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팬픽

Finding Paradise ~ 어느 여름날의 추억

교토대동방학과 2021. 2. 14. 23:07

-Finding Paradise ~ 어느 여름날의 추억-
4차 모티브 팬픽대회 출품작

이른 아침부터 작열하는 태양이 지상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전성기를 맞이한 매미와 풀벌레들조차 우는 것을 포기하고 그늘 속으로 몸을 감출 정도의 열기, 이는 제아무리 빽빽한 대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미혹의 죽림이라 할지라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었다. 높게 드리운 대나무가 만들어낸 나무 사이사이마다 열기와 습기가 가득 들어찬 죽림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찜통과도 같았다.

쪄죽을 듯 한 무더위에 죽림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런 날씨 속에서 허투루 몸을 움직였다간 체력을 평소의 배는 소모하게 될 것이라고 요괴와 들짐승들 모두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리라. 잎사귀를 흔드는 바람 한 점 없어 외부에서 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이 느껴지는 정적인 풍경. 평화 속에서 만물이 한숨 돌리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그 때였다.

스승님! 스승님! 도와주세요~!!”

에이린- 어디 있어? ---.“

초조함 섞인 다급한 외침과 이와 대비되는 느긋하게 늘어지는 목소리. 두 명분의 말소리가 영원정 담장을 타고 흘러나와 죽림에 메아리쳤다. 우당탕 소란을 피우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복도를 뛰어다니는 쪽은 영원정의 달토끼 레이센 우동게인 이나바. 마치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방방마다 살피며 스승의 존재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고풍스럽고 값져 보이는 옷을 바닥에 질질 끌면서 느릿하게 걸어 다니는 쪽은 영원정의 주인 호라이산 카구야. 이쪽은 찾으러 돌아다니는 것도 귀찮다는 표정으로 상대가 알아서 찾아와 주기를 바라며 적당히 같은 이름만 반복해서 부르고 있을 뿐이었다.

복도 양 끝에서 서로의 방향으로 이동하던 레이센과 카구야가 한가운데에서 딱 마주쳤다. 짧은 순간 눈빛을 교환한 둘은 곧 서로 같은 인물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상당히 급해 보이는구나, 이나바. 또 테위가 몹쓸 장난이라도 친 거니?”

그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에요! 빨리 스승님을 모셔오지 못하면 제게아니 영원정에 큰일이 생길 수도 있다구요!”

진정하렴. 나도 마침 에이린에게 용건이 있었으니, 같이 찾아보는 건 어때?”

아까부터 방마다 다 뒤져봤지만 어디에도 안 계셨습니다. 오늘 어디 나가신다는 이야긴 없었으니 분명 영원정 내에 계실 텐데, 공주님은 어디 짐작 가는 장소가 있으신가요?”

그래? 실내에선 찾을 수 없었단 말이지~”

카구야가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가리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몸을 돌려 자신이 지나온 복도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무런 언질도 없이 어딘가로 향하는 카구야의 등 뒤에 쪼르르 따라붙은 레이센이 그녀에게 물었다.

, 역시 공주님. 스승님이 어디 계신지 알고 계시는군요!”

짐작 가는 곳이 하나 있어서 그래. 이나바, 어디 가서 양산 좀 하나 가져오겠니? 오늘 같은 날 햇빛이 몸에 닿는 것은 피하고 싶구나.”

? , 알겠습니다!”

후다닥 양산을 가져온 레이센에게 카구야는 그것을 펼쳐 자신에게 씌우도록 했다. 카구야가 그녀를 데려간 곳은 영원정의 후원, 툇마루에서 내려와 지면에 발을 디딘 카구야는 그대로 산책로를 겸하여 다져진 길을 따라 앞으로 사뿐사뿐 나아갔다.

모래가 아름다운 물결을 그리고 있는 석정(石庭)을 지나 잉어가 헤엄치는 작은 연못을 건넜다. 계속해서 카구야는 줄지어 늘어선 소나무들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갔다. 소나무가 드리운 그늘을 빠져나가자, 둘의 시야 정 가운데에 우뚝 선 한 그루의 나무가 보였다. 담장과 담장이 맞닿는 정원의 가장 끝, 햇빛이 특히나 강렬히 내리쬐고 있는 구석에 주위 수목들과 확연히 다르게 생긴 나무가 짙은 초록빛 잎사귀 무성한 가지를 사방으로 펼치고 있었다.

나무에 가까워질수록 잎사귀에 가려진 흰 꽃잎과 연두색 열매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풍요로운 대지의 축복을 상징하는 듯 한 아름다운 자태에 시선을 빼앗긴 레이센은 잠시 자신의 목적을 망각할 정도였다. 우뚝 멈춰선 레이센이 나무를 감상하기에 여념이 없던 도중,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무 뒤편에서 들려왔다.

어머, 공주님. 그리고 우동게. 여기까지 무슨 일로

그제야 레이센은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벗어나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나무 그늘 아래 둘이 한참을 애타게 찾아다니던 상대, 야고코로 에이린이 텅 빈 물뿌리개를 들고 서 있었다. 나무를 중심으로 축축하게 젖은 주변 흙이 방금 전까지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말해주는 듯 했다.

요즘 에이린이 안 보인다 하면 항상 여기에 와 있다니까. 벌써 몇 년 됐지? 이 나무도 생각보다 빨리 자랐네.”

특별한 방법을 써서 성장을 촉진시켰답니다. 이미 작년부터 수확도 하고 있었는걸요?”

어라스승님 나무도 가꾸셨나요? 공주님은 이미 그걸 알고 계셨고요?”

섭섭해라-. 우동게는 같이 지내면서도 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구나.”

그러게. 어떻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이나 된 일을 모르고 있을까~”

...그건!! 정원일은 제 담당이 아니기도 하고 또 영업이라던가 이변이라던가 이래저래 바쁘다보니- 이 나무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스승님!”

누가 봐도 어색하게 말을 돌리며 나무를 가리키는 레이센을 본 에이린과 카구야가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민망해진 레이센의 얼굴이 금세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것보다 우동게, 내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 온 거 아니니? 공주님도 여기까지 몸소 오신 것을 보면 꽤 급한 일인 것 같네요. 먼저 말씀해 주시겠어요? 우동게는 그 다음에.”

아냐, 아냐. 나는 별로 급하지 않으니까 이나바 이야기부터 먼저 듣도록 하자. 에이린이 없으면 큰일이 날 거라고 소란이란 소란은 다 피우고 다니던걸?”

둘이 동시에 레이센을 쳐다보았다. 뒤늦게 자신이 에이린을 찾아다닌 이유를 상기한 레이센이 움찔 어깨를 움츠리며 귀를 구깃구깃 구기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불안해하는 기색이 느껴지는 레이센의 모습에 어렴풋이 원인을 짐작한 에이린이 웃음을 거두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저어 순호씨가 또 찾아왔는데요......”

한 치도 예상에서 어긋나지 않은 레이센의 대답에 에이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린은 카구야와 레이센을 대동하고 영원정의 복도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대동이라곤 해도 카구야는 멋대로 따라왔을 뿐이고 레이센은 에이린의 등 뒤에 꼬옥 매달려 있을 뿐이었지만 그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여유는 없었다.

그러니까 순호가 불쑥 널 찾아왔고, 너는 차를 내오겠다는 핑계로 그대로 순호를 방치한 채 나를 찾아왔단 말이지.”

방치한 시간이 꽤 되었으니 지금쯤이면 슬슬 화가 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갑자기 달려들어서 와락 끌어안으려 하시잖아요! 살의나 적의와 차원이 다른 공포라구요?!”

그렇다 해도 잘도 순호가 공주님이 계시는 이곳을 마음대로 활개치도록 내버려 두었구나. 정말 네 말대로 큰일이 났으면 어쩌려고 그랬니?”

죄송합니다……

나중에 혼날 각오 하고 있으렴. 공주님, 순호는 달나라의 적입니다. 그녀가 공주님을 상아와 착각하여 이성을 잃고 날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데, 여기선 안전하게 안에 계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괜찮아. 이나바를 보러 온 거라며? 복수는 잠시 멈추겠다는 지난번 약속, 유효한 거지? 그럼 문제없겠지. 어차피 나는 죽지도 않고 또 여차하면 에이린이 지켜줄 테니까.”

죽지 않는다 하여 위험을 즐기는 행위는 삼가 주세요. 불사의 몸이라고 너무 험하게 쓰신다니까요.”

에이린도 참~ 모코우와 싸울 땐 말리지 않았으면서.”

복도를 걸어온 세 사람이 응접실로 통하는 문 앞에 섰다. 레이센의 말대로라면 분명 안에는 순호 혼자만 있어야 할 터. 하지만 얇은 문 너머로 전해지는 옥신각신 하는 소리가 다른 인물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카구야와 레이센을 뒤로 물린 에이린이 안의 상황을 확인하며 천천히 미닫이문을 열어 젖혔다.

사람 말 좀 들으라구~ 가출 청소년도 아니고 이렇게 자꾸 불쑥 사라지면 곤란하단 말야. 오늘도 보고 받고 얼마나 급하게 지옥에서 뛰쳐나왔는지 아니!”

레이센의 우려와 다르게 순호는 탁자 앞에 다소곳이 앉아 멍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끄럽게 떠드는 쪽은 그 앞에 서서 순호의 팔을 잡아 끌고 있는 인물. 순호의 동료이자 지옥을 관리하는 최고 여신, 헤카티아가 언제부터인지 찾아와 말 안 듣는 아이를 타이르는 것처럼 순호에게 잔소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태연하게 적의 본거지에 쳐들어와 일방적인 말다툼을 벌이는 두 사람을 본 에이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순간, 인기척을 느낀 순호가 고개를 홱 돌려 그녀들을 쳐다보았다.

! 레이센~ 후후, 어디 갔었니. ~속 기다리고 있었단다? 이리 오렴. 얼굴을 보고 싶구나. 이왕이면 좀 더 가까이에서후후

히익?! 저는 아무 것도 몰라요, 스승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순호가 눈가에 실웃음을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표정이 더욱 새파랗게 질린 레이센은 에이린의 등 뒤에 쏙 숨어 쭈뼛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 모습에 에이린이 뭐라고 한 마디 하려던 찰나, 에이린보다 한 발 먼저 나선 헤카티아가 순호의 허리를 안아 움직임을 제지했다.

내 말 안 듣고 있었지, 그치! 순호야~ 저 토끼도 지금 무서워하고 있잖아? 이렇게 막 마음대로 들어와서 쓰다듬고 먹이주고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단은 진정하자, ~? 스테이 스테이~”

레이센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가로막으려는 에이린과 순호를 떼어놓으려 하는 헤카티아. 아이들의 싸움을 중재하는 학부모들의 모습 같은 이 우스운 광경은 힘 싸움에 지친 순호가 단념할 때까지 한참을 이어졌다.

후아- 실례가 많았네. 그치~? 요즘 일 때문에 순호를 잘 챙겨주지 못해서 순호가 쓸쓸했나 봐.”

달나라의 적이 이렇게 영원정을 제 집 드나들 듯 불쑥 찾아오면 곤란해요. 본인은 우동게를 보러 온다고는 하지만, 공주의 안전도 있고 하니 쉽게 들여보내기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지 않나요?”

물론 알고는 있지. 하지만 나도 하루 종일 순호를 감시하고 있을 순 없는걸. 그런 건 순호도 싫어할 테고. , 어차피 언젠가 한 번 보기로 했으니 놀러오는 것 정도는 가볍게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싸움을 하려는 목적은 없어요. 제 목적은 오직 하나, 레이센을 보러 오는 것뿐이랍니다.”

그게 곤란하다는 건데. 이나바는 연약해서 스트레스를 너무 받으면 픽 쓰러져 죽을 지도 몰라.”

죽진 않아요!? 속은 좀 쓰리지만……

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달의 도시 인물들과 달의 도시 침략세력 간 회담이 시작되었다. 하나같이 위협적인 힘을 지닌 이들의 화젯거리는 고작 달토끼 하나. 이들을 잘 아는 월인들이 보았다면 기절초풍하고도 남았을 광경, 화제의 중심에 오른 달토끼 본인이 극도의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하는 건 어때? 우리 쪽에서 순호가 보고 싶어할 때 토끼를 빌려가는 건?”

안 됩니다. 우동게는 빌려주고 돌려받는 물건이 아니에요.”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쭉 지켜보기만 할게요. 괜찮을까요?”

본인이 불안해하고 있어요. 스토킹 같은 행위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접근금지라니 너무하잖아. 우리 순호가 토끼를 해치려고 하는 것도 아니구.”

억지에 가까운 상대의 요청을 일일이 쳐내느라 에이린은 진땀을 빼고 있었다. 기분을 상하게 해선 곤란한 상대이나 그렇다고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해 줄 순 없는 노릇이다.

레이센이 순호를 피하는 이유 자체는 분명했다. 그녀는 지금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리라고, 에이린은 생각했다. 순호와 친해졌을 때 곤란해질 자신의 입지, 공주를 모시면서 그녀의 적을 곁에 둔다는 죄책감, 어느 한 쪽을 배신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런 것들이 레이센의 마음을 압박하며 순호가 보내는 호의 자체를 거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곤란하네요. 이쪽도 저쪽도 다 서로의 사정이 있으니.”

양쪽의 입장을 적절히 조율하기 위해 에이린이 이마를 감싸고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저기, 에이린. 그리고 당신들. 내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 들어보지 않을래?”

싱글거리며 말을 꺼낸 카구야에게 자리에 있던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돈된 것을 확인한 카구야는 짧게 숨을 들이쉬곤 당당하게 선언했다.

피서를 가자. 에이린, , 이나바들, 그리고 당신들까지 다 같이.”

주위의 시간이 정지했다. 무슨 말을 한 건지,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모두 하나같이 얼빠진 표정으로 어리둥절해했다. 다들 할 말을 잊은 가운데, 에이린이 진지함이라곤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카구야의 발언을 제일 먼저 받아치며 나섰다.

공주님? 이 상황에서 갑자기 피서라뇨. 이런 상황에서 농담은 조금 자제해 주심이...”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사실, 아까도 에이린에게 날이 너무 더우니까 뭐라도 해달라고 부탁하려던 참이었거든. 흡혈귀 녀석들이 일전에 저택 지하에 바다를 만든 적이 있었지? 우리도 그렇게 하자. 바다, 바다가 좋겠어. 우리도 다 같이 바다로 놀러 가는 거야.”

영원정에 바다를 만들라는 말씀이신가요?”

사방이 온통 대나무여서 감흥이 살지 않을 거야. 호수가 넓고 크니까 비슷하게 분위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이목을 끌지 않게 주변에 결계를 치는 것쯤은 간단하지? 중요한 건 긴장을 풀고 편히 쉴 수 있도록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마련해 주는 거야. 그렇지, 이나바? 네가 매일 일하는 곳에서 휴식의 시간을 가지라고 한들 마음이 편하지도 않을 거고, 오히려 스트레스만 계속 쌓이지 않겠니.”

그렇겠죠.”

내가 기회와 장소를 마련해 줄 테니 그날만큼은 편하게 저들과 어울려 주렴. 너도 좀 쉬면서 말이야. 물론, 당신들도 약속을 해줘야겠어. 이나바한테 친근하게 구는 것 외에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말 것. 전쟁도 복수도 잠시 내려놓고 사람 대 사람으로서 순수하게 즐기는 거야. 더위도 잊고 화친도 도모하는 일석이조의 계획, 일명 파라다이스 비치 계획이지.”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처럼 보여도 카구야의 눈빛은 진지했다. 에이린은 카구야의 의도를 금세 파악했다. 카구야도 레이센이 불안해하는 원인을 알고 있었고 그녀를 짓누르는 의무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의 계획은 영원정의 주인인 자신이 직접 나서 레이센과 순호를 위해 마련해준 공식적인 교류의 장. 비록 카구야 자신의 사리사욕이 담겨있긴 했지만 그런 일처리가 어떤 면에선 카구야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괜찮은 아이디어네. 친목 행사를 열어 전쟁을 멈추는 건 이쪽에서도 오래전부터 해오던 거니까, 문제없어. 난 찬성~ 순호도 그렇지?”

찬성합니다. 말씀하신 것도 약속드리지요. 레이센과 당신들에게 해가 될 짓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말이죠.”

어리둥절해하던 상대도 카구야의 말을 듣더니 순순히 그녀의 제안을 납득하고 받아 주었다. 겨우 타협점을 찾았으니 그 뒤는 에이린의 일이었다. 에이린은 앉은 자리에서 급조한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정교하게 카구야의 아이디어에 살을 붙여 계획을 짜내 순호 일행에게 전달했다. 일정 조율까지 다 마친 뒤, 행사 일정에 대해 모두가 납득함으로써 그들의 대화는 순탄하게 매듭지어졌다.

일주일 뒤라, 이쪽에서도 준비해야 할 게 많겠네. 순호는 피서라는 개념도 생소할 테니까. 오늘은 실례가 많았어.”

헤카티아가 청한 악수에 응한 에이린이 그 말에 답했다..

무력 사용 없이 평화적으로 일이 해결된다면 이쪽도 환영입니다. 그리고 다음부턴 방문 전에 미리 이쪽에 말을 해주시면 좋겠네요. 순호와 만나기 전 저 아이의 긴장을 덜어줄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노력해 봐야지. 순호도 아끼는 토끼를 위한 일이라고 하면 이해해 줄 거야. 당신이 그 유명한 달의 두뇌지? 고생이 많아. 순호를 계속 막아선 것도, 우리의 계획을 망친 것도, 일전의 탄막 페스티벌의 수습도 모두 당신이 해낸 일이라며? 이번에도 그쪽의 공주의 아이디어를 곧바로 구체적인 계획으로 발전시켰잖아. 대단해, 대단해~”

이번 일은 순전히 공주님 덕이죠. 저는 공주님을 거들어 드렸을 뿐. 예전의 일들이라면 더 큰 재앙으로 번지는 사태를 막기 위해 할 일을 다 한 것뿐입니다.”

내 부하들도 이렇게 유능했으면 좋을 텐데~ 예전엔 주변에 유능한 인재들이 꽤 많았는데 어느 샌가 하나 둘 다 없어지고 없더라구. 다들 권력에만 눈이 멀어서 먼 곳을 보는 눈이 부족하단 말이지.”

안타까운 일이네요.”

그래서 말인데, 물어보고 싶은 게 있거든.”

스카웃 제의인가요? 그런 거라면 곤란한데요.”

아니. 혹시 당신, 어디서 나 본 적 없어?”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슬며시 흘겨보는 헤카티아의 시선이 싸늘하게 내리꽂혔지만, 에이린은 전혀 놀라거나 긴장하지 않고 태연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글쎄요, 혹시 모르죠. 순호를 막는 과정에서 당신의 눈에 띄었을 지도요.”

그런 거 말고. 훨씬 더 이전에. 당신은 왠지 내가 아는 녀석과 꼭 닮아 있거든.”

한 번 만난 사람은 절대 잊지 않는걸요. 만난 적 있었다면 이쪽이 먼저 기억해냈겠죠.”

무언가 캐내려 하는 것 같던 헤카티아였으나 에이린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그녀는 질문을 더 잇지 못했다. 때마침 레이센과 작별 인사를 가진 순호가 헤카티아에게 돌아왔기 때문에 헤카티아는 마지못해 질문을 멈추고 잡았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 됐어. 하도 오래 살다 보니 착각한 것이겠지. 그럼 쉬는 날 보자구용. 즐거운 시간 기대하고 있을게~.”

순호 일행이 돌아간 영원정에 다시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다. 카구야는 방으로 돌아가 분재를 다듬고, 테위와 토끼들은 그늘에 늘어져 있으며, 레이센은 순호를 방치한 벌로 복도 청소를 명받아 행했다. 모두가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 가운데 에이린은 아침에 자신이 물주던 나무로 돌아와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파라다이스 비치 계획, 공주가 말한 계획의 이름과 함께 에이린은 조금 전 헤카티아가 자신에게 던진 질문을 떠올렸다.

당신도 눈치 채기 시작한 것일까. 낙원이라... 정말, 얄궂은 운명이네.”

나무에 기대 눈을 감고 잠든 것처럼 생각에 잠긴 에이린의 입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말이 흘러나왔지만 곧 불어온 한줄기 바람에 의해 묻혀버리고 말았다.

-2-

일주일 후 파라다이스 비치 계획 실행일, 후끈 달아오른 지상의 열기에 안개가 전부 걷힌 안개의 호수 표면은 평소보다 더욱 반짝거리며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아쿠아마린 빛깔로 물들어 드넓게 펼쳐진 호수의 모습, 이는 가히 바다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풍경이었다. 조금만 자세히 내다보면 바로 호수 건너편 육지가 보이는 것이 흠이지만 육지 한가운데 위치한 환상향에서 이보다 더 물이 많은 곳이 어디 있으랴. 적어도 바다로 놀러 온 느낌을 내기엔 부족함 없는 환경이 갖추어졌으니 이 정도의 옥의 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정오가 얼마 남지 않은 오전이었다. 요괴의 산으로부터 물이 유입되는 강의 하구, 하얀 모래톱이 넓게 펼쳐진 장소에 달의 침략세력들과 영원정 일원들이 한데 집결했다. 양쪽 모두 이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만반의 준비를 갖춘 모습이었다.

모래톱 한편에 화려한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우마차를 개조해 만든 카구야 전용 정자는 햇빛을 차단하기 위한 대나무발부터 운치를 돋우기 위한 풍경까지 카구야를 위한 모든 것이 완비되어 있었다. 카구야는 그 안에 오도카니 앉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옷차림으로 흐뭇하게 호수를 내다보는 중이었다. 바람마저 미지근하고 끈적한 날이었지만 정자 내부는 카구야의 능력으로 일정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도록 되어 있어 본인은 땀 한 방울 흘리는 일 없이 쾌적해 보였다.

정자의 옆에선 에이린과 레이센, 테위 셋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파라솔과 돗자리 등을 설치하고 마무리로 홍마관에서 빌려온 그릴을 가져다 놓으니 꽤 그럴싸하게 해수욕장 분위기가 느껴졌다.

스승님, 이 계획은 공주님께서 제안한 것이 맞죠?”

땀을 뻘뻘 흘리며 식재료가 든 상자를 옮기던 레이센이 에이린에게 물었다. 카구야가 직접 골라준 화려한 프릴이 주렁주렁 달린 비키니를 입은 레이센은 덥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랬지.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주위를 둘러보며 점검을 끝낸 에이린이 레이센을 쳐다보았다. 에이린은 심플한 검은색 탱키니 위에 평소 의상 디자인을 본떠서 만든 적-청 배합의 파레오와 백색 로브를 걸친 모습이었다. 노출이 너무 과하지 않으면서 세련미가 느껴지는 디자인이었다. 이는 카구야가 에이린이 분위기에 어울려 주지 않으면 이나바가 긴장을 풀 수 있겠어?’라며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차려 입은 것. 의상의 배색과 조합 역시 카구야의 안목이 작용한 것이었다. 카구야 본인이 만족한 듯 하니 결과적으로 에이린은 이런 수영복 차림에 딱히 큰 불만은 없었다.

공주님은 옷도 그대로 입고 오시고, 저 안에서 나오실 생각이 없으신 것 같아서요. 아니면 설마 저 복장 그대로 물에 들어가시려는 생각은 아니신 거죠?”

저 복장으로 물에 들어가실 리 없잖니. 아마 식사 때만 잠깐 나오실 거야. 어제 여쭤보니 머리가 젖어서 달라붙는 게 싫다고 하시던걸. 덧붙여 귀한 옷이 모래투성이가 되는 것도 별로라고 하셨어.”

그럼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지 않나요?”

공주님이 원하신 건 피서지 물놀이가 아니니까. 즐거운 추억거리를 만들면서 더위를 물리고 싶으셨던 거란다. 그리고 이렇게 다 같이 놀러 나온 건 우동게, 너를 위해서이기도 해. 너도 언제까지 순호를 피해 다닐 수만은 없잖니? 오늘만큼은 눈치 보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편히 순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녀와 시간을 보내주렴. 일은 그만 거들어도 되니, 너도 휴가를 좀 즐기려무나.”

으음, 말처럼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노력해 볼게요. 스승님도 함께 하실 건가요?”

나는 공주님을 챙겨 드려야지. 그리고 바다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어서 해수욕 분위기를 즐길 수는 없을 것 같네. 괜히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으니 나는 구경만 하도록 할게.”

씁쓸하게 웃으며 말하는 에이린의 말에 레이센이 귀를 쫑긋거리며 반응했다.

바다를 싫어하셨어요?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인걸요.”

싫어하는 것까진 아니란다. 좋아하지 않을 뿐이지. 어디까지나 지상의 바다 한정이야. 고요한 달의 바다는 좋아한단다.”

레이센은 입술에 손가락을 얹으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했다. 스승이 바다를 싫어하는 정확한 이유에 대해 나름대로 추측 해보려는 그녀의 시도였다.

지상의 바다는 달의 바다에 비하면 더러움이 가득하긴 하죠. 시시각각 요란스럽게 변화하고 요동치는 것도 큰 차이점이고요. 그런 어수선함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거죠?”

글쎄- 그냥 좋지 않은 기억이 있어서 그렇단다. 그보다 우동게, 저쪽은 이미 세팅이 끝난 것 같구나. 우리 쪽에서 필요한 건 다 챙겨오겠다고 했는데 저렇게 성대하게 준비 해올 줄은 몰랐는걸.”

어라그러게 말이에요. 순호씨는 몰라도 헤카티아씨는 진심인 모양이에요.”

어색하게 웃으며 레이센이 에이린이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았다. 카구야의 정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새하얀 대리석 기둥 4개가 푸른색 반구형 지붕을 떠받치고 서 있었다. 마치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듯 기둥을 휘감고 자란 포도 넝쿨이 무성하게 그늘을 드리운 이국적인 정자, 그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에 순호 일행이 나란히 둘러앉아 바쁘게 움직이는 영원정 일행을 구경하고 있었다.

순호는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한 갈래로 묶어 넘기고선 트임이 두드러진 차이나드레스 풍의 수영복 차림으로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헤카티아는 화려한 붉은 원색 모노키니 위에 ‘Welcome Beach’라고 적혀진 개성 넘치는 가디건을 걸치고 선글라스와 금목걸이로 액센트를 더한 채였고, 그 옆의 꼬마 요정은 성조기 무늬 래쉬가드 차림이었다. 하나같이 개성이 넘치는 조합, 상식을 초월한 패션쇼를 벌이고 있는 이들의 코디를 주도한 게 누구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명백한 것이었다.

널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구나. 가서 어울려 주는 건 어떠니? 점심 식사까지 아직 시간도 좀 있으니 그때까지 자유롭게 시간 보내다 오렴.”

제가 자리를 비워도 괜찮으시겠어요?”

더 시킬 일도 없는걸. 있더라도 테위한테 부탁 하거나 내가 처리하면 되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레이센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에이린이 편안한 어조로 말했다.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레이센은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순호 일행 쪽으로 다가갔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었으니 남은 건 이나바의 몫이네. 그렇지?”

대나무 발을 걷고 몸을 내민 카구야가 양쪽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레이센이 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 자신을 신경 쓰지 않도록 일부러 그녀를 배려한 것 같았다.

부담만 주지 않으면 상대가 누가 되었든 주눅 들지 않는 당돌한 아이이니 잘 해낼 거예요. 그 안은 부족한 것 없으신가요?”

에이린도 이젠 좀 쉬어야지.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 다 하려다가 열사병이라도 걸릴라.”

전부 혼자는 아니죠. 요정이나 요괴들의 간섭 받는 일 없이 이곳에 전세 낼 수 있었던 건 공주님의 힘 덕분인걸요. 모두의 옷을 골라주신 것도 공주님이었고요.”

나 혼자만 편하게 즐겨선 피서의 의미가 없는걸. 에이린도 이나바들도 다 같이 즐기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

후후, 배려에 감사드린답니다. 앞장서서 주위를 돌볼 줄도 알게 되시고, 지상에 온 뒤로 공주님도 많이 성장하셨군요.”

무슨 의미야.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구.”

카구야가 볼멘소리를 내던 그 때, 첨벙 하는 물소리가 청명하게 두 사람의 귓전을 때리고 지나갔다. 뒤이어 깔깔거리는 헤카티아의 웃음소리와 언성을 높인 레이센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저쪽에서 먼저 일정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호수에 주저앉은 레이센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적신 채 바락바락 성을 내는 모습으로 보아하니 저쪽에서도 짓궂은 장난에 당해버린 것 같았다. 순호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으로 레이센을 일으켜주려 했지만, 곧바로 손으로 물을 마구 끼얹으며 협공하는 지옥의 2인조에 의해 순호도 머리끝까지 물을 뒤집어 써버리고 말았다. 그 뒤 열이 머리끝까지 오른 순호와 레이센이 합심해 역공을 시작하고, 그 사이에 테위가 난입하며 상황은 아수라장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물을 끼얹고 나동그라지며 본격적인 물놀이가 시작되었다.

걱정할 필요도 없이 이나바는 잘 해주고 있네. 그렇지, 에이린?”

… …

에이린?”

카구야가 묵묵부답인 에이린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멍하니 서서 물놀이를 즐기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렬한 햇빛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시선을 빼앗긴 에이린의 얼굴은 즐거운 것처럼 보이기도 슬픈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아련한 인상이었다.

에이린, 듣고 있어?”

?! , , 공주님! 죄송하지만 뭐라고 하셨는지 듣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목청을 돋운 카구야의 부름에 화들짝 놀란 에이린이 허둥지둥 몸을 돌렸다.

이나바들이 부러운 거라면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가서 함께 놀아도 되는데.”

아뇨, 그런 이유는 아니랍니다. 그냥 저들을 보고 있자니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추억에 잠겨버리고 말았네요.”

무슨 추억을 떠올린 걸까나. 내가 기억하는 에이린은 항상 진중한 모습이었는데, 에이린도 저렇게 요란하게 웃고 떠들던 시절이 있었나 봐?”

저 정도로 요란하진 않았지만, 철없고 과격하던 시기는 있었죠. 아직 공주님을 모시지 않던 시절, 달의 도시가 생기기 훨씬도 전의 일이랍니다.”

내가 모르는 에이린의 모습이라니 궁금해졌어. 그 옛날 추억이라는 거 말해주면 안 돼?”

안 돼요, 공주님. 말씀드리기 부끄러운 것들도 있는걸요.”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는걸? 언제나 완벽한 에이린의 흑역사라니, 재밌을 것 같아.”

타인의 과거를 가십거리로 삼으시면 안 돼요, 공주님. 곧 점심시간이고 뒤이어 예정된 일정이 진행되니 대신 이쪽을 즐겨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카구야가 뾰로통 볼을 부풀리며 졸라 보았지만 에이린은 그저 싱긋 웃으며 대답을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조르다 지친 카구야는 물어보기를 포기하고 다시 정자 안으로 쏙 들어갔다. 이런이런-하며 고개를 내저은 에이린은 다시 호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이린의 눈앞에 현실의 풍경과 겹쳐 과거의 풍경이 떠오르고 있었다. 푸른 바다 위에 엉성하게 돛을 휘날리는 배들이 둥실 거리며 대열을 형성하며 떠 있었다. 배마다 가득 들어찬 인간들이 육지를 향해 일제히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와 동시에 육지에서도, 해변을 가득 메운 인간의 무리가 바다를 향해 절을 올리는 것이 보였다.

인간들의 조아린 고개가 향하는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 후광마저 느껴지는, 주위 인간들과 확연히 다른 신성한 분위기의 존재들. 그들은 바로 고댓적부터 존재해오던 신들이었다. 이자나기 부부, 아마테라스 남매같이 익숙한 얼굴들부터 이국의 신들까지, 각양각색의 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인간들의 환호 속에 하나씩 승선하고 있었다.

배에 올라탄 인물들 중 선미에 올라선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단단히 전신을 무장하고 눈에서 투지가 불타오르는 기 세 보이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다름아닌 과거의 에이린, 이젠 변해버린 그녀의 옛날 모습이었다. 지금과 다른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배 위에서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환한 얼굴은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부풀어 있었다.

이윽고 인간들의 배웅을 받으며 배가 하나 둘 육지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한껏 분위기에 취해있던 과거의 자신이 출항이 시작되자 일행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잔뜩 들떠 있는 그녀가 말을 거는 사람은 다름 아닌 헤카티아. 그녀와 스스럼없이 즐거운 듯 이야기 나누는 자신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배는 점점 작아져 지평선 너머로 흐릿하게 사라져 버렸다. 배가 사라짐과 함께 해변을 가득 메운 인간도, 에메랄드 빛 바다도 함께 안개처럼 에이린의 눈앞에서 흩어졌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주위 풍경은 다시 물놀이가 한창인 안개의 호수로 돌아와 있었다. 돌아온 풍경의 중심에서 헤카티아가 레이센을 물귀신처럼 뒤에서 와락 덮치는 것이 보였다. 에이린이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오랜 친구 사이처럼 꺄-- 웃고 떠드는 그들에게서, 얼핏 회상으로 지나간 옛 자신의 모습을 본 것만 같았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옛 기억과 함께 줄곧 깊숙이 묻어둔 줄로만 알았던 그 시절의 감정들이 에이린의 머릿속에서 마치 엊그제의 일처럼 하나씩 떠오르고 있었다.

한바탕 즐거운 자유시간을 보내고, 점심식사와 짤막한 휴식시간을 가진 일행 모두가 모래톱 한복판에 모였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석고가루로 그려진 커다란 사각형의 안쪽. 사각형의 가운데엔 쇠기둥에 걸린 그물이 열풍에 연약하게 출렁거리며 영원정 일행과 순호 일행의 사이를 국경처럼 가로지르고 있었다.

사람 머리만 한 공을 옆구리에 끼운 에이린이 한 걸음 나서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오늘의 주요 이벤트인 비치발리볼 친선 시합을 진행하겠습니다. 시간 관계상 1세트 단판승부로, 21점을 먼저 내는 쪽이 승리입니다. 룰은 사전에 전달했으니 진행 및 판정에 대해서는 모두 숙지하고 있죠?”

물론~ 순호한테는 제대로 설명해 놓았다구. 피스쨩은 아직 이해 못한 것 같지만, 어차피 2 2경기니까 상관없겠지?”

그럼 그쪽에선 두 분이 출전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영원정 쪽에선? 누가 나설 거야?”

, 저와 테위가 나설 거예요. 스승님은 심판을 보셔야하고 공주님은 몸을 쓰는 게 싫다고 하셨으니까요.”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있던 레이센이 헤카티아의 물음에 에이린 대신 답하였다. 이걸로 양쪽의 엔트리는 모두 정해진 셈이었다.

예상한 멤버들이네. 그런데 이기면 그냥 그걸로 끝인 거야? 상품 같은 거 없어?”

에에즐기자고 하는 친선경기인데 굳이 상품이 필요한 걸까요? 그 전에 저희가 상품을 준비하고 저희가 이기면 결국 아무 의미 없는 본전이 되는걸요.”

얘는~ 그래야 동기부여가 되지. 긴장감이 없으면 재미있는 승부가 되지 않는다구? 그래, 이런 건 어떨까? 지는 쪽은 이기는 쪽이 말하는 거 한 가지를 들어주기로.”

소원 들어주기 입니까. 스승님이 결정하실 일이지만 우선 물어보고 싶네요. 무엇을 시키시려고요?”

심플하게 다음번엔 우리 작전에 끼어들어 훼방 놓지 않는 거라던가?”

될 리가 없잖아요, 그런 거!”

좋네요, 받아들이도록 하죠.”

스승님!?!?”

레이센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기겁했다. 은근슬쩍 저쪽에서 어마어마한 제안을 걸어왔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에이린과 카구야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그럼 이쪽에서 이길 경우 당분간 달의 도시를 건드는 일은 자제해주시죠. 당분간이라 함은, 우동게가 살아 있는 동안으로? 순호와 당신이 달에 끼칠 수 있는 잠재적 위협을 고려했을 때 이 정도는 걸어야 수지가 맞겠네요.”

좋아, 받아들이겠어. 이래야 게임이 되지.”

어머나, 어머나~ 달나라의 운명이 이나바들의 어깨에 달렸네. 힘내야겠어.”

힘내야겠어-가 아니라구요!? 왜 평범한 스포츠 경기를 외교전쟁으로 만드시는 건데요!”

나와 공주님 모두 우동게를 믿고 있는걸. 우동게는 이미 탄막놀이라는 스포츠로 저 둘을 이기지 않았니? 하지만 만에 하나 우동게가 져버린다면... 우동게는 달나라에 용서받지 못할 죄를 하나 더 저지른 죄인이 되어버리고 말겠지. 너무 신경 쓰지는 말렴? 지면 전부 내가 책임지면 될 일이니까. 모두 우동게에게 실망하게 되겠지만.”

신경 안 쓸 수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 우선 연습 경기를 진행하겠습니다. 양쪽 선수 자리로.”

스승니이이이임~!!!”

죽상이 되어 항변하는 레이센의 말을 끊은 에이린이 그녀에게 공을 넘겨주고 코트 밖으로 물러났다. 애써 현실을 부정하는 느낌으로, 혹시 이 모든 게 자신을 놀리기 위해 짜고 치는 장난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레이센은 네트 반대쪽을 흘끗 살펴보았다.

조만간 달에 피바람이 불어 닥치겠네, 그렇지 순호야?”

불구대천의 원수 상아여. 보고 있는가. 이 다음은 네 차례가 될 터이니.”

어라, 둘 다 진심? 하는 생각에 그 자리에서 하얗게 얼어붙은 레이센. 아무리 봐도 그냥 공놀이에 임하는 자세라고 생각되지 않는, 전의를 불태우는 둘의 모습에 레이센의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겁먹지 마, 레이센. 넌 군인이잖아. 이 경기는 신체 능력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육탄전. 한평생 몸을 쓴 적 없는 녀석들을 상대로는 네가 더 유리하다고.”

테위 … …

있는 힘껏 서브를 날려 기선제압 해버리라구. 모두 레이센만 믿고 있으니까.”

등을 두드려주며 엄지를 내밀어보인 테위가 레이센의 앞에 서서 수비 자세를 취했다. 왜소한 몸집의 테위였지만 레이센에겐 지금 이 순간만큼 그녀의 등이 넓어 보였던 적이 없었다.

그래, 신체 능력이라면 내가 더 유리할 지도 몰라. 고마워 테위. 열심히 해볼게!”

연습 경기, 시작!”

힘찬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지고, 용기를 낸 레이센이 비장한 표정으로 엔드라인 바깥에 섰다. 튕겨 올린 공과 함께 힘차게 솟아 오른 레이센은 자신의 힘을 가득 담은 손바닥으로 공을 내리쳤다. 힘차게 날린 서브가 네트를 넘어가고, 그 직후

-!!!-

레이센의 동체시력으로도 따라잡지 못한 무언가가 레이센의 머리 옆을 스치고 날아가 지면에 내리꽂혔다. 잘려나간 머리카락 몇 가닥이 나풀나풀 흩날리며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망가진 목각인형처럼 고개를 천천히 돌린 레이센이 소리가 난 지점을 확인하자, 움푹 패인 모래구덩이에 방금 전 그녀가 날린 공이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아웃. 연습게임이었으니 점수는 없습니다.”

아깝네~ 힘 조절을 좀 해야겠어.”

아깝네~라니, 이거 1점이고 뭐고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스승님!”

후후... 괜찮아, 우동게.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저 공은 수소폭탄이 직격해도 터지지 않도록 내가 특수 제작한 것이니까.”

공이 터지기 전에 제 머리가 터질 뻔 했는데요!?”

룰을 추가해야겠네. 상대에게 직접 데미지를 입히면 실점이라는 걸로. 그쪽도 불만은 없으시죠?”

“OK~”

지금 룰이 문제가 아니라테위!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테위?”

다급하게 고개 돌려 바라본 코트 안쪽에 테위는 없었다. 그녀는 어느새 카구야 옆에 늘어져, 부채를 파닥거리며 항의하는 레이센을 마치 남의 일인 것 마냥 구경하고 있었다.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장수의 비결 중 하나, 그것은 위험한 곳에 스스로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이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달의 운명을 건 싸움이라고?”

나는 지상의 토끼니까. 달토끼가 힘을 내는 게 맞다고 봐.”

저저저저거!!”

“21 싸움이 되어버렸네. 그래서 이길 수 있겠어? 미리 항복할 거라면 받아줄게.”

레이센이 갈팡질팡하며 에이린과 헤카티아 양쪽을 번갈아 살폈다.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에게 발버둥 칠 것이냐, 모든 걸 포기하고 스승에게 뒷일을 맡길 것이냐, 두 가지 선택지가 그녀에게 주어져 있었지만 어느 쪽도 선택하기 힘든 것이었다. 차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레이센이 혼란스러워 하자, 그 모습을 본 에이린이 그녀에게 다가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어떻게 할 거니, 우동게. 기권하고 싶다면 기권해도 좋아.”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달의 도시가 위험에 빠지게 되잖아요.”

그렇다고 진짜로 널 원망하진 않을 거란다. 저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나니까, 내가 책임질 일이지. 또 내가 잠깐 눈감아준 정도로 곧바로 몰락할 달의 도시가 아니잖니? 그곳을 지키는 이들 또한 내 제자들이라는 걸 잊지 말렴. 그러니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우리는 네 탓을 하지 않을게.”

안심하고 도망쳐도 된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우리가 네 등을 떠민 거나 마찬가지잖니. 공주님도 이해해 주실 거야. 그래서, 네 마음은 기권하는 쪽으로 굳어진 거니?”

레이센은 입술을 꾹 물고 말이 없었다. 스스로 언급한 도망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다짐을 일깨워주며 꺾여버린 의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다신 현실부터 도망치지 않겠다는 다짐, 영원정에 와서 수도 없이 되새긴 자신과의 맹세가 레이센을 물러설 수 없게 만들었다. 다짐을 떠올릴수록 조금씩 그녀 안에서 용기가 솟아났다. 점차 후들거리던 몸의 떨림이 뚝 가라앉았다. 천천히 심호흡을 마치고, 레이센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에이린에게 대답했다.

아뇨, 이대로 싸우겠습니다.”

테위도 전의를 상실했는데 저 둘을 상대할 수 있겠니?”

공이 몸에 맞으면 상대의 실점이라는 룰이 추가되었죠. 어떻게든 공을 눈으로 따라잡는 건 가능할 듯 하니 몸으로 제대로 막아내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몰라요. 실낱같은 가능성이지만 뭐라도 해봐야죠.”

살상 능력이 없는 공이라지만 아까 같은 속도를 직격으로 맞으면 몸이 성하지 못 할 거야. 우리가 무리하라고 강요하진 않는단다, 우동게.”

하하두 번 다시 도망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한 걸요. 지금처럼 제 어깨에 걸린 것이 많은 상황에선 더더욱. 단련된 몸이니 그리 쉽게 망가지진 않을 겁니다. 만약 다치게 되면 스승님만 믿고 있을게요.”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이는 레이센을 에이린은 대견스럽게 바라보았다. 모두를 위해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는 레이센에게선 이전의 나약하고 자기중심적인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카구야처럼 레이센도 지상에 온 뒤로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했던 것이다. 그녀들에게서 느껴진 변화는 에이린에게 실로 감명 깊은 일로 다가왔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레이센을 보는 에이린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레이센이 공을 주워 들고 코트로 돌아가려 했다. 비록 긴장으로 몸이 뻣뻣이 굳어있긴 하지만 굳게 각오한 그녀의 얼굴에선 두려움이나 공포는 찾아볼 수 없었다. 레이센의 발이 엔드라인을 넘어 코트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직전에 에이린이 레이센의 어깨를 붙잡으며 멈춰 세우더니,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부터 내가 얘기하는 거 잘 들으렴, 우동게. 네 몸을 희생하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테니.”

레이센의 귓가에 소근 거리며 헤카티아 일행의 시야가 닿지 않는 뒤쪽에서 에이린이 무언가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처음엔 영문 모를 소리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레이센이었으나, 에이린이 전해준 물건과 함께 설명을 다 듣고 난 그녀는 곧 모든 걸 다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회의가 꽤 길었네. 이러다 해가 넘어가겠어. 그럼 바로 본 게임으로 넘어갈까~? 걱정하지 마, 순식간에 끝내줄 테니.”

자신만만하게 웃는 헤카티아의 선언을 뒤로 하고 휘슬소리와 함께 본 게임이 시작되었다. 곧바로 힘차게 레이센이 공을 날려 헤카티아가 아닌 앞쪽의 순호를 향해 서브를 보냈다.

룰에 익숙하지 않은 순호를 노릴 셈이었구나? 하지만 우리의 작전은 이미 정해져 있었거든!”

처음으로 순호가 움직였다. 예상보다 훨씬 민첩한 몸놀림으로 서브를 받아 그 위력을 줄이는데 성공한 순호는 곧바로 헤카티아 쪽으로 공을 높게 띄워서 전달했다. 곧바로 코트 안에 정확히 내리꽂히는 헤카티아의 강 스파이크. 이 모든 것이 서브를 보내고 5초도 안 되어 일어난 일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연계 공격에 레이센이 제자리에서 한 걸음도 떼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판정. 순호 팀 득점!”

순호에겐 미리 공을 받아 높게 전달만 해달라고 일러뒀지. 덧붙여 순호는 맨손으로 사람을 형체도 안 남게 박살낼 정도로 강하다구? 어느 쪽으로 공을 보내도 소용없을 거야. 우리의 팀워크는 너 혼자 감당할 수준이 아니란다, 불쌍한 토끼야.”

이후 일방적인 순호-헤카티아 조합의 유린이 이어졌다. 가뜩이나 넓은 코트를 홀로 방어해야 하는 레이센은 헤카티아라는 창과 순호라는 방패를 뚫지 못하고, 무섭게 내리꽂히는 공의 폭격 속에서 꿈쩍도 못한 채 실점만 거듭할 뿐이었다.

어느덧 스코어가 0 20이 되었다. 매치 포인트, 앞으로 단 1점만 내면 순호 팀이 승리하는 상황. 서브를 제외하곤 단 한 번도 공을 건드린 적 없는 레이센에게 헤카티아가 비아냥거렸다.

너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시시하잖아. 달을 걸고 하는 싸움이라고? 이렇게 무력해도 되는 거야?”

역시 안 되겠어요. 이길 수 없어, 이건 너무 불공평한 싸움이에요! 21로 불리하게 시작한 것도 모자라 힘의 사용에도 제한이 없는 경기라니!”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는 거람.”

스승님께 들었어요. 헤카티아씨는 마술을 써서 공에 힘을 실어 보내고 있는 것이라고! 그럼 속임수나 다름없지 않나요. 룰 위반 아닌가요! 저도 마음만 먹었으면 진작 제 능력을 썼을 걸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니 이건 불공정한 싸움, 무효나 다름없어요!”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횡설수설 억지를 부리는 레이센의 모습에 헤카티아가 맥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엔 즐거운 분위기를 망쳐버린 것에 대한 불쾌한 감정과 핑계를 대며 무효를 주장하는 레이센에 대한 짜증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다 끝난 게임을 무효로 돌리자는 거니? 이제 와서?”

그건 … …

신과의 약속을 어기는 자의 말로는 예로부터 비참했지. 누구보다 계약과 약속을 중시하는 내 앞에서 그런 억지가 통할 거라고 생각해?”

그럼 이렇게 해요! 다음 한 판으로 승패를 결정하는 걸로! 이번엔 자신이 가진 능력을 다 써서 싸우는 것으로요! 헤카티아씨도 순호씨도 마술이든 무엇이든 쓰고 저도 광기를 조종하는 힘을 쓰는 걸로요. 공평한 힘겨루기로 종지부를 찍는 거예요.”

결국 무효랑 뭐가 다르담. 총력전 단판 승부라니.”

들어주는 것이 어떤가, 헤카티아. 재미있는 승부를 원한다면 레이센의 요구를 받아주는 편이 나을 터. 지금껏 무력하게 당하기만 했으니 마지막으로 한 번 쯤은 자신의 전력을 다해 덤빌 수 있도록 기회를 줄 수 있지 않은가.”

레이센에게 동정심을 느낀 건지 아니면 그녀 역시 일방적인 게임에 질린 것인지 순호가 나서 레이센의 편을 들어주었다. 다른 사람 말은 몰라도 친구 말만큼은 거절하기 힘들었던 헤카티아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불만 가득한 한숨을 내쉬며 헤카티아가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대신 힘을 얼마든지 사용해도 된다고 했지? 그 말 후회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속셈이 뻔히 보이는걸. 능력은 핑계고 단판승부가 목적인거지? 경기 전 급하게 추가 된 룰, 데드볼로 게임을 끝내볼 생각이었겠지. 그렇다면 이쪽은 진심을 담아 공격하겠어요. 토끼 한 마리쯤은 일격에 재기불능으로 만들 위력으로 말이야.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 되었구나. 어리석기 짝이 없어.”

“...그럼 일단 단판승부에는 동의하시는 거죠? 어떤 결과든 반드시 승복하고요.”

그래그래. 네 말대로 해준대도. 더 불평하진 않을게..”

만일을 위해, 스틱스 강에 맹세하실 수 있으신가요? 전력이 아니었다는 등 다른 소리를 하며 승부를 번복하면 곤란하니까요.”

헤카티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직후, 난폭한 마력의 흐름이 그녀를 중심으로 폭발하듯 뿜어져 나와 넘실거렸다. 레이센의 말은 곧 헤카티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자존심 강한 그녀의 역린을 자극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레이센 쪽으로 향한 헤카티아의 입에서 살기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겁 없이 이 나를 도발하는구나. 주제를 모르고 누가 누구를 얕보는 거지? 그래, 맹세하지. 반드시 죽음의 일격을 날려주겠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재기불능은 네게 너무 약한 처벌인 것 같네. 형체도 안 남기고 산산조각 내주겠어. 죽고 지옥불 속에 고통 받게 된다 해도 원망하지 말렴.”

더 이상 평범한 배구 경기가 아니게 된, 목숨을 건 시합의 마지막 라운드를 알리는 휘슬이 울려 퍼졌다. 순호와 헤카티아가 포지션을 잡고, 마지막 서브를 맡은 레이센이 엔드라인 밖으로 걸어갔다. 공을 던지기 전 레이센은 상대팀의 움직임을 살펴 보았다. 처음부터 적당히 진지하게 임한 순호야 그렇다 쳐도 헤카티아로부터 살벌한 적의가 느껴지고 있었다. 이만큼 떨어진 거리에서도 느껴지는 불길한 마력, 이 거리에서도 위압감에 짓눌려 버릴 것 같은 강력한 힘이었다. 레이센이 침을 꿀꺽 삼키며 스승이 쥐어준 물건을 손에 쥐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되돌릴 수는 없다. 이판사판, 모 아니면 도의 숭부. 공을 하늘높이 던져 올린 레이센이 그에 맞춰 힘차게 도약했다.

순호씨!”

태양을 향해 치켜든 손으로 공을 향해 내지르며, 레이센이 순호를 똑바로 마주보며 소리쳤다.

저희가 이기면 놀러오실 때마다 마을에서 데...데이트 해드릴게요!!”

?”

누가 봐도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뜬금없는 고백 멘트와 동시에 작렬하는 레이센의 서브가 순호에게 내리꽂혔다. 레이센을 향한 순호의 관심이 아무리 크다 한들 상아를 향한 원한을 상회할 수는 없는 법, 고작 데이트 따위로 순호가 일부러 패배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녀의 파격적인 발언은 공에 집중하고 있던 순호의 집중력을 일순간 흐트러뜨리기엔 충분했고, 그 점이 바로 레이센이 진짜 노리던 것이었다.

순호의 반응이 한 박자 늦었다. 뒤늦게 순호가 황급히 팔을 내밀었지만 그녀의 팔은 공의 착지점 중앙에서 살짝 비껴나가, 튕겨나간 공을 애매한 방향으로 날아가게 만들었다. 기세좋게 엔드라인 밖으로 멀리 날아가는 공, 제아무리 발이 빠른 사람이라도 저만큼 날아간 공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대로는 아웃이 거의 확실한 상황, 승리를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그 때, 헤카티아가 공의 위치로 순식간에 전이했다.

분명 능력 사용에 제한이 없다고 했지?”

헤카티아의 눈앞에서 공이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 놓인 것처럼 공중에 정지한 공을 향해 손을 뻗은 헤카티아가 손가락으로 공을 톡 건드렸다. 그녀의 손끝을 타고 주입된 마력이 운동량으로 변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공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날 도발한 것도 모자라 순호의 호의를 이용하다니, 당돌함이 도가 지나치구나. 이 공이 보여? 난 지금 당신을 조준하고 있어. 그렇게 약해빠진 몸으로 이 공에 최대한으로 담은 내 마력에 맞선다면 100% 죽어. 피 한 방울 남지 않고 그대로 증발하겠지. 살고 싶다면 피하는 게 좋을 거야, 물론 그렇게 되면 네 패배는 확정이지만. , 선택의 시간이에요. 자신을 내던지고 모두를 지키는 길을 택할지, 자신을 지키고 모두를 포기할지.”

레이센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양손을 펼쳐 공을 잡을 자세를 취했다. 원래 있던 위치에서 한 걸음도 발을 떼지 않고 두 눈 부릅뜬 채 정면으로 공을 주시했다. 그 모습을 본 헤카티아가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결국 받아내기로 했구나. 용기에 감탄하여 봐줄 거라고 생각했니? 유감이네, 이쪽은 자비하고는 거리가 먼 지옥의 신이거든. 그럼, 천벌을 내릴 시간이야. 지옥에서 다시 보자고, 귀여운 토끼씨.”

마력을 가득 휘감은 공이 헤카티아의 손끝으로부터 발사되었다. 레일건을 쏜 것처럼 오렌지빛 섬광이 주위 공기를 가르고 레이센에게 덮쳐들었다. 섬광이 그녀가 펼친 양 손 한가운데 정확하게 내리꽂히고, 직후 거대한 충격파가 발생하여 굉음과 함께 레이센을 뒤로 날려버렸다. 흩날린 모래먼지가 주위를 뒤덮었다.

누구도 레이센을 걱정하여 달려가거나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지 않았다. 그저 다 같이 숨을 죽이고 레이센이 날아간 자리를 바라보며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자욱하게 시야를 가린 모래먼지가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옅어진 모래먼지 너머로, 조금씩 무언가의 형체가 드러내기 시작했다.

“... 아야야, 그래도 아프긴 아프네 이거 ...... ”

모래톱에 반쯤 파묻혀 쓰러진 레이센이 손에서 공을 떨어뜨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레이센이 죽거나 재기불능이 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군데군데 생채기가 있긴 했지만 그렇게 강한 공격을 정면에서 받은 것 치곤 지나치게 멀쩡한 모습이었다. 헤카티아를 제외한 모두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며 돌아본 레이센이 씩 웃으며 에이린을 불렀다.

판정 부탁드릴게요, 스승님?”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인 에이린이 휘슬을 입에 물었다. 경기 종료를 알리는 우렁찬 휘슬 소리가 호수 일대에 울려 퍼졌다.

 

 

 

 

 

-3-

, 따가워요 스승님. 그냥 긁힌 상처인데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다구요?”

가만히 있어. 세균 감염을 막으려면 소독만큼은 철저하게 해야지.”

그래, 나중에 상처가 덧나면 어떡하니. 자아, 레이센. 나도 간호해 줄테니 안심하고 몸을 맡기려무나.”

아하하... 머리에 붕대를 그렇게까지 둘둘 감으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에이린과 순호에게 앞뒤로 둘러싸여 극진한 간호를 받고 있는 레이센이 쑥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쭈뼛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즐겁다는 듯이 바라보던 카구야와 테위가 히죽거리면서 한 마디씩 보탰다.

이나바는 인기가 많구나- 부러운걸.”

죄 많은 토끼라니까.. 분명 저러다가 누구 한 쪽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울려버릴걸. 그렇게 남겨진 쪽은 실연의 상처를 평생 떠안고 살게 되겠지.”

아니 아니, 그냥 다친 곳을 치료하는 것뿐이거든요! 그리고 테위 너는 누구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했는지 알고!”

그렇지만 괜히 도발해서 일을 키운 건 레이센이잖아.”

그건 ... 스승님이 시키신 대로 했을 뿐인데......”

레이센이 곁눈질로 헤카티아 쪽을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덧붙여 헤카티아는 땡볕 아래에서 정좌상태로 반성 중. 너무 철없이 굴었다느니 행사를 다 망칠 뻔 했다느니 한 차례 잔소리를 쏟아 부은 순호가 그녀에게 내린 벌이었다.

어쩐지, 공주도 사부도 가만 지켜보기만 하더라. 감춰둔 묘수가 있었던 거구만.”

이나바가 생각 없이 자살 행위를 벌일 리 없잖아? 또 상황이 그 지경이 되도록 에이린이 아무 말 안 하고 있다는 것은 다 에이린의 예상대로라는 뜻 아니겠어? 에이린이 뭔가 알려줬구나 싶어서 그냥 가만 있었지. 그래도 마지막 일격은 꽤 위험했어. 이나바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저질렀다면 진짜로 죽었을 지도 몰라.”

결과적으로 잘 되었으니 다행 아닌가요. 꽤 조마조마했어요. 연기나 도발이 안 통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땐 진짜 몸으로 공을 다 막아야 했으니까요.”

흐음, 어디서부터 작전이었던 걸까?”

순호가 레이센의 머리 위에서 불쑥 얼굴을 들이밀고 눈을 가늘게 뜨며 내려다보았다. 레이센의 이마에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레이센은 슬그머니 순호의 시선을 피해보려 했지만 바로 코앞에서 내리꽂히는 시선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결국 무언의 압박에 굴복한 그녀는 모든 것을 이실직고하고 말았다.

본 경기 시작 전부터요. 처음엔 일부러 무력하게 당하기만 한 것도, 마지막에 억지를 써서 단판 승부로 유도한 것도, 순호씨의 실수와 헤카티아씨의 마력 사용을 이끌어 낸 것도 다 작전이었어요.”

보나마나 그 작전을 생각해낸 건 그쪽의 달의 두뇌겠지. 그렇지요?”

제가 알려준 건 유도해야 하는 상황과 그에 따른 대처뿐, 어떻게 내가 말한 그 상황들을 유도하는가는 순전히 우동게의 말과 행동에 달린 것이었죠.”

, 맞아요! 몇 개를 제외하면 나머진 다 제가 즉석에서 지어낸 말들이었다니까요? 그런데도 용케 스승님의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구요. 정말이지 훌륭한 연기력 아닌가요. 그러니 저도 최소한 절반은 승리에 공헌했다고 볼 수 있죠!”

그렇구나. 데이트 약속도 작전대로 지어낸 거였구나. 후후...”

우쭐거리는 시간도 잠깐 뿐, 음침한 웃음과 함께 중얼거린 순호의 말에 레이센이 다시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 , 그건... ...”

우동게, 내뱉은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거란다.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 그것이 승자의 도리야.”

물론이죠! ! 제가 거짓말을 할 리 있겠습니까. 당연히 지켜야죠. 24시간 365일 부르면 5분 내로 튀어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겠습니까.”

그렇게까진 안 해도 되는데. 아무튼 잘 알겠어. 당장 내일부터가 기대되는걸. 이쪽은 시간이 차고 넘치니까.”

곧바로 내일부터입니까...... , 스승님. 이거 돌려드릴게요. 스승님이 건네주실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는데 설마 이 작은 돌조각이 헤카티아씨가 진심으로 내지른 공격을 진짜로 막아낼 줄은 몰랐어요.”

레이센이 손가락에 걸고 있던 끈을 풀고 무언가를 에이린에게 건넸다. 부적처럼 고이 끈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그것은 누런 색깔의 작은 조각이었다. 아무런 마력이나 술식이 느껴지지 않는 정체불명의 부적, 그것은 겉으로 보기엔 확실히 주위에 흔히 널린 돌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유심히 그 부적을 살피던 순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뭐지? 이것이 헤카티아의 공격을 막아주었다고?”

저도 설명은 듣지 못했어요. 그저 헤카티아씨가 마법을 쓰면 이걸 이용해서 막으라는 말 밖에는.”

이건 손가락뼈야. 아주 오래 전 신화의 시대에 존재했던 어떤 거인의 시체에서 떼어낸 것이지.”

에이린은 레이센이 넘겨준 조각을 받아 구급약이 든 상자에 같이 집어넣곤 입구를 봉했다. 자신이 고이 간직하고 있던 부적의 정체가 시체의 일부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들은 레이센은 흠칫 놀라며 방금전까지 부적을 쥐고 있던 손을 탈탈 털어냈다.

뼛조각이요? 경기 내내 꽉 쥐고 있었는데!”

특별한 술식 같은 건 걸려있지 않군요. 그랬다면 나나 헤카티아가 진작 알아챘을 터.”

알아채지 못할 만 하죠. 이건 아무 장치도 속임수도 없는 그냥 평범한 뼈입니다. 중요한 건, 누구의 뼈냐는 거죠. 이 뼈의 주인, 클리티오스라고 불리던 거인은 오로지 헤카티아의 힘을 받아내기 위해 창조된 존재였습니다. 그녀가 아무리 강대한 마법을 사용한다 해도 이 신체는 그 마력을 모두 흡수할 수 있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헤카티아가 마력을 쓰도록 유도하여 이 조각으로 피해를 무력화 시킨 겁니다. 충격파는 마력에 의한 것이 아니니 막을 수 없었지만요.”

과연, 처음부터 헤카티아의 마법에 대항할 방법을 가지고 있었군요. 그렇다는 건 이미 헤카티아가 그런 위험한 내기를 제안할 것도 다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네요.”

보기와 다르게 그녀는 꽤 호전적인 성격이니까요. 틀림없이 단순한 놀이도 진검승부로 끌고 갈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스포츠 경기를 제안한 것도 비슷한 이유랍니다. 당신이나 헤카티아 어느 한 쪽이 우동게와 노는 것에 질릴 경우를 대비했죠. 덕분에 충분히 날뛰지 않았나요?”

재미있네요. 우리는 또 당신의 계획대로 이용당한 셈이군요?”

이용이라뇨, 오해입니다. 오늘 제 목적은 이 행사를 무사히 평화적으로 마치는 것. 평화로운 분위기에 위협이 되는 모든 긴급 상황에 대해 대비를 해둔 것뿐이니까요. 틈을 타 그쪽을 속이거나 이용해먹을 생각은 없어요.”

부처님의 손바닥 위에 올라온 느낌이 이런 건가 싶네요. 당신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꿰고 있으니까요.”

, 전부 다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은 아니랍니다? 당신의 주의를 돌리라는 말에 우동게가 그렇게 적극적인 멘트를 던질 줄은 예상 못했거든요. 주위를 너무 의식해서 그렇지 당신의 관심이 아주 싫은 건 아닌가 보네요. 자리를 비켜드릴 테니 서로 터놓고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떤가요?”

에이린의 말에 고개를 숙인 순호와 레이센의 눈이 마주쳤다. 어색하게 웃는 레이센은 딱히 에이린의 말을 부정하지 않고 있었다. 무슨 말을 이어야 할지 고민하는 기색 가득한 침묵의 시간이 짧게 이어지고, 이윽고 용기를 낸 레이센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 지금까지 순호씨랑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려 한 적이 없었네요. 생각해보면 순호씨도 제게 나쁜 뜻으로 다가오신 건 아닌데, 입장 차이도 있고 아직 누군가의 애정을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보니 계속 거리를 두기만 했어요.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않고 말이죠.”

이해한단다. 네 말대로 우리는 적이니까. 나 때문에 네 입지가 위태로워지면 곤란하잖니.”

하지만 계속 이러는 건 마음이 편치 않아서요. 저도 힘들고 그만큼 순호씨도 상처 입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막상 이 어색한 관계를 풀어나가자니 어떻게 할지 모르겠고... 그런 절 공주님과 스승님이 배려해 주셔서 오늘 같은 시간을 마련해주셨죠. 그러니까 저, 이렇게 기회가 될 때 순호씨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아가고 싶어요. 복수를 하지 않을 때의 순호씨는 어떤 분인지, 제게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시간을 들여서요!”

, 레이센의 머리 위에 순호의 손이 얹혀졌다. 그대로 조심조심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순호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달의 녀석들은 전부 똑같다고 생각했어. 타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으며 자신이 깨끗한 줄 아는 거만한 녀석들이라고 말이지. 하지만 레이센 너는 더러움이 묻는 것을 아랑곳 않고 달 뿐만 아니라 지상을 지키기 위해 몸을 내던졌지. 그때부터 네게 흥미가 생겼지. 그것 말고도 너를 찾아오는 이유가 더 있긴 하지만 다 말하기엔 너무 길구나.”

앞으로 하나씩 말해주시면 되죠. 하하, 시간은 차고 넘친다고 하셨잖아요? 오늘 다 못 한 이야기는 다음에 마을에서 차 한 잔 하며 이어나가요.””

그래. 이러고 있으니 왠지 아련하구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후후, 복수를 잠시 잊게 될 정도야.”

어머니의 손길처럼 느껴지는 따듯함에 레이센은 눈을 감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순호 앞에만 서면 긴장으로 굳어 있기 바빴던 레이센이 처음으로 순호에게 보여준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런 레이센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순호와 함께, 이제야 겨우 마음의 벽을 허물고 서로의 진심을 마주한 둘의 담소가 도란도란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잘 해결 되었네. 이런 자리에서 구두로 한 약속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나바도 있으니 당분간 달의 도시는 안전하겠지.”

옛날에도 이렇게 말로 해결이 가능했었더라면 고생을 몇 배는 덜 했을 텐데, 안타깝네요.”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니까. 그나저나 에이린은 역시 대단해. 하나부터 열까지 다 꿰뚫어보고 있었잖아. 보나마나 순호가 폭주했을 경우도 대비했었겠지?”

물론이죠. 그녀는 헤카티아보다 불안정한 존재. 그녀에 대해선 헤카티아보다 더 많은 경우의 수를 상정하고 대책을 세워 두었습니다. 그 대책들을 꺼내 쓸 일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다 우동게 덕분이죠.”

어떻게 그렇게 머리가 좋을 수 있는지 참 신기하단 말이야. 달에서도 지상에서도 에이린보다 앞서나간 사람은 한 번도 못 봤어. 언제나 에이린은 남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멀리 내다보고, 또 지혜로웠지. 오래 살면서 많은 것을 봐와서 그런 걸까? 아니면 타고난 것?”

어머, 갑자기 그런 걸 궁금해 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에이린을 따라하면 어쩌면 나도 에이린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아마 어려울 거예요. 따라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뿐더러, 지혜를 얻는다 하여 무슨 상황에서든 해결책을 곧장 떠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랍니다. 오히려 생각이 너무 많아져 행동하기를 겁내는 겁쟁이가 될 수도 있어요.”

난 똑똑한 머리를 제대로 쓸 자신이 있는데, 에이린은 날 못 믿나봐?”

하하, 그렇지는 않습니다, 공주님. 제가 공주님을 믿지 않으면 또 누굴 믿겠습니까. 공주님께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꾸준히 학문을 닦아나가시면 환상향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시게 될 거예요.”

칭찬 같지만 그거... 그냥 계속 공부만 하라는 거잖아? 에이린, 아까부터 계속 묻는 말에 대답을 피하기만 하고,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는걸. 뭔가 숨기고 있는 것 아니니?”

적당히 웃으며 말을 돌려볼까 했지만 카구야의 쏘아보는 시선이 따가웠다. 카구야의 고집은 에이린이 더 잘 알고 있었으니, 말해주지 않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질 기세라는 것쯤은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난처하다는 듯 팔짱을 낀 에이린이 조용히 앓는 신음소리를 냈다.

많은 것을 알려달라고 한 것도 아닌걸. 지금은 그저 에이린이 똑똑해진 비결만 말해주면 납득하고 넘어갈게. 부끄러운 기억을 알려달라는 게 아니잖아?”

공주님의 고집은 어쩔 수 없군요. 으음... 그래요, 스승이 있었답니다. 아니, 스승과 비슷한 존재라고 해야 할까요.”

흐응... 에이린도 누군가의 제자였던 시절이 있었구나. 에이린의 스승이었던 사람은 지금 그럼 어디 있어? 달의 도시에 남아 있는 거야? 아니면 지상에?”

안타깝게도 오래 전에 죽었답니다. 전쟁의 물결이 일렁이던 시기에, 제가 없는 동안 다툼에 휘말려 살해당했죠. 제가 돌아 왔을 땐 이미 살던 궁전과 시체까지 모두 불타버린 뒤였죠. ”

에이린을 가르칠 정도로 똑똑한 존재가 고작 전쟁으로 죽었다고? 말도 안 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듯, 지식이 풍부하다고 하여 무슨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랍니다. ”

어쩔 수 없었던 게 아니지. 네가 죽인 거나 다름없잖아, 안 그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에이린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녀들의 뒤로 다가온 헤카티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서 있었다.

벌을 받고 계신 줄 알았는데요.”

-분히 반성했어. 애도 아니고, 언제까지 무릎 꿇고 있을 순 없잖아. 그보다 지금 재미있는 얘기를 하는 것 같았는데, 그치? 난 이쪽 이야기에 더 흥미가 있다고.”

헤카티아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성큼 다가오자, 에이린이 반사적으로 그녀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거리를 두었다.

더 할 이야기는 없습니다. 방금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에요.”

아니, 아니지. 정말 중요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잖아. 네 스승이란 자에 대해서, 그리고 네가 정확히 그 지혜를 어떤 방법으로 얻었는지에 대해서.”

이 자리에서 이야기할만한 내용은 아닌 것 같군요.”

숨기고 싶을 만 하겠지. 네 똑똑한 머리는 누군가에게 배워서 얻어낸 게 아니니까. 너는 사이가 좋았던 가족을 배신하고 그가 가진 지식과 지혜를 훔쳐냈어. 네가 다스리는 도시의 인간들의 신앙을 얻기 위해서였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전쟁이 벌어질 것을 직감하고 몰래 고향으로부터 도망쳐 나왔지. 네가 다스리던 인간들도 내버리고, 가족들은 죽거나 몰락하도록 방치하고서 말이야. 덕분에 그 잘난 머리로 어디로 도망쳤는지 한참을 찾았잖니. 설마 그 곳이 달이었을 줄이야, 못 찾을 만 했군.”

에이린은 죄인이 된 마냥 초조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쓰르라미의 소리만이 어색한 침묵을 메우는 가운데 주홍빛으로 물든 노을이 그녀의 난처해하는 얼굴에 어둡게 그늘을 드리웠다. 적잖이 당황한 듯 한 에이린을 가만 보고 있던 헤카티아가 말 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대리석으로 조각된 테이블과 의자 3, 그리고 화려한 티세트가 생겨나더니 보이지 않는 실로 조종당하는 것처럼 그들 세 명 앞에 척척 세팅되었다.

난 또 ~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 했잖니. 옛 가족을, 오랜 친구를 모른 척 해서야 쓰니? 옛날의 너는 솔직하고 당당한 녀석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야비한 겁쟁이가 되어 버린 건지. , 너와 나 사이에 아직 해결하지 못 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고. 예전처럼 오붓하게 앉아서 말이지. 공주님도 원한다면 같이 들어도 좋아. 궁금한 게 산더미잖아?”

의자에 먼저 앉은 헤카티아가 차를 따르면서 생긋 웃어 보였다. 살벌한 압박이 느껴지는 미소에 에이린이 머뭇거리는 동안, 보다 못한 카구야가 정자 밖으로 걸어 나오더니 헤카티아가 마련한 자리에 털썩 기대앉았다.

공주님... ...”

왜 죄 지은 사람처럼 그러고 있어, 에이린? 저 여신에게 약점을 잡히기라도 한 거야?”

그건 아니지만... 공주님 앞에서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서요.”

내가 실망할까봐 걱정되나보네. 에이린, 나는 에이린이 이해가지 않는 행동을 하더라도 거기엔 다 이유가 있다고 믿고 있어. 달을 배신하고 나와 같이 도망칠 때도 그러지 않았어? 그러니까 설령 저 여신의 말이 사실이어서 에이린이 누군가에게서 지혜를 빼앗아갔든, 모두를 버리고 도망쳤든 나는 그것만으로 에이린을 판단하고 실망하지 않아. 대신, 나는 그저 에이린이 숨기고 있는 과거가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야.”

왜 제 과거에 대해 알고 싶어 하시는 거죠, 공주님?”

그래야 에이린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늘 보살핌만 받아왔으니까 가끔은 이쪽에서도 이나바처럼 챙겨주고 싶단 말이지. 하지만 에이린은 자신에 대해서 말한 적이 거의 없으니까 뭔가 해주고 싶어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걸. 그러니 알고 싶어. 에이린이 어떤 사람인지, 나와 만나기 전에 어떤 일들을 겪으며 지내왔는지. 그렇게 너에 대해 알아가고 싶어. , 그리고 둘만 붙여놓았다간 또 아까 같은 싸움이 일어날 것 같아서, 이상한 짓 못하게 감시도 할 겸?”

사람을 너무 못 믿네. 내 말에 성실히 답해주기만 한다면 난폭한 일은 벌이지 않을 거야.”

도발에 쉽게 넘어가는 신을 어찌 믿겠어. 그리고 그쪽의 말은 여차하면 일을 벌이겠다는 것처럼 들리는걸. 그럼 더더욱 둘만 내버려둘 순 없지.”

카구야까지 저리 단호하게 말하니 에이린은 결국 남은 자리에 앉아 헤카티아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착잡한 표정으로 깍지를 낀 그녀의 앞에 찻잔이 놓였다. 은은하고 달콤한 꽃향기가 느껴지는 푸르스름한 빛깔의 차가 찻잔 가득 찰랑거리고 있었다.

제비꽃으로 만든 차야. 네가 좋아하던 것이지. 그립지 않아? 달 같이 칙칙한 곳에선 볼 수 없는 것이잖아.”

“...언제부터 눈치 채고 계셨던 거죠?”

제발 눈치 채 달라고 애원한 건 네 쪽이었잖아? 토끼 입에서 이쪽에 익숙한 말이 튀어나온 것도 그렇고, 내 공격을 막아낸 것도 그렇고. 그거, 클리티오스의 일부였지? 완전히 불태워버린 줄 알았는데 그 새 그 일부를 네가 떼어 갔을 줄이야. 정말이지 만일을 대비하는 그 철저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니까.”

클리티오스의 뼈...순호가 말해주던가요?”

그럴 리가~ 지금 순호는 토끼랑 가족 놀이 하느라 바쁜걸. 척 보면 알지. 그 정도 눈치는 있어. 어쩐지 익숙하다 했어. 성격도 죽이고 머리색도 바뀌어 전혀 딴 사람이 되었으니 몰라볼 수밖에. 정말 모두의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네게 우리는 어떻게든 잊고 싶었던 존재에 불과했던 거였어.”

아득히 먼 옛날 일까지 꺼내면서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모르겠군요.”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할까. 역시 처음부터 하나하나 짚고 가는 게 좋겠지? 영리한 넌 잊지 않았겠지만 네 공주님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으니까. 먼저 이것부터 짚고 가자. 널 뭐라고 불러야 할까? 에이린이라고 했지. 이게 몇 번째 이름이지? 너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오모이카네? 네이트? 이슈타르? 미네르바? 아니 우리 사이엔 이게 더 익숙한 이름이겠지. 아테나.”

헤카티아가 늘어놓은 마지막 이름을 들은 에이린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들이 끊어진 필름을 이어붙이는 것처럼 하나 둘 연결되었다. 완성된 기억이 그녀의 눈앞에 떠올랐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기억들을 되새겨 돌아보며, 마침내 입을 연 에이린은 꽁꽁 숨겨온 먼 옛날의 이야기를 하나 둘 털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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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먼 옛날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도 전, 최초의 인류보다도 한 발 먼저 세상에 발을 내딛은 지적인 존재들이 있었다. 지구상 어떤 생명체들도 비교할 수 없는 고도의 기술력과 특별한 능력을 지닌 지성체, 이들은 훗날 인간들이 신이라 부르게 되는 존재들이었다.

대를 거듭하며 진화하는 과정에서 생명체들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시에 점점 영리해졌다. 주위 환경을 인지, 분석하여 이용할 줄 아는 개체들이 생겨났고, 이런 개체들은 자신이 학습한 내용을 후대에 전달하며 그 수를 불려 나갔다.

점점 더 생명체와 환경 사이 상호작용은 다양해지고 복잡하게 발달했다. 그 과정에서, 일부 개체들이 주위 환경에 따라 발생하는 신체의 특별한 변화를 인지하게 되었다. 먹이를 얻었을 때 흥분 상태에 돌입한다거나, 번개가 내리칠 때 근육이 긴장되고 심장이 빨리 뛰는 등, 후에 감정이라고 불리는 것들이었다.

한 번 습득한 감정은 관련된 경험의 기억과 함께 이들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후대로 전해졌다. 감정이 세분화됨에 따라 집단 내에 축적된 경험의 양은 더욱 방대해졌고, 그렇게 오랜 세월 각인-학습-축적을 반복해온 결과 인류가 탄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일정 수준의 지능을 지닌 집단 사이에선 집단 공통의 잠재적 기억을 지니게 되었다. 별도의 가르침 없이도 감정과 상황을 연결 지을 수 있게 해주고 집단 내 공감대를 형성하는 잠재 기억, 이른 바 집단 무의식의 형성이었다.

태초의 신들은 이 집단 무의식으로부터 탄생했다. 자연계의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공통된 감정과 기억이 그들을 세상에 존재하게 했고 권능을 부여했다. 창조와 빛의 권능을 가진 태양신, 세상을 불태워 파괴함과 동시에 새 터전을 일구는 권능을 지닌 불의 신 등. 주로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이 그들을 이루는 근간이 되었던 만큼 태초의 신들은 하나하나가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존재들이었다.

개체별로, 집단 별로 형성된 집단 무의식이 전부 조금씩 달랐기에 서로 같은 현상에 대응되는 신도, 대응되는 현상은 다르지만 권능이 동일한 신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이렇게 중복되는 신들을 모두 헤아려도 그 수는 기껏해야 몇 백 명 수준으로, 지상에 존재하는 다른 생명체들의 개체수를 생각했을 때 턱없이 적은 숫자였다.

처음에 신들은 자신보다 하등하고 수준 낮은 다른 생명체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끼리끼리 한데 모여 자신들이 지닌 권능과 기술을 이용해 자신들만의 낙원을 건설했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낙원에서 신들은 한동안 지구상 어느 생명체보다 편안한 삶을 영위하였다. 자신들의 권능에 취한 신들의 사회는 점점 폐쇄적으로 변했고, 신들 스스로 일궈낸 풍요와 편리는 조금씩 독이 되어 그들의 정신을 나태하게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신들은 텅 비어 있었다. 몸은 편하지만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하루하루가 반복되었다. 서서히 신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존재 목적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이들이 생겨났다.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난 이유를 찾기 위해, 의문을 품은 이들은 낙원 밖으로 눈을 돌려 지상의 미물들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호기심에 지상을 돌아다니던 어떤 신이 자신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소통을 시도하려는 한 무리를 마주쳤다. 훗날 최초의 인류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신들이 봐온 그 어떤 생명체들보다 지적 능력이 우수한 개체였지만 반대로 신체 능력만큼은 형편없었다.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 날개, 그 어떤 것도 가지지 않았던 그들은 대신 그 영리한 머리를 사용해 냉혹한 자연 속에서 살아남고 있었다. 그들은 도구와 함정을 직접 제작하여 위험에 대비할 줄 알았고, 그들만의 언어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다양한 감정을 활용한 의사소통 방식 까지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비록 특별한 능력은 없었지만 지능이 높고 감성이 풍부한 이들은 지구상 생명체들 중 가장 신들에게 근접한 이들이었다.

인류의 존재가 알려진 뒤 모든 신들의 관심은 대번에 인류에게 집중되었다. 일부 신들은 심심풀이로 그들의 생존을 도왔으며 어떤 짓궂은 신들은 권능을 사용하여 그들을 괴롭혔다. 그런 과정이 몇 번 반복되는 동안 인류는 이들이 자기들보다 더 영리하고 우수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곧 인류는 그들을 향해 두려움과 존경, 부러움이 섞인 감정을 동시에 품게 되었고, 조금이라도 신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자신이 품은 감정을 아낌없이 내비치며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했다.

이와 함께 신들의 세계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인간들이 자신들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었을 때 권능이 더욱 강력해지면서 내면의 무언가가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 느껴졌던 것이다. 인간으로 치면 만복감과도 비슷한 감정이었다. 동시에 때때로 본 적 없는 새로운 신들이 새로이 탄생하기도 했다.

곧 영리한 신들은 이 기묘한 현상에 대해 논리적인 결론을 얻어낼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하찮게 여겼던 미물들의 감정이 자신들을 존재하게 하는 것임을. 이들과 나누는 영적인 소통이 자신들에게 존재를 더욱 견고히 한다는 것임을. 신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주어진 권능을 이용해 지상 생명체들에게 자신을 각인 시키고 특별한 감정을 지속적으로 이끌어 내는 것, 그것이 신들의 역할이었다.

이 대발견은 무료한 신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 그들에게 살아가는 기쁨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두려움 또한 안겨주었다. 만약 높은 지성을 지닌 개체들이 모두 죽어 특별한 감정을 더 이끌어낼 수 없어진다면? 특별한 감정의 공급이 신들을 탄생시킨다면 반대로 상실은 신들의 소멸도 야기할 수 있다는 뜻이 되었다. 처음으로 신들이 느낀 죽음의 공포는 모든 신들의 의견이 하나로 끌어 모았다. 낙원에서 인류를 다스리자는 것. 자신들의 휘하에 두고 철저한 관리를 통해 인류를 번성시켜 언제까지고 자신들에게 특별한 감정을 바치도록 하자는 것이 신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신들은 그들이 지닌 권능으로 인류를 돕고, 자신들의 지식을 전수해 주며 인류가 개체수를 늘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이에 부응하듯 인류는 지속적으로 신들에게 특별한 감정을 바쳤다. 믿고 경외하는 감정, 이는 곧 신들과 인간 사이에서 신앙으로 불리게 되었다. 인류는 자신들이 가진 의사소통체계를 이용해 후대에 신들의 위대함을 전달하며, 그들을 향한 신앙심을 계속 유지할 것을 가르쳤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신과 인류의 공생관계, 이는 낙원에 활력을 불어넣는 동시에 인류의 진화를 더욱 촉진시켰다. 한동안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허나 완벽할 것만 같았던 공생 관계도 마냥 오래가지는 못했다. 신앙을 바칠 수 있는 인간의 수는 여전히 턱없이 적었고 수 백 명의 신들 모두를 만족시키기에 신앙의 양은 너무나도 부족했다. 평등하던 신들 사이에서도 들어오는 신앙의 양에 따라 힘의 격차와 불평등이 생겼고 이내 신들 사이에서도 질투, 시기와 같은 악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불화와 다툼이 일어났고, 심지어 신앙을 적다는 이유로 인간을 벌하는 신까지 생기는 등 낙원에 또다시 불안이 싹트기 시작했다.

매일 같이 신앙의 분배를 놓고 신들 사이에 논쟁이 발생하는 가운데, 달과 죽음의 여신, 헤카티아만큼은 이 모든 상황이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 여유로웠다. 그녀를 상징하는 밤과 죽음 모두 매일같이 생명체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는 것들. 지상의 모든 생명체가 밤과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지 않는 이상 그녀가 잊혀질 일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헤카티아는 신들 중에서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계산이 빨라 닥쳐올 위기나 기회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던 그녀는 신들 사이에서 얼마 안되는 예언의 천재였다. 예언에 뛰어났기에 헤카티아는 인류 발견 이전부터 어렴풋이 신앙의 존재와 낙원의 미래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앙의 존재가 알려지자마자 그녀는 후에 벌어질 귀찮은 다툼을 피하고자 재빨리 자신의 권능을 이용해 죽은 자들의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 틀어박혔다.

실로 현명했던 행동, 덕분에 그녀는 밖에서 신들이 언성을 높이는 동안에도 편하게 수집한 영혼들을 보며 느긋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화롭기 그지없던 그녀의 궁전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실로 이례적인 첫 방문객, 검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전신에 갑옷을 두른 그녀는 앳되어 보이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며 대번에 헤카티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기까지 찾아오는 이가 있을 줄은 몰랐네. 무슨 목적이지? 날 쓰러뜨리고 내 권능을 가져갈 셈?”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헤카티아님. 당신의 힘을 빌려주십시오.”

방문객은 바로 본론을 입에 담더니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곤색 눈동자를 빛내며 성큼 헤카티아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당돌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태도에 헤카티아의 표정이 어이가 없다는 듯 일그러졌다.

사람한테 부탁하는 태도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네가 누구였더라? 여긴 또 어떻게 찾아온 거고.”

제 이름은 아테나. 싸움과 전쟁의 권능을 가진 자입니다. 비교적 최근에 낙원에 합류했었죠. 전 이전부터 당신에 대해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신앙의 발견을 마냥 기뻐하고만 있을 동안 당신은 미리 지금의 사태를 예상하고 남들과 거리를 두고 이 세계를 창조해 모습을 감추었죠. 아닌가요?”

어머, 기분 나빠라. 이런 관심, 싫지는 않은데 좀 너무 끈적거리는걸.”

저는 농담을 주고받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왔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요청하는 태도치고 너무 거만하지 않아? 좋아, 일단 무슨 도움을 요청할 건지 말은 해 봐. 듣고 나서 들어줄지 말지 생각하는 건 내 마음이지만.”

옥좌에 늘어지게 걸터앉은 헤카티아가 건성으로 아테나의 말에 답했다. 실로 무례한 태도였지만 그 말을 들은 아테나는 불쾌하다는 기색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고 담담히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도와준 덕분에 인류는 이 낙원에서 이전보다 크게 번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수는 여전히 적고 신앙의 양은 모두를 만족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하죠. 그 때문에 요즘 여기저기서 신앙을 독점하기 위한 전쟁의 전조가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계시죠?”

알지, 죽은 이들이 밖의 소식을 전해 주는걸. 전쟁, 좋은 거 아냐? 너를 위한 거잖아. 너는 마음껏 날뛰어도 되고 나는 앉아서 죽은 영혼을 수집하면 되고. , 우리 같은 존재들도 영혼이 있나 몰라~ 싸우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 지 궁금했는데.”

서로를 파괴하기만 할 뿐인 전쟁은 무의미 합니다. 어느 쪽도 이득을 얻지 못하고 모두가 궤멸하는 결과만 남게 되겠죠. 게다가 제가 아무리 전쟁의 신이라지만 우리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은 저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고 싶다는 건데.”

이 곳을 떠나려고 합니다. 마음이 맞는 이들과 뭉쳐서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헤카티아한테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자신들이 터전을 가꾸고 신앙을 바칠 인간을 키워낸 장소를 떠나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곳으로 향하려 하다니 멍청하기 짝이 없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낙원을 벗어나 험한 가시밭길로 발을 들여 놓겠다 선언하는 아테나를 대놓고 비웃으며 헤카티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할 셈이라면 그만 둬. 제정신이니? 가만히 있어도 아무 일 없는 편한 곳을 놔두고 너랑 같이 떠나게?”

인간이 비단 이곳에만 존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땅 어딘가에 저들과 비슷한 수준의, 신앙을 바칠 수 있는 마음과 머리를 가진 동족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을 찾아내어 우리의 존재를 알리고 섬기게 만든다면 더 많은 신앙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인간이 더 있을 거라는 보장은 있고? 그리고 왜 꼭 나여야 하는 거지?”

발로 걸어선 그렇게 멀리까지 갈 수 없습니다. 이 근방은 저희들이 모두 꿰고 있으니 그래선 의미가 없죠. 우리는 저 드넓은 바다를 건너 누구의 발길도 닿은 적 없는 미지의 땅으로 떠날 것입니다. 헤카티아님은 미래를 내다보고 행동하실 줄 아는 분이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이기에, 헤카티아님과 같이 예지 능력이 뛰어난 분들이야말로 이 여정에 꼭 필요한 존재라고 판단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눈여겨보던 분이시기도 하고요.”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 걸. 그렇게 미지의 땅에 도착했다고 치자. 거기 인간들은 어떻게 찾아낼 거지? 우리 존재는 어떻게 알릴거지? 다시 처음부터 모든 걸 반복하자고?”

인간을 이용할 겁니다. 인간의 습성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같은 인간이니, 그들은 저희보다 동족을 더 잘 찾아낼 겁니다. 또 동시에 그들은 저희들의 힘과 업적을 알리는 역할도 맡게 될 겁니다. 인간들이 먼저 나서 우리들의 위대함을 알리고 그 때 나서서 우리의 힘을 보여준다, 그런 방식이라면 단시간에 현지의 인간들을 포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 다른 인간들을 찾지 못했을 땐 우리가 데려간 이들과 그곳에 정착해 독립된 사회를 구축해야겠죠.”

헤카티아가 옥좌에서 몸을 일으켜 아테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반드시 이곳을 떠날 거라는 의지, 그리고 이 땅의 다른 곳에도 인간이 있을 거라는 믿음. 굳은 신념이 느껴지는 아테나의 태도에 흥미를 느낀 헤카티아가 그녀에게 물었다.

... 구체적인걸. 그래, ‘우리라고 했지? 이 계획에 동참한 다른 녀석들은 얼마나 되지?”

아직 많지 않지만 우선 포세이돈님이나 제우스님, 제 삼촌과 아버지 되는 분들이 계십니다. 막연하기만 했던 제 계획을 완성할 수 있도록 지혜를 빌려 주신 분들이죠. 특히 포세이돈님은 아는 것이 많은 분이시니 계획이 성공 확률을 크게 높여 주실 겁니다.”

아버지...삼촌... 말로만 들어있 가족놀이 좋아하는구나. 마치 인간들 같아.”

이렇게 하면 결속력이 다져진다고 느끼고 있으니까요. 피로 이어진 인연은 무슨 짓을 해도 끊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런 식으로 우리들도 마음이 맞는 이들끼리 강한 인연을 맺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말고도 가족 관계를 맺은 이들이 꽤 된답니다. 헤카티아님도 가족의 연을 맺어보시는 건 어떤가요?”

난 됐어. 어우, 느끼해라~. 그리고 아직 너희들 계획에 동참하겠다고 하지도 않았다고?”

천천히 생각하셔도 됩니다. 바다를 건너 멀리까지 항해할 배가 완성되려면 시간이 걸리니까요. 그때까진 종종 대답을 들으러 찾아오겠습니다.”

그으래. 마음대로 하렴. 시간 낭비일 뿐이겠지만.”

적당히 내치면 금세 포기할 거란 헤카티아의 예상과 달리 아테나는 매일 끈질기게 그녀를 찾아왔다. 괜히 마음대로 하라고 했나 싶을 정도로 아테나는 지칠 줄을 몰랐다. 반복되는 설득은 물론, 과일이나 귀한 음료 등을 선물로 가져와 환심을 사려 하기도 하고 일출부터 일몰 때까지 긍정의 대답을 기다리며 하루 종일 부동자세로 앉아 있기도 했다. 그런 아테나의 필사적인 모습에 헤카티아도 조금씩 그녀에게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녀의 계획에 몇 마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전부였던 헤카티아였지만 어느새 부턴가 헤카티아 쪽에서 먼저 화두를 던지며 그녀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 늘어났다.

아테나가 헤카티아를 매일같이 찾아온 지 어느덧 100일이 지났다. 둘의 사이는 의자매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돈독해져 이젠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속마음을 나눌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신들의 가족놀이를 영 못마땅해 하던 헤카티아였지만 아테나만큼은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뛰어난 머리를 자신만을 위해 써오던 헤카티아와 대조적으로 인간과 신 모두를 위한 미래를 설계하려는 아테나의 비범한 모습이 헤카티아는 싫지 않았다. 아테나에 대한 헤카티아의 호감은 날로 커져갔고 마침내 101일째 되던 날, 그녀는 아테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좋아, 내가 졌어. 너희들의 항해 계획에 동참해 줄게.”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아테나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걸렸다. 함께하게 되어 기쁘다는 진심이 가득 담긴 아름다운 미소였다.

다행이네요. 배도 완성되고, 이제 이틀 뒤 출항이 예정되어 있어 오늘도 거절당하면 어쩌나 초조하던 차였습니다.”

이틀 뒤? 그걸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어?”

일정을 빌미 삼아 헤카티아님을 은연중에 압박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리고 말하지 않았던 것이 하나 더, 저희 말고 다른 가족들도 같은 날 이곳을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목적지는 각자 다르지만요.”

다른 녀석들도 떠난다고? 아아, 지난 몇 달간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결국 다들 같은 결론에 도달했나보네. 그럼 이곳은 아무도 남지 않게 되는 건가?”

라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은 남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상황을 지켜보겠다고 하더군요. 그 외엔 아마도 전부... 다들 지금의 낙원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인간들도 어느 배에 몇 명씩 태울지 정해진 상태입니다. 이건 저도 오늘 다른 분들한테 처음 들은 소식이에요.”

목적은 다 똑같은 거지?”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우리들을 위해. 인간의 동족들을 찾아 그곳에 새 낙원을 세우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 기대 그대로 이루어지면 좋으련만.”

뭔가 더 말을 이으려던 헤카티아가 아테나를 쳐다보곤 입을 다물었다. 희망으로 부풀어 있는 그녀에게 괜히 불길한 말을 덧붙이지 않으려는 헤카티아의 배려였다.

자리에서 내려온 헤카티아가 아테나와 함께 궁전 밖으로 나섰다. 남은 이틀 동안 바깥에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고 다른 신들과 안면을 트기 위함이었다. 공허한 어둠 속에 영혼들만이 반딧불이처럼 둥실둥실 떠 있는 사자의 세계를 가로질러 바깥 세계로 나가는 도중, 아테나가 헤카티아에게 물음을 던졌다.

아직도 가족이 될 생각은 없으신가요?”

아니~ 나는 됐어. 내가 알고 지내는 건 너밖에 없는데 이제 와서 아들이니 언니니 생겨서 뭐하게? 너만 동생 후보로 넣어두는 걸로 하지 뭐.”

가족관계엔 다른 이점도 있습니다. 인간들은 저희들의 가족관계를 진심으로 믿고 거기에 살을 덧붙여 이야기를 지어내 다른 동족들과 자손들에게 전달하죠. 이는 곧 신앙심을 기르는 양분이 됩니다. 연결된 가족이 없다면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 끼어들기 힘들 겁니다.”

가족놀이에 그런 의미도 있었구나. 누가 누구의 부모고 자식이라는게 그렇게 중요한가?”

세상 모든 현상은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인간들은 이 자연계 만물 사이의 인과관계를 우리들의 가족관계와 연결 지어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교대로 뜨고 지는 태양과 달은 사실 남매사이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처럼. 덕분에 우리들에 대한 믿음은 더욱 커져갈 테니 나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 것에 의존하는 건 나약한 녀석들이나 그런 거야. 지켜보라고. 나는 그런 가족놀이 없이도 언제까지고 지금의 입지를 유지할 거니까..”

그것도 예언...인가요?”

이 언니 말이 언제 틀리는 거 봤니?”

깔깔거리는 헤카티아의 웃음소리를 뒤로 하며 두 신은 빛으로 가득한 문을 통과해 이승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헤카티아가 아테나와 함께 이승으로 나오고 이틀 뒤, 지금의 지중해와 맞닿은 해변에서 예정대로 대규모의 출항식이 열렸다. 방주 형태의 거대한 배들이 해안가에 줄지어 있는 모습은 당대 원시 인류의 입장에선 하나하나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고개가 숙여지게 만들었다.

환호 속에 선택받은 인간들이 먼저 승선하고, 배의 항해를 이끌 신들의 그룹이 뒤이어 인간들의 절을 받으며 배에 올랐다. 아직 인간들에겐 항해 능력이 없었기에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것은 온전히 신들의 기량에 달린 것이었다. 승선한 신들은 저마다 맡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고 곧 물살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배가 하나 둘 먼 바다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출항 직전, 아테나는 낙원에 남기로 한 인간들을, 그리고 자신들을 따라 미지의 땅으로 떠나기로 한 인간들을 차례대로 둘러보았다. 남기로 한 인간들은 이곳에서 언젠가 다시 돌아올 자신들을 기다리며 옛 낙원을 지켜줄 것이다. 함께하기로 한 인간들은 미지의 땅에 뿌리내리며 새 낙원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것이다. 더 이상 신들은 다투지 않고, 인간은 신들의 가호 아래 언제까지고 번영할 것이다. 전쟁과 다툼이 사라지면 전쟁의 권능을 가진 자신은 이전보다 약해지겠지만 모두의 미래를 위해서 자기 하나 쯤은 얼마든지 약해져도 좋다고, 아테나는 마음 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마침내 출항 신호가 떨어지고, 아테나가 탄 배가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바다로 나아갔다. 새 낙원을 찾아 떠난 최초의 대항해, 이곳에서 지금 막 새로운 신화가 탄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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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항해를 거친 끝에 저희는 다른 원시 인류들이 무리지어 사는 땅을 발견했습니다. 완벽한 기후와 지형을 갖춘 그 곳은 낙원을 건설하기에 부족함 없는 곳이었죠. 그래서 저희는 그곳을 새 보금자리로 삼기로 결정했습니다.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인간들의 발전을 돕고,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덕분에 그곳의 인간들은 화려한 문명을 꽃피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계획은 성공적이었죠.”

하지만, 모든 것이 네 예상대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지. 넌 인간을 지나치게 신뢰했어.”

에이린의 말을 끊은 헤카티아가 그녀에게 툭 핀잔을 던졌다.

말씀대로, 그때 저는 인간들 안에 잠재된 짐승의 본능을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또 신과 닮은 존재들이라면 언제든 신의 추악한 면 또한 닮을 수 있다는 것을.”

그래, 너도 다른 녀석들도 인간의 악의를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어. 실제로 그들이 문명을 이룩하고 본격적으로 우릴 섬기기 시작했을 땐 다들 안도감에 젖어 뒤의 일은 생각도 않고 있었지? 너무 인간들을 오냐오냐해주면 큰일이 벌어질 거란 내 경고도 무시하고 더 많은 신앙을 얻기 위해 아낌없이 우리의 지식과 기술을 전수해주고 말이야.”

그에 대해선 후회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은 나약한 인류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이었어요. 꼭 우리들의 신앙을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에게 계속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던? 그때까지 베풀어준 은혜를 잊고 우리의 자리를 넘보지 않았던가? 너무 똑똑한 녀석들은 곤란해. 주는 대로 만족하지 않고 자꾸만 쓸데없는 생각을 품고 말거든. 고개 조아리는 인간들 속에 뒤에서 반란의 칼날을 갈고 있을 거란 생각을 정말 한 번도 안 해 본 거야?”

헤카티아는 신들이 인간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점을 경계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신들의 모임에서 종종 다른 신들과 갈등을 빚었고, 당시 리더였던 포세이돈과 특히 심하게 부딪혔다. 인간들에게 이따금 적절한 재앙내려 자신들에 대한 공포를 심어 줘야 한다는 헤카티아와 무한한 관용과 사랑을 베풀어 인간들이 스스로 경외심을 느끼고 겸손해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포세이돈은 거의 매일 같이 언쟁을 벌였고, 당시의 에이린은 그들의 싸움을 중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는 저희가 언제든 인간들이 엇나가지 않도록 바로잡아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래, 너는 쓸데없는 살생을 피하고 싶어 했으니까. 다른 녀석들도 포세이돈의 지혜를 믿고 그의 편을 들었지. 그렇게 인간의 악의를 얕보고 내 예지를 무시한 결과 무슨 일이 벌어졌지?”

헤카티아가 테이블 위에 각설탕을 줄지어 쌓아올리더니, 그 위에 자신의 잔에 담긴 차를 부었다. 물에 녹아내리기 시작한 설탕 탑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동시에 흘러내린 차가 테이블 전체로 퍼져나갔다.

어머, 뭐하는 짓이야. 옷이 다 젖어버리잖아.”

미안, 조금 감정이 격해져서. 이왕이면 직접 보여주고 싶었어.”

가장자리까지 닿은 물방울이 아래로 떨어져 그 자리에 앉은 모두의 옷을 적시기 직전, 시간을 되감은 것처럼 테이블을 흥건히 적신 차가 다시 헤카티아의 잔으로 빨려 들어갔다.

저주받은 탑, 그리고 이어진 대홍수. 인간의 신에 대한 도전은 어리석기 짝이 없었고 그 대가로 신들의 공분만 사고 말았지. 우리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던 모양이더라고? 인간은 다 똑같다니까~”

그리고 그때부터 당신은 변해버렸죠. 함께하던 우리와 길을 달리하기 시작했어요. 살아있는 자들을 함부로 벌하지 못한다면 죽은 이들을 벌함으로서 신의 무서움을 깨닫게 해주겠다며 궁전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외로운 스타트업이었어. 나중에 동업자를 만나서 얼마나 다행이지 뭐니. 그리고 달라진 건 나뿐만이 아니잖아? 다른 녀석들도, 너도 모두가 달라졌지.”

분노한 신들에 의해 한 차례 대숙청이 벌어진 후, 인간들에게 크게 실망한 신들은 새로운 근심거리를 얻게 되었다. 자신들에게 반기를 든 인간들을 차마 용서할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멸하자니 자신들의 존속이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신들은 인간들이 함부로 단합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뿔뿔이 흩어놓고 언어체계를 흩어놓아 함부로 인간들이 단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통치방식 또한 이전과 달라졌다. 이전처럼 계속 은총을 베풀되, 철저한 충성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신전을 짓게 하고, 주기적으로 제사와 공물을 바치도록 했다. 그렇지 않고 저항하는 이는 철저히 냉혹한 자연 속에 유린당하도록 방치했다. 또 인간들에게 위협적인 괴물을 창조하고, 인간 사이 다툼과 전쟁을 적극적으로 부추겨 자신들에게 더 많은 신앙을 바치는 무리만이 살아남도록 간접적인 솎아내기를 행하기도 했다.

모두의 마음이 돌아선 가운데 포세이돈만큼은 끝까지 인간의 선한 면을 믿고 그들에게 감정을 해소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신들의 반발을 살 뿐이어서, 결국 그는 리더의 자리와 함께 발언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새로운 리더는 인간을 솎아내는 데 제일 먼저 앞장섰던 포세이돈의 형제 제우스였다. 제아무리 지혜의 신이라 해도 한번 돌아선 여론 앞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나 다름없었다.

포세이돈이 몰락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너는 그를 속여 그가 가진 지혜를 모조리 빼앗아 지혜의 여신 자리에 올랐어. 그는 더 이상 필요 없어졌으니 가차 없이 버리고 네 자신의 안위부터 챙길 심산이었나?”

속여서 빼앗았다고, 그렇게 알려진 모양이군요.”

인간들 앞에서 그에게 망신을 주고 도시의 통치권을 가져간 건 유명한 이야기니까. 나를 포함한 모든 신들이, 그리고 인간들이 다 그렇게 알고 있어. 넌 전부터 사람의 재능을 파악하는데 탁월했으니까. 쓸모 있는지 없는지 구분 짓는 것도 확실했겠지.”

오해에요. 저는 결코 저 자신을 위해 그를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이용가치로 사람을 판단하지도 않고요.”

, 테이블을 세게 내려치며 헤카티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변명으로 일관하는 범죄자를 심문하듯, 험악하게 인상을 찡그린 헤카티아는 에이린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며 거칠게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오해? 네 악행이 만천하에 기록되어 내려져 오고 있는데 오해라고? 신들 사이의 전쟁이 발생했을 때 포세이돈은 허무하게 살해당하고 너는 그 뒤로 자취를 감췄잖아? 그 뒤로 여기저기 이름을 바꾸고 다니면서 도망 다니다가, 이쪽의 신들을 꼬드겨 달로 도망쳤어! 넌 비겁한 녀석이야. 기회주의자에, 사람을 장기짝 보듯 하는 녀석이지.”

끝까지 저를 믿어주지 않으시는군요......”

그 입으로 감히 신뢰를 논해? 말없이 떠난 건 네 쪽이었잖아. 날 찾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수 천 년 동안 날 피해 다녔잖아. 아아, 그러고보니 지금은 그 달마저 도망쳐 나온 신세였지. 이제 다음엔 누굴 버리고 도망칠 거지? 네가 애지중지 아끼고 모시는 이 공주도, 저 토끼들도 언젠간 다 버려지고 말겠지, 나처럼!”

이를 갈며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아챌 것처럼 주먹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헤카티아의 표정은 원망과 비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살기등등하게 에이린을 노려보는 헤카티아의 눈가에 눈물방울이 고였다. 한 번 폭발한 울분의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이윽고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눈물을 누가 볼 새라 재빨리 손으로 훔쳐내며, 목 메인 소리로 헤카티아가 말을 이었다.

네가 이렇게 이기적인 녀석이란 것을 알았다면 처음부터 따라오지도 않았을 거야. 그렇게 먼저 다가와 주었으면서. 가족이 되자고 했으면서. 어떻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처럼......”

인간은 신과 닮은 존재, 그것은 반대로 신 또한 인간과 비슷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신들에게도 희로애락이 있다. 이들도 이별의 아픔을 알고, 소중한 이가 떠나가면 그리워할 줄 안다. 그런 슬픈 감정의 홍수 앞에 마음이 꺾이고 상처받는 것은 신도 인간도 매한가지, 비단 지옥의 최고 여신이라 해도 당해낼 도리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겉으론 내색하지 않고 있었지만 헤카티아에게 아테나는 그 어느 누구보다 특별한 존재였다. 계획에 동참하긴 했어도 가족에 속하지 않아 신들 사이에서 겉돌던 그녀를 잊지 않고 챙겨주는 건 오직 아테나뿐이었다. 이미 아테나의 존재는 헤카티아를 지탱해주는 일부나 다름없었는데, 그런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떠나버린 것이다. 아무런 사정도 말해주지 않고, 좋지 않은 소문만 무성히 남긴 채.

처음에 헤카티아는 아테나에 대한 소문을 부정하며 그녀가 언젠가 돌아와 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거기에 전쟁까지 겹치자 헤카티아의 마음은 점점 지쳐갔다. 힘겨운 전쟁에서 살아남아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헤카티아의 주위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동료들은 죽거나 몰락해 자취를 감췄고, 자신들이 건설한 낙원이 무너져 내리는 마지막 날까지 아테나는 그들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헤카티아는 자신이 버려졌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녀에 관한 좋지 않은 소문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게 되었다. 믿음은 불신으로, 애정은 증오로 바뀌었다. 배신감에 치가 떨고 고독함에 몸부림치며 헤카티아는 아테나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하지만 원망의 감정 이면엔, 여전히 그녀에 대한 그리움과 일말의 애정이 남아 있었다. 왜 자신들을 떠났는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듣고 싶었다. 아니면 최소한 처음부터 자신들을 도구 취급했다고 말해주길 바랬다. 무엇이 됐든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나 본인의 입으로 모든 사실을 전해 들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용서를 할지 복수를 할지는 그 다음에 정할 일이었다.

서로의 관계를 완전히 매듭짓기 위해 헤카티아는 잿더미가 된 낙원에서 다시 일어섰다. 원래 하던 저승의 관리 역할은 동업자와 부하들에게 넘기고, 그녀는 전 세계를 누비며 아테나의 존재를 찾아 헤맸다.

헤카티아가 순호와 만난 것도 아테나를 찾아 떠난 여정 도중이었다. 처음엔 그저 흥미가 생겨 이야기를 들어본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헤카티아는 달의 도시와 이를 세운 달의 두뇌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지식의 신이란 존재에 대해 헤카티아는 의심을 품었다. 혹시 그녀가 아테나는 아닐ᄁᆞ? 마침 순호가 죽이려 하는 상아라 하는 자와 얽힌 악연도 있었겠다, 상아를 죽이고 달의 두뇌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 헤카티아는 순호와 손을 잡고 달 침략에 뛰어든 것이었다.

에이린은 이런 헤카티아의 자세한 사정까진 알지 못했지만, 최소한 그녀가 느꼈을 감정과 고통은 이해할 수 있었다. 에이린은 고민에 빠졌다. 이 자리에서 진실을 말할 것인가, 아니면 거짓으로 헤카티아와의 관계에 선을 그어 그녀의 생각대로 악인으로 남을 것인가. 에이린 스스로 선택을 내릴 시간이었다.

진실을 털어놓는다 해도 헤카티아의 울분이 풀린다는 보장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그녀의 상처만 더 헤집는 꼴이 될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진실을 숨기자니 헤카티아의 눈물과 옛날의 추억들이 마음이 무겁게 했다. 진실과 거짓 사이에 선 에이린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쩔쩔 매고 있을 때였다.

에이린, 더 이상 뭔가를 숨기는 것은 그만둬.”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구야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격앙된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둘의 주의를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에이린, 혼자 모든 것을 떠안으려 하지 마. 에이린은 늘 그랬지. 내 잘못도 자신이 책임지려 하고, 내게 해가 될 것 같은 일이 있으면 숨기거나 자기 선에서 처리하기 급급했어. 왜 그렇게 하는 거야? 나쁜 것을 혼자 전부 감당한다고 해서 나나 다른 사람들이 기뻐할 거라 생각해? 진실을 덮고 혼자 더러운 사람으로 남는 것이 남을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인거야?”

공주님......”

알고 있어, 덕분에 나도 에이린에게 많이 도움 받은 거. 하지만 나도, 다른 사람들도 도움 받기 이전에 사정을 알 권리가 있어. 네 손이 더러워지는 걸 원치 않을 수도, 오히려 이쪽에서 손을 내밀어 힘든 일을 분담하려 할 수도 있어. 에이린, 네가 상대를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그 상대도 너를 아낀다는 것을 알아줘. 정녕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면 그를 바보로 만들지 말아줘. 솔직해져. 떳떳해져. 네가 정말 옳은 길을 택했다고 생각한다면 말이야.”

담담하게 에이린을 꾸짖은 카구야는 이번엔 헤카티아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당신도, 일단 에이린의 말을 들어보자. 아까도 말했지만, 에이린은 바보같이 혼자 더러운 일을 죄다 떠맡으려 하는 일은 있어도, 태연히 남을 속여서 이익을 취하는 소인배는 절대 아니야. 그만큼 나는 에이린이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어. 당신도 에이린과 함께한 세월이 있잖아. 그럼 에이린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지 않아? 그런데도 에이린이 정말 당신과 모두를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당신에게 에이린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였어?”

정곡을 찔려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문 둘에게 카구야는 각자 자리로 돌아가 앉을 것을 권했다. 마음속으로 할 말을 정리하며,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며 잠시 숨을 돌리는 짧은 휴식 시간이 지나갔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정돈되자 이를 확인한 카구야가 에이린을 넌지시 불렀다.

말할 준비도, 들을 준비도 다 된 것 같네. 에이린, 이제 말해주지 않겠니. 네가 감춰둔 진실에 대해서. 이 자리에서 그간 쌓여온 오해를 더위와 함께 모두 날려 버리는 거야. 네 진심을 들려줘.”

카구야의 말에 에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깊숙이 묻어두었던 자신의 기억, 감정을 이제는 모두에게 털어놓아야 할 시간.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면 비난도 달게 받으리라. 떳떳하지 못했던 자신에게 쏟아질 원망이라도 감수하리라. 각오를 굳힌 에이린의 고백이 시작되었다.

 

 

 

 

 

 

 

 

 

 

-5-

포세이돈이 나를 자신의 궁전으로 초대한 것은 인간들이 봉납한 도시를 놓고 그와 벌인 경합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인간들의 신앙을 더 많이 얻는 쪽이 도시의 통치권을 얻게 되는 그 날의 경합은 나의 승리로 끝났고 포세이돈은 손아랫사람에게 패배한 무능한 지혜의 신이라는 오명만 뒤집어쓰고 말았다. 가뜩이나 좁아진 그의 입지를 완전히 짓눌러 버렸으니 나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턱이 없는데 어째서 그는 나를 자신의 궁전으로 초대한 것일까? 그의 의중이 궁금해진 나는 호기심 반 걱정 반 섞인 마음으로 그의 초청에 응하기로 했다.

바다 아래 위치한 그의 궁전은 화려한 외관과 대조적으로 사람이 거의 없이 텅 비어 있어 쓸쓸한 감상을 안겨주고 있었다. 저주받은 탑 사건 이후 인간에게 끝까지 친화적 이었던 포세이돈은 모든 지지 기반을 빼앗겨, 사실상 신들 사이에서 고립되고 말았다. 새로이 권력을 쥔 제우스가 산 위에서 떵떵거리는 동안 그가 시종도 거의 없이 이런 곳에 틀어박히게 된 건 그의 다 잘못된 선택 탓.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다 가진 그가 어째서 이런 어리석은 선택을 한 걸까. 한 때 그의 생각에 동조하던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왔는가, 아테나. 나의 조카, 나의 제자여. 기다리고 있었네.”

이렇게 불러주시는 건 처음이네요, 무슨 용건으로 부르셨는지요, 포세이돈님.”

그야 당연히 자네를 축하해주기 위해 불렀지. 사랑스러운 조카가 나를 넘어선 경사로운 날이 아닌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그가 나에게 이리 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그의 앞에 조촐하게 두 사람을 위한 상이 차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것일까, 의심이 앞선 나는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주저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인간들이 요긴한 가축과 소금을 포기하고 제가 가져온 나무를 택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자네가 나보다 인간들을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뜻이 되겠지. 인간들은 이 땅 어느 생물보다 빠르게 진화와 성장을 거듭하고 있어. 우리들이 그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다면 더 이상 예전만큼 그들에게 신앙을 얻어낼 수 없겠지.”

당신의 지혜로도 예측 불가능한 일인가 보군요.”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을 수도 있다네. 우선 좀 앉지 그러나. 나는 자네를 해하려 부른 것이 아닐세. 그러니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주었으면 좋겠군. 아끼는 조카님이 그러면 섭섭한 기분이 들지 않나.”

서글퍼 보이는 그의 눈빛을 본 나는 그의 요청을 더는 거부할 수 없었다. 정 때문에 추락한 신을 보면서 정에 휘둘려 이렇게 쉽게 경계를 풀다니, 나도 어쩔 수 없는 그의 제자인가 싶었다. 가까이서 본 그의 모습은 이전보다 더 초췌했다. 마치 무언가에 시달린 것처럼 핼쑥해진 얼굴과 허해진 몸 어디에서도 예전의 위용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단순히 권력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신이 이렇게 망가지지는 않을 것이다. 설마 그가 쇠약해진 이유가 오늘 나를 여기로 부른 이유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

생각이 너무 많군 그래. 이런 것 마저 나를 닮았군. 생각이 많은 것은 나쁘지 않다네. 깊게 생각할수록 남들이 보지 못한 먼 곳까지 내다볼 수 있게 되니 말일세.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에 사로잡혀 버려선 안 된다네. 지나치게 많은 것을 생각하려 하다간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정체 되어버리니 말이야.”

내 잔에 넥타르를 따라준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종종 나나 다른 신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상태를 귀신같이 눈치 채고 한 마디씩 던지곤 했다. 이것도 그 지혜로 내다보는 것인가, 마치 마음을 직접 읽힌 기분이다. 불쾌한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썩 기분이 좋지도 않은 것이었다.

곤란합니다, 이렇게 다 아시는 것처럼 행동하시면. 좋은 머리를 이런 음험한 데 사용하지는 말아주세요.”

자네도 나처럼 되면 알기 싫어도 다 알게 될 걸세. 상대와 함께한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예상할 수 있게 된다네. 상대의 생각은 물론이고 감정 변화, 행동, 심지어 충동적으로 벌이는 일까지도.”

그렇게 말씀하시니, 마치 이전의 경쟁은 일부러 져 주신 것처럼 느껴지는군요. 절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제 승부수를 예측 못 하셨을 리 없잖아요?”

자네가 생각하기 나름이네. 하하하! 말하지 않았나, 몸이 안 따라주면 소용이 없다고.”

벌써부터 노화가 시작되었다는 듯이 말씀하셔도 말이죠……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지.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나는 너무 뒤떨어진 존재인걸지도 몰라. 매일같이 새로운 신과 괴물들이 태어나는 요즘 같은 시대엔 말일세. 그래서 묻고 싶네, 아테나여. 그대는 내 지혜를 원하는가?”

너무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마시던 술을 하마터면 쏟을 뻔 했다. 도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두 번 세 번 곰씹어 봐도 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당황을 금치 못하고 있는 내게 되물었다.

내가 가진 지혜와 지식, 이 모든 것을 자네에게 준다면 받아들일 텐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농담으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농담 삼아 하는 말이 아닐세. 내가 자네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생각하다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고 그랬었지. 한심하게도 지금 내가 그렇다네. 인간들에게, 우리들에게 닥칠 끔찍한 운명이 보이는데 아무리 생각을 짜내도 다가오는 비극을 막을 방법이 보이지 않아. 이러고도 지혜의 신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 손으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면 지혜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끔찍한 운명이라니요. 저희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아니면 대적 불가능한 적이 나타나기라도 한다는 것인가요?”

그가 머리를 감싸 쥐고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떨리는 그의 숨소리에서 절박함이 느껴졌다. 이전부터 불길한 미래를 예지한 예언은 종종 있어왔다. 하지만 과거의 예언들은 인간의 힘을 빌려서, 또는 신들의 힘을 합쳐 어떻게든 최악의 상황을 면하고 피해를 최소화 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데 지혜로운 그마저 대책을 찾을 수 없는 큰 사건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세상에 종말이라도 닥쳐온다는 것일까.

천천히 고개를 든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조만간 큰 전쟁이 있을 거야. 신들 사이의 전쟁이. 수많은 신이 죽고, 몰락할 걸세. 그리고 신들의 시대에 종말이 도래할 걸세. 전쟁이 끝나고 나면 점차 인간은 신들을 등지게 될 것이야. 우리를 잊게 될 것이야. 낙원은 황폐해지고, 이 땅 위에 우리가 설 수 있는 곳은 얼마 남지 않게 될 것이라네.”

연약한 인간은 우리들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없으면 자연 앞에 무력하기만 한 인간들이 우리에게 등을 돌린다니요?”

자네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인간은 한 번 신에게 도전했다네. 그리곤 신들의 분노를 사 많은 이들이 숙청당하고 살아남은 이들은 흩어지게 되었지. 언뜻 보면 그들이 쓰라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들이 깨달은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네. 신들의 분노 뒤에 감추어진 두려움을 언젠가 그들이 우리를 넘어설 지도 모른다고 경계심을 인간들이 눈치 채 버린 걸세..”

우리가 그들을 두려워한다고요? 말도 안 됩니다!”

인간들이 우리와 만나기 이전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고 있나. 철저한 배척이었다네. 인간들은 자신들을 닮은 존재를 두려워했다네. 언제 그것들이 성장해서 자신들을 따라잡게 될지 모르니 말이야. 그래서 자신들과 닮은 존재들을 철저하게 멸하면서 현재의 입지를 굳혔지.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다른 개체들이 여전히 짐승 수준에서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 때문이라네. 우리는 인간과 닮았어. 그렇다면 그들처럼 우리도 인간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나.”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제우스를 떠올렸다. 그는 인간을 이용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였다. 재능이 있으면서 신들에게 충분히 공헌한 자는 신의 피가 섞였다느니 하는 이유를 붙여 신으로 승격시켜주고, 그렇지 않고 신들에게 반항하는 이는 그 가족까지 씨를 말려 버렸다. 포세이돈의 말대로라면 그의 행동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란 걸까. 그의 말이 조금씩 이해 가기 시작했다.

인간들은 이미 여기저기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네. 그들은 이미 멋대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어. 우리의 존재를 알려 신앙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세력을 통치하는 데 유용하게 이용하기 위해서 말일세. 우리는 생각과 믿음으로부터 탄생한 존재들일세. 인간들의 소문에 따라 얼마든지 정체성이 변질되고 힘이 약해질 수 있지. 더 이상 신화는 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야. 신을 인간의 번영을 위한 발판으로 전락시키는 도구가 될 걸세.”

너무 과한 추측이십니다. 그 말씀엔 근거가 부족하지 않습니까.”

두고 보면 알게 될 걸세. 이미 신들의 몰락은 시작되었다네. 국가를 세운 인간들은 서로 최고가 되기 위해 앞다퉈 경쟁을 벌이고 있지. 우리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지 않았나. 경쟁은 인간을 더욱 발전시키고, 머리 좋은 인간들은 금세 우리가 가진 기술을 따라잡고 앞서 나갈 걸세. 자연도, 질병도 모두 극복하고 그들 스스로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을 터득할 걸세.”

그 과정에서 신앙이 약화된다는 말씀이군요. 그럼 또 이전처럼 신들 사이에 다툼이 시작될 것이고요.”

지난 번과 차이가 있다면 이번엔 인간이 우리 싸움에 개입한다는 것이겠지. 그들은 이미 생각의 힘이 우리를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 우리를 이간질하고 변질시키며 서로 파멸하도록 유도할 걸세. 이 땅의 유일한 주인이 되기 위해서 그들은 신화에 마침표를 찍으려 할 걸세.”

그럼 그 사실을 다른 신들에게 알리면 되지 않습니까? 모두에게 경고하고 힘을 합쳐 인간들의 술수를 이겨내도록 하면 충분히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어요.”

인간은 이곳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네. 이쪽의 반란을 진압한다 해도, 어디선가 신을 넘어서는데 성공한 인간들이 생겨날 거고 그들이 다른 인류를 지배할 걸세. 우리의 노력은 모두 헛수고가 될 거고, 신들의 시대는 반드시 끝을 맺을 수밖에 없어. 그 이전에 신들이 인간에게 위기의식을 느낄 리도 없겠지만 말이야.”

다 소용 없는 일이라면 저한테는 왜 그 이야기를 해주시는 거죠?”

자네는 영리하잖나. 낙원이 위기에 닥쳤을 때도, 자네의 생각이 모두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 그런 자네라면 내가 찾지 못 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 때는 미지의 가능성에 걸어볼 수라도 있었고 모두의 협력이 있었으며 인간들도 우리들에게 순종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암울한 미래가 확정된 상황이 아닌가. 다른 신들도 협력해주기는커녕 약해지지 않기 위해 서로 싸워댈 것이 뻔하고, 인간에게 협조를 구할 수도 없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 혼자서 어떻게 다가올 신들의 종말을 막으란 말인가. 행동하기를 포기하고 내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그에게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건 책임회피입니다! 모든 부담을 제게 안기고 혼자만 편해지려고 하시는 겁니까! 이럴 거면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게 두고, 저도 모두와 같이 종말을 맞이하게 내버려두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럴 수는 없네. 자네는 내가 제일 아끼는 조카이자, 우리들 중 가장 강직하고 행동력 있는 신이야. 나는 그런 자네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시 이 땅에 신들의 시대를 열어 줄 희망이 되어 줄 거라 믿는다네.”

말도 안 돼요. 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런 사명 같은 걸 받아들일 수!!!”

그가 내 이마에 손을 뻗었다. 부드럽게 내 이마에 얹은 그의 손을 타고 그가 가진 만물에 대한 지식이, 지혜가 밀려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가 뜨거웠다. 순식간에 너무 많은 것을 받아들인 머리가 고통을 호소했다. 나도 그가 우려했던 끔찍한 미래가 예상되기 시작했다. 신들이 서로 자멸하고 인간이 신을 등지는 모습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상상을 초월한 고통과 충격을 감당할 수 없었던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신음하며 속에 있는 것을 모두 게워내고 말았다.

아테나여, 자네만큼은 나처럼 정체되는 일이 없었으면 하네.”

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건네준 그가 내 머리에서 손을 떼고 내 앞에 무릎 꿇었다. 토사물에 몸이 더러워지는 것을 아랑곳 않고, 슬픈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그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정말 미안하네... 자네에게 이렇게 할 밖에 없던 나를 용서해 주게. 원망해도 좋고 분이 풀리지 않는다면 내 목숨을 거두어도 좋다네. 그저 내가 바라는 건 하나뿐일세. 자네만큼은 살아남아 주게. 끝까지 살아남아 자네의 행복을 찾게나. 내 마지막 부탁일세.”

이기적인 사람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저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요.”

거의 흐느끼다시피 하며 나는 한 맺힌 말들을 연신 뱉어냈다. 나 스스로도 무슨 말을 중얼거렸는지 알 수 없었다. 의식이 몽롱했다. 눈앞이 자꾸만 흐려졌다. 횡설수설하는 내게 그가 뭔가 계속 말을 건네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곳을 떠나게. 자네라면 이 넓은 땅 어딘가에 존재하는 행복의 낙원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이것이 유일하게 내가 알아들은 그의 마지막 전언이었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그의 품에 쓰러져 의식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그 뒤 어떻게 그의 궁전에서 나와 나의 신전으로 돌아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나는 내 거처에 와 있었다. 몸은 진작 일어설 기력을 잃었고, 정신이 듦과 동시에 복잡한 생각이 가득 들어찬 내 머릿속은 나를 또다시 혼미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드러누워 끙끙거리며, 곧 닥쳐올 예지를 반복해서 보고 또 보며 존재하지 않는 답을 찾으려 애썼다. 결과적으로 무의미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얼마만일까, 머리는 여전히 지끈거렸지만 그래도 몸에 어느 정도 기력이 돌아온 나는 오랜만에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서자마자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포세이돈, 그리고 아폴론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포세이돈은 누군가에 의해 궁전과 함께 시체도 남기지 않고 불타버렸다고 했다. 아폴론은 멀리서 찾아온 신이 쏜 화살에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연달아 벌어진 가족들의 죽음에 모두의 표정은 시종일관 어두웠고, 그들 사이에서 불온한 분위기가 술렁이고 있었다.

나는 나를 향한 모두의 시선이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 내가 포세이돈이 가진 지혜를 얻고 지혜의 여신 자리를 얻었다는 사실을 신도, 인간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와 함께 내가 그를 술자리에서 속여 지혜를 빼앗았다는 소문이 낙원 구석구석까지 퍼져 있었다. 가족들은 내게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날 배신자로 낙인찍었고, 내가 다스리는 도시의 인간들은 이때다 싶어 자기들 멋대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마구 지어내 자신들의 권위를 치켜 올리는데 사용했다.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신들의 적이고, 인간들도 나를 정치적 도구로밖에 여기고 있지 않았으니까. 이곳은 이미 내게 낙원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때 혼란스러워하던 나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존재가 떠올랐다. 나와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고, 내 사정을 듣고 이해해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존재, 헤카티아. 그녀에게서 마지막 남은 희망의 빛을 본 나는 곧장 헤카티아가 지내는 저승세계로 향했다.

오랜만에 방문한 저승세계는 이전과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이전의 저승이 그저 망자들의 영혼이 머물다 가는 곳에 불과했다면 지금의 저승은 망자를 재판하고 벌하기 위해 철저히 체계를 갖추고 조직화 되어 있었다. 텅 빈 곳이었던 저승엔 어느새 뱃사공과 문지기, 옥졸, 괴물 등이 가득 들어서 공간을 채워주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모습을 숨기며 저승의 최심부, 헤카티아의 궁전으로 이동했다. 혹시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들은 누군가에게 시비가 걸리지 않을까 시종일관 가슴을 졸이면서 발걸음을 옮긴 나는 천신만고 끝에 겨우 그녀의 거처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었다.

헤카티아님, 안에 계십니까. 이 아테나, 당신을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응답이 없었다. 나는 실례인걸 알면서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그녀의 궁전은 텅 비어 있었다. 본인은 물론 그 넓은 공간 안에 시종 하나조차 남아 있지 않은 궁전 안엔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어수선하게 짐을 챙기다 만 흔적이 여기저기 남은 것으로 보아, 다들 급하게 이곳을 떠난 듯 했다. 헤카티아에게도 안 좋은 일이 닥친 것인지 불길한 생각이 들던 그 때였다.

당신이곳엔 무슨 일이죠? 혼란을 틈타 저승에 무슨 짓을 벌일 셈인 건가요?”

내 뒤에서 가냘프지만 차가운 분노가 서려 있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기에, 나는 그녀를 자극하지 않도록 최대한 천천히 몸을 돌리며 그녀를 마주했다.

페르세포네님

저승의 또 다른 관리자, 하데스의 처인 계절의 여신 페르세포네가 나를 경멸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헤카티아님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몰래 숨어들다니, 당신에 관한 소문들이 역시 사실이었나 보군요.”

아닙니다! 저는 오늘 헤카티아님께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헤카티아님이 자리를 비운 줄은 몰랐어요. 저에 대한 소문도 사실이 아닙니다. 모두 오해에요!”

거짓말. 헤카티아님과 가까운 당신이 그 분이 전쟁을 벌이러 가신 것을 모를 리 없잖아요.”

전쟁이요?”

시치미 떼지 마세요. 아폴론님이 살해당한 것에 대해 헤카티아님이 크게 분노하고 계신 것을 모르셨나요? 저와 남편 앞에서도 부하를 전부 끌고 가 범인과 관계된 모두를 죽이겠다고 몇 번이나 으름장을 놓은 걸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정이 있어서 잠시 세상과 연을 끊고 지냈었기 때문에 포세이돈님과 아폴론님이 살해당했다는 사실도 바로 얼마 전에 알았습니다. 정말이에요!”

당신이 포세이돈님을 죽이고 지혜를 강탈한 것이 아니었나요?”

빼앗은 것이 아니에요! 그 분이 직접 넘겨주셨단 말입니다.”

나는 필사적으로 항변하며, 그 날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차마 다가올 전쟁과 신들의 종말에 대해서는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불길한 미래를 계속 예지하는 것에 지친 포세이돈님이 당신께 지혜의 신 역할을 물려주셨단 말이군요.”

믿기 힘들겠지만 그것이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아직 뭔가 감추고 있는 것이 있죠? 그래선 설득력이 없어요. 나조차도 그런데, 형제를 잃고 분노한 내 남편이나 다른 분들이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나 할 지.”

헤카티아님도 제게 얽힌 소문을 알고 계신가요?”

포세이돈님이 살해당한 건 아폴론님이 살해당하기 훨씬 전의 일이니 당연히 알고 계시죠. 하지만 그 분은 우리 앞에서 당신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어요. 당신을 믿고 있어서 그런 건지, 배신감을 느끼고 당신이란 존재를 잊고 싶어지신 건지.”

어디로 가야 그 분을 만날 수 있는 지 아시나요?”

자세한 행선지는 몰라요. 동쪽으로 가셨다는 것밖엔.”

그거면 됐습니다. 나머진 제가 직접 헤카티아님을 찾아가서 말씀드리죠.”

이곳을 떠나려고요? 다른 신들은 당신이 살인죄를 추궁 당하고 벌을 받을까봐 도망쳤다고 여길 텐데.”

하나하나 해명하고 다니기엔 주어진 시간이 부족해서요. 우선 제가 가장 믿고 있는 분께 모든 것을 말씀 드리고 도움을 요청하려 합니다.”

정말 그분께 해를 끼치지 않을 거죠?”

이곳 스틱스 강에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거짓을 고하는 것도 약속을 어기는 것도 허락되지 않은 절대적인 맹세를 입에 담은 내게 페르세포네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세요.”

그녀가 나를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그녀는 어지간한 사람 키만큼 긴 활과 화살을 들고 나오더니 이를 내게 건네주었다.

이걸 들고 가도록 하세요.”

이건……?”

아폴론님이 돌아가시며 남긴 활 중 하나에요. 헤카티아님이 보관하고 계시던 것을 안 계신 동안 제가 관리하기로 했죠. 다짜고짜 헤카티아님을 찾아 가면 그분이 당신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겠어요? 제가 믿고 보내준 거라 하면서 이 활을 증표로 보여 주세요. 안 통할 지도 모르지만 아예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야 낫겠죠.”

결국 믿어주시기로 한 건가요?”

여전히 의심스럽기는 해요. 하지만 당신은 아레스님처럼 폭력으로 원하는 걸 손에 넣으려 하는 분은 아니니, 괜히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 같긴 해요. 그래도 조심하세요. 가족이 두 명이나 살해당한 것 때문에 다들 분노로 이성을 잃어 가고 있으니. 다른 분들과 마주치면 싸움을 피하긴 힘들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할지......”

그보다 어서 여길 떠나세요. 잠깐 나갔다 온다는 게 시간을 너무 끌었네요. 제 남편은 집착이 심하니까 곧 여기로 절 찾아 들이닥칠 거예요. 남편과 마주치면 곤란한 상황이 펼쳐질 테니 그 전에 빠져 나가도록 하세요.”

홱 등을 돌려 궁전 밖으로 향하는 페르세포네에게 나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저승의 어둠 속에 녹아들어 궁전을 빠져 나가는 동안,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말다툼하는 소리가 먼 발치에서 얼핏 들려왔다. 아무래도 날 위해 그녀가 시간을 벌어주는 듯 했다. 마지막까지 배려해준 그녀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저승을 빠져 나온 나는 그 길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페르세포네에게 받은 활 한 자루만 달랑 들고서, 동쪽으로 향한 내 정처없는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끔찍한 기근으로 죽음의 땅이 되어버린 옛 낙원을 지나, 모래가 끝없이 펼쳐진 지역을 가로질렀다. 어쩌다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을 때마다, 나는 헤카티아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내가 가진 지식을 활용해 그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다.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고육지책으로 짜낸 방법이었지만, 다행히 효과는 있어 여기저기에서 신앙이 모여들고 새로운 신화가 탄생했다. 그 과정에서 내게 새로운 이름과 신격이 부여되기도 했다.

모래로 뒤덮인 땅과 작별을 고하자 이번엔 나무와 풀숲이 울창하게 자란 땅이 시작되었다. 그 지역을 돌아다니던 중 나는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신들을 만날 수 있었다. 신의 자리를 넘보는 괴물들과 통제에서 벗어나는 인간들에게 시달리고 있던 그들은 내 사정을 듣고 크게 공감하며 주위 정보를 수집해주는 등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도움의 대가로 나는 그들 중 가네샤 라고 불리는 자에게 내 지혜 일부를 나눠주어, 그들의 낙원을 지킬 힘을 보태 주었다.

그 지역 신들이 마련해준 배를 타고 나는 다시 바다로 나섰다. 항해 도중,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나는 우리의 낙원에서 결국 우려하던 신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추운 북쪽 지역의 신들이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신앙에 불만을 가지고 거인들과 함께 우리 낙원을 침략한 것이다.

헤카티아를 찾느라 시간감각이 둔해져 있던 나는 결국 운명의 때가 닥쳐올 때까지 아무 것도 해내지 못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내 처지를 비관할 새도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에서 비슷한 전쟁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신들이 마구잡이로 휘두른 능력은 이 세계 전체를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설상가상으로 난 그 여파로 발생한 해일에 휘말려 망망대해를 표류하게 되었다.

아무도 구하지 못했고, 목적지도 목표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는 허무함과 자괴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나도 포세이돈과 똑같은 존재였던 것이었다. 그렇게 정체되어 버린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은 듯 배에 드러누워 조류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어디로든 흘러가 버리라지. 이제 뭐가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 없는 것이었다.

얼마나 긴 시간을 떠돌았을까, 긴 잠에서 눈을 뜨자 어느새 나는 육지에 도착해 있었다. 내 배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내가 눈을 뜨자 화색을 띠며 요란스럽게 나를 환영해주었다. 갑작스러운 환영인사에 어리둥절해진 나를, 그들은 어딘가로 모셔가기 시작했다.

내가 도착한 곳은 하늘 위에 세워진 신들의 나라였다. 타카마가하라라고 불리는 그곳은 내가 살던 낙원보다 훨씬 규모가 컸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신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렇게 신이 많은 지역은 본 적 없었다. 그런데도 이들에게선 신앙이 부족한 낌새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세상을 뒤집어 놓은 전쟁의 여파를 겪은 것 같지도 않았다. 어떻게 이런 곳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곧장 궁금해졌다.

날 이곳으로 이끈 이들 중 한 명이 내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이곳은 4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거대한 섬으로, 육지와 고립되어 있는 특성 탓에 비교적 다른 곳보다 문명의 발달이 미흡한 곳이었다. 덕분에 그곳은 인간들의 신에 대한 의존도가 각별히 높았고,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신격을 부여하며 신앙을 바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신을 섬기는 것이 곧 일상인 그곳은 그야말로 내가 거쳐온 낙원들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 곳에서 나는 이전에 알고 지냈던 반가운 얼굴들과 재회했다. 우리들처럼 방주를 타고 낙원을 빠져나갔던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일행이었다. 표류 하다 이 섬까지 떠내려 온 나를 알아본 그들이 사자를 보냈던 것이다. 또 그들은 내가 여기저기에 지식을 전파하고 다닌 지혜의 여신이란 사실 또한 알고 있었고, 이를 눈여겨보아 내게 극진한 대접을 해주었다.

타카마가하라에서 호화로운 삶을 누리는 동안 나는 이곳 신들이 크게 두 분류로 분류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 이자나기와 가족의 연을 맺고 타카마가하라의 건립을 도운 이들은 아마츠카미, 이후 번영한 신앙에 의해 그 땅에서 후천적으로 생겨난 토착신들은 쿠니츠카미라 불렸다. 두 신 사이엔 암암리에 지배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물론 지배하는 쪽은 아마츠카미 쪽이었으며 이들은 중앙 집권의 형태로 뭉쳐 각지의 토착신들을 굴복시킨 뒤 자신들의 휘하에 두고 있었다. 불합리한 시스템 같았지만 외부인인 나는 그들의 체제에 함부로 간섭할 수 없어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나는 틈틈히 아마츠카미들에게 바깥의 소식과 함께 헤카티아의 행방을 물어보았다. 그들은 곧 옆 대륙에 정착한 신들과 주고받은 몇 가지 이야기들을 내게 일러 주었다. 아폴론의 살해는 옆 대륙의 인간들이 사주한 것이며, 이를 받아들인 후예라는 궁술의 신이 각지의 태양신을 살해했다는 것, 정작 후예 본인은 그들을 살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처에게 살해당했다는 것까지. 헤카티아는 뒤늦게 대군을 이끌고 대륙에 쳐들어 왔다가 후예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내가 섬에 도착하기 훨씬도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고 했다.

그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는 착잡해졌다. 헤카티아는 어디로 간 것일까. 비슷한 시기에 신들의 전쟁이 발발했으니 그 전쟁에 휘말렸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헤카티아 성격에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는 이를 가만 두고 볼 리 없으니 말이다. 결국 소식은 얻었으나 헤카티아가 어디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착잡함은 곧 그리움으로, 그리움은 절망으로 변했다. 결국 제자리걸음이었다. 몸은 호의호식하고 있어도 여전히 내 마음은 갈 곳도, 기댈 곳도 없었다.

절망에 빠진 나는 때마침 내 안부를 물으러 찾아온 츠쿠요미라는 신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우리 낙원에서 벌어진 일부터 앞으로 닥칠 종말의 예언까지. 내 무력함에 지친 나는 앞으로 어째야 할 지 모르겠다며 그에게 쌓여있던 울분을 잔뜩 토해냈다.

내 한 맺힌 자학을 츠쿠요미는 가만히 들어주었다. 그리곤 내게 다정히 속삭였다. 신들의 시대가 영원히 이어지는 낙원을 세울 방법을 알고 있다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선 내 지식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는 지금 신들이 인간과 너무 가까이 지내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고귀하고 우수한 존재인 신들이 인간과 너무 가까이 지내다 보니 그들에게 물들어버려, 나약하고 추악한 면까지 닮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 땅에서 나고 자란 모든 생명은 더러움이 가득하다고 했다. 더러움이 있기에 짐승도 인간도 본질은 추악하며 이들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쿠니츠카미 또한 더러움이 가득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또 한 번의 항해를 제시했다. 더러움이 만연한 이 땅을 버리고 깨끗한 정토에 새 낙원을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제시한 새로운 낙원의 후보지는 바로, 하늘에 떠 있는 달이었다.

실로 주도면밀한 계획이었다. 아마츠카미들만 데리고 달로 천도하여 그곳에 신들의 국가를 세운다. 신앙은 지상에 남은 쿠니츠카미들로 하여금 모아 바치도록 하고, 동시에 아마츠카미들은 인간들의 신앙이 끊길 때를 대비하여 그들의 존재와 힘을 유지할 기술을 개발한다. 그렇게 달은 완전히 지상으로부터 독립시켜, 극락정토에서 영원한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만들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신이 소멸하는 것 또한 더러움이 묻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인간의 더러움으로 인해 인간과 다름없게 되어 결과적으로 신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 소멸의 원인이라고 했다.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비판하고 들어갈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절망과 상실에 빠져있던 내게 그의 제안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것으로 여겨졌다. 마치 자세히 들여다보면 울퉁불퉁하지만 멀리서 얼핏 보면 매끄럽게 보이는 달처럼 말이다.

츠쿠요미는 내게 신들이 인간으로부터 완벽히 독립하게 되면 지상에 남은 다른 가족들도 낙원으로 불러올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곧바로 그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내 지혜와 힘을 빌려주기로 결정했다. 신을 배신하는 인간의 운명 따위는 내게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신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낙원을 건설해 그곳에서 가족들과 재회하기 위해, 나는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마츠카미의 사회 속에 녹아드는 일이었다. 이름도, 모습도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모두 바꾸고 새로운 가족의 연도 맺었다. 난 더 이상 아테나가 아니었다. 야고코로오모이카네라는 지식의 여신으로서, 나는 내가 가진 지식을 총동원하여 그들을 도와주었다. 달까지 이어지는 항로와 방주를 설계했고 인간들로부터 낙원을 감출 결계를 고안해냈다. 그 외에도 건축, 무기, 생활 등등 모든 면에서 내가 손을 뻗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나는 달 천도에 필사적이었다.

츠쿠요미는 신들을 포섭하고 설득하는 일을 맡았다. 나를 구워삶는데 성공할 만큼 그의 화술은 놀랍도록 설득력 있었고, 대륙, 반도, , 그 일대 거의 모든 신들이 그의 계획에 동참해 모였다. 달의 도시가 완성되고 몇 달 후 신들이 타카마가하라에 모여들었다. 한 척의 거대한 방주에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올라탔다. 출항식이 이루어지는 자리에 인간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날은 오직 신들의, 신들에 의한, 신들을 위한 자리였다. 방주가 둥실 하늘로 떠올랐다. 38km의 거리를 항해한 끝에 마침내 신들의 무리가 새로운 낙원, 월면에 발을 디뎠다.

달의 도시에서 나는 공로를 인정받아 높은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달의 두뇌라며 모든 신들이 나를 추켜세워 주었고, 많은 이들이 내게 의지했다. 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 달을 지상보다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놓았으며 더 이상 신들이 인간에게 얽매여 살 수 있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나날이 달의 도시는 번성했으며 나는 평화와 안정을 되찾았다. 만일에 대비해 제자를 여럿 두어 군사, 정치,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내 빈자리를 대신할 수 있게 했음은 물론이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단 하나, 나를 제외하고서 말이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로운 대인관계 속에서 내 안의 아테나로서의 정체성이 희미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수 세기가 흐르도록 헤카티아나 예전 가족들의 소식을 듣지 못했고, 이곳의 주민들은 모두 나를 달의 두뇌, 오모이카네로 대할 뿐 내 과거에 대해 언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대로 괜찮은걸까. 내가 나 자신이 아니게 된 것만 같았다. 낡은 부분을 전부 새 것으로 뜯어고친 배는 이전의 배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실로 그러한 처지였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다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이 옛날과 달라져 있었으니까. 언젠가 예전 가족들과 재회했을 때, 과연 그들은 지금의 나를 받아줄까?

그런 고민을 이어가던 중 한가지 의구심이 들었다. 달의 도시가 완공된 이래 지상에서 새로 이곳으로 찾아와 새로운 주민이 된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쿠니츠카미들은 물론 옛 낙원의 일원이었던 신들도 누구 하나 이곳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지상의 신앙은 나날이 약해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설마 달의 도시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일까? 나는 츠쿠요미에게 찾아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지금이라도 지상의 신들을 구제해야 되지 않느냐는 질문과 함께. 그러나 그는 태연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곤란합니다. 이제 겨우 달의 도시는 단 한 점 더러움 없는 이상적인 땅이 되었는데, 지상의 더러움을 가득 묻힌 자들이 우르르 몰려오면 이 곳마저 오염되지 않겠습니까. 아직은 시기상조입니다, 야고코로 공. 지상에 남은 자들의 처우는 좀 더 두고 보고 천천히 생각하도록 하지요.”

약속한 내용과 다르지 않습니까? 새 낙원이 완성되면 지상에 남은 가족들도 방주에 태우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공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구제해주기로 약속한 건 가족들 뿐. 이젠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고 처음부터 우리들과 함께하지도 않은 먼 옛날 이웃들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지요. 쿠니츠카미들은 이 정토에 발을 들이기에 격이 너무 낮은 존재들이고요. 이미 시종이라면 옥토끼들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들과 함께한 저의 가족들은 이곳에 올 자격이 충분하다고 보는데요.”

, 그들 말이죠. 야고코로 공의 마음 이해합니다. 우리도 마음 같아선 그 분들은 이곳으로 모셔오고 싶지요. 하지만 그들은 이미 오래 전에 소식이 끊기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서 생사유무조차 알 수 없는 공의 가족들을 찾기 위해 인원은 파견한다고 한들 누가 감히 자원하려 하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지상의 더러움에 물들어 이곳에 돌아오지 못 하게 될 수도 있는데도요.”

그럼 그들을 찾는 걸 포기하겠다는 뜻인가요? 절 속인 겁니까?”

해석이 과하시군요.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 무모한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공의 가족들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들어온다면 그 때 그분들이 계신 곳으로 사자를 보내도록 하지요.”

말은 그럴싸하게 하고 있지만 사실상 포기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지상과 접촉하는 것 자체를 꺼리면서 어디서 정보를 모을 것이며 지상에선 누가 그들의 행방을 찾아 준다는 말인가.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나는 누구를 위한 낙원을 만든 것인가. 내 가족들이 설 자리 없는 낙원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모든 것을 다시 무로 돌려 놓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내가 오모이카네로서 이곳에서 맺은 관계들이, 나를 부모처럼 따르고 스승처럼 존경하는 수많은 얼굴들이 생각났다. 그 생각에 발목이 잡힌 난, 츠쿠요미의 능글맞은 미소를 보면서도 차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희망은 다시 날개를 잃고 추락하고, 기대는 체념이 되어 살아갈 의지를 꺾어놓았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무미건조한 시간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와중, 나는 그 아이와 만나게 되었다. 카구야라고 불리는 그 아이는 유달리 호기심이 왕성해 매일같이 달과 지상에 대한 질문을 내게 던지곤 하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고 그 과정에서 스릴을 즐기는 그녀의 태도는 편안한 현재의 삶에 안주하려는 다른 달의 주민들과 확연히 달랐다.

카구야가 내게 찾아오는 일이 늘며 자연스럽게 나는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주위에선 내 시간을 지나치게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냐며 우려를 표했지만 난 오히려 즐거웠다. 그녀는 다른 이들과 달리 나를 대할 때 거리를 두지 않았고 스스로를 혹사시키는 내게 쓴 소리를 아끼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녀와 있으면 상실과 절망으로 인한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 마음에 난 구멍이 조금씩 메워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점점 더 카구야에게 애착을 느끼게 되었고, 점차 나는 그녀를 진짜 가족처럼 대하게 되었다. 투정이나 응석도 받아주고, 때론 그녀를 위해 궂은일도 마다 않는 등, 그럴수록 주위의 우려는 점점 깊어져만 갔지만 나는 상관없었다. 이제 겨우 내가 있을 곳을 찾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카구야의 호기심은 끝을 몰랐고 그녀의 관심은 조금씩 지상의 일과 같이 달의 도시에선 금기나 다름없는 영역에도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카구야가 부탁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의향이 있었던 나는 그런 그녀를 만류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결국 카구야를 향한 나의 무른 태도가 큰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내가 제조해준 봉래의 약을 카구야가 금기를 깨고 복용한 것이다.

불로불사, 섭리를 벗어난 무한한 삶에 욕심을 가지는 행위는 살인보다 그 죄가 무거운 것이었다. 달의 중요 인물이 둘씩이나 연루된 이 사건에 온 도시가 발칵 뒤집혔다. 도시를 다스리는 중책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몇 날 며칠 동안 우리들을 추궁하고 심문했다. 나는 모든 것이 나의 실책이라고 항변했다. 카구야의 호기심을 부추기고 주의사항을 전달하지 않은 내 잘못이라고. 나는 모든 죄를 뒤집어 쓸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대로 지상으로 쫓겨나거나 영원히 어딘가에 유폐된다 해도 상관없었다. 나는 카구야만 무사하면 그걸로 되었다. 그녀가 중벌을 피할 수만 있다면, 소중한 그녀가 불행해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나는 필사적으로 카구야의 선처를 호소하고 또 호소했다.

하지만 나의 간절한 외침은 그들에게 닿지 않았다. 그들의 판결에 따르면 카구야는 지상으로 추방, 나는 가벼운 근신 처분. 외부 여론을 신경 쓴 정치적 판단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아직 쓸모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내 시간을 빼앗고 풍기를 어지럽히는 카구야는 그들에게 눈엣가시나 다름없던 존재였으니 이번 사건은 나와 그녀 사이를 갈라놓을 좋은 기회가 되었으리라.

카구야마저 잃고 또 다시 애끊는 슬픔에 빠진 내게 츠쿠요미는 능청스럽게 형기를 마치면 카구야를 달로 다시 데려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되면 다시 그녀와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봉래의 약을 먹은 상아가 어찌 되었는지, 그녀를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 지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한 걸까? 그들은 나를 이용할 속셈이다. 카구야는 달에 돌아오는 즉시 유폐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평생 이 도시에 부려 먹히겠지. 상아의 죗값을 대신 치르는 달토끼들처럼 말이다.

모든 것에 환멸이 느껴졌다. 무엇이 신들의 낙원이냐. 무엇이 더러움 없는 세상이란 말이냐. 자기들 입맛대로 신분을 가르고, 배척하고, 인간들이 하는 짓과 다를 바 없지 않나. 내가 꿈꾸던 세상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그런데, 내가 원하던 세상의 모습은 무엇이었지? 나는 어떤 삶을 원했지? 인간을 늘리고, 신앙을 얻고, 새 낙원을 건설하고, 그 모든 것을 통해 나는 무엇을 얻고자 했지?

아아, 그렇구나. 나는 지금껏 대의를 따르며 그것이 내 소망이라고 착각하고 있었구나. 모두가 원하는 바를 이루면 나도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도타인의 행복이 나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데도. 그럼 내 소망은 무엇이었지? 소망을 이루려면, 내가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낙원? 신앙? 아니, 그런 건 다 필요 없어. 내게 필요한 건 오직 하나, 가족 뿐이야.

나는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표면상으론 그들에게 협조하는 척 하며 조용히 뒤에서 다가올 때를 준비했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사탕발림에 속아 넘어간 줄 알고 있었겠지만 한 발 앞서 있던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마침내 카구야가 귀양살이를 마치고 달로 돌아오는 날이 되었다. 죄인이자 내 고삐를 틀어쥘 도구에 불과했던 카구야의 귀환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엉성한 경비를 뚫고 나는 카구야를 데려오도록 명 받은 사자들 사이에 숨어들었다. 옛 고향 땅을 떠나올 때처럼, 활 한 자루만 챙겨 들고. 이번엔 절대 눈앞에서 행복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소중한 가족을 잃지 않을 것이다. 각오를 다진 내 눈 앞에서 지상으로 향하는 관문이 열렸다. 사자들의 뒤를 따라 나는 지상에 발을 내디뎠다. 죽림 한가운데 우리를 마중 나온 카구야가 보였다. 그리고 나는

 

 

 

 

 

 

 

 

-6-

그 뒤는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겠지?”

, 그렇습니다. 공주님.”

정리하자면 에이린은 예나 지금이나 가족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을 위해 앞장서 온 거네. 자신이 소모되는 것도 아랑곳 않고. 어쩜내가 아는 에이린의 모습이랑 하나도 다르지 않았구나.”

어깨를 으쓱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반응하는 카구야, 그런 그녀의 입가엔 옅게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래도 기쁜걸. 에이린이 날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직접 들을 수 있어서. 에이린이 자기 이야기를 해준 것도 이번이 처음이고. 이 기쁨을 차마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해 아쉽지만, 중요한 건 내 감상이 아니니까. 그쪽은 어때. 이제 좀 에이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카구야가 헤카티아에게 시선을 던지며 질문했다. 그녀는 에이린의 고백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복잡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침묵한 그녀의 손 위로 에이린이 자신의 손을 포개며 말했다.

당신에게는 몇 번이고 모든 사정을 이야기하고 다시 함께 하자고 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얄궂게도 운명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그게 저에 대한 오해와 악감정만 키워놓고 말았군요. 정말면목 없습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은 거야? 몇 번이고 말할 기회가 있었잖아. 심지어 저번엔 나를 모른다고 부정하기까지 해놓고선!”

다시 만나게 된 당신이 순호의 협력자가 되어 달을 침략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비록 달의 도시를 등지고 도망쳐 나왔지만 그곳을 제가 일구어낸 것도 엄연한 사실. 제가 구해내고 가르친 많은 이들이 아직 달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전 달의 도시가 침략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달의 도시에 복수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고요. 서로 적으로 돌아선 입장에서 제가 옛날 일을 꺼낸다고 하여 무엇이 이로울까요.”

고작 그런 이유로 날 부정했다고? 소중한 가족이었다며!”

당신과 제가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 새로운 이들이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주었습니다. 지금의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한때의 가족을 막아서야 하는 기분이 어떤지 아시나요? 제 이야기를 들었으니 당신도 느끼게 되겠죠. 순호와 제 사이에서 당신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순호를 도와 저를 쓰러뜨릴 방법을 찾을 지, 저를 위해 순호와의 관계를 끊을 지. 어느 쪽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테죠. 죄책감을 안고 가는 것은 저 하나로 족하길 바랐습니다.”

에이린이 안타까움 섞인 시선을 떨구며 말끝을 흐렸다. 헤카티아는 호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땅거미가 내려앉아 어둑어둑해진 물가에서 순호가 레이센과 함께 물놀이의 뒷정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손으로 에이린의 체온을 느끼며, 눈동자 안에 순호를 담으며 헤카티아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누구를 골라야 할 지 고민했다. 물론, 결정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포세이돈님이 죽기 전 제게 그러셨죠.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사로잡히지 말라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는 것은 최악이라고요.”

……

이것 하나만 알아주세요. 저는 누구도 잊지 않았다는 것을, 저 또한 모두와 단절되어 있는 동안 살아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고통에 시달려 왔다는 것을요. 저희 사이의 오해를 거둔 것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저와의 인연을 잊지는 말되, 지나간 추억에 연연하여 현재의 인연을 손에서 놓지 말아주세요. 부디, 앞으로도 순호의 곁에 남아 있어 주세요.”

너와 너의 도시를 적대하는 짓인데도? 한 번이라도 우리의 계획이 성공하면네가 아끼는 녀석들이 어떻게 될 지 몰라.”

물론 진심으로 막을 겁니다. 저도 제게 소중한 이들을 지켜야죠.”

만약에 언젠가 우리 중 누가 죽어야 하는 때가 온다면?”

아무도 죽지 않는 방법을 찾아내야지요. 지금의 저는 답을 찾지 못해 도망치거나 포기하지 않으니까요.”

하여간예나 지금이나 말은 잘해.”

시간은 좀 걸렸지만, 결국 제 진심이 당신에게 통하는 것도 옛날과 다름 없네요. 솔직히, 믿어주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거든요.”

널 의심했으면 처음부터 널 따라 나서지도 않았을 거야. 고지식하고 솔직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머리 굴리고 뭐 그러긴 해도 네가 그렇게 비열한 녀석은 아니니까. 널 오해한 건 내가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해서 그랬던 것 같아. 가족은 살해당하거나 흩어졌지, 복수는 실패했지, 그러다 보니 분노에 사무쳐서 네가 어떤 심정일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서로 싸우기도 하고 오해하기도 하지만 언제든 다시 화해하고 서로를 이전보다 더욱 깊게 이해하게 되는 것, 그런 게 바로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건 신앙을 모으기 위한 놀이에 불과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나도 가족이 없으면 안 되는 존재였구나.”

낙원은 멀리 있지 않았어요. 나와 소중한 사람이 함께 즐거운 시간을 쌓아갈 수 있는 곳이 곧 낙원.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건 진짜 가족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 이번엔 네 말이 맞다고 해줄게.”

에이린의 손을 맞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헤카티아가 그녀와 짧게 재회의 악수를 나누었다. 오랜 시간을 지나 먼 길을 걸어온 곳에서 마침내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데 성공한 에이린의 표정은 실로 후련해 보였다. 그 편안해 보이는 미소에 싱긋 웃어주며, 헤카티아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은 행복한 거지?”

, 더없이 행복합니다. 이제야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어요. 영원정의 모두가 제 가족이고, 이 환상향이 저의 낙원입니다.”

그래. 네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거겠지. 계속 행복해야 해, 아테나.”

지금은 에이린이랍니다. 그게 지금의 가족들이 부르는 저니까요..”

에이린좋아, 나도 이 편이 마음 편히 널 적으로 상대할 수 있으니까.”

후후, 그렇지만 경기 전에 한 약속은 지켜주셔야 해요?”

, 분위기 좋았는데 그 얘길 지금 꺼내기야!? 치사해! 아까 한 말들 다 취소 해버린다?”

그건 그거, 이건 이거라는 거지~.”

어두워진 호숫가에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번져나갔다. 이윽고 세 명을 중심으로 밝게 번져나가는 분위기에 이끌려 하나 둘 정리를 마친 인원들이 그들에게 모여들었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에이린이 손뼉을 치며 모두를 주목시켰다.

, 정리는 다 끝난 것 같으니 슬슬 돌아갈 채비를 하죠. 물론 그 전에 오늘의 마지막 일정, 야외 식사부터 하고 말이죠. 우동게, 불을 피워주렴. 테위랑 토끼들은 재료들을 꺼내오고, 공주님은어떻게 하시겠어요?”

~ 좋아. 나는 그럼 음식에 독이 있나 없나 검사를 맡을게.”

다들 일하는 앞에서조금은 자제해 주세요.”

저기~ 우리가 도울 건 없어? 가만있으면 심심하잖니.”

상을 차리는 걸 거들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니면 우동게를 도와주셔도 좋고요.”

잠시 후, 밝게 타오르는 불꽃으로 일대의 어둠이 걷혔다. 축제처럼 흥겨운 분위기 속에 행사를 마무리 하는 야외 바비큐 파티가 펼쳐졌다. 이 시간만큼은 아군과 적의 구분이 없었다. 하나 되어 술잔을 나누고 같이 식사를 하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두의 얼굴엔 저마다 웃음꽃이 만발해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 너머로 즐거워하는 모두의 모습을 지켜보며, 고기를 구워 덜어주던 에이린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긴 생애 동안 방황하다 겨우 찾은 행복을 만끽하며.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이 특별한 시간이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기를 바라며.

, 에이린. 오늘 고기는 특별히 더 맛있는 것 같네. 비싼 재료를 구해온 거야?”

아뇨, 특별한 건 고기가 아니라 고기에 곁들인 재료랍니다.”

흐응이런 거 지금까지 한 번도 해준 적 없었잖아.”

어머, 모르셨군요. 그 재료는 제가 기르던 나무에서 딴 열매랍니다. 고기를 재울 기름도 거기서 짜내고, 곁들인 절임도 그 열매로 만든 것이죠. 작년부터 비로소 수확이 가능해져서 올해부터 선보일 수 있던 거랍니다.”

그럼 앞으론 자주 기대 해봐도 되는 거지?”

특식이니 특별한 날에만 이에요.”

카구야에게 고기가 담긴 접시를 건네 돌려보내며 에이린은 병에 담긴 검은색과 초록색의 열매들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그녀 옆으로 다가온 헤카티아가 그중 하나를 슬쩍 집어 먹으며 에이린의 귓가에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올리브라, 너다운 선택이네. 직접 기른 거라고?”

그곳과 이곳은 환경이 달라 조금 애먹긴 했죠. 마음에 드시나요?”

아주 훌륭해. 그런데, 이 올리브도 그렇고 너, 너무 티를 냈단 말이지. 이런 식으로 꼬리를 드러내고 다니면 언젠간 결국 내가 네 정체를 눈치 챘을 텐데.”

어머, 그렇게 보였던 걸까요?”

설마 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

“... ...?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불을 살피느라 방금 말은 못 들었네요.”

~ 아냐 아냐, 고기가 떨어졌으니 한 접시 더 달라구~ 너무 바싹 익히진 말고.”

헤카티아는 캐묻는 것을 그만 두었다.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어쩌면 그녀는 은연중에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란 것이 아닐까. 분명 반가웠으리라. 수천 년의 세월을 건너 가족과 재회한 기쁨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떳떳하지 못 한 처지여서, 솔직해지는 것이 두려웠던 그녀는 이런 식으로 단서를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어렴풋이 에이린의 마음이 짐작 가는 헤카티아였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동생이라니까. 그러고서 뭐가 지혜의 여신이라는 거니, 바보 녀석.”

고기를 입에 물고 샐쭉 거리는 헤카티아에게 에이린은 눈웃음으로 답했다.

지상에 펼쳐진 작은 낙원, 그 낙원을 축복하듯 잔잔한 호수 수면에 밝게 떠오른 달이 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