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팬픽

괴조를 베다 ~ Till - ?

교토대동방학과 2021. 2. 14. 22:51

괴조를 베다 ~ Till - ?

단편 팬픽대회 출품작

 

언제까지냐~ 언제까지냐~

 

곤히 자고 있던 요우무의 눈이 번쩍 뜨였다. 못으로 철판을 긁는 것처럼 불쾌한 울음소리가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며 요우무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기분 나쁜 소리가 밤마다 들려오게 된 것이. 어림잡아 석 달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머릿속을 징징 울리는 소리에 밤잠을 설친 지도 벌써 100일이 다 되었다. 요우무의 체력은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벽을 짚고 일어선 그녀의 팔은 잔가지처럼 앙상했고 다리는 힘을 제대로 싣지 못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언제까지냐~ 언제까지냐~

 

힘겨워하는 요우무를 비웃듯 밖에서 들리는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이 울음소리의 정체는 무엇이며 감히 이 백옥루까지 쳐들어온 목적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쩌면 이곳의 주인, 사이교우지 유유코를 노리는 사악한 요괴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오래 전 지옥부터 명계까지 한바탕 뒤집어 놓은 원령의 소행일지도 모른다. 원인불명, 정체불명의 괴현상.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지만 요우무에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이대로 괴현상을 계속 방치해 두었다간 자신이 고사(枯死)하는 것은 물론이요, 백옥루와 명계의 질서까지 위험해질 것이라는 것.

 

썩 나와 모습을 드러내어라, 사악한 이매망량이여! 내 생명이 다하는 한이 있어도 네놈만큼은 베어 버리고 말테니!”

 

비틀비틀 몸을 기대 힘겹게 장지문을 열어젖힌 요우무가 남아있는 기력을 전부 끌어 모아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호통 쳤다. 그와 동시에 거슬리는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딱히 요우무의 으름장이 통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석 달 내내 반복된 똑같은 패턴. 요우무가 방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소리가 뚝 그쳤다가도, 수색을 마친 그녀가 빈손으로 방으로 들어서면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울어재끼니 악질도 이런 악질이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진작 미쳐버리고도 남았을 끔찍한 이 고문을 요우무는 지금까진 오로지 정신력만으로 견뎌왔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한계였다. 이대로 가면 쇠약해진 몸이 먼저 무너지고 말 터, 그렇기에 요우무는 더 늦기 전에 끝을 보자는 심정으로 시선을 돌려 방 한 쪽에 정비해둔 자신의 검 두 자루를 찾기 시작했다.

 

요우무. 몸도 좋지 않으면서 이 늦은 시간에 어딜 나가려고 하는 거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니?”

 

등 뒤에서 들려온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요우무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잠에서 깨어난 유유코가 어느 샌가 그녀의 방문 앞에 서있었다. 당혹스러워 하는 요우무의 이마를 타고 한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요우무는 자신이 밤마다 괴현상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유유코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한 번 잠들면 잘 깨지 않는 체질인 것일까, 괴현상이 발생하고 한참이 지나도 유유코가 이에 대해 요우무에게 의논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는 요우무의 상태가 병환 탓인 줄로만 알고 그녀에게 치료와 휴식을 권할 뿐이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유유코를 보며, 요우무는 그녀에게 마음의 짐을 더 이상 안겨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요우무가 몸져눕게 된 원인이 괴현상 때문임을 유유코가 알게 된다면 그녀는 분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설 것이리라. 백옥루의 정원사로서 이 장소를 수호하지 못할망정, 자신의 의무를 주인에게 넘기고 돌봄 받는 것은 요우무의 성격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요우무는 하루하루 자신의 생명이 깎여나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괴현상에 대해 유유코에게 함구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밤은 그녀가 성급했다. 초조해진 나머지 한밤중에 그렇게 큰 목소리로 소란을 피웠으니 아무리 잠귀가 어두운 유유코라 해도 잠에서 깨지 않고 배기겠는가. 그것도 모자라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무기를 챙기는 장면까지 들켜버렸으니, 이 상황에선 어떤 거짓말이나 변명도 소용없을 것이 분명했다.

 

유유코님, 이건... 제가 나중에 천천히 설명 드리겠습... 콜록! 콜록!”

 

다급하게 해명하려 했지만 나오는 것은 호흡이 꼬이며 생긴 마른기침뿐이었다. 가슴을 치며 숨을 고르려 애쓰는 요우무에게 다가온 유유코가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떨리는 손을 꼭 잡아 주며, 유유코는 요우무의 기침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지막이 그녀에게 물었다.

 

요우무, 최근 네 상태가 이상하구나. 아까의 외침도 그렇고, 혹시 밤마다 악몽 같은 것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니니?”

 

정곡을 찔린 요우무의 입이 꾹 닫혔다. 침묵은 곧 긍정의 뜻, 이내 깊은 한숨이 유유코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오늘은 우선 푹 쉬려무나. 네가 충분히 자고 일어날 때까지 내가 네 옆에 있어줄게. 안심해도 좋단다. 내가 함께 있는 동안엔 그 어떤 존재도 더 이상 너를 괴롭히지 못할 테니.”

 

자신의 무릎 위에 요우무를 뉘여 주며 유유코가 다정하게 속삭여주었다. 주인의 무릎을 베는 주제 넘는 짓을 할 수 없다며 요우무의 마음이 다급히 외쳤지만, 그 외침은 나른해진 몸에 밀려든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조용히 묻혀버리고 말았다. 곧 의식을 잃고 잠에 빠져든 요우무가 유유코의 무릎 위에 고개를 톡 떨어뜨렸다.

 

유유코의 말대로 또다시 불쾌한 울음소리가 잠을 깨우는 일은 없었다. 정신을 잃고 얼마나 자들었을까, 햇살이 눈을 따갑게 찌르는 느낌에 요우무가 부스스 눈을 뜨며 정신을 차렸다. 개운함이 몸 구석구석까지 느껴지는 가운데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는 유유코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낯익은 얼굴. 요우무는 금방 그 인물이 유유코의 절친한 벗인 야쿠모 유카리임을 알 수 있었다.

 

잘 잤니, 요우무?”

 

꽤 심각하네. 3일이나 죽은 듯이 잠들다니, 얼마나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인 거람. 요우무, 무슨 일이 있으면 당연히 주인에게 먼저 이야기해야 되는 거 아니야? 예나 지금이나 넌 우직함이 도가 지나쳐.”

 

잔소리는 나중에. 아픈 사람에게 그러는 거 아니야, 유카리

 

너희 둘의 안부가 걱정되어서 찾아왔더니 이 모양이잖아. 유유코 너도 마찬가지야. 왜 요우무를 이 지경까지 내버려둔 거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조금 독한 병에 걸린 것이라 생각해서, 적절한 치료를 받고 푹 쉬면 나아질 줄 알았어. 그만큼 무관심했다는 뜻이 되려나? 나도 참... 요우무에게 몹쓸 짓을 저질러 버렸네.”

 

자신이 장장 3일씩이나 유유코의 무릎 위에서 자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대화내용에 요우무의 눈이 번쩍 뜨였다. 허둥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하는 요우무를 유유코가 이마를 살포시 눌러 제지했다.

 

너를 탓하는 것이 아니니 더 누워 있으렴. 너는 아직 더 쉬어둬야 할 필요가 있단다.”

 

, 하지만 제가 3일씩이나 잠들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랬지. 어찌나 잘 자던지. 유유코가 여기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니깐?”

 

망령이라 먹고 마시지 않아도 괜찮은걸~. 이 자세로도 잠은 잘 수 있고.”

 

불편을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유유코님 …….”

 

그 이야기는 나중에. 그보다 요우무, 네가 무엇 때문에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앓아왔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겠니? 도움 받는 것에 부담 갖지 말고.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려 하지 않아도 괜찮단다.”

 

무거운 신음소리를 중얼거리며 갈등하던 요우무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더는 숨길 수 없겠네요. 사실... 밤마다 이상한 것이 백옥루에 찾아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방 밖으로 나서면 어느 샌가 자취를 감추곤 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의 울음소리만큼은 똑똑히 기억납니다. 언제까지냐~ 언제까지냐~ 하고 저를 재촉하는 듯한, 불쾌한 소리였어요. 매일 밤만 되면 그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와서 한숨도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머릿속에서 언제까지냐고 묻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요우무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누그러져 있던 방의 분위기가 일순 무겁게 얼어붙었다.

 

이츠마덴(以津真天)의 소행이구나.”

 

말도 안 돼. 어떻게 또 같은 일이…….”

 

요우무를 쓰다듬던 유유코의 손이 멈추고, 유카리의 눈살이 험악하게 찌푸려졌다. 그 틈을 타 몸을 일으킨 요우무는 어두운 낯빛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둘을 번갈아 보았다. 심상치 않은 둘의 반응, 사태의 심각성을 어렴풋이 눈치 채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 요우무가 조심스럽게 둘에게 질문을 던졌다.

 

두 분은 그 괴현상의 정체를 알고 계시는 것 같네요. 이츠마덴이라니, 요괴의 이름인가요?”

 

그건... 오래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괴조란다. 어림잡아 20척은 되는 크기에 맹수의 이빨, 인간의 얼굴, 용의 비늘을 지녔다고 하지. 시체 주위를 맴돌며 울부짖어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요괴, 그것이 괴조 이츠마덴. 오래 전에 퇴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고 계속 되살아나는 성가신 요괴란다.”

 

즉 형체가 있는 요괴, 퇴치가 가능한 녀석이라는 말씀이시네요.”

 

일단은 그렇지만…….”

 

유유코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요우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요우무의 목숨이 달린 중요한 사안임에도 유유코는 이 이상 자세한 언급을 꺼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건 무슨 뜻이죠? 두 분은 이미 그 괴조를 직접 보신 적이 있으신 것이 아닌가요?”

 

유유코가 입을 꾹 닫았다. 떨리는 그녀의 입술은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저 앓는 소리만 틈새로 작게 흘릴 뿐이었다. 결국 끝까지 요우무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채, 망설이기만 하던 유유코가 그녀로부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찰나의 순간 요우무가 본 것은 유유코의 붉어진 눈시울과 눈가에 맺힌 한 방울 눈물. 유유코의 갑작스러운 감정변화를 이해하지 못한 요우무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요우무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동안 유카리는 유유코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그녀의 뒤로 돌아가 떨고 있는 그 몸을 살포시 안아주었다. 옷깃을 힘주어 쥔 유유코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위로해주며, 유카리가 넌지시 유유코에게 말을 건넸다.

 

언제까지 숨길 순 없잖아. 지금은 사실을 말할 때야.”

 

...못 하겠어. 또 똑같은 비극이 반복되고 말 거야.”

 

이대로 두어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건 마찬가지야, 유유코. 최소한 요우무에게 선택의 기회는 줘야하지 않겠어? 정 말하기 힘들다면 내가 대신 이야기하도록 할게. 그래도 괜찮지?”

 

묵묵부답인 유유코의 반응을 긍정으로 알고 유카리는 요우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두 차례. 그 야쿠모 유카리가 신중하게 마음의 준비를 하는 모습에 바짝 긴장한 요우무는 그녀의 말 한 마디, 단어 하나 놓치지 않도록 귀를 기울였다.

 

요우무. 잘 들어두렴. 이것은 네 조부 요우키와도 관련된 일이야. 네가 어렸을 때, 요우키가 나와 유유코에게 밤마다 백옥루에 나타나는 요괴가 있다며 너와 똑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어. 이야기를 들은 난 그것의 정체가 사악한 괴조라고 요우키와 유유코에게 알려주었지. 요우키는 요괴가 명계를 활보하게 둔다면 유유코가 위험해질 거라면서, 그렇게 되기 전에 자기 손으로 괴조를 퇴치하겠다고 했단다. 처음에 유유코는 요우키를 말렸어. 하지만 내가 아는 이츠마덴은 그렇게 강한 요괴도 아니고, 요우키의 실력을 믿고 있던 나는 유유코를 설득해서 요우키의 뜻대로 하게 해주었어. 그렇게 요우키는 반드시 괴조를 베고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백옥루를 떠났는데, 그게 요우키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요우키는 그대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단다. 아마... 이츠마덴에게 당하고 만 것이겠지.”

 

요우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믿겨지지 않는 사실에 충격 받은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고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가슴을 움켜쥔 요우무에게서, 괴로워하는 숨소리와 함께 가래가 끓는 기침소리가 격하게 이어졌다. 부릅뜬 눈으로 유카리를 올려다보며, 억지로 목소리를 짜낸 요우무가 쏘아붙이듯 물었다.

 

분명 제 할아버님은 수행을 위해 출가하셨다고 하시지 않았었나요. 왜 그 사실을 이제야 말씀해 주시는 겁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분의 손녀인 제게...!”

 

유유코의 뜻이었단다. 어린 네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가혹한 진실이었어. 요우키는 요우무 네가 제일 동경하던 스승이자 가족이었잖니.”

 

그런다고 제 마음이 가벼워지진 않습니다. 긴 세월 동안 제가 어떤 마음으로 할아버님을 기다리고, 절망하고, 체념했는지 아십니까. 그것도 모자라 밤마다 나타나는 요괴의 정체가 할아버님의 원수였다니, 그걸 이제야 알게 된 지금 제 기분이 어떤지 아십니까?”

 

그걸 왜 모르겠니, 요우무. 피가 이어지지 않은 나도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이렇게 가슴이 아려오는걸. 난 단 한 순간도 요우키를 잊은 적이 없었단다. 그래서 네게 말할 수 없었던 거야. 네가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너도 망설임 없이 요우키와 같은 선택을 할 테니까.”

 

목멘 소리로 유유코가 요우무를 달래보려 했지만, 요우무에겐 그녀의 말이 그저 비겁한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할아버님 때부터 이어져 온 악연이라면 제 손으로 끊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적어도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단 낫지 않나요?”

 

... 너마저 잃고 싶지 않구나, 요우무.”

 

그 순간 요우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처음으로 유유코가 실망스럽고, 또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어린 자신에게 요우키의 죽음을 숨긴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미숙했던 시절의 자기라면 유일한 혈육의 상실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진실을 숨겨야 할 필요가 있었던가. 필요가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요우무는 방금 유유코가 한 말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요우무를 잃고 싶지 않다는 유유코의 말과 그녀를 바라보는 유유코의 시선 속엔 우려와 불안이 가득했다. 이는 요우무가 틀림없이 괴조에게 당하고 말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걱정이었다. 왜 유유코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것인가. 요우무는 문득 자신의 몸 상태를 자각했다. 병들고 지쳐 이전보다 쇠약해진 몸. 하지만 겨우 그 정도다. 녹슬지 않은 검술 실력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고 끓어오르는 투지 또한 건재했다. 요괴 하나 쯤은 충분히 해치울 자신이 있는 몸, 그런데도 유유코는 멋대로 요우무의 패배를 짐작하고 있었다. 꾸준히 자신을 단련하며 유유코를 위해 일생을 바쳐왔는데도 아직도 자신이 못미덥다는 말인가. 그동안 유유코를 위해 노력하고 헌신해온 자신의 삶이 모두 부정당한 것 같은 좌절감에 요우무의 언성이 높아졌다.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시는 건가요, 유유코님. 제가 그렇게 미덥지 못하신 건가요? 이제는 더 이상 제게 의지하실 수 없다는 건가요? 전 한평생 당신 곁을 지키며 제 가치를 증명해왔는데, 유유코님은 너무나도 간단히 제가 질 것이라 단정 짓고 저한테 얌전히 죽음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는군요. 분명 할아버님도 지금 저와 같은 심정이었겠지요. 그때도 유유코님은 할아버님을 불신하여 그분의 투지를 꺾어버리신 건 아닙니까!”

 

그만.”

 

요우무의 목에 부채를 디밀어 그녀의 말을 자른 유카리가 차갑게 그녀를 쏘아보았다.

 

네가 화내는 이유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행의 도가 지나치구나. 네 충성심은 그 정도니? 주인이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를 드러내다니, 마치 철부지 어린아이 같구나. 이것이 네가 보여주고자 했던 너의 가치였다는 거니?”

 

반박할 수 없는 유카리의 지적에 요우무가 분한 표정으로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질 정도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냉랭한 분위기 속에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말없이 유카리를 노려보던 요우무가 무언가 결심한 듯 부채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그대로 유유코와 유카리를 지나쳐 방의 반대쪽으로 가더니, 둘로부터 등을 돌린 채 옷을 갈아입고 자신의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

 

묻지 않으셔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손으로 괴조를 베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요우키 때는 내가 믿고 유유코를 설득했지만 지금은 달라. 일어나는 것도 힘겨워하는 그 몸으로 뭘 하겠다는 거야? 너 정말...! ”

 

무력으로라도 요우무를 저지하기 위해 유카리가 팔을 치켜든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유유코가 유카리의 팔을 잡아채며 그녀를 저지했다. 유카리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유유코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유유코, 너 이대로 저 아이를 보낼 셈이야? 요우무마저 잃고 싶지 않다며?”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어. 하지만 이대로 두면 요우무는 자기 말대로 고통 속에 점점 죽어갈 뿐이야. 도와주고 싶어도 우리가 요우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할 거라면, 요우무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자. 이번만큼은... 다른 결과가 있을 거라고 믿어보는 거야.”

 

믿다니, 저 몸 상태로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도울 수 없다니, 강하지도 않은 요괴 하나 정도라면 다른 이들에게 퇴치를 요청하는 방법도 있어. 정 안되면 내가 나설 수도 있고.”

 

유카리, 너도 알잖아. 한동안 평화가 계속된 이 환상향에 더 이상 요괴 퇴치를 위해 선뜻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렇다고 네가 나선다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야. 이건 요우무만의 문제고, 또 지금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해. 위험하다는 것은 알아. 다시 돌아오지 못 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그래도 요우무를 믿어주자. ... 이미 요우무를 실망시켜 버리고 말았으니까. 여기서 더 요우무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이랬다 저랬다... 난 너희 둘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 하겠어.”

 

답답하다는 한숨을 내쉬며 유카리가 마지못해 팔을 내렸다. 그 동안 나갈 채비를 끝마친 요우무가 허리에 검을 차고 둘 앞에 섰다. 가지런히 정돈해 묶어 넘긴 머리, 다소 빛이 바래긴 했어도 헤지거나 주름진 곳 하나 없는 제복과 밑창이 닳았지만 새것처럼 광을 내고 있는 구두.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에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관리한, 평소 요우무의 성실한 성격이 느껴지는 말끔한 차림새였다. 몇 년 만일까, 실로 오랜만에 본연의 모습을 갖춘 백옥루의 정원사가 지금 유카리와 유유코 앞에 서 있었다. 방금 전 유유코가 한 말을 들은 덕분인지 요우무의 표정은 아까보다 누그러져 있었다. 또렷하게 뜬 두 눈 안에 강한 결의를 품고서, 유유코를 똑바로 마주한 요우무가 그녀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반드시 녀석을 베고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유유코님.”

 

고개를 끄덕인 유유코가 요우무에게 답했다.

 

다녀오렴, 요우무.”

 

힘차게 장지문을 여닫는 소리가 백옥루에 울려 퍼졌다.

 

-2-

 

이츠마덴을 찾아 요우무는 밤마다 울음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하늘을 날면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비행은 생각보다 소모되는 영력 소모가 커 지금처럼 힘을 조금이라도 아껴야 할 때에 적합하지 않은 데다, 공중에 있으면 검을 휘두를 때 지지할 곳이 없어 온 몸의 힘을 검에 집중시키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요우무는 일격으로 싸움을 결판 지을 셈이었다. 혼신의 일격을 녀석의 급소에 내지른다면 지금의 몸 상태로도 거대한 괴조를 제압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리라. 그렇게 판단한 요우무는 유유코가 말한 정보를 토대로 괴조의 모습을 상상하며 예상 가능한 급소의 위치와 상대의 움직임을 하나씩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드넓은 백옥루의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온 지도 한참이 지났다. 이미 백옥루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 있었고. 어느새 태양은 저물어 명계에 어둑하게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정처 없이 발을 옮기던 요우무의 콧잔등에 톡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빗방울이었다. 톡 톡 몸에 닿는 빗방울이 조금씩 그 수를 늘려가더니, 어느새 추적추적한 가랑비가 되어 온 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젖은 옷이 달라붙으며 한기와 무게가 더해진 몸에 피로가 급속도로 쌓여갔다. 비를 피할 곳이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이곳은 백옥루의 정원 한가운데, 앙상하게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만 드문드문 있는 곳에서 비를 막아줄 수 있는 장소는 전무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발걸음을 돌릴 수는 없는 노릇. 얄궂은 하늘을 향해 쓴웃음을 지으며 가져온 등불에 불을 붙인 요우무는 앞으로 계속 걸음을 이어나갔다.

 

언제까지냐~ 언제까지냐~

 

굵어진 빗줄기가 어느덧 장대비로 변했을 때, 빗방울이 지면을 때리는 소리에 섞여 흐릿하게 익숙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주위의 공기가 요우무를 무겁게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요우무는 곧 칠흑 같은 어둠이 자기 주위를 둘러싸고 있음을 깨달았다. 빗속인데다 밤중이라 눈치 채지 못했었지만 지면에 검은 먹구름이 주변만 겨우 보일 정도로 짙게 내려 앉아 있었다. 요우무의 주위를 완전히 포위한 요운(妖雲), 그 속에서 거슬리는 울음소리가 조금씩 요우무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올 것이 왔구나, 요우무는 곧바로 몸을 숙이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등불을 내려놓은 손이 자연스럽게 누관검으로 향했다. 요우무의 시선은 소리가 들려오는 전방을 주시하고, 만일의 기습에 대비해 그녀의 반신(半身)인 반령이 주위를 맴돌며 사각이 생기지 않도록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요우무의 정면에서 요운이 흩어지며 거대한 괴조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주위를 둘러싼 구름처럼 시커먼 그 형체는 요우무의 키의 3배는 족히 넘는 듯 했다. 괴조가 까마귀의 것과 흡사한 날개를 좌우로 활짝 펼쳤다. 몸집보다 거대한 날개가 펄럭이며 생겨난 풍압이 강한 힘으로 요우무를 덮쳤다. 요우무는 풍압에 날아가지 않도록 다리에 힘을 실어 버티며 검집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팔을 타고 어깨까지 흘러들어오는 묵직한 감각. 기력이 쇠해져서 그런 걸까, 생각보다 버겁게 느껴지는 검의 무게였기에 요우무는 곧바로 신체의 부담을 최소화 할 수 있도록 검의 위치를 고쳐 잡았다. 그와 동시에 괴조의 몸통을 덮은 번쩍거리는 비늘이 요우무의 눈에 들어왔다. 가깝다. 검이 충분히 닿는 요우무의 사정권 내였다. 남은 것은 급소를 찾아 상대가 인식하기도 전에 베어버리는 것 뿐. 우선적으로 녀석의 목을 찾기 위해 요우무는 고개를 치켜들어 괴조의 얼굴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등불 불빛에 괴조의 목과 머리가 희미하게 보였다. 요우무가 이츠마덴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이츠마덴 또한 요우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흉측하게 구부러진 거대한 부리 안쪽은 섬뜩한 톱니이빨이 가득했고 번쩍이는 안광은 먹이를 노리는 짐승의 것 그 자체였다. 단번에 저 머리를 베고 말리라, 결심한 요우무가 도약을 위해 발끝에 힘을 주던 순간이었다. 번쩍, 흑운이 밀려나며 드러난 하늘에서 섬광이 번쩍여, 번갯빛이 괴조의 면상을 등불보다 환하게 비추었다. 선명하게 드러난 괴조와 눈이 마주친 요우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믿기지 않는 것을 본 요우무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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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의 백옥루, 굵은 빗줄기가 세차게 지붕을 때리며 처마를 따라 줄지어 흘러내리는 가운데 유유코가 툇마루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요우무가 떠난 방향을 줄곧 바라보고 있었다. 요우무가 괴조를 퇴치하겠다며 나선지 한나절이 지났거늘, 그때부터 유유코는 줄곧 이 상태였다. 언제 돌아올지, 돌아올 수 있을지 조차 모르는 정원사의 존재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친구의 상태가 걱정된 유카리가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들어가서 좀 쉬는 게 낫지 않겠어? 언제까지 그러고 있으려고.”

 

요우무가 돌아올 때까지.”

 

그렇게 걱정할 거면서 꼭 그 아이를 보내야 했던 거야? 본인이 직접 가는 건 상대가 요우키의 원수라 어쩔 수 없었다 쳐도, 정 불안하면 다른 이를 동행시키는 정도는 가능하잖아.”

 

예전처럼 요우무와 함께 여정을 떠날 동료들은 이젠 더 이상 없는걸.”

 

이번 대의 하쿠레이가 있잖아. 이제 슬슬 교육도 끝나고 제 몫을 할 때가 되었거든. 서포트라면 꼭 인간이 아니어도 되고.”

 

유유코가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소용없을 거야. 유카리... 넌 이츠마덴이라는 괴조를 본 적 있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한 번 정도.”

 

환상향에서는?”

 

한 번도 못 봤어. 백옥루에 나타난 요괴가 이츠마덴이라고 알려주긴 했지만 그건 요우키의 이야기를 듣고 떠올린 거니까.”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 요괴가 있다는 이야기는 기록으로밖에 보지 못했어. 요우키 때도, 요우무 때도, 매일 밤 불길한 소리가 들리거나 정체불명의 그림자가 백옥루에 보였다고 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듣거나 보지 못했어.”

 

둘이 헛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하지만 요우키는 괴조를 퇴치하러 나섰다가 실종되었잖아. 헛것을 보았다고 하기엔 앞뒤가 맞지 않아.”

 

유카리는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이츠마덴은 퇴치법이 명확하고, 그다지 강한 요괴도 아니야. 그리고 내가 들은 이야기 중에 이츠마덴이 직접 인간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소문은 없었어. 그런데 그런 약한 요괴에게 요우키가 당해버렸다는 건 이상하지 않아?”

 

물론 이상하지. 하지만 요우키가 돌아오지 않자 먼저 그렇게 말한 건 유유코 너잖아? 요우키는 괴조에게 잡아먹혔다면서. 확신하듯이 말했잖아.”

 

침묵한 유유코가 몸을 돌려 유카리를 바라보았다. 때맞춰 친 번개의 섬광이 그녀의 얼굴을, 빗물과 섞여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을 선명하게 밝혀주었다. 천천히 열린 유유코의 입에서 떨림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카리, 괴조 이츠마덴 같은 요괴는 존재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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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우무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환각 같은 것에 현혹된 것은 아닌지 세차게 고개를 내젓고 다시 올려다보았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유유코의 말처럼 괴조는 흉측한 부리가 달린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우무가 경악한 까닭은 괴물의 기괴한 생김새 때문이 아니었다. 이보다 더 흉측하게 생긴 요괴도 수도 없이 봐 온 요우무가 고작 사람 형상을 한 새 따위에게 겁먹을 리 없었다. 요우무를 얼어붙게 한 충격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덮쳐온 것이었다. 마주한 괴조의 얼굴에서 익숙한 노인의 얼굴이 보였다. 주름이 가득하지만 위압감이 느껴지는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얼굴. 이는 요우무의 기억 속에 흐릿하게 남은 조부, 콘파쿠 요우키의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언제까지냐…….

 

괴조의 부리가 열리며 낮게 그르렁 거리는 쇳소리가 울렸다. 이것은 명백한 도발이자 비웃음. 코앞에 원수를 두고도 망설임에 검을 휘두르지 못하고 있는 요우무에 대한 괴조의 조롱이었다. 잠시 주저하던 요우무의 팔에 힘이 실렸다. 여기까지 와서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중요한 순간에 망설인 자신에게, 그리고 요우키의 명예를 더럽힌 괴조에게 느낀 분노의 감정이 요우무의 투지를 다시 순식간에 타오르게 만들었다.

 

할아버님을 해친 것도 모자라 이젠 그 분을 욕되게 하고 있구나. 사악한 요괴야, 내가 겁먹을 줄 알았더냐. 검을 거두고 이대로 네게 당할 줄 알았더냐. 더러운 술수를 써서 날 농락하려 할지라도 내 의지는 변하지 않는다! 벤다. 이 자리에서 네 녀석의 목을 베고 대를 이어 내려온 질긴 악연을 매듭짓겠다!”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보다도 한 발 빠르게 검신이 번쩍였다. 격노한 요우무가 쏜살같이 검으로 매끄러운 호를 그리며 자신에게 겁 없이 얼굴을 들이민 괴조의 목을 베었다. 급소를 정확히 노린 치명적인 일격, 흐트러지지도 빗나가지도 않은 매끄러운 공격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괴조의 잘린 목이 땅바닥에 나뒹굴고 목을 잃은 몸통이 선혈을 흩뿌리며 고꾸라지는 것 뿐 ... 일 터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분명 누관검이 목을 가르고 지나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도 이츠마덴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히 서서 가소롭다는 듯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요우무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날개를 베고, 몸통을 베고, 부리를 베고, 또 다시 목을 베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자신의 체력이 뭉텅 깎여 나가고 있었지만 요우무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베어도 베는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요우무가 내지른 검은 마치 허공을 가르는 것처럼, 이츠마덴의 몸뚱이를 그저 통과하기만 할 뿐이었다.

 

약점이 따로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본체를 껍데기로 위장하고 있는 것인지 요우무가 알 방도는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의 약점을 찾을 때까지 베고, 또 베는 것 뿐. 남은 힘을 모조리 실은 요우무의 맹공격이 이어졌다. 누관검이 괴조와 함께 주변 공기를 가르고, 그 틈새에서 생겨난 진공은 또다시 카마이타치의 낫처럼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괴조를 덮쳐든다. 빠져나갈 곳 따위 없는 무수한 칼날의 감옥. 한계에 도달한 몸마디 곳곳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요우무는 오직 정신력 하나만으로 이 악물고 버티며 공격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비참하게도 먼저 무너져 내린 것은 요우무 쪽이었다. 억지로 팔을 휘두르자 검을 쥘 힘이 빠져나간 손에서 검이 미끄러져 바닥에 내리꽂혔다. 지탱할 힘을 잃은 다리가 풀썩 꺾이며 균형을 잃은 그녀의 몸이 물웅덩이에 처박혔다. 조금만 더 싸워달라고 자신의 몸에 필사적으로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힘이 고갈된 그녀의 반신은 그 자리에서 땅을 짚고 상체를 일으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흐릿해지려는 의식을 겨우 잡고 있는 요우무의 앞을 등불이 비추었다. 바닥을 짚고 있는 자신의 두 팔이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누관검조차도 몇 번 휘두르면 지칠 정도로 근육이 거의 사라지고, 피골이 상접하여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와도 같은 앙상한 두 팔. 그 팔 사이에서 한 노인이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살은 축 늘어지고 쭈글쭈글한 주름이 가득하지만 눈에 독기를 품고 분노에 이를 가는 노인의 얼굴, 그것은 요우무 자신의 모습이었다. 언제 이렇게 나약한 모습이 되었단 말인가, 눈앞에 요우키의 원수를 두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초라해진 자신을 보며 요우무는 속으로 탄식했다. 그러나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물웅덩이에 비친 얼굴이 하나 늘었다. 요우무를 비웃고 있는 것이 분명한, 목을 길게 내빼고 그녀를 내려다보는 이츠마덴의 얼굴이었다. 비가 조금씩 그치기 시작했다. 수면에 일렁이던 파문이 잦아들고 거기 비친 상이 선명하게 제 모습을 갖추었을 때, 이츠마덴의 입에서 이전과는 다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냐……. 언제까지 산 채로 썩어가는 삶을 이어갈 것이냐…….

 

괴조의 입에서 형태를 갖추고 튀어나온 온전한 말에 요우무의 눈이 번쩍 뜨였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물웅덩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요우무가 이윽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야 알겠다. 네놈은 나였구나. 내가 만들어낸 요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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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쏟아내며 괴조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유유코를 유카리가 아연실색하며 쳐다보았다. 갑작스런 눈물도 눈물이거니와, 방금 전까지 요우무가 괴조에게 잡아먹히니 마니 하던 유유코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유카리가 의문을 표했다.

 

이츠마덴은 존재하지 않는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 입으로 요우키는 괴조에게 잡아먹혔다며!”

 

“...있지, 유카리. 요우키는 지나칠 정도로 충성스럽고 또 성실했어. 요우무도 그런 요우키의 성격을 쏙 빼닮았고.”

 

하루 이틀 본 사이가 아니니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게 지금 네가 한 말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데.”

 

너도 알다시피 반인반령의 수명은 보통의 인간보다 몇 배는 길어. 하지만 그들도 결국 반은 인간. 망령인 나나 요괴인 너처럼 생로병사의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어. 결국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일련의 과정을 그들은 수백 년에 걸쳐 겪게 되는 거야. 유카리는 몸이 늙고 병들어가는 경험을 해본 적 있어?”

 

요괴는 노쇠(老衰), 노사(老死)도 없으니까, 그런 경험이 있을 리가.”

 

우리같이 늙지 않는 존재는 늙어가는 괴로움을 이해하지 못해. 요우무나 요우키가 그냥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안식을 얻을 수 있었을 거야. 온전한 유령이었다면 애초에 늙어 쇠약해질 일이 없었을 거고. 하지만 이도 저도 아닌 반쪽짜리 존재이기에 둘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공포와 고통을 수십 년 동안 나눠 받게 되었어. 자신보다 사명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그 둘이 자기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음을 깨달았을 때, 그렇게 무의미한 수십 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얌전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둘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자체를 괴로워하며 몸부림치고 있었을 거야.”

 

요우무가 괴조를 찾아 떠난 방향으로 유유코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빗줄기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백옥루의 지평선 너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잠잠하고, 또 조용했다.

 

모든 것은 병들고 늙어가는 자신의 반인 부분을 도려내고 싶어 하는 둘의 사욕(死慾)이 만들어낸 것. 무기력, 불안, 두려움, 집착...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함께 뒤섞이며 탄생한 자살충동이라는 이름의 괴물. 유카리, 이제 알겠어? 왜 내가 우리의 도움이 아무 소용없다고 한 건지. 처음부터 백옥루에 요괴는 존재하지 않았어. 요우키도 요우무도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괴물에 의해 고통 받고 있었던 거야.”

 

유유코 너...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왜 알면서도 내게 말하지 않았어? 일찍 알았다면 너무 늦기 전에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요우키가 백옥루를 떠나도록 두지 않았을 텐데!”

 

처음 요우키를 말리면서 네게도 사실을 말하려 했어. 하지만 유카리 네가 요우키를 믿어보자고 날 설득했을 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이것은 결국 자기 자신과의 싸움과도 같다고. 요우키는 강한 남자니까 요괴퇴치라는 명분을 주면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었어. 하지만 결국 요우키는 돌아오지 않았지. 죽어가는 모습을 내게 보이기 싫었던 걸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걸까? 거기까지는 알 수 없어. 어찌되었건 결국 요우키는 자신이 만들어낸 괴조에게 잡아먹혀서 스스로를 세상에서 지워버렸으니까.”

 

수백 년의 세월 동안 홀로 간직해온 괴로운 진실을 털어놓는 유유코의 어깨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다신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는데... 이젠 요우무가 똑같은 일로 괴로워하고 있어. 유카리, 나는 어쩌면 좋지? 난 요우키 때처럼 또다시 요괴의 소행이라 속이며 요우무가 자기 자신과 싸우게 할 수밖에 없었어. 요우무를 믿어보자고 되뇌고 또 되놰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아. 만약 요우무도 요우키처럼 죽음을 선택하면 어떡하지? 그렇게 되면 나는 요우키와 요우무에게 도대체 어떤 존재인걸까? 힘이 되어주지도, 지켜주지도 못하는 난 둘에게 그저 사명감을 채워주기 위해 존재하는 명분에 불과했다는 걸까? 모르겠어. 이대로 요우무마저 돌아오지 않게 되면 난 누구를 믿고 기대야 할까? 내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버릴 것만 같아서 두려워. 도대체 난 어떡해야 하는 거야…….”

 

요우키, 그리고 요우무의 일생 동안 함께하며 그들을 지켜본 유유코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그래서 자신의 무력함이 더욱 뼈저리게 느껴졌을 것이다. 자신이 뭐라고 어르고 달래든 둘은 그 위로 또한 짐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 그들은 오히려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유유코가 그들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가족처럼 여겨온 사람들이 사명 때문에 자신을 떠나 죽음을 택하려 하니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을까. 늙어가는 고통은 몰라도, 유카리는 친구가 흘리는 눈물에 담긴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카리 또한 지금 당장 슬퍼하는 유유코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유유코를 끌어안고 안심시키며, 함께 요우무의 마음이 꺾이지 않기를 바랄 뿐. 불안하게 꾹 움켜쥔 유유코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유카리는 요우무가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유유코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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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고 노려보는 요우무에게 괴조의 얼굴이 가까워지며 점점 녀석의 이목구비가 뚜렷해졌다. 그제야 요우무는 괴조의 얼굴은 요우키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챘다. 이 얼굴은 늙어버린 요우무 자신의 모습이었다. 자신을 비웃는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보며 요우무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하나씩 짜 맞춰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유유코는 밤마다 벌어지는 이변을 눈치 채지 못했던 걸까? 왜 누관검으론 괴조를 벨 수 없었던 것일까? 괴조의 울음소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의문에 대한 답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엾구나. 주인의 신뢰 하나 사지 못하고 눈앞의 요괴조차 베지 못할 정도로 녹슬고 이 빠진 검이여…….

 

괴조의 입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슬리는 쇳소리 따위 섞이지 않은, 놀라울 정도로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 톱니 같던 이도, 날카로웠던 부리도 괴조의 얼굴이 가까워짐에 따라 조금씩 뭉툭해지고 있었다. 요우무가 진실에 조금씩 다가갈 때마다 괴조의 얼굴은 점점 인간의 형상에 가까워지며 그녀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해갔다.

 

닥쳐라! 유유코님께선 나를 믿고 여기에 보내셨다. 네 녀석이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라면, 그 허상을 베고 유유코님께 돌아갈 것이다!”

 

그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이더냐? 구석에 처박혀 하루하루 숨만 쉬며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더냐?

 

네 녀석을 무찌르고 나면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겠지.”

 

자신의 몸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지 않더냐. 너의 몸은 한계에 도달했다.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는 이상 그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되리라는 것은 이미 수도 없이 보아오지 않았더냐. 인간들의 마지막을 잊었느냐. 꺼지기 시작한 생명의 불꽃은 다시 타오르게 할 수 없음을 잊었느냐.

 

한때 요우무가 알고 지냈던 인간들의 모습이 하나둘 떠올랐다. 레이무, 마리사, 사쿠야, 사나에 ... 모두 지금은 죽고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임종을 지켜본 요우무가 인간의 최후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먼저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호흡, 순환, 소화, 배설, 생명을 유지하는 기능들이 하나씩 작동을 멈추어간다. 마지막 순간엔 판단력을 상실하고, 그야말로 산송장이 되어 점점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진행 시기엔 개인차가 다소 있지만 확실한 것은 한 가지, 한 번 진행되기 시작한 노화를 늦추거나 멈출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 이후론 아무리 애를 써도 오히려 죽음만 앞당길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검을 휘둘러 적을 벤 일이 언제였는지 기억하느냐? 이미 너는 오래전에 쓸모없어졌다. 앞으로도 네 검은 허공만 가르고 네 몸은 지면에 고꾸라질 것이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생충처럼 주인에게 달라붙어 주인의 정신을 갉아먹는 것뿐이다. 왜 그런지 알겠느냐? 네 반쪽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육신을 가졌기에 너는 짐짝이 될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그런 말로 마음이 꺾일 줄 아느냐. 속셈이 무엇이냐! 네가 정녕 내가 만들어낸 괴물이라면 내 앞에 나타난 이유를 말해라!”

 

매일같이 네게 묻지 않았더냐. 언제까지냐고, 언제까지 살아갈 것이냐고 말이다. 내가 괴물이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요괴가 아니다. 멋대로 괴조라고 생각하고 내게 형체를 부여한 건 너 자신이 아니더냐. 나는 네가 스스로를 자책하는 마음이다. 주인에게 가진 죄책감이다. 그리고 죽고 싶어 하는 욕구이다.

 

거울에 비친 것처럼 완전히 요우무와 똑같아진 얼굴이 매섭게 그녀를 쏘아붙였다. 이렇게 간단한 진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끊임없이 요괴의 소행이라 둘러대며 자신의 처지로부터 눈을 돌리려했던 요우무가 한심하다는 듯, 그 얼굴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조부의 원수에 대한 복수, 스스로를 부정하고 어떻게든 주인에게 쓸모 있는 도구임을 보여주려는 허울 좋은 변명이 아니더냐. 하지만 다 부질 없는 짓이다. 네 할아버님은 어땠지? 이제 그가 왜 너를 떠났는지 알겠느냐? 왜 돌아오지 않는지 알겠느냐?

 

요우무가 입을 다물었다. 괴조, 아니 자신의 마음이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기억을 끄집어내고 정곡을 찔렀다. 괴조는 없다. 모든 것은 늙어버린 자기 자신에게 느낀 자책감이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그렇다면 자신과 똑같은 일을 겪고 괴조를 퇴치하러 나선 요우키는 어떻게 된 것인가. 요우키는 끝내 백옥루로 돌아오지 않았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도달했을 때, 요우무의 마음속에서 지금껏 의지해온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네 주인이 모를 거라고 생각했느냐. 이미 알았겠지, 알았으니까 네게 진실을 숨기고 나를 요괴의 소행으로 치부하려는 네 같잖은 변명에 동조한 것이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그 정해진 답을 돌릴 수 없음은 네 주인도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갑작스레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바닥에 꽂힌 누관검이 바람에 흔들려 물웅덩이 위에 찰캉 쓰러져 내렸다. 적을 베기 위해 날카롭게 벼린 검의 날이, 지금은 요우무를 향해 있었다.

 

네겐 아직 긴 시간이 남아 있다. 반쪽짜리이기 때문에 죽지도 못하고 억지로 살아가야 하는 아주 긴 시간이지. 하지만 아직 네겐 선택의 여지가 있지 않느냐. 이 자리에서 인간의 육신을 버리고 온전한 유령이 되거나, 도망쳐서 그 부끄러운 모습을 주인에게서 감추거나. 그러면 너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다신 괴조를 보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선택해라. 이것이야말로 지금 네게 주어진 사명일지니.

 

피폐해진 요우무의 정신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누구보다 강한 존재라 믿었던 요우키조차도 이겨내지 못한 노화의 고통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보다 의심이 앞섰다. 지금보다 몸이 더 약해지면 검을 드는 것조차 힘겨워질 것이다. 넓은 백옥루를 순찰하거나 정비하는 일도 지금 같은 다리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온전한 유령이 된다면 늙고 병드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금처럼 두 자루의 검을 휘두르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정원사로서의 임무는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깨를 짓누르는 사명감이 요우무의 사고를 압박하며 좁혔다. 바들바들 떨리는 요우무의 손이 홀린 것처럼 누관검을 향했다.

 

요우무는 누관검의 날을 목에 가져다 대었다. 살짝만 힘을 주면 육체의 구속에서 풀려나 온전한 유령이 될 터였다. 그동안 살아온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요우무가 자신의 목을 그으려던 그 순간, 주마등의 마지막 장면이 막 요우무의 눈앞에 떠올랐다. 백옥루를 떠나기 직전 유유코가 보였던 서글픈 표정이, 요우무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했던 그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사명이란 말 때문에 잊고 있던 소중한 사람이 뒤늦게 떠오른 요우무의 손에서 누관검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유유코는 요우무가 괴조를 물리치고 돌아오겠다는 말을 믿고 그녀를 보내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요우무는 그 대답을 유유코가 자신의 검술 실력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유유코가 이미 그녀에게 벌어진 이변의 정체를 눈치 채고 있었다면 무사히 다녀오라는 말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유유코는 요우키의 마음이 약해지지 못하게 말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이 일이 요우무 자기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이 될 것임을 알았기에, 유유코는 요우무에게 진실을 숨기고 끝까지 그녀를 붙잡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 유유코가 돌아오라는 말과 함께 요우무의 출정을 허락했다. 이것은 요우무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고 싶다는 유유코의 진심이자 요우무의 마음에 보내는 신뢰. 여기서 목숨을 끊거나 도주하는 것은 그런 유유코의 신뢰를 배반하는 것이 된다. 과거의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사명 같은 것보다 평생을 함께해온 주인의, 동반자의 뜻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임을 왜 이제껏 잊고 있었을까. 눈앞에 유유코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극단적인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을 붙잡아준 유유코의 한마디와 그 말뜻을 떠올린 요우무의 두 눈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요우무가 다시 검을 쥐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칼끝을 겨누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배에 검을 찔러 넣었다. 검이 살을 파고드는 감각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에 고통이 수반되거나 찔린 자리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일은 없었다. 요우무가 자신을 찌른 것은 단검(와키자시)인 백루검. 미혹을 끊어낼 수 있는 또 한 자루의 검이었다.

 

멍청한 녀석, 무슨 짓이냐...!

 

괴로워하는 신음이 괴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비늘로 단단히 감싸져 있던 몸 한가운데에 무언가로 찌른 것 같은 구멍이 나있었다. 찔린 자리를 중심으로 비늘이 후드득 떨어지고, 날개의 깃털이 하나 둘 빠지며 빗속에서 흩날렸다.

 

네 녀석이 선택하라고 말한 어느 것도 그분의 뜻이 아니다. 처음부터 내겐 한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어. 네 녀석을 베고 유유코님에게 돌아간다. 그뿐이다. 너는 내 번뇌의 집합체, 유유코님을 모시는 올바른 길로부터 벗어나게 유혹하는 사악한 마음이다. 그렇다면 널 무찌를 방법은 이것 뿐. 그 쩔쩔매는 모습을 보아하니 내 선택이 옳았나 보군.”

 

소용없는 짓을 ……. 나는 네가 만들어낸 존재다. 날 쓰러뜨린다 해도 네 육신이 병들고 죽어가는 이상 나는 반드시 다시 나타날 것이다. 네가 죽을 때까지 몇 번이고 너를 괴롭힐 것이다!

 

나는 검사이기 이전에 유유코님의 곁을 지키는 자.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유유코님이 결정하신다! 그 분의 뜻이 그러하다면, 이런 추레한 삶이라도 이어가길 바라신다면 나는 그 뜻을 받들겠다. 마지막까지 그 분의 옆에서 함께할 것이다! 할 수 있다면 해 보거라. 내 아무리 쇠약해진다 해도 너 같은 미혹은 몇 번이고 다시 벨 수 있으니!”

 

삶에 집착하는 것 또한 미혹이거늘... 어리석구나. 언젠간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후회? 이 나이에 이런 일로 유유코님을 마음고생하게 만든 것이 후회스러운 일이겠지. 사라져라 괴조여, 내 어두운 미련이여.”

 

요우무가 칼끝을 비틀며 더욱 깊숙이 검을 찔러 넣었다. 일말의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하고 괴조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원한에 가득 차 노려보던 자신의 얼굴도, 주변을 둘러싼 검은 구름도 서서히 흐릿해지더니 이내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빗소리 외에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된 것을 확인한 요우무는 그제야 몸에 찔러 넣었던 백루검을 빼내 검집에 다시 집어넣었다.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치고 언제 그랬냐는 듯 구름이 말끔하게 걷힌 하늘에 아침 해가 화창하게 떠올랐다. 유유코와 유카리는 밤새 같은 자리에 서있었다. 마음속에 한 줄기 희망을 품고서, 하나밖에 없는 백옥루의 정원사를 기다리면서.

 

저 멀리 지평선에 작은 형체가 어른거렸다. 처음엔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었으나, 불안정하게 비틀거리는 그 형체는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차츰 형체의 윤곽이 드러났다. 자신의 키만큼 기다란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하고 있는 은발의 노인이었다. 이윽고 그 옆을 둥실둥실 떠도는 반령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 더 뒤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짓고 있는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사람이 돌아온 것을 본 유유코가 말릴 새도 없이 맨발로 뛰쳐나갔다.

 

유유코와 요우무, 서로 마주한 둘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이 느껴지는 주인의 시선에 요우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승전보인 동시에 앞으로도 그녀와 함께 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대답이었다. 약속을 지킨 요우무를 유유코가 와락 끌어안았다.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그녀를 꼭 안은 유유코는 이내 고개를 묻고 안도의 눈물을 펑펑 흘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품에서 울음을 터트린 유유코를 보며 요우무는 놀란 듯 했으나 이내 어깨에 힘을 빼고 지난 밤 유유코가 그랬던 것처럼 다정하게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유유코를 다독여주며 미소 지은 요우무의 입에서 그녀에게 꼭 전하고 싶었던 한 마디가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다녀왔습니다, 유유코님.”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