된 것도 정해진 운명이었다는 뜻이겠지.”

 

뭐어~ 그쪽도 헤카티아와 돌이킬 수 없는 거래를 한 셈이지, , .”

 

좋지 아니한가. 나 또한 피로 얼룩진 복수를 바라고 있다. 나 혹은 상아 둘 중 적어도 한쪽이 파멸하여 완전히 이 세상에서 존재가 사라지기 전까지 이 복수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말한 것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나는 더욱 헤카티아에게 의지하겠다. 이 몸이 전부 불타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설령 지금의 휴식이 헤카티아의 힘이 불러낸 복수가 일으킬 파멸의 순간을 위한 것이라 해도.”

 

주변까지 파멸로 끌고 가게 된다니깐. 지금 네 옆엔 니와타리도 있고, 지난번에도 환상향에 피바람이 불 뻔 했다는 걸 벌써 잊었냐구.”

 

어차피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라면 막으려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허나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그대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또 다시 환상향이 파멸의 위기에 처하는 일은 없도록 할 테니. 복수의 순간에 그 곳에 존재하는 건 오직 나와 헤카티아, 그리고 상아 뿐일 것이다.”

 

네 복수는 내 알 바가 아니고, 내가 살아있는 동안 쓸데없는 짓을 벌이려 하면 진짜 퇴치해 버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

 

만약 내가 방금 한 말을 어기게 된다면 부디 그렇게 해 주길 바라지. 나는 그대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대들이라면 나를 저지할 자격이 있어.”

 

우린 네 뒤처리 담당이 아닌데 말야. 니와타리, 너도 지옥에 돌아가거든 처신 잘해야 할 걸. 이번 일로 헤카티아 녀석이 무슨 보상을 주겠다고 하거든 거절하는 편이 좋을 거다. 너도 끔직한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뭔가 바라고 한 일은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그냥 그 말씀만 기억해두죠.”

 

제발 귀찮은 일만 안 생겼으면 좋겠다, 제발. 꼭 이런 말을 하면 귀찮은 일이 생기던데. 하아... 벌써 정오가 다 되어가네. 너희들 여기서 양심 없게 밥까지 먹고 가려는 건 아니지?”

 

불편해하실 것 같으니 그냥 돌아갈게요. 순호씨도 적당히 즐기신 것 같으니. 그렇죠, 순호씨?”

 

이 정도면 충분히 돌아본 것 같네요. 지상인들 모두 잘 지내고 있는 모습에 만족했습니다.”

 

퉁명스러운 레이무의 말투에서 오래 있어봤자 신사에 폐만 될 것이라 느낀 쿠타카가 순호를 데리고 떠나려고 하던 때였다. 그녀의 눈앞에 지붕위에서 무언가가 슉 하고 떨어져 그녀와 순호 사이를 가로막았다.

 

~~! 친구님과 부하님에게 주인님으로부터 메시지가 1건 도착했습니다~!”

 

이게 누구야, 또 크레이지한 녀석이 와주셨구만. 역시 이 신사 문제 있다니까.”

 

진짜 이것들이 ... 내 신사에서 소란 일으키지 말고 다 나가!”

 

어이쿠, 레이무. 진정해 진정. 우리한테 용건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씩씩거리며 나서려는 레이무를 마리사가 겨우 붙잡아 말렸다. 말리지 않았으면 바로 퇴치용 음양옥이나 부적이 날아가고도 남았을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갑작스레 일행들 사이에 난입한 헤카티아의 부하요정, 클라운피스가 손에 든 횃불을 산만하게 붕붕 휘두르며 순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친구님, 친구님. 주인님이 슬슬 지옥으로 돌아와 달래요. 저기 닭이랑 같이요!”

 

헤카티아의 부름인가. 어디로 오라고 하던가?”

 

어디였더라~ 어려운 이름이었는데요. 사카린의나라? 카와이라이라이?”

 

혹시 그거, 사이노카와라라는 이름 아닌가요?”

 

맞아 그거! 닭 주제에 보기보다 똑똑하네요! 주인님의 부하라서 그런가 봐요.”

 

쪼그만한 요정에게 대놓고 무시당한 쿠타카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사이노카와라는 꽤 넓은 곳이어서, 막연히 거기로 와달라고 하셔도 곤란한데요.”

 

아핫, 닭이 예리하기까지 하네요. 주인님께서 빨간 꽃이 잔~뜩 핀 붉은 다리 위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어요,”

 

연상되는 장소가 하나 있습니다. 꽤 유명한 곳이니 찾기 어렵지 않겠군요.”

 

그래, 사이노카와라의 다리 위인가. 요정이여, 헤카티아의 전언은 분명히 받았다. 지금 바로 니와타리 양과 가도록 하지.”

 

이왕이면 이름으로 불러달라니까요, 친구님~”

 

알겠다, 클라운피스여. 수고 많았다.”

 

순호가 손을 뻗어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기분이 좋아진 클라운피스가 배시시 웃으며 뿅뿅 뛰어올랐다.

 

야호~ 그럼 메시지도 전했으니 전 이만 가볼게요. 남은 시간은 지상에서 놀다 와도 된다고 했거든요.”

 

어휴, 다 가라, . 이제야 좀 조용해지겠네. 더운데 좁은 곳에 잔뜩 모여 있어봤자 더 뜨거울 뿐이라니까.”

 

말을 마친 클라운피스는 레이무 쪽으로 메-롱 혀를 내밀곤, 혼날 새라 포르르 빠르게 날아 토리이 너머로 사라졌다. 클라운피스가 가고 난 뒤, 쿠타카는 순호의 손을 잡아 자리에서 일으켜주며 잔뜩 열이 올라 있는 레이무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침부터 실례가 많았습니다. 헤카티아님의 전언을 받았으니 이만 가보도록 할게요.”

 

다음에 올 땐 최소한 새전이나 선물이라도 들고 올 수 있도록 해.”

 

조심해서 가라구~ 아까 내가 한 말 잊지 말구.”

 

쿠타카와 순호까지 떠나고 나자 겨우 신사에 평화가 찾아왔다. 풀벌레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레이무는 휴식을 방해 받은 것에 대해 투덜거리며 두 사람 분의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하고, 마리사는 그런 레이무의 기분을 더 자극하지 않도록 얌전히 툇마루에 앉아 텅 빈 참배길에 깔린 돌의 수를 세고 있었다. 달그락거리는 상을 차리는 소리가 안에서 들려오고 마리사가 절반 정도의 돌을 셌을 무렵, 저 멀리에서 누군가가 다급히 이쪽으로 날아오는 모습이 마리사의 시야에 들어왔다.

 

레이무, 안에 있어? 어라, 마리사도 있었구나. 마침 잘 됐네.”

 

레이센? 여긴 어쩐 일이냐. 지금 레이무는 기분이 매우 안 좋다구. 잘 못 건드리면 퇴치 당할지도 모른다?”

 

지금 농담 같은거 할 때가 아냐! 혹시 여기에 니와타리씨랑 순호씨가 같이 오지 않았어?”

 

예리한데~ 어떻게 알았어? 아까 막 상관이 부른다고 지옥으로 떠났지만.”

 

제길, 한 발 늦었네... 조금만 붙잡아두지 그랬어.”

 

뭔데, 그 심각한 표정은. 또 달이 습격당하기라도 했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튼 급해. 레이무부터 불러와봐!”

 

머리를 감싸 쥐고 레이센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자, 소란을 눈치 챈 레이무가 안에서 문을 세차게 열어젖히며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어째 오늘은 이상한 손님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 걸까.”

 

지금 진지하다니까. 귀찮고 말고 할 게 아니라 ... 일단 본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지금 이 약을 먹고 지옥으로 가줘.”

 

레이센이 허겁지겁 품에서 꺼내 레이무와 마리사에게 쥐어준 건 이전에도 신세진 적 있는 익숙한 약. 몸 안의 더러움을 정화해 생과 사의 경계를 없애는 감주의 약이었다.

 

이걸 주는 이유는 설마 ...”

 

자세한 건 나도 잘 몰라. 스승님께서도 최악의 경우에 필요할 거라고 하셨으니까. 둘이 이미 지옥으로 돌아갔다면 시간이 얼마 없어. 스승님께서도 너무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고 설명은 나중에 해줄 테니 서둘러 가서 둘의 상태를 살펴 달래. 특히 레이무, 네가 가진 무녀의 힘이 아니면 최악의 상황을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거라면서.”

 

너희들은 어쩌고 이 일을 죄다 나한테 떠맡기는 거람. 자초지종도 모르는데.”

 

나도 설명은 못 들었고, 시간이 없는 건 마찬가지야. 나도 지금부터 마을에 가서 사람들에게 집 안에서 나오지 말라고 말하러 다녀야 하니까. 그러니까 제~발 이번만은 그냥 스승님의 말대로 해줘. 스승님의 판단이 틀린 적은 없었잖아?”

 

중요한 정보는 쏙 가리고 이용해 먹는 것만 빼면 말이지.”

 

아무튼 ... 사안이 심각해보이니 알겠어. 기껏 차린 점심을 못 먹고 가게 생겼네.”

 

나중에 에이린 녀석한테 몇 배로 받아내 주자고.”

 

레이센 너, 나한테 빚진 거 알아 둬. 마을 사람들은 잘 지켜주고.”

 

각자의 장비를 챙겨든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라 중유의 길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레이센은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을 확인하곤 곧바로 몸을 돌려 마을 쪽으로 달려 나갔다. 한낮의 태양이 내뿜는 열기가 절정에 다다른 미()시의 일이었다.

 

-5-

 

약속장소인 다리 위에 도착했을 때 헤카티아의 모습은 거기에 없었다. 아마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리라. 조금만 더 있으면 정신없었던 지상 출장도, 순호와 함께 보내는 시간도 끝이라는 생각에 아쉬우면서도 홀가분한 기분이 든 쿠타카는 난간에 몸을 기대고 다리 아래 풍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쿠타카와 순호가 서 있는 다리는 두 언덕을 이어주는 형태로 설치되어 있었다. 언덕쪽을 바라보면 지평선 너머로 흐드러지게 핀 피안화 꽃밭을 감상할 수 있고 아래쪽을 바라보면 돌탑들이 늘어선 사이노카와라와 삼도천의 전경을 볼 수 있어 어디로 고개를 돌리든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이 절로 나오는 장소였다. 이 곳은 본래 시비곡직청 재정 운영에 도움을 주고자 만든 관광장소였지만 중유의 길처럼 직접적인 수입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고 애매하게 멀리 떨어진 입지 때문에 찾아오는 이 또한 거의 없어 사실상 애물단지처럼 방치되고만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이런 유명무실한 점이 가져다 준 이점이 있었으니, 왕래가 적고 경관이 좋다는 점 때문에 지옥의 높으신 분들이 이따금 개인적인 접선을 가지는 랜드마크로 활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헤카티아가 이 곳을 약속장소로 정한 것도 다른 지옥의 신들과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강가에선 미즈코들의 돌탑 콘테스트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콘테스트라 해도 거의 매일 발생하는 이벤트지만, 기약 없는 구원의 순간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속죄의 탑을 쌓아야하는 미즈코들에겐 혁신적인 동기부여가 되어주었다. 아이들의 상상과 개성이 가득 담긴 다양한 돌탑들은 이들의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오는 예술 축제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쿠타카는 지옥에서 일하며 돌탑이 가지는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감탄 대신 그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동정의 시선으로 돌탑들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니와타리 양이 무엇에 그리 푹 빠져있나 했더니, 흥겨워 보이는 축제네요. 아이들의 혼을 달래주기 위한 것인가요?”

 

사정을 모르는 순호가 쿠타카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아이들의 혼령이라는 것이 그녀의 관심을 끈 모양이었다.

 

그렇습니다. 선과 악의 개념조차 알지도 못하고 죽은 아이들을 재판에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재판에 보내지는 대신 이 곳에서 지장보살님이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저 탑들은 ... 일종의 시간 때우기 라고 할까요...”

 

쿠타카는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한 말은 거짓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모두 말해주고 있지는 않았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앞에서 어찌 아이가 부모보다 먼저 죽은 것이 중죄이며, 저 돌탑들은 그 죄를 씻어내기 위한 형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돌탑을 부수는 옥졸들이 오늘 사이노카와라에 행차하지 않는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기며 쿠타카는 순호의 의식을 아래쪽으로부터 돌리기 위해 황급히 대화 주제를 바꿨다.

 

, 그렇죠. 헤카티아님이 오시기 전에 미리 전해드렸어야 했는데 깜빡할 뻔 했네요!”

 

자신의 머리 위에 얹고 있었던 병아리를 내려주며 쿠타카가 순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며 망설이던 순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쿠타카로부터 병아리를 옮겨 받았다.

 

저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잘 키워주세요. 순호씨라면 분명 좋은 어머니가 되어 주실 겁니다.”

 

어머니 ... ...”

 

손바닥 위에서 삐약거리는 병아리를 보며 순호가 쓸쓸한 미소로 감상에 젖어 있을 때였다.

 

~! 오래 기다렸어? 미안미안,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출장 겸 휴가는 잘 즐기다 왔어?”

 

쿠타카의 양 어깨를 덥썩 잡으며 불쑥 튀어나온 푸른 머리의 헤카티아가 요란하게 인사를 건넸다. 순간 깜짝 놀라 비명이 튀어나올 뻔했던 쿠타카는 애써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둘을 마중나온 지옥의 여신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드립니다, 헤카티아님. 보시는 바와 같이 별다른 문제 없이 무사히 지상 출장을 마치고 지금 막 돌아왔습니다.”

 

왔는가, 헤카티아여. 꽤 오래 기다리게 하는군.”

 

둘이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재밌어 보여서 쭉 지켜봤지. 사이가 많이 좋아졌더라? 이러다 소중한 친구를 부하에게 빼앗길까봐 가슴이 조마조마한걸.”

 

만난 지 겨우 며칠밖에 안 된걸요. 헤카티아님이 순호씨와 함께한 시간은 도저히 못 따라가죠.”

 

얘도 참 말은 잘해~. 아무튼 고생 많았어, 니와타리 양. 환상향에선 뭘 하면서 돌아다녔던거야? 순호가 만나고 싶어하던 아이들은 다 만났고?”

 

쿠타카는 지난 3일간 있었던 일들을 헤카티아에게 말해주었다. 영원정에서 월인들과 협상을 한 일이며, 모리야 신사에서 사나에와 호숫가를 거닌 일, 병아리를 살려준 일과 하쿠레이 신사에서 무녀들과 투닥거렸던 일까지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쿠타카는 순호에게 생긴 감정의 변화를 특히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이 여행은 순호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느 정도 감싸주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생기면 자신이 얼마든지 안내를 도맡아 그녀를 도와주고 싶다는 것이 보고의 결론이었다.

 

헤카티아는 쿠타카가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그녀의 말을 가만히 경청하고 있었다. 마침내 쿠타카의 보고가 끝났을 때, 헤카티아는 흡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로 그녀의 열정과 노력에 화답했다.

 

대단해, 대단해~ 시키는 대 길안내만 하다 올 줄 알았는데 기대 이상이야, 놀랐어. 니와타리 양이 이렇게 사려 깊고 뛰어난 관찰력을 가진 줄은 몰랐네? 역시 인재는 다르구나 싶어. , 니와타리 양. 잠깐 좀 나랑 걸을까? 내가 순호랑 니와타리 양에게 각각 따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 , 알겠습니다.”

 

어깨에 팔을 두르며 친근하게 말하는 헤카티아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던 쿠타카는 그녀에게 맞춰 걸음을 옮겼다. 남겨진 순호는 어찌하려는지 헤카티아는 쿠타카를 데리고 한참을 걸어들어가더니, 피안화 빼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 한가운데 우뚝 멈춰 섰다. 순호가 걱정된 쿠타카가 뒤를 돌아봤을 땐 이미 그녀는 저 멀리에, 얼굴은커녕 형체조차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순호가 걱정돼?”

 

장소가 장소인 만큼 순호씨 혼자 두기는 불안해서요. 순호씨는 아직 사이노카와라의 돌탑들이 가진 의미를 모르고 계시잖아요?”

 

그렇지? 내가 아직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순호는 지금 혼자가 아니야. ‘와 함께 있으니까 괜찮아.”

 

헤카티아님은 여기 계시잖아요? 말씀이 잘 이해가지 않습니다만...”

 

아하하, 그럴 수 있지~ 니와타리 양은 이쪽의 나 밖에 못 봤으니까. 그건 그렇고 묻고 싶은 게 좀 있는데. 순호랑 같이 다니면서 힘든 건 없었어? 돌아다니기 힘들었다든가, 순호에게 시달려서 진이 다 빠졌다든가.”

 

별 일은 없었는데요. 오히려 기운이 넘쳐나는 날들이었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더운 날씨였는데도 덕분에 전혀 지치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었어요. 지금도 쌩쌩한걸요? 모리야의 신님들께서 못 본 사이 신격이 높아졌다고 하실 정도였습니다.”

 

그으래~? 잘 됐네. 지쳐서 비실대면 곤란하거든. 그럼 순호는 어때 보였니? 즐거워 보였니? 행복해 보였어?”

 

글쎄요, 제가 그 분의 마음 속을 전부 읽을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을 대하는 순호씨는 종종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듯한 미소를 보여주셨어요. 어쩌면 자식같이 느껴지는 분들을 만나면서 잠깐이었지만 옛날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느끼셨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니와타리 양의 도움이 컸어. 니와타리 양 쪽에서 먼저 진심을 다해 순호에게 다가가 주었으니까 가능했던거지. 그래서 난 네게 여러 가지 의미로 감사를 표하고 싶어, 니와타리 양.”

 

헤카티아가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우며 쿠타카의 손을 덥썩 잡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머쓱해진 쿠타카의 볼이 주변에 가득 핀 피안화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쑥스럽지만 한편으론 또 뿌듯한 기분을 느끼며 쿠타카는 이런 좋은 시간을 마련해준 헤카티아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별로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저 맡은 일에 성실히 임했을 뿐, 헤카티아님의 선의가 아니었으면 처음부터 불가능 했을 겁니다. 순호씨를 걱정해주시고, 또 그분의 상처 입은 마음이 치유될 수 있도록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배려해주시다니 이렇게 좋은 분을 친구로 둔 순호씨가 부러울 정도인걸요. 헤카티아님은 순호씨를 진심으로 아끼고 계시는군요.”

 

무슨 소리니? 내가 고맙다고 한 건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쿠타카의 말에 딱 잘라 대답하는 헤카티아. 쑥스러워 시선을 마주하지 못 하고 있던 쿠타카는 예상치 못한 날선 대답에 당황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웃음 짓고 있는 헤카티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가 짓고 있는 웃음 어디에도 친구를 생각하는 따듯한 온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거기서 느껴진 싸늘한 감각에 쿠타카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헤카티아와 눈이 마주쳤다. 몸을 벌벌 떠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소름끼치는 공포가 그녀를 옭아맸다. 쿠타카는 그때서야 자신은 헤카티아와 이야기하며 단 한 번도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 순호와 비슷한 원한을 품은 존재에게서 아주 옅은 악의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것을. 친구라는 관계는 애정으로 유지된다고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걸까? 오랜 세월 지옥과 지상을 오가며 지내는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지독한 악의가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순호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오싹했던 감각과는 차원이 달랐다. 신경독처럼 피부를 타고 파고들어 온 몸의을 마비시키는 듯한 감각에 파랗게 질린 쿠타카의 머릿속에 뒤늦게 레이센이 말한 경고가 생각났다.

 

고마워, 니와타리 양. 덕분에 나의 복수는 계속 이어질 수 있게 되었어. 그리고 쇠락한 지옥도 다시 예전처럼 부흥하게 될 거야. 넌 나의 영웅이야. 후후...니와타리 양, 이제 넌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지켜주면 돼. 모든 일이 마무리 될 때까지, 여기서 나와 있어주렴?”

 

헤카티아의 뒤에서 공기가 술렁거렸다. 사이노카와라, 순호가 기다리고 있는 곳에서부터 거대한 파장이 피안 전체에 일제히 퍼져나갔다. 그 직후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먼 거리에서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거대한 보라색 불꽃이 사이노카와를 뒤덮으며 피어올랐다.

 

순호씨!?”

 

서둘러 달려가고 싶었지만 헤카티아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겉보기엔 가녀린 팔이었지만, 그녀의 완력은 쿠타카가 전력을 다해 뿌리치려 해도 뿌리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안 돼. 여기까지 와서 일이 틀어지면 곤란해요? 이건 나를 위한 일이면서 동시에 지옥의 모두를 위한 일인걸. 설마 방해할 생각은 아니지? ? 니와타리 양은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잖아?”

 

주변의 꽃이 급속도로 말라 죽어간다. 선명한 붉은 빛이 검게 변해 꽃잎이 지면으로 힘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불꽃이 피어나고 채 1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웠던 피안화의 평원은 어느새 전부 새카만 죽음의 색으로 가득 물들어버리고 말았다.

 

헤카티아님, 도대체 어떻게 된 ... ?!”

 

신음과 함께 쿠타카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쿠타카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헤카티아를 올려다보았다. 소리치고 싶었으나 목이 꽉 막힌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불타는 것처럼 뜨거운 가슴을 쥐어뜯고 싶었으나 헤카티아에게 붙잡힌 팔은 그런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조금만 참으렴, 니와타리 양. 아픔은 잠깐이지만 영광은 영원할거란다. 죽을 것 같이 아파도 죽지는 않으니 괜찮아. 지금의 넌 이 섬나라 800만 신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성 그 자체니까.”

 

몸 안에서 신의 힘이 끊임없이 솟아난다. 일개 토착신인 자신이 전부 담아내기엔 너무나 방대한 양의 힘. 감당하지 못한 힘이 안에서 응축되고 요동치면서 자신을 좀먹는다. 태양을 삼킨 기분이 이런 것일까. 끔찍한 고통에 의식을 잃을 것 같았지만 몸 구석구석까지 전달되는 힘의 흐름은 오히려 그녀의 정신을 맑게 만들어 더욱 선명한 고통을 느끼게 만들었다.

 

니와타리 양은 타지의 사정에 어두우니 모르겠지만, 닭은 종교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태양, 부활을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이야. 꽁꽁 숨어있는 태양신을 바깥으로 불러내고, 천상으로부터 잠들어있는 만물을 깨워 신의 존재를 알리며,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 영혼을 이끌어주기도 하지. 정말 대~단하지 않니. 이렇게 기특한 동물이 또 있을까. 그래, 그렇기에 내 계획엔 네가 필요했던 거야. 닭이 가진 권능을 상징하는 네가.”

 

헤카티아가 꼬옥 잡고 있던 쿠타카의 손을 놓았다. 신체가 자유로워져도 움직일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힘을 잃은 쿠타카의 몸이 바닥에 널부러졌다.

 

혹시 입이 가벼운 누가 나와 순호에 대한 이야기를 흘리지 않았니? 아마 흘리고도 남았겠지. 지상엔 잘난 척 하기 좋아하는 녀석들이 한가득이니. 순호가 죽여버린 예라는 녀석은 자신의 잘난 활솜씨를 과시하기 위해 신들을 죽이고 다녔어. 그것도 태양과 관련된 신들만 골라서 말이야. 뜨거운 태양빛 때문에 인간들이 괴로워한다나~? 제 주제도 모르고 날뛰던 건방진 그 남자는 결국 아폴론의 목숨까지 앗아갔지.”

 

들었...습니다. 동료를 죽인 것에... 원한을 품으셨다고 ...”

 

쿠타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힘겹게 대답했다. 헤카티아의 표정이 어이없다는 듯 일그러졌다. 쿠타카에게 헤카티아의 코웃음 치며 경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누가 그러든? 달의 현자라고 불리는 월인 녀석이?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오네! 올림포스의 녀석들은 유능해서 좋기는 하지만 하나 둘 죽었다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정이 붙지는 않았다구? 아폴론이 아니라 전쟁광 아레스나 바람둥이 제우스 녀석이 죽었으면 이렇게 먼 곳까지 올 일도 없었어. 하지만 그 남자는 아폴론을 죽였어. 찬란한 빛의 상징인 아폴론을. 빛이 있어야 어둠도 존재하는 법, 그 녀석이 아폴론과 다른 태양신들이 죽여버리는 바람에 태양빛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약해졌고 지옥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 또한 같이 약해져버렸어. 니와타리 양은 보기보다 똑똑하니까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그래, 지옥이 예전 같지 않게 된 건 다 예의 탓이야. 그 녀석은 내 지옥을 건드리고 만 거야. 감히, 천박한 손으로, 나의 영역을, 이 나를 욕보였어.”

 

한 마디 한 마디 분노가, 원한이 가득 실린 헤카티아의 말에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으며 쿠타카를 무겁게 짓눌렀다. 안팎으로 괴로움을 느끼며 당장이라도 이 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진 쿠타카였지만 안타깝게도 죽음으로 뒤덮인 이 벌판에서 당장 그녀를 구해줄 수 있는 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참 아쉬웠어. 내 손으로 찢어 죽이고 싶었는데 순호가 한 발 먼저 쳐 죽여 버렸잖아. 예는 죽어버렸지만, 그가 죽었다고 해서 어둠이 사라진 지옥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어. 그 뒤는 지옥이 어떤 꼴이 났는지는 네가 아는 대로야. 죄인들이 고통에 겨워하는 비명소리는 점점 줄어들고, 지옥의 자랑이었던 고문들은 죄다 미지근해졌지. 악의 가득했던 옥졸들은 하나같이 임무는 뒷전으로 하고 자기들끼리 권력을 두고 싸우느라 바쁘고. 그것도 모자라 이젠 짐승 놈들이 지옥을 침략의 발판으로 삼고자 쳐들어오기까지 하잖아? 너무 한심하지 않니? 얼마나 한심하면 몇몇 관리직들이 지상이 더 지옥답다면서 아예 일을 팽개치고 인간계로 떠나버렸을 정도라구. 그래서 난 지옥을 다시 어둠과 악의로 가득 채울 계획을 고안해냈지.”

 

그 계획의 첫 번째 열쇠가 바로 너, 니와타리 양이 가진 닭의 권능이야. 니와타리 양. 너라면 이미 죽어버린 태양신들의 빛을 부활시킬 수 있어. 그 부활한 빛을 지금 지상을 비추고 있는 태양에 모아준다면 태양은 지금보다 더 강렬히 타오를 테고, 지옥에 드리운 어둠도 짙어지겠지. 그래... 지상이 많이 더웠다고 했지? 아마 지금은 더 할걸~? 태양신 10명 분량의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을 테니까. 지상의 녀석들은 쪼금 괴롭겠지만, 지상이 지옥보다 더 지옥 같아진 요즘이니 지옥 무서운 줄 모르고 업을 쌓은 대가를 치루는 셈 쳐야지.”

 

그럼 순호씨도 ... 저처럼 헤카티아님의 계획에 이용한 것인가요...?”

 

난 너처럼 눈치 빠른 사람이 좋더라. 니와타리 양의 신격은 죽은 신들의 힘을 끌어낼 정도로 높지 않단 말이지. 그래서 두 번째 열쇠인 순호와 같이 다니게 하며, 걔가 가진 순화의 힘의 영향을 받도록 했어. 말했잖아? 지금 너는 창조신 이자나기조차 넘어서는 신격을 갖추고 있다구. 일생일대에 없을 순간이니 뿌듯해 해도 좋아요?”

 

그 계획 때문에 순호씨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신 건가요!”

 

흐응~ 이 상황에서까지 순호를 걱정해주는구나. 그만큼 정이 들었을 줄은 몰랐어. 조금 섭섭해지는걸. 니와타리 양, 지옥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착해빠진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주제는 알고 행동하렴. 순호는 내 친구지, 네 친구가 아니야. 누군가를 진심으로 죽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네가 그 불쌍한 녀석의 기분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 잠깐 순호의 마음을 엿본 정도로 그 안을 전부 알게 된 것처럼 굴지 말아줄래? 순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어울릴 수 있는 건 나 하나 뿐이야. 달토끼도, 인간도, 너도 순호에겐 그저 스쳐지나가는 여흥에 불과...”

 

싸늘하게 쿠타카를 쏘아붙이던 헤카티아의 눈앞을 사람의 형체 하나가 쌩 하고 빠르게 지나갔다. 형체가 지나가고 남은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 고통스러워하던 쿠타카의 모습까지도. 감정도, 계획도 최고조로 달아오른 이 순간에 갑작스레 난입한 불청객의 존재에 헤카티아가 방금 전의 형체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아... 주제를 모르는 녀석이 한둘이 아닌 모양이네~ 그렇게도 신의 분노를 사고 싶다 이거지...”

 

-6-

 

정신을 차린 쿠타카가 어느새 자신이 하늘을 날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 헤카티아의 살기에 짓눌려 머리가 하얘지는 바람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차였는데, 그런 자신을 위기로부터 구해준 이가 누굴까 궁금해진 쿠타카는 고개를 들어 고마운 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 그러기에 내가 뭐랬냐. 조심하라고 그랬지?”

 

마리사씨? 이곳은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 그보다, 지금 여기는 위험합니다! 지금 피안을 뒤덮고 있는 것은 분명 순호씨가 가진 순화의 힘. 인간이 이 힘에 노출되었다간 죽음의 기운이 순화되어 결국 죽게 될 거예요!”

 

참 나, 끙끙 앓고 있으면서 말은 잘하는구만. 이렇게 착해빠진 신이 지옥에는 왜 있는거람. 우린 괜찮다구! 에이린이 우릴 여기로 보내면서 준 감주의 약을 먹었으니까. 전에도 먹은 적 있어서 아는데 이 약만 있으면 순화의 능력 따윈 전혀 소용없어!”

 

그치만 이건 전보다 더 위험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그 녀석, 얌전히 있겠다고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어?”

 

마리사의 옆을 날고 있던 레이무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만사 귀찮아하던 아침의 모습하고는 딴판이었다.

 

헤카티아님이 그러셨어요. 지금 지상엔 순화된 제 힘으로 인해 몇 배는 강렬한 태양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고... 그 덕분에 쇠퇴했던 지옥이 어둠을 되찾을 것이라고요.”

 

찜통같이 찌던 더위가 헤카티아 때문이었나. 하여간 민폐 덩어리라니까. 이미 오는 길에도 너무 뜨거워서 식물이 마르고 땅이 갈라지고 있었다구. 지옥이고 뭐고 지상이 지옥처럼 되어버리겠어.”

 

그래서, 순호는 어디 있는거야? 같이 있던거 아니었어?”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중간에 헤카티아님이 저만 따로 데려가셨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보지 못했고요.”

 

어이, 레이무... 저기 저거...그 녀석 맞지?”

 

창백한 표정으로 마리사가 한 곳을 가리켰다. 황폐해진 사이노카와라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미즈코들이 힘겹게 쌓아올린 돌탑들은 전부 형체도 없이 무너져 있었고, 그 가운데 무시무시한 지옥의 옥졸들이 군데군데 죽은 것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사이노카와라를 보라색 불꽃이 넘실거리며 에워싸고 있었다. 불꽃은 가까이 가도 뜨거운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불꽃 속에서 느껴지기 시작하는 건 순호의 사념이었다. 원망, 증오, 절망, 살의, 악의... 순호에게 맺힌 한의 감정이 머릿속에 직접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순호의 원수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불쾌하게 파고드는 사념에 쿠타카가 저도 모르게 구역질을 했다. 레이무와 마리사도 입을 틀어막고 파랗게 질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도 쿠타카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원한이 서서히 자신의 마음을 물들이는 것이 느껴졌다. 감정이 폭주하고 이성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미쳐버릴 것 같은 의식을 힘겹게 유지하며 전진하는 레이무 일행들의 눈 앞, 불꽃의 중심부에 검은 그림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눈구멍으로 추측되는 곳에서 피눈물을 줄줄 흘리며 전신이 소사체처럼 새까맣게 변한 사람의 형체. 쿠타카는 그 형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건 순호씨가 확실합니다! 이 불쾌한 불꽃은 아마도 순호씨의 힘과 감정이 뒤섞여 분출되고 있는 것. 레이무씨, 마리사씨, 어서 순호씨를 막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저희도 분노에 사로잡혀 버릴 겁니다!”

 

말이야 쉽지, 어떻게 ... 어어어어!?”

 

하늘을 날던 마리사의 빗자루가 갑자기 힘을 잃고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다급하게 레이무가 손을 뻗었지만 아슬아슬한 차이로 레이무가 뻗은 팔은 마리사에게 닿지 못했다.

 

마리사!!”

 

지면이 가까워지고 마리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둔탁한 충격음이나 두개골이 박살나는 끔찍한 소리 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다. 딱딱한 지면에 격돌하는 대신 두둥실 떠있는 신비한 느낌에 마리사가 감았던 눈을 슬쩍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걸로 은혜는 갚았네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땅에 추락하기 직전, 날개를 펼친 쿠타카가 아슬아슬하게 마리사를 받아낸 덕분에 마리사는 생채기 하나 없이 무사할 수 있었다. 여전히 내부에서 순화된 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는 쿠타카에겐 날개를 펴는 것부터가 버거운 일이었는지, 마리사를 내려준 쿠타카는 다시 기운을 잃고 풀썩 무릎 꿇고 주저앉아버렸다. 마리사가 쿠타카를 일으켜 주려고 했다. 하지만 마리사의 뒤에서 들려오는 섬찟한 목소리에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너 정~말 재밌는 아이구나? 마술을 다루는 인간이 감히 내게 반기를 들다니. 신을 기만하는 너 같은 인간은 타르타로스 제일 깊숙한 곳에 처박고 평생 고문하고 싶어져.”

 

싸늘하게 마리사를 내려다보는 노란 머리의 헤카티아가 그곳에 서있었다. 등 뒤에 닥친 위기에 마리사가 문답무용으로 자신의 팔괘로를 꺼내 헤카티아를 겨누고 발포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황한 마리사는 몇 번이고 팔괘로를 작동시켜 보았지만, 팔괘로는 그저 피식 하고 김빠지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지금부터 네가 마술을 사용할 권리를 압수하도록 하겠어. 지난번엔 심심풀이로 놀아주었지만, 이번은 엄연한 공무집행 방해니까 봐주는 일 따윈 없다구? 모두 사이좋게 죽음으로 갚아줘야겠어. 니와타리 양은 항명죄로 나중에 따로 벌을 내려줄게?”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는 살기를 느낀 마리사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레이무가 있는 위쪽을 쳐다봤다. 하지만 레이무 또한 이미 붉은 머리의 헤카티아에게 앞을 가로막힌 상태였다. 옴짝달싹도 못 하는 둘을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는 쿠타카의 뒤로 어느새 다가온 푸른 머리의 헤카티아가 그녀를 번쩍 일으켜 어깨를 끌어안았다, 바둥거리며 무력하게 저항하는 쿠타카의 귓가에 헤카티아가 속삭였다.

 

셋이 모여서 저항하면 뭐라도 있을 줄 알았어? 말하는 와중에 도망치다니 버릇없네요?”

 

헤카티아님...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을 벌이신건가요.”

 

먼저 할 일 없어보이는 무능한 옥졸들에게 명령을 내렸어. 지금 사이노카와라에 돌탑이 너무 많이 늘어서 있으니 보기 좋게 정리 좀 하라고. 원래 그런 곳이잖아? 그리고 네 말대로 이곳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며 옛날 추억에 푹 젖어있는 상태의 순호한테 그 모습을 보여줬지. , 제대로 설명도 해줬다? 저기 순호야~ 순호가 살아남은 바람에 순호의 아이는 죄인이 되어 버렸다구? 이 넓은 저승 어딘가에서 지금도 순호를 찾으면서 무의미한 속죄를 반복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일까~ 하면서. 순호에게 그렇게 큰 감정기복을 느끼게 하기 힘든데, 니와타리 양의 섬세한 배려가 빛을 발했어. 원래 높은 곳으로 올려 준 뒤 밀어 떨어뜨렸을 때 더욱 충격이 큰 법이거든. 예상대로 효과 만점. 순호는 폭주하고, 순화의 힘이 지옥에 넘쳐흐르게 되었지. 이 얼마나 완벽하니? 다시 순수한 악의와 어둠이 지옥에 가득 차오르고 있잖아. 이걸로 다시 지옥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거야. 니와타리 양, 지금 기분이 어떠니? 자신의 선의가 이런 결과를 불러올 줄은 몰랐지?”

 

헤카티아가 쿠타카의 턱을 받쳐주며 순호 쪽을 향해 강제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지금도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저주의 말을 내뱉으며 피눈물 흘리는 순호와 함께 그녀의의 발치에 나뒹굴고 있는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쿠타카가 순호에게 맡긴 병아리의 시체였다. 샛노랗게 생기가 돌아왔던 솜털이 다시 회색빛으로 바래버린 채 순화의 힘에 의해 말라 비틀어진 병아리의 모습은 그동안 쿠타카가 순호를 위해 벌인 노력도 약속도 모두 의미 없는 짓이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은 쿠타카가 거의 울부짖는 목소리로 헤카티아에게 소리쳤다.

 

어째서 이렇게 잔혹한 짓을 ...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순호씨는 헤카티아님의 친구라면서요! 어떻게 친구를 이렇게 상처 입힐 수 있는 건가요!”

 

맞아. 난 순호가 정~말 정말 좋아. 나랑 목적도 같구~ 내 말도 잘 들어주고~ 복수에 미쳐있는 점도 마음에 들어. 처음 날 찾아왔을 때 그 죽어있던 눈빛을 아직도 잊지 못하겠다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말이지, 순호는 나보다 먼저 예를 죽여 버렸어. 예에 대한 원한이라면 순호보다 내가 훨씬도 전부터 가지고 있었는데, 비겁하게 끼어들어서 새치기를 해버렸어. 니와타리 양은 그 기분을 알까? 죽이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원수를 찾아 온 세상을 헤집고 다녔는데 이미 죽어 없어져 있었을 때의 허무함을. 그래서 난 내 삶의 의미를 빼앗아간 순호가 진심으로 미워. 내 재미를 빼앗아가고도 내게 도움을 청한 그 뻔뻔함이 싫어.”

 

쿠타카의 귓가에서 이를 으득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까지 분노가 실린 헤카티아의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지 싫지만 또 무~지 좋아서 죽이고 싶진 않아. 그래서 생각했지. 일단 순호의 복수에 협조하기로. 상아라는 년은 순호의 원한과 직접 관련이 없다는 것 따윈 이미 진작 알고 있다구요? 그치만 만약에 말이야. 순호가 상아를 죽이기 직전에 내가 그 년을 먼저 죽여 버리면 어떨까? ... 순호도 분명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낄 거야. 나니까 알 수 있어. 모든 것은 순호에게 내가 느꼈던 증오의 감정을 똑같이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야. 그것이 내가 순호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 순호와 완전히 동등한 관계의 친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 그러기 위해선 순호에게 상아에 대한 적개심을 틈틈이 상기시켜줄 필요도 있어. 요즘 순호는 지상인들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까. 그것이 이 계획의 또 다른 의의. 복수심도 부추기고~ 순호에게 앙갚음도 하고~ 지옥의 부흥도 이루어내고. 하아, 내가 떠올렸지만 정말 완벽한 계획이야. 본의 아니게 네 노력을 짓밟아버려서 미안~ 네 행동은 솔직히 예상 밖이었거든.”

 

제정신이 아니시군요. 이러고도 신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겁니까.”

 

오히려 가장 지옥의 여신다운 전략을 세웠다고 보는데? ”

 

아무리 상관이라 해도 전 헤카티아님의 방식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제가 주제넘게 나서는 바람에 순호씨께 더 큰 상처를 안겨드리긴 했지만, 아직 되돌리기엔 늦지 않았어요. 처음에 헤카티아님께 약속드렸죠, 순호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지켜드리기로. 지금 그 약속을 지킬 때입니다. 헤카티아님의 계획은 제가 막겠어요.”

 

넘쳐나는 힘을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면서 말이니? 무력해진 둘, 고전하는 한 명. 겨우 너희들론 세 명의 나를 뚫고 순호를 진정시킬 수 없을걸? 무리야 무리~. 얌전히 있어주면 저 둘도 특별히 죽이지 않고 살려줄테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렴.”

 

쿠타카는 레이무와 마리사를 번갈아 보았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힘을 빼앗겨 평범한 인간 소녀나 다름없게 되어버린 마리사도, 한 명의 헤카티아를 견제하는데 온 신경을 쏟고 있는 레이무도 이 상황을 타개할 힘은 없어 보였다. 시간을 끌수록 지상도 순호도 위험해지기에, 쿠타카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헤카티아를 저지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니와타리,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레이무를 도와! 에이린이 그랬어. 레이무가 있어야 최악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쿠타카를 향해 큰 소리로 외치던 마리사가 헤카티아의 힘에 의해 땅바닥에 짓눌려 쓰러졌다. 마리사는 의식을 잃었지만 다행히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쿠타카에게 전달된 모양이었다. 마리사의 말을 들은 순간 쿠타카의 뇌리를 스치고 순호를 구할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성공이 순전히 운에 달린 도박수. 그러나 지금 이 급박한 상황에서 그 외의 선택지를 고려할 시간은 없었다.

 

레이무씨! 저를 받아들이세요, 지금 당장!”

 

?! 뜬금없이 무슨...!”

 

무녀인 레이무씨만이 가능한 일이에요. 헤카티아님이 그러셨죠. 지금 제 힘은 800만 신을 넘어서고도 남을 거라고. 그렇다면 저를 깃들게 함으로써 레이무씨도 이 힘을 사용할 수 있어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신인 네가 버티지 못하는 힘을 인간이 견뎌내게 하겠다고?”

 

인간이 신을 믿는 만큼 신도 인간을 믿어줘야죠. 잠자코 헤카티아님께 굴복하진 않을겁니다.”

 

붉은 머리의 헤카티아로부터 거리를 벌린 레이무가 신을 깃들게 하는 의식을 치루기 시작했다. 상황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에 언짢은 감정을 드러낸 세 명의 헤카티아가 레이무를 일제히 바라보며 각자의 위치에서 주문을 영창했다.

 

마음에 들어. 참 재미있는 아이들이야.”

그렇지만 나를 방해하려 들다니 건방져.”

신에게 거역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며 지옥에 떨어지렴.”

 

영창을 끝낸 세 헤카티아로부터 사악한 주술의 힘이 담긴 탄막이 생겨나 일제히 레이무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살의 가득한, 어느 방향으로도 회피가 불가능한 필중필멸의 공격. 위기의 순간에도 레이무는 제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의식에 집중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탄막이 가까워지고 사방에서 모여든 공격이 그녀를 형체도 남지 않게 찢어발기려는 순간이었다. 탄막의 중심, 레이무로부터 거대한 빛이 폭발했다. 그와 동시에 쿠타카는 자신의 안에서 요동치던 신성의 힘이 그녀에게 옮겨가지는 것을 느꼈다.

 

“...아슬아슬했잖아요.”

 

태양을 등에 업은 듯 눈부신 후광이 비치는 가운데 빛나는 날개가 돋아난 레이무가 떠 있었다. 그녀를 가득 에워싸고 있었던 탄막은 빛의 폭발과 함께 전부 증발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게 정말 니와타리의 힘이라고? 말도 안 돼.”

 

일시적으로 순화된 힘에 불과해요. 순호씨의 폭주만 막으면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겁니다.”

 

! 그렇게 놔두진 않아.”

 

사방에서 불꽃이 피어올라 레이무의 주위를 포위하고 좁혀들었다. 하늘에 별들이 생겨나나 싶더니 이내 불타는 유성우가 되어 레이무한테 덮쳐들었다. 뒤이어 여러 개의 달들이 떠올라 서로 부딪혀 깨지며 수많은 파편을 흩날렸다. 헤카티아와 가까이 붙어있던 쿠타카와 마리사, 그리고 순호를 제외한 모든 곳에 불과 돌덩어리가 떨어지며 사정없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묵시록에서 묘사한 신의 심판을 연상시키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헤카티아의 신벌이 레이무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재빠른 움직임으로 아슬아슬하게 지옥의 폭풍을 돌파하며 레이무는 조금씩 순호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레이무가 가까워짐에 따라 헤카티아의 공격은 더욱 격렬해졌지만 쿠타카가 내려준 힘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그녀를 저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저지를 뚫고 레이무가 순호에게 도달했다. 태양을 상징하는 신성한 힘과 원한과 분노 가 가득 서린 힘, 두 개의 상반된 순수한 힘이 격돌하며 커다란 폭풍을 일으켰다. 귓가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체념 섞인 한숨소리를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힘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쿠타카는 헤카티아에게 안긴 자세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 Epilogue -

 

얼마나 의식을 잃었을까, 눈을 뜬 쿠타카 앞에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깜짝 놀란 쿠타카는 몸을 벌떡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매일 아침마다 보는 익숙한 인테리어, 이곳은 시키 에이키의 집무실 안이었다.

 

일어났군요, 쿠타카.”

 

몸을 일으킨 쿠타카의 맞은편에서 시키 에이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무례한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한 쿠타카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시키 에이키를 향해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염마님! 염마님이 보고 계신 앞에서 보기 좋게 늘어져 있었다니 실례도 이런 실례가 없습니다!”

 

아뇨, 사과해야할 건 쿠타카가 아닙니다. 오히려 제 쪽이죠. 헤카티아님이 출장 얘기를 하시면서 지옥의 부흥을 위해 쿠타카가 꼭 필요하다고 했을 때 강경하게 반대했어야 했는데, 제 힘이 부족했습니다.”

 

쿠타카는 자신이 왜 쓰러졌었는지를 떠올려냈다. 사이노카와라에서 있었던 일, 헤카티아가 털어놓았던 그녀의 야망, 그리고 지상의 인간들과 손을 잡고 헤카티아의 계획을 저지하고 순호의 폭주를 저지한 일. 모든 것이 떠오른 쿠타카가 시키 에이키에게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 얼마나 쓰러져 있었던 거죠? 무녀 일행과 지상은 어떻게 되었나요? 순호씨는 괜찮으신가요? 헤카티아님은 어떻게 되신 건가요?”

 

쿠타카, 천천히 하나씩 물어도 늦진 않습니다. 일단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지상은 무사합니다. 헤카티아님의 의도를 눈치 챈 영원정에서 일찌감치 인간들을 실내로 대피시킨 덕분에 사망자는 없었다고 하더군요. 열사병으로 고생한 인요가 몇 명 있긴 했던 모양이지만요. 모리야에서도 소식을 듣고 발 빠르게 대처하여 텐구들과 협동해 산불 예방에 힘을 썼다고 합니다. 일이 끝난 후 비를 부른 것도 모리야의 신님들이었고요. 그리고 쿠타카를 도와 사건을 해결한 무녀와 흑백 모두 다친 곳 없이 멀쩡합니다. 헤카티아님도 진심으로 죽일 의도는 아마 없었던 것이겠죠. 이 모든 건 쿠타카가 의식을 잃은 요 일주일 사이 코마치를 지상으로 보내 하쿠레이의 무녀에게 직접 들은 것들입니다.”

 

어라, 저 일주일이나 무단결근 했던 건가요?!”

 

무단은 아니죠. 굳이 말하면 병가라고 해야겠네요. 쿠타카의 증상은 몸살 같은 것이었으니까요. 사정이 있었던 일이고 쿠타카의 빈자리로 인한 불편은 위에서 다 수습해주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순호씨는요? 무사하신가요? 설마 그대로 퇴치당하거나 하신건 아니죠?”

 

그건 ... ...”

 

시키에이키가 대답을 망설이던 와중에 집무실 문이 또다시 세차게 쾅 열렸다. 어안이 벙벙해진 둘 앞에 열린 문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민 건 다름 아닌 사건의 장본인 헤카티아였다.

 

헬로~! 어머, 니와타리 양 드디어 정신이 들었네? 잘 됐네~ 사과의 뜻에서 니와타리 양에게 주려고 멀리까지 가서 이것저것 가져왔어용. 문병 선물로 제격인 황금 사과랑, 슬쩍 빼돌린 넥타르랑~ 하나같이 드러누운 신도 벌떡 일어나게 해주는 진귀한 것들이야.”

 

헤카티아님?! 분명 저한테 엄청 화나 계실 줄 알았는데요.”

 

아하하, 신경 쓰지 마. 나도 좀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한 것도 없지 않아 있고, 니와타리 양을 이용한 건 사실이잖아? 여기서 내가 화내면 양심이 없는 거지. 지옥의 분위기도 원하던 만큼은 아니지만 대충 기강이 잡히긴 했고.”

 

선물 보따리를 내려놓고 쿠타카가 방금 전까지 누워 있었던 자리에 풀썩 앉아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치켜 올리며, 이전의 유쾌한 분위기로 돌아간 지옥의 여신은 쿠타카를 향해 손짓했다.

 

듣고 싶은 얘기가 많을 텐데. 일단 앉아. 아직 돌아다닐 정도로 회복된 건 아니잖니?”

 

쿠타카가 머뭇머뭇 다가가 눈치를 보며 헤카티아의 옆에 앉았다. 쿠타카의 기억 속에선 필름이 끊기기 직전까지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던 상대였기에, 아무리 친하게 군다고 한들 긴장을 풀래야 풀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을 겪었으니 두려워하는 것도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쿠타카, 쓰러진 쿠타카를 이곳으로 데려와 준 분이 헤카티아님이랍니다.”

 

거기에 덧붙여 쏟아지는 탄막과 파편 속에서 인간 꼬마와 니와타리 양을 지켜준 것도. 이러면 좀 마음이 놓일까?”

 

그 전까진 진심으로 죽일 기세셨잖아요.”

 

어쩌지~ 단단히 삐졌나봐. 그땐 살짝 기분 상해서 세 명 중 두 명 정도만 진심이었지만 역시 너무했던 걸까?”

 

그것보다... 듣고 싶은 설명이 있는데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알아. 순호 말하는 거지?”

 

잘 아시네요. 순호씨는 괜찮으신 거죠?”

 

백문이 불여일견. 저기 순호야~ 언제 들어올래. 거기서 계속 안 들어오면 얘가 계속 걱정할지도 모른다?”

 

문 밖으로 고개 돌려 큰 소리로 순호를 부르는 헤카티아. 그 부름에 응해 문 뒤에서 쭈뼛쭈뼛 순호가 몸을 반 정도 내밀고 쿠타카 쪽을 살폈다. 멀쩡한 순호의 모습을 본 쿠타카의 얼굴이 안도감으로 밝아졌다.

 

순호씨! 그대로 폭주를 못 이기고 어떻게 된 것은 아닐까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왜 거기서 들어오시지 않고 계시나요?”

 

“...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아니 그건 애초에 그 약속은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이었다니까. 그 병아리는 원래부터 금방 죽을 운명이었어. 그렇다고 그 아이를 순호가 살려낸 건 꺼져가는 촛불을 살려보겠다고 모닥불 속에 던져 넣은 거나 마찬가지야. 요정이면 모를까, 연약한 생명에게 순화된 생명력을 불어 넣는건 명을 단축시키는 짓이라구. 내가 순호를 자극하지 않았어도 며칠 못 갔을걸?”

싸늘한 시선 세 개가 동시에 헤카티아에게 내리 꽂혔다. 애써 자신을 합리화하던 헤카티아가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순호씨가 품은 원한의 깊이를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네요. 그것도 모자라 또 다른 생명을 인질로 그 감정을 누그러뜨리려 하다니, 저도 죄가 많습니다.”

 

제 친구 헤카티아 때문에 여러 가지로 폐를 끼치고 말았네요. 미안해요.”

 

아뇨, 순호씨의 잘못이 아닙니다! 저야말로 죄송하죠. 그런데 순호씨는 헤카티아님이 저지른 짓을 알고도 헤카티아님을 용서하기로 하신건가요.”

 

말도 마~ 정신 차린 순호에게 떡이 되도록 얻어맞고 3분의 1 정도 죽을 뻔 한 뒤에 겨우 용서 받았어.”

 

오늘 3분의 1이 더 죽게 될 지도 모른다, 헤카티아여. 그대는 입을 열 자격이 없어. 다물어라.”

 

... ... 화해하신 거라고 봐도 괜찮겠죠?”

 

헤카티아가 저를 미워하는 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답니다. 저를 돕는 이유도, 상아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지도 말이죠. 하지만 이렇게 선을 넘어설 줄은 몰랐네요. 복수를 할 거면 정면에서 당당히 죽이려 들면 될 것을, 비열하게 뒷공작을 하는 태도엔 질렸습니다. 언젠가 갚아줘야죠.”

 

죽일 정도로 싫은 건 아니야.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을 주는 정도까지만?”

 

그렇다면 나는 그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하도록 하지. 불구대천의 원수 상아여, 보고 있는가. 네 길동무가 될 자가 여기 있느니라.”

 

아하하하...”

 

이번엔 내가 심하긴 했어. 하지만 친구끼리 쫌 투닥 거리는 일이야 있을 수 있지 않겠니? 다툼에 니와타리 양을 끌어들이긴 했지만 그건 사업상 필요한 거였고.”

 

두 분 다, 적당히 해주십시오. 이 이상 주위에 폐를 끼치는 일은 아무리 상관이라 해도 염마인 제가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로 피해를 입은 옥졸들에 대한 피해보상 및 파괴된 사이노카와라의 재건비 등은 모두 헤카티아님께 달아두도록 하겠으니 알아두시지요.”

 

너무해...!”

 

사퇴까지 바라진 않으니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한 책임을 져 주십시오. 개인적인 일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보게 한 대가입니다.”

 

틀린 말도 아니었던지라 시키에이키의 단호한 태도에 헤카티아도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둘을 보며 쿠타카는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좋아하면서 또 상처입히지 못해 안달난 저 애증의 관계를 우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상식을 벗어난 애증의 관계를 쿠타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둘이 서로의 기분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방식이 통하는 것은 아닐까. 헤카티아가 말한 것처럼, 멋대로 순호의 마음을 이해했다고 착각하고 이를 감싸주려 한 자신의 노력은 주제넘은 짓이었던 것이 아닐까. 결과적으로 어찌저찌 일은 잘 풀렸지만 뒷맛이 쓰게 느껴졌던 쿠타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쿠타카에게, 어느새 그녀의 뒤로 다가온 순호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 또 기회가 된다면 헤카티아 몰래 지상에 가도록 할게요. 그때도 같이 다녀주실 수 있을까요?”

 

돌아보지 않아도 순호의 표정이 상상되는, 따스함이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쿠타카의 노력이, 그녀의 배려가 결코 의미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순호의 진심이 그녀의 손길을 타고 느껴졌다. 헤카티아의 시선이 닿지 않는 틈을 타, 쿠타카는 활짝 미소지은 얼굴로 순호를 돌아보며 힘찬 끄덕임으로 그녀의 진심에 답했다.

 

어휴,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생겼어. 이렇게 손해볼 줄 알았으면 일을 벌이지 않는 건데.”

 

질렸다는 투로 고개를 내저으며 헤카티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순호와 팔짱을 꼈다. 표정을 찡그리긴 했지만 순호는 딱히 달라붙는 헤카티아를 거부하진 않았다.

 

돌아가시는 건가요?”

 

오래 있어봤자 세 명에게 돌아가며 잔소리를 듣는 것 밖에 더 있겠어? 니와타리 양이 깨어난 것도 확인 했으니 이만 가볼게. 가져온 선물은 꼭 니와타리 양 혼자 먹도록 하구.”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헤카티아님, 순호씨.”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밖으로 나가려던 헤카티아가 멈칫, 뭔가 생각 난 듯 팔짱을 풀더니 쿠타카 쪽으로 돌아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맞다, 니와타리 양. 너 무지 당돌하더라. ~주 마음에 들었어. 그치만 니와타리 양이 내 계획을 망친 건 망친 거니까 ... ... 무슨 말인지 알지?”

 

이해가 늦은 쿠타카에게 윙크와 손키스를 날리며 헤카티아는 순호와 함께 퇴장했다. 그리고 잠시 후, 뒤늦게 말뜻을 이해한 쿠타카의 절규하는 소리가 시비곡직청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골치 아픈 친구가 늘어난 한 신의 험난한 직장생활이 예상되는, 어느 날의 지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