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팬픽

여섯 번째 난제 ~ A Tragically Frozen Heart

교토대동방학과 2021. 3. 7. 22:01

[카구야 x 레티 동방 SS 입니다]

-1-

일년 중 가장 긴 밤이 찾아오는 동짓날 밤, 나는 어떤 꿈 속에 있었다. 같은 상황이 몇 번이고 계속해서 반복 되는 꿈. 시작은 어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암흑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곧 내가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다. 굳게 감긴 눈을 조금씩 뜨자, 눈꺼풀 사이로 밀려든 환한 빛이 따갑게 눈을 찌르며 시야를 하얗게 가린다. 천천히 빛의 안개가 걷히면서 나와 마주 앉아있는 한 남자가 보인다. 부석부석한 머리에 빛 바래고 낡은 의복, 거기에 얼굴 절반을 덥수룩하게 덮은 수염까지, 귀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추레한 모습의 남자다. 그와 내 시선이 마주친다. 세월의 풍파가 느껴지는 그의 주름진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내 마음까지 녹여버릴 것 같은 따스한 웃음을 지으며, 그가 굳은살 박힌 손으로 내 손을 꼬옥 잡아준다. 따듯하다 못해 뜨겁게까지 느껴지는 그의 체온과 함께 그의 손으로부터 무언가가 내 손 안으로 전달된다.

내게 쥐어진 물건이 무엇인지 나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굳이 고개를 숙여 그것을 확인하려 한다. 하지만 그 순간 어색하게 필름을 잘라 이어 붙인 것처럼 장면이 전환된다. 나는 숙이다 만 고개를 번쩍 치켜들어 주위를 확인한다. 밝고 따사로운 햇살은 온데간데 없이, 어두운 밤하늘에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고 있다. 그 남자는 여전히 내 앞에 있다. 아까보다 서글픈 눈빛을 한 채로. 그가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한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 지 알고 있다. 안 돼, 말해선 안돼. 그 일을 입에 담아선…! 다급히 손을 뻗은 나는 그의 입을 틀어막아서라도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내 손이 닿고, 그와 함께 그의 몸이 산산이 부서져 간다. 그는 더 이상 살아 숨쉬는 생명이 아니었다. 피 한 방울, 세포 하나까지 얼어 붙은 얼음 기둥. 기둥은 요란하게 무너져 내려 한 무더기의 얼음 가루로 변하고, 가루는 곧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집어삼켜져 어둠 속으로 흩어진다. 얼음 결정 하나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눈보라가 그치고, 나는 다시 암흑 속에 홀로 남게 된다. 이후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기나긴 밤 동안 같은 장면이 지겹게 반복되었다. 세는 것도 지쳐서 포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을 뜨길 거부할 수도, 그에게 무언가를 받길 거부할 수도, 그의 입을 틀어막을 수도, 얼어붙은 그가 산산조각 나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나는 방관자였다. 나는 무력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간 지옥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누구라도 좋으니 이 끔찍한 꿈에서 깨워 달라고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악몽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침 햇살의 온기를 가득 머금은 뜨뜻한 공기가 주위를 휘감는 숨막히는 느낌에 비로소 나는 긴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평소라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온기 지만 이 날만큼은 반갑기 그지 없었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눈을 떴는데도 그 자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고개를 내저어 마지막 남은 잔상까지 떨쳐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양이 한창 동쪽 하늘에서 떠오르는 중이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는 것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흔치 않은 중요한 날이다. 이런 날에 늦잠 따윌 자서 천재일우의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나갈 채비를 하기 위해 서둘러 다시 어둑어둑한 집 안으로 들어왔다.

몇 번이나 정탐을 통해 확인 했어, 예정 변경 같은 건 없을 거야.”

옷깃을 여미며 나는 흐릿하게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을 다독였다. 한 번 결심한 마음이 이제 와서 흔들릴 리는 없지만 목숨을 걸고 강행하는 일이니 스스로 안심 시키는 정도는 해 두는게 낫겠지. 생각해보면 요괴가 죽는 걸 두려워해 일을 벌이지 못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무릇 요괴라면 요괴답게 마지막까지 남들을 해치다 퇴치 당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오늘 해칠 녀석은 지금까지 해쳐온 어떤 녀석들보다도 특별하다. 나의 행복, 나의 가족,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간 나의 원수. 그 녀석이 멀쩡히 살아서 내 주위를 활보하고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내가 해야할 일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설령 내가 죽어 무로 돌아가는 일이 있더라도 그 녀석만큼은 반드시 죽일 것이다. 형체도 남지 않게 해서 이 세상에 그 녀석이 존재했다는 흔적을 지워 버릴 것이다.

복수심에 내 피와 심장이 더욱 차갑게 얼어 붙는 것이 느껴졌다. 거울 안쪽에서 서늘한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그 동안 세운 계획을 다시 한 번 정리했다. 모든 준비가 완벽한 것을 확인한 뒤 밖으로 나선 나는 빠르게 하늘을 가로지르며 그 녀석이 있는 곳을 향했다. 인적이 드문 대나무 숲 한가운데, 인두겁을 뒤집어쓴 비열한 악당한테 어울리게 꽁꽁 숨겨진 장소, 영원정이라는 곳으로.

 

-2-

영원정의 앞마당에 서리꽃이 하얗게 내려앉았다. 흙도 초목도 토끼의 털처럼 보송보송한 순백 결정으로 뒤덮은 마당의 경관을 툇마루에서 내려다보던 레이센이 기지개를 폈다. 심호흡과 함께 차가운 아침 공기가 폐 안으로 흘러 들어오자 남아있던 잠기운이 깨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웃옷을 걸쳐도 살이 아릴 정도로 냉기가 파고들어오는 쌀쌀한 겨울 아침이었지만 굳이 이런 날 실외로 나오기를 택한 레이센의 표정은 추위 따윈 잊어버린 듯 행복한 미소가 가득 번져 있었다.

보기 드물게 운수가 좋은 날이었다. 에이린은 마을의 서당 선생으로부터 겨울철 아이들 질병 예방에 관한 상담을 요청 받아 동이 트자 마자 자리를 비웠고, 틈만 나면 짓궂은 장난을 꾸며대는 테위와 다른 토끼들도 단체로 어딜 가버렸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는 곧 당장 레이센을 터치하거나 곤란하게 만들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 흔히 말하는 무두절이었다.

불쑥 찾아온 행운이 가져다 준 자유에 레이센은 생각 같아선 제자리에서 뿅뿅 뛰며 환호성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텐션이 올라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들떠도 기본적인 가사는 처리해야 후환이 두렵지 않을 터. 마침 슬슬 카구야가 일어날 시간이었다. 에이린이 오전 동안 부재중이란 사실은 카구야도 이미 알고 있으니 대신 레이센에게 아침식사와 함께 이런저런 요구를 해올 것이 뻔했다. 모처럼의 휴식시간을 공주에게 휘둘리다가 날려버릴 수는 없는 일, 그렇다면 끝없는 요구가 시작되기 전에 이쪽에서 미리 선수를 치자. 얄팍한 묘수를 떠올리며 레이센은 공주의 아침을 미리 준비하기로 결심했다. 잠이 덜 깼을 때에 딱 맞춰 아침을 내가면 별다른 잔심부름을 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막연한 생각으로부터 얻어진 결론이었다.

부엌엔 전날 동지를 쇠기 위해 준비했다가 미처 다 쓰지 못하고 남은 호박 서너 덩어리가 켜켜이쌓여 있었다. 이대로 방치하면 썩을 것이 분명하고, 썩은 호박을 퇴비로 처리하는 것은 레이센의 몫이 될 것이 뻔했다. 지금 미리 처리 해두는 편이 좋겠지, 호박 한 덩어리를 번쩍 들어 올리며 레이센이 중얼거렸다. 호박 하나가 통으로 들어간 영양죽에 단호박 조림과 튀김, 거기에 호박 샐러드까지 부엌 가득 영롱한 노란빛의 향연이 펼쳐졌다.

정말이지 훌륭하지 않을 수 없는 재고 처리 능력을 자찬하며 레이센은 카구야를 위한 1인 상차림을 모두 마쳤다. 일거리를 한 번에 두 개나 덜었다는 생각에 콧노래를 절로 흘러나왔다. 총총 가벼운 발걸음으로 긴 복도를 지나 카구야의 침실 앞에 도달한 레이센이 그녀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말했다.

실례합니다, 공주님. 일어나 계신지요.”

그럼. 아침 식사를 가져온 모양이구나. 들어 오렴.”

방문 너머에서 나긋나긋하고 청아한 목소리가 레이센의 부름에 답했다. 조금 이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레이센은 공손히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평소보다 아침이 빠르네. 에이린이 없어서 신난 모양이구나?”

아하하그럴 리가요. 날이 추워서 그런가, 오늘따라 일찍 눈이 떠져서 말이죠~. 공주님도 오늘은 일찍 기상하셨네요?”

정곡을 찔린 걸 숨기려 말을 돌리면서 레이센은 카구야를 바라보았다. 누가 깨우는 일 없이 카구야가 스스로 일찍 일어나는 일은 상당히 드물다. 보통은 에이린이나 레이센이 깨우러 오거나 해가 거의 중천에 가까워져야 일어나기 마련인데, 오늘 카구야는 스스로 일찍 일어나 있는 것은 물론 화장과 몸단장까지 마친 상태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아니면 오늘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그런 레이센의 신기하다는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챈 카구야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말하니 내가 매일 늦잠만 자는 것 같잖아.”

,아뇨! -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없는데 복식까지 다 갖춰 입으시고, 무슨 중요한 손님이라도 오시는 건가 싶어서요. 그런 얘긴 들은 적이 없었거든요.”

손님이라, 예를 들면?”

모코우씨라던가요?”

그 아이를 맞이하는데 이렇게 차려 입을 필요는 없는 걸. ”

그럼 다른 분 인가요?”

꼭 누가 찾아오지 않아도 몸을 꾸밀 수 있는 거야. 귀족이란 원래 언제 어디에서라도 기품을 유지해야 하는 법, 공주인 나도 그렇게 하는게 당연한 거잖아?”

틀린 말씀은 아니네요.”

그보다, 상차림이 이게 뭐니. 이것도 호박, 저것도 호박, 전부 호박이잖아. 이나바, 상 차리기 귀찮으면 귀찮다고 말하지 그랬어. 이래서야 잔반 처리나 다름 없잖아?”

레이센이 들고 온 상차림을 훑어본 카구야가 퉁명스럽게 쏘아 붙였다.

......잔반이라뇨. 전부 새로 만든 것이라구요?”

남은 재료를 처분하기 위함이니, 사실상 그게 그거지.”

그렇지만 먹지 않고 두면 전부 썩어버리는 걸요.”

요리법도 너무 진부하고. 이래서야 어제 먹은 거랑 거의 다를 게 없어. 호토우라던가 서양풍 스프라던가, 좀 더 많은 선택지가 있었을 거 아니니?”

반찬투정으로 들리긴 해도 전날 질리도록 호박을 먹은 사람에게 또 호박을 대접하는 셈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불만이었다. 좀 더 편해지려고 꼼수를 부리다 제대로 발등을 데인 레이센은 카구야의 볼멘소리를 그저 숙연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편법을 쓰는 요령이 부족하다니까, 이나바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처럼 차려온 상을 거부할 수는 없으니 잘 먹을게. 대신!”

대신…?”

아직 용서한 건 아니니까. - 그래. 계속 달착지근한 것만 먹었더니 좀 새콤한 게 먹고 싶어졌어. 후식으로 딸기를 준비해 주겠니, 이나바? 이왕이면 산미가 강한 산딸기로.”

이 겨울에 말씀이십니까?”

그래. 주위에서 구하지 못하면 마을에서 찾아보거나, 아니면 네가 알고 지내는 누군가가 저장해 둔 것이 있지 않겠어? 오래 걸려도 좋으니까 부탁할게. “

뜬금없이 카구야가 꺼낸 억지스러운 요구사항에 레이센이 난처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 엄동설한에 산딸기를 구해오라니, 사실상 나가서 죽도록 고생이나 해보라는 뜻이 아닌가. 폭거도 이런 폭거가 없었다. 귀한 휴일을 모조리 날리게 생긴 레이센이 카구야의 말에 소심하게 반박했다.

조금 무리가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말린 과일이라면 모를까, 이런 날씨 속에 신선한 산딸기를 가지고 있을 사람은 온 환상향을 다 뒤져도 없을 거라구요…”

혹시 모르잖니? 지극정성으로 찾아 다니면 어느 산 속의 신이 그 마음씨에 감복하여 산딸기를 내어 줄 지도. 아니면 에이린에게 대신 말할 수밖에 없으려나? 이나바가 오늘은 일할 의욕이 없는 것 같으니 에이린이 대신 내 부탁을 들어줘야겠어- 라고.”

다녀올게요. 그러니 스승님께 오해 살 만한 말은 삼가 주세요. 부탁 드려요…”

저항하려 해도 둘 사이엔 주인과 종자라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카구야의 고집은 완고했고 거기에 대고 똑같이 고집 부려봤자 곤혹을 치르는 것은 레이센 뿐. 결국 아늑한 휴식시간에 대한 기대는 완전히 산산조각 난 채 공주에게 떠밀려 나갈 채비를 서두르는 레이센이었다.

정 못 찾는다면 어쩔 수 없지. 해지기 전까지만 돌아오렴. 에이린도 그때쯤이면 돌아오지 않을까?”

다 알고 계시면서, 너무하세요……”

요령을 피우려면 좀 더 처신을 잘 했어야지.”

평소 약장사를 나설 때 입는 복장 위에 두꺼운 외투를 꽁꽁 싸매고서 대문 밖으로 나서는 레이센을 카구야는 짤막한 손인사와 함께 배웅했다. 혹시 지금이라도 명령을 거두어주지 않을까 아쉬운 마음에 흘끗 뒤를 돌아본 레이센이었지만 거기엔 방금 떠나 보낸 레이센은 안중에 없다는 듯 자신의 방으로 휙 돌아가버리는 카구야의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언제나 을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한숨을 폭 내쉬며, 그렇게 레이센은 마을을 향해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레이센이 영원정을 떠나고 난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카구야는 잘 차려진 아침상 앞에 다소곳이 정좌했다. 레이센이 내온 아침식사는 만들고 나서 시간을 꽤 지체하는 바람에 본래 가지고 있던 온기를 거의 잃어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먹으려 하면 먹을 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카구야는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식욕이 없거나 반찬투정을 부리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카구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이 방금 닫은 미닫이문을 응시했다. 숨을 죽이고, 입가에 걸린 옅은 미소마저 지운 채 카구야는 그저 가만히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모두가 자리를 비운 영원정에 카구야 혼자 남게 된 지 어림잡아 1시진은 지났을 때였다. 이미 그녀 앞에 놓인 음식은 차디차게 식어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방 안을 데워주던 히바치(화로)에서 타오르던 불꽃도 한참 전에 꺼져 숨을 내쉴 때마다 입가에 하얀 김이 서렸다. 바깥에는 때아닌 눈보라라도 불어 닥치기 시작했는지,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며 나무로 된 문을 인정사정 없이 후려치는 소리가 사납게 울려 퍼졌다.

덜컹거리던 문이 풍압을 이기지 못하고 슬쩍 열렸다. 그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좁은 틈새로 차가운 겨울바람과 함께 눈보라가 사납게 들이치며 가뜩이나 추운 방 안 온도를 더욱 떨어뜨렸다. 추위에 장시간 노출된 카구야의 몸이 말단부터 파랗게 변색되기 시작하고 그녀가 내쉬는 숨은 몸 밖으로 나오는 즉시 얼어붙어 그녀의 피부를 얼음결정으로 뒤덮고 있었다. 그럼에도 카구야는 고통스러워 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불을 지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히 정면을 바라보기만 하던 카구야가 돌연 나직한 목소리로 문 밖을 향해 말했다.

모습을 드러내시지요. 거기 있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사납게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일순 잠잠해졌다. 여전히 추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입김마저 얼어붙게 만들던 방 안의 한기도 기세가 꺾인 것이 느껴졌다. 말 몇 마디에 잠잠해진 날씨, 이것은 그녀를 덮친 이 추위가 당연히 일어나는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밖에서 미닫이 문이 열어젖혔다. 아니, 얼어붙어 있던 문짝을 강제로 잡아 뜯었다고 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문짝이 뜯겨져 나간 휑한 구멍을 통해 아까보다 많은 양의 눈과 바람이 들이닥쳤다. 그 한가운데, 이 기상이변의 주모자로 보이는 낯선 방문자가 눈보라를 등지고 우뚝 서있었다. 헝클어뜨린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을 확인하긴 힘들었지만,그녀 손에 들린 서늘하게 날 벼린 손도끼가 그녀가 결코 호의를 품고 이곳을 찾아온 것이 아님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카구야 공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둘의 목소리가 동시에 교차한 직후, 짧은 침묵이 찾아왔다.

-3-

마을에서의 용무를 모두 마치고 영원정에 돌아가기 위해 죽림에 들어선 에이린이 제일 처음 느낀 것은 죽림을 가득 채운 요기였다. 본래 미혹의 죽림은 온갖 요괴와 요수들이 득실거리는 곳, 요기가 조금 감지된다고 하여 전혀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 날 만큼은 달랐다. 평소의 죽림이 약한 요기가 이것저것 뒤섞여 정돈되지 않고 난잡한 느낌이었다면, 지금 죽림 가득 넘실거리는 이 요기는 매우 강력하고, 동시에 매우 순수했다. 요괴의 기운이 순수하다고 하면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지금으로선 이를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마치 자연 현상의 하나인 것처럼 공기 중에 녹아 있는 사악한 기운, 그 이질적인 기운을 다른 요괴들도 눈치챘는지 죽림 안엔 오직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죽림 안의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순수한 요기는 죽림 안쪽으로부터 새어나오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방향에 영원정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에이린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에이린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아침에 내린 서리가 미처 다 녹지 못했을 정도로 추운 날씨임에도 초조해진 에이린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빽빽한 대나무 사이로 익숙한 영원정의 윤곽이 어슴푸레 드러날 즈음이었다. 에이린의 시야에 낯익은 인물의 뒷모습이 보였다. 레이센이었다. 분명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영원정을 지키고 있어야 할 그녀는, 무력하게 땅바닥에 주저 앉아 자신의 팔을 부여잡고 연신 괴로운 신음만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우동게,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니!”

스승님! 큰일이에요. 영원정이공주님이……!”

에이린의 다그침에 레이센이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이린은 당장이라도 레이센을 추궁할 기세로 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레이센이 가까워짐에 따라, 그녀의 상태가 점점 자세히 관찰되었다. 돌연 에이린의 성난 발걸음이 뚝 멈추었다. 레이센을 내려다보는 에이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한쪽 소맷단이 완전히 찢겨나가 노출된 레이센의 팔은 붉은 색으로 부어올라, 곳곳이 보랏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곳곳에 물집이 잡힌 손가락은 망가진 관절인형마냥 어색하게 뒤틀린 채 굳어 미동조차 않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팔 전체가 괴사하기 직전의, 심각한 동상이었다.

에이린이 신속히 자신이 두른 목도리를 풀러 레이센의 팔을 감싸주었다. 그리곤 자신의 품으로 감싸 안아 자신의 체온으로 차갑게 얼어붙은 팔을 녹여주었다. 임시방편인 응급처치였지만 동상이 더욱 심각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선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레이센의 표정이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어서 영원정으로 돌아가 치료를 해야겠어. 이대로 계속 바깥에 방치하는 것은 위험해.”

안 돼요, 스승님. 지금 영원정에 들어가시면…”

레이센이 힘겨운 숨을 몰아 쉬며 멀쩡한 팔을 들어 영원정 방향을 가리켰다. 방금 전까지 레이센에게 정신이 팔려 보지 못했던, 영원정을 덮친 이변이 눈에 들어왔다. 죽림에 들어서며 느꼈던 수상한 요기가 결계처럼 영원정을 온통 에워싸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바깥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요력의 결계 안쪽은 내부 상황을 겨우 확인할 수만 있을 정도로 짙은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눈과 얼음에 파묻힌 영원정, 생명이 살아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 그 광경은 대멸종을 불러 일으킨 빙하기가 다시 한 번 닥쳐온 듯한 끔찍한 재난 현장 그 자체였다.

저 안에 들어가시면 안 돼요. 눈보라에 아주 잠깐 닿은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몸이 얼어붙었어요. 몇 초만 늦었어도 팔을 잃게 되었을 거예요.”

레이센을 부축하며 일어난 에이린이 그녀를 데리고 결계 앞에 섰다. 마치 방금 레이센이 한 말을 시험해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곧바로 팔을 뻗은 에이린이 결계 안쪽으로 손끝을 살짝 집어넣었다. 움찔, 에이린의 몸이 떨리며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스승님?!”

눈이 휘둥그레진 레이센이 다급히 에이린을 끌어당겼다. 뒤로 밀린 에이린이 비틀거리며 자신의손을 확인했다. 그녀의 손이 눈보라에 노출 된 건 10여초밖에 안 되는 극히 짧은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손은 얼음 조각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툭 치면 그대로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은 손, 이미 거센 바람에 손가락이 두 개 정도 떨어져 나간 상태였지만 얼마나 단단하게 얼었는지 손가락이 잘려 나간 자리에서 아무런 출혈도 통증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괜찮으세요? 스승님, 어서 치료를 하지 않으면...!”

허둥거리는 레이센을 뒤로 물리고 에이린은 태연하게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손을 감고 절단부위를 동여매었다. 죽지 않는 몸을 가진 그녀에게 이 정도 부상은 하루 정도면 회복될 터, 손가락 한한 두 개 잃은 것 쯤은 지금 에이린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우동게, 공주님은 안에 계신 게 확실하지? 다른 토끼들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공주님의 심부름을 나왔다가 심상찮은 요기가 느껴져서 돌아와보니 이미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어요. 토끼들이라면 테위를 따라 죄다 어디론가 가버려서 제가 나왔을 땐 영원정엔 공주님밖에 안 계셨어요.”

공주님이 심부름을 시켰다는 건 무슨 소리니?”

그게아침 식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서 이 겨울철에 산딸기를 구해오라고 하셨습니다.”

에이린은 곧바로 카구야의 의중을 눈치챘다. 만약 레이센이 영원정에 있을 때 이 이변이 시작되었더라면 추위에 대항할 방법도, 죽어도 되살아나는 몸도 가지지 못한 그녀는 그대로 꽁꽁 얼어 동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레이센을 지키기 위해, 카구야는 일부러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그녀를 밖으로 내보낸 것이리라. 그렇다는 건 카구야는 이런 일이 닥쳐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럼 왜 미리 에이린에게 적의 습격을 예고하지 않은 것일까. 왜 하필 에이린이 자리를 비운 날 적이 쳐들어오기 쉬운 환경을 만들어 둔 것일까. 일련의 카구야가 벌인 행동은 아무리 봐도 그녀 스스로 죽음을 각오하고 침입자를 정면에서 맞이하려 했다고 밖에 설명되지 않는 것이었다.

공주님, 어찌하여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이신 건가요… …”

스승님, 공주님은 괜찮으신 걸까요?”

무력하게 당하고만 계실 분은 아니지만, 모르는 일이야. 한시라도 빨리 이 안으로 들어가 구해내지 않으면 안 돼.”

에이린이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약이나 술식이라면 얼마든지 있었지만, 아무 도구도 재료도 없는 지금 지어내기엔 시간을 오래 잡아먹을 것이 분명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느긋하게 술식이나 짜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곧장 눈앞의 결계를 돌파, 또는 제압 가능한 물건, 또는 인물.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무언가를 깨달은 에이린이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우동게, 지금 마을로 가자꾸나.”

? 마을은 갑자기 왜요?”

나와 같이 사람을 좀 찾아줘야겠어. 아까 서당선생이 그 아이와 약속이 있다고 했었으니 지금쯤 마을 어딘가에 있을 거야. 문제는 그 아이가 공주님을 위해 움직이냐는 건데.”

그 아이라면… … !”

한 박자 늦게 말뜻을 이해한 레이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확실히 이 일엔 적임자가 있었다. 아무리 강한 추위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고, 만일의 상황에도 목숨 잃을 염려 없는 최고의 조력자 후보가.

곧바로 영원정을 등진 에이린과 레이센이 죽림 바깥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며 얼핏 돌아본 영원정은 어느덧 한가득 쌓인 눈에 뒤덮여 건물의 윤곽조차 보이지 않게 되고 있었다. 1 1초라도 지체할 틈이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카구야를 구해내기 위해, 둘은 빽빽한 대나무 사이를 헤치며 달리고, 또 달렸다.

-4-

바깥에선 레이센이 영원정에 닥친 이변을 이제 막 눈치채고 급히 발걸음을 돌리던 그 시각, 영원정 안은 무거운 공기가 가득 건물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카구야와 침입자가 좁은 방 안에서 마주한 가운데,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침입자 쪽이었다. 침입자가 성큼 카구야에게 다가오며 손에 든 도끼를 힘주어 쥐었다. 세게 움켜쥔 손 안에서 손톱이 살을 파고들며 붉은 피가 뚝 뚝 다다미 위에 떨어져 내렸다. 방울방울 떨어져 내린 피가 다다미에 닿는 즉시 얼어붙으며 침입자가 지나온 길에 붉은 가시형태의 결정을 남겼다.

얼마 전부터 영원정 주위에서 느껴지던 요기는 당신이 흘린 것이었군요. 신중하게 기회를 엿본 것은 좋았으나 마무리가 허술했습니다.”

겁먹거나 놀라기는커녕 역으로 지적을 해오는 카구야의 뻔뻔한 태도에 침입자가 이를 으득 갈았다. 화답 대신 침입자가 휘두른 도끼가 그녀 앞에 놓인 상 위에 내리 꽂혔다. 와지끈 쪼개져 주저앉은 상 주위로 튀어 오른 그릇과 음식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졌다.

소녀가 위험을 감수하고 모두를 물리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지금 제 앞에 서 있지도 못했겠지요. 그러니 일단은 그 야만스러운 무기를 거두고 대화를 하지 않으렵니까. 가령, 소녀의 목숨을 노리는 이유라던가 말이죠.”

살은 얼음장같이 차가웠고 입술은 진즉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지만 카구야는 여유를 잃지 않고 눈 앞의 자객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하지만 소용 없는 짓이었다. 오히려 그 여유로운 태도가 상대를 더욱 자극해 버렸는지, 도끼를 뽑아든 자객이 난폭한 괴성을 내지르며 카구야에게 덤벼들었다. 공기를 가르는 무거운 소리와 함께 번쩍이는 도끼날이 카구야의 안면에 덮쳐들었다.

다음 순간, 허공에서 도끼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니, 정확히는 움직임을 멈춘 것처럼 보였다. 손잡이를 쥔 손을 통해 미세하게 느껴지는 관성이 도끼가 움직이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으나 그저 그 뿐, 카구야의 미간을 내리찍은 도끼날이 살점을 찣고 뼈를 쪼개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흠칫 당황한 침입자가 저도 모르게 도끼를 쥔 손을 놓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시간이 정지한 듯 어색하게 공중에 떠 있던 도끼가 그로부터 몇 초 뒤 제자리에 떨어져 바닥에 박혔다.

이 곳에서 소녀의 허락 없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호위가 없다 하여 소녀가 무력할 것이라 단정하셨는지요.

카구야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추위에 잔뜩 수축하여 오그라든 근육을 억지로 움직이며 일어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녹슨 관절인형처럼 기괴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몸을 움직이기는커녕 입조차 제대로 열기 힘든 기온임에도 불구하고 카구야는 마치 추위 따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침입자를 마주했다. 그녀의 눈가와 입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익숙하다는 것처럼. 죽음조차 한 줌 여흥거리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처럼.

영원정에 당도한 것을 환영합니다, 유키온나님. 호라이산 카구야, 이 영원정의 주인으로서 소녀의 보잘것없는 목숨을 거두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행차한 당신의 용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한낱 지상의 요괴에 불과한 당신이 일면식도 없는 소녀를 노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시 그것은 옛날 동화 속 이야기와 관련된 것이 아닙니까? 어리석은 남자들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까?”

모르겠다는 듯 빙빙 돌려 말하고 있으나 즐겁다는 듯이 재잘거리는 카구야의 눈빛은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는 확신에 차있었다. 불길한 요기가 일렁이며 바깥에 부는 바람이 한층 거칠어졌다. 카구야가 모른 척 던진 질문들이 침입자-그녀가 유키온나라 부른 요괴의 정곡을 찌른 것이 틀림없는 반응이었다. 격노한 상대의 반응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소맷자락에서 봉래의 옥 가지를 꺼낸 카구야가 거기에 말을 덧붙였다.

사력을 다해 소녀를 즐겁게 해주시지요. 복수를 하고자 하는 그대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제게 보여주시지요.”

그녀가 던진 도발이 기폭제가 되어, 폭발적인 요기가 유키온나로부터 퍼져 나왔다. 폭풍 수준으로 거대해진 눈보라가 주위의 소리를 전부 집어 삼키고, 방 안의 물건들이 하나 둘 눈에 파묻혀 얼음 덩어리로 변해갔다. 바람에 흩날린 유키온나의 연보랏빛 머리카락 사이로 살의를 불태우고 있는 부릅뜬 눈이 보였다. 핏발 가득 선 눈으로 카구야를 노려보고 있는 험상궂게 일그러진 얼굴, 그것은 동화나 그림 따위에서 으레 아름답다고 묘사되는 설녀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마치 한 마리 야차를 연상시키는 얼굴이었다.

 

어쩐지 모든 것이 너무 쉽게 풀린다 했다. 계획에 가장 걸림돌이 될 거라 생각한 호위를 비롯하여 건물 안에 득실거리던 토끼들마저 전부 자취를 감추고, 마침내 카구야 공주 홀로 남은 것을 확인했을 땐 하늘이 나의 복수를 도운 줄로만 알았다. 여차하면 전부 죽여버릴 생각이었지만, 쓸데없이 힘을 빼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한 대로 결계를 펼치고 준비해둔 흉기를 꺼내 그녀의 방에 접근하는 와중에도 내 머릿속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오로지 복수를 이루고 그녀를 고통스럽게 죽여버릴 생각만이 가득했다.

바람 소리에 기척을 숨기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들어간 방문 앞까지 도달했을 때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이미 내 계획을 진작에 눈치 채고 날 맞이하는 카구야 공주였다. 살을 에는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느긋하게 내게 말을 거는 그녀를 본 내 심장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호위가 자리를 비우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함정이었나? 줄곧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는데, 나는 그녀에게 놀아나고 만 것인가? 힘들게 손에 잡은 기회를 놓칠까,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될까 두려웠다.

초조해진 나는 되는 대로 그녀에게 공격을 휘둘렀다. 앞뒤 안 가리고 휘두른 일격은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 스치지 못한 채 그녀 바로 앞에 처박혔다. 위협이라도 되었으면 좋았으련만, 머리가 쪼개질 뻔했던 그 상황에서도 카구야 공주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내 실책을 비웃었다.

그 증오스러운 면상을 노리고 다시 한 번 제대로 공격을 휘둘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것처럼 내가 휘두른 도끼는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공중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달의 공주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이런 원시적인 무기로 그녀를 죽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죽이려는 요괴 앞에서 지나칠 정도로 담담한 그녀의 태도와 고상한 척 점잔을 빼며 늘어놓는 그녀의 말에서 느껴지는 기백은 요괴인 나를 아득히 압도하는 것이었다. 요괴란 본래 상대의 두려움으로부터 힘을 얻는 법이다. 두려워하지 않고, 하물며 보이지 않는 실력의 격차마저 느끼게 하는 그녀에게 내가 쓸 수 있는 힘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도망칠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죽음은 각오한 일이지만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복수 대상에게 희롱만 당하다 죽는다면 그보다 분한 일이 또 없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한다면

고민하고 있는 사이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죽여달라는 뜻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녀는 지금 나를 심심풀이로 써먹으려는 셈이다. 내가 전력을 다해봤자 그녀의 스릴을 충족시키는데 그치지 않을까? 운 좋게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는 데 성공한다 해도그녀를 정말 죽일 수는 있는 걸까?

그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역시, 다 알고 있었구나. 이렇게까지 나 자신의 힘을 과시했으니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지만, 그녀는 오늘이 오기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겠지. 아마 나를 상대하기 위한 대비책도 충분히 갖춰놓았을 것이다. 호위를 물리고 정면에서 날 상대하려 하는 녀석이 아무런 준비도 안 했을 리 없지. 그렇게 체념하자 왠지 맥이 빠졌다.

스스로 느낀 무력감에 복수에 대한 집념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던 그때였다. 으스대며 지껄이는 그녀의 말 속에서 옛날 이야기 라는 단어가 또렷이 들려왔다.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며 나를 꿰뚫어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저 녀석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 내가 여기 무엇을 하러 왔는지 알고 있다. 그렇다는 건, 내가 이곳에 왜 왔는지도 알고 있었을 텐데.

그 생각이 사실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녀가 어리석은 남자들이라고 힘주어 또박또박 언급한다. 어리석은 남자들 속에 물론 그 사람도 포함되어 있겠지. 물론 알고서 하는 말일 것이다. 그래, 저 녀석은 원래 그런 녀석이었지. 하염없이 남들을 깔보고 기만하며, 타인의 진심과 노력마저 자신의 노리개로 삼는 쓰레기 같은 녀석. 어젯밤 날 괴롭혔던 악몽이 어른어른 머릿속에 떠오른다. 내게 환하게 웃어주던 그 사람이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얼어 붙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진다. 장례조차 치를 수 없게 산산조각 난 그의 뒤에 서있는 건, 우리 모두를 비웃고 있는 카구야 공주.

그를 처음 만난 그 날에도 너는 분명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겠지. 새로운 장난감이 들어왔다고 기뻐하고 있었겠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너는 그저 웃어 넘겼겠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내가 어떤 괴로움을 겪었는지 안중에도 없는 채로 이 모든 것이 동화 속 이야기가 되었다며 좋아하고 있었겠지. 차라리 아무 것도 몰랐다면 좋았을걸, 네 녀석 따위 몰랐으면 좋았을걸, 모두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어 놓고 너는…!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전력 차이 같은 건 이제 상관없어. 분석도 필요 없어. 억울하게 죽은 모두의 넋을 위해, 네가 망친 삶을 돌려받기 위해, 기필코 널 죽여 버릴 거야. 설령 이 눈보라가 지나간 자리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더라도.

-5-

한 남자가 있었다. 대대로 사냥꾼이었던 집안에서 자라 가업을 이어받은 그는 마을의 식량 사정과 치안 유지에 크게 기여하며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사냥의 신이 재림하기라도 한 듯한 그의 위세는 실로 대단하여, 비록 귀한 몸은 아니었지만 지역 영주조차 실력을 인정하고 그에게 경의를 표할 정도였다.     

마을에서 동떨어진 산속 외딴집에서 지내며 그날그날 잡은 사냥감을 팔거나 유해조수 퇴치로 근근이 먹고 살아가는, 농담으로라도 유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생활이었지만 남자는 그런대로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사냥감들이 뛰노는 대자연이 곧 그의 재산이었고 어떤 짐승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냥할 수 있는 천부적인 재능과 기술이 곧 그의 권력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무엇 하나 부족함 없어 보이는 남자였지만 사실 그에겐 한 가지 속으로만 앓고 있는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 고민이란, 혼기가 꽉 차도록 짝을 찾지 못해, 대를 이을 자식 하나 없다는 것이었다. 훤칠한 키에 다부진 체격, 출중한 능력까지 여심을 사로잡고도 남을 요소가 가득한 그였지만, 가난한 평민 출신이라는 것과 욕심 없는 그의 성격이 혼사를 이루는데 발목을 잡았다. 제아무리 잘난 남자라 해도 평생을 산 속에 틀어박혀 갓 잡아온 짐승들의 고기와 가죽을 손질하는데 평생을 바쳐야 한다면 어떤 여자가 좋다고 선뜻 동행에 나서겠는가.

무엇보다 남자는 연애에 서투를 뿐만 아니라 관심 자체가 거의 없었다. 기술을 물려 줄 자식이 없어 걱정하면서도 막상 나가서 여자를 만나 보라는 주위의 조언엔 언젠가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겠죠하는 두루뭉실한 대답으로 일관하기 일쑤였다. 남자는 아무 여자하고 만나지 않겠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말인 즉 슨, 한 눈에 이 사람이다! 하고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람이 아니면 교제를 시작할 생각조차 없다는 뜻이었다. 본인 마음가짐조차 이 모양이니, 결국 이렇다 할 짝을 찾지 못한 채 남자는 하루하루 나이만 먹어갈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사냥감을 팔러 마을에 내려온 남자는 마을을 떠들썩하게 달군 이웃 마을 미인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마을 어디를 가도, 입만 열면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대나무 숲 한가운데에서 자신을 거두어준 노부부와 함께 살고 있다고 하는 그 여인은 누구도 출신이나 가문을 알지 못하지만 외모만큼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미모가 눈부시기 이를 데 없어 1리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또 아름다운 만큼 남자를 보는 눈이 까다롭기 그지 없어, 내로라하는 귀족과 왕족은 물론 천황의 구애조차 거절했다고도 했다. 그 밖에 대나무 속에서 태어났다거나 이 세상 존재가 아니라거나, 그녀가 내는 난제를 해결해야만 결혼할 수 있다는 등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모를 소문도 무성했다.

소문을 들은 남자는 호기심이 동했다. 세간의 이목을 거부하고 독특한 남자 보는 눈을 가진 소문 속 여인에게 동질감을 느껴서, 그리고 천황마저 반하게 만든 미모가 실제로 어떤지 확인하고픈 마음도 있었다. 궁금해진 남자는 곧바로 의뢰가 있다는 핑계로 본래 살던 집을 정리하고 먼 여행길을 떠났다. 이웃 마을 대나무 숲이라고 한들, 근처에 대나무 숲이 있는 마을이 한 두 곳이 아니었건만 오직 그녀의 얼굴을 직접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지칠 줄 모르고 돌아다녔다. 어느덧 계절이 바뀌어 초록빛 무성했던 숲이 알록달록한 붉은 빛깔로 물들 즈음, 남자는 마침내 소문 속 그녀가 지내고 있다는 죽림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여로를 풀 틈도 주지 않고 남자는 곧바로 대나무 숲 안에 작은 움막과 함께 자신의 보금자리를 차렸다. 이방인이 죽림 한가운데 눌러 앉았다는 소식에 처음에 마을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찾아온 어중이떠중이가 흑심을 품고 수상한 짓을 꾸민다는 생각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남자의 적극적인 교류와 뛰어난 사냥 솜씨 덕에 곧 마을 사람들은 의심의 시선을 거두고 그를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주었다.

죽림에서 지내며 그 지역 사람들의 의뢰를 처리하는 동안, 겸사겸사 남자는 남는 시간에 우거진 대나무 사이를 서성거리며 같은 장소를 하루에 몇 바퀴씩 맴돌았다. 하늘 높이 치솟은 대나무들 사이에 주저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낡은 집, 대나무 공주가 살고 있다는 바로 그 집이었다. 때론 먼 발치에서, 때론 대문 코앞을 지나가며 남자는 그때마다 닭처럼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집 안쪽을 살폈다. 하지만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느긋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늙은 부부의 모습 뿐, 소문이 사실 거짓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젊은 여인의 모습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찬 공기가 스산하게 내려앉은 보름날 밤,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곤히 자고 있던 남자를 깨웠다. 이왕 깨버린 잠, 차갑게 식은 몸이라도 덥힐까 싶어 남자는 등불 하나에 의지한 채 무작정 어두운 죽림 안으로 산보를 나섰다.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 간간히 굶주린 짐승들이 그르렁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오는 죽림은 낮에 볼 때랑 전혀 다른 마경을 연출하고 있었지만 남자는 겁먹는 일 없이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현재 위치도 향하고 있는 방향도 모르고 발 닿는 대로 걸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남자의 눈앞에탁 트인 눈에 익은 장소가 나타났다. 위로는 탁 트인 하늘을 볼 수 있고, 앞으로는 좌우로 갈라져 솟은 대나무들이 보기 좋게 길을 열어줘 노부부의 집이 곧장 보이는 전망 좋은 장소. 남자가 하루에 최소 한 번씩은 지나치며 휴식을 취하는 명당이었다. 아무래도 하도 자주 찾는 장소다 보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몸이 경로를 기억한 듯 했다. 이렇게 된 거 조금 쉬었다 갈까, 긴장이 탁 풀린 남자가 곧장 달빛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환한 달빛 아래 서있는 사람 형태의 실루엣이 남자의 시야에 들어왔다. 즉시 숨을 죽인 남자가 다급히 몸을 웅크려 어둠 속에 몸을 감추었다. 확실히 짐승은 아닌 것 같았는데, 이 야심한 시간에 누가 이런 숲 속을 서성인단 말인가. 말로만 듣던 요괴인가 싶어 남자는 조심스럽게 고개만 내밀어 눈을 가늘게 뜨고 수상한 인물의 정체를 살폈다.

달빛을 반사해 은빛으로 반짝이는 흑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묘령의 여인이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올 흐트러짐 없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바람결에 산들거리는 매끄러운 머릿결은 보는 이의 혼을 쏙 빼놓고도 충분히 남는 것이었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치마에 금사은사로 수놓아진 춘하추동의 절경, 그리고 겹겹이 겹쳐 입은 형형색색 화려한 비단옷은 그녀가 척 봐도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임을 알게 해주었다. 어딘가의 귀족, 아니면 황족일까. 이렇게 누추한 곳에 홀로 귀한 옷을 차려 입고 있으니 참으로 이질적이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붕 뜬 느낌이 풍경으로부터 그녀를 돋보이게 해주었다.

보는 이 아무도 없음에도 곱게 단장한 얼굴은 백옥처럼 새하얬고 그 고움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가느다란 속눈썹과 동그란 눈, 오똑하고 매끄러운 콧날, 잔잔하게 미소를 머금은 보석 같은 입술, 하나하나가 마치 신이 정교하게 조각한 예술품 같은 아리따운 그녀의 얼굴을 본 남자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왠지 서글픈 듯, 후련한 듯 감정을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달을 쳐다보고 있는 그녀에게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분위기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남자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호흡이 가빠지고 뇌가 녹아 내린 듯 머릿속이 흐리멍덩해졌다.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격렬한 감정의 물결이 일렁였다. 어느새 남자는 자신이 몸을 숨기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홀린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좀 더 가까이서 그녀를 자세히 살피기 위해 몸을 앞으로, 앞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결국 어긋난 무게중심을 견디지 못한 몸이 픽 쓰러지며 주위의 나무를 온통 흔들어놓았다. 바삭거리며 잎사귀들이 떨어져 내리는 요란한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고 울려왔다.

거기 누구신가요?”

여인이 고개를 홱 돌려 남자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달은 남자가 일어선 것도 엎어진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놀라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실례를 끼쳐드렸군요. 저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얼마 전부터 이곳에 눌러 앉아 사냥을 하며 먹고 살아가는 사냥꾼입니다. 혹시 들어본 적 없으신지요…?”

“…글쎄요, 밖에 잘 나가보지 않아서 모르겠군요. 할아버님께서 언젠가 이야기 해 주신 적 있으신 것 같긴 하네요.”

슬금슬금 거리를 두고 있는 그녀는 남자를 경계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실로 당연한 반응이었다. 인적 하나 없는 숲 속에 모르는 남자와 단 둘이, 그것도 몰래 숨어서 자신을 훔쳐 보던 남자와 같이 있게 되었는데 겁먹지 않을 여성이 어디 있으랴. 온 사방에 비명을 질러 저기 집에서 자고 있을 노부부를 깨우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 밤중에 소녀가 사는 곳까지 어인 일로 오시게 된 건가요? 밤사냥을 나선 것이라 보기엔 손에 아무 도구도 들려 있지 않군요. 맨손으로 사냥을 하시는 것은 아닐 테죠.”

잠이 안 와서 기분전환 삼아 산책을 하며 밤의 정취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인기척이 느껴져서 이쪽으로 오게 되었죠. 이쪽이야말로 묻고 싶군요. 밤의 숲은 위험합니다. 사나운 동물이나 도적을 언제 어디서 마주칠 지 모르는데 귀하신 분이 숲 한가운데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사냥꾼님과 마찬가지로 달구경을 나왔다고 해두죠. 오늘은 달이 아주 밝은 날이에요. 이런 날 달을 보고 있으면 문득 떠나온 고향이 생각나고는 하거든요.”

고향 생각이라, 동감합니다. 저도 먹고 살기 위해 선조들이 대대로 살아온 고향 땅을 떠나 여기까지 오게 되었거든요.”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해 두 손을 펼쳐 보여주며 남자가 달빛 아래로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섣불리 거리를 좁히는 것은 더욱 경계만 살 뿐이었기에 남자는 그녀와 너무 가까워지지 않도록 신중히 둘 사이 거리를 쟀다. ‘이 여인이 내가 그토록 찾아 다니던 대나무 공주구나!’ 남자의 마음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절세가인이란 호칭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와 귀품 있는 자태, 그간 들어온 소문에 한 치 과장도 섞여 있지 않았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먹고 살 길을 찾아 오셨다면 이곳은 적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냥감이 풍족하지도 않고, 산짐승의 위협도 덜 한 곳이니까요. 지금이라도 다른 곳을 찾아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이제 막 새 자리를 잡은 터인데 조금 더 지켜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러고 보니 제가 누구인지는 소개 드렸지만 그쪽의 처자께선 뉘신지 대답을 듣지 못했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떠도는 소문으로 익히 들어서 대충 알고 있었지만 마치 아무것도 몰랐다는 척 남자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이에 여인은 남자를 슬쩍 흘겨보더니, 예의를 갖추어 인사하며 남자의 물음에 답했다.

소녀, 본래 가지고 있던 이름은 사정이 있어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할아버님께서 붙여주신 이름, 나요타케노카구야히메로 지내고 있지요. 평소 할아버님과 할머님께선 카구야히메라 불러주신답니다.”

과연, 첫 눈에 범상치 않은 분이라 생각했는데 그에 걸맞은 이름을 가지고 계셨군요. 그쪽에선 저를 사냥꾼님이라 부르니, 이쪽에선 공주님이라 불러드려도 될까요?”

방금 막 만난 사이에 잘도 서슴없이 말씀하시는군요. 하지만 나쁘지 않네요. 허락해 드리겠습니다.”

영광입니다, 공주님.”

그렇다고 장난스럽게 부르는 건 거절하겠습니다. 하여간에, 시간이 늦었습니다. 좀 더 달을 보고 싶었으나 이렇게 이야기 나누는 사이 짓궂은 떼구름이 몰려오고 말았군요. 곧 달은 가려지고 이곳도 어둠에 물들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기 전에 소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냥꾼님께서도 밤길 조심하여 돌아가시지요.”

고개 들어 바라본 하늘엔 카구야히메의 말대로 흐릿한 구름 떼가 달을 스물 스물 가리고 있었다. 아직 달이 가려지려면 한참 남았지만 단 둘이 있는 이 자리가 부담스럽기라도 한 건지 카구야는 몸을 돌려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려 했다.

저기, 잠깐만요!”

막 멀어지려는 카구야를 남자가 불러 세웠다. 카구야히메는 그 자리에 멈춰서 고개만 살짝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만나 서로를 소개한 것도 인연인데, 종종 댁 앞을 지나가게 될 때 인사를 한다던가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꼭 답해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쉬고 계시는 할아버님과 할머니께 폐가 되지만 않는다면 저는 상관 없습니다. 좋을 대로 하시지요.”

조금 냉담한 태도였지만 어찌되었건 남자의 요청에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곤 카구야히메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사라졌다. 카구야히메가 떠나가고 남겨진 남자는 한동안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녀의 처소 방향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남자가 그 자리를 떠난 건 한참 뒤, 달이 몰려든 구름 뒤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모든 것이 어둠에 삼켜진 뒤였다.

-6-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남자는 밤 동안 있었던 일을 계속해서 회상하고 또 회상했다. 달빛 아래 서있던 아름다운 카구야히메의 모습이, 옥구슬이 쟁반 위를 굴러가는 듯한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이 세상 모든 것에 초연해진 듯한 그녀의 눈빛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카구야히메를 생각할 때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각이 가슴을 옥죄었다. 그녀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녀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졌다. 그녀의 환심을 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싶어졌다.

자신을 온통 사로잡은 이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남자가 깨닫는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곧바로 남자는 카구야히메가 자신이 그토록 꿈꿔오던 운명의 상대라 확신했다. 비록 보잘것없는 신분에 가진 것이라곤 낡은 움막 한 채 안에 있는 것들이 전부였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좋으니 우직하게 정면으로 부딪혀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자고,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열의를 불태우며 남자는 다짐했다.

다음날부터 카구야히메를 향한 남자의 적극적인 애정공세가 시작되었다. 애정공세라 한들, 살면서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한 시골 청년이 무엇을 할 줄 알겠는가. 그저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의 집 앞에서 크게 카구야히메를 부르며 그 날 있었던 무용담을 줄줄 늘어 놓는 게 전부였다. 남자는 시나 노래를 지을 줄도 모르고 귀족이 겸비한 화려한 화술 또한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단점을 억척스러운 유머와 과장된 제스처를 통해 극복하려 하며, 흐린 날에도 눈이 오는 날에도 추운 날씨 속에 몇 시간이라도 서서 공주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했다.

그런 남자의 마음이 카구야히메에게도 닿았던 것일까, 처음엔 듣는 둥 마는 둥 모습조차 내비치지 않던 카구야히메였으나 꾸준히 이어지는 남자의 방문에 공주의 마음도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이야기를 들어주더니 언젠가부턴 남자의 말을 맞받아쳐주기도 하고, 나중엔 아예 마루로 나와 찬바람을 맞는 것도 아랑곳 않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그에 관한 감상을 밤늦게까지 늘어놓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카구야히메는 말수가 늘어나고 더 자주 웃는 모습을 남자에게 보여주었다. 헤어질 때마다 다음을 기약한다는 카구야히메의 말은 남자에게 마치 그의 방문을 기대하고 있겠다는 것처럼 들려 그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만들었다. 남자는 이제 자신과 공주가 충분히 가까워졌다믿었다. 너무 늦기 전에 마음 속에 숨겨둔 진심을 꺼내 그녀에게 보여줄 때라고, 지금이라면 그녀가 자신의 진심을 받아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의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다짜고짜 혼담을 성사시키고자 찾아오는 구혼자들을 제외하면 찾아오는 이 없고, 천황과 주고받는 서신을 제외하면 교류할 이 아무도 없는 죽림 안에서 남자는 공주를 허물없이 대해주는 유일한 지인이었다. 여느 남성들과 다른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사냥꾼이 카구야히메는 마음에 들었지만, 그것은 이성으로서가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서, 다른 말로 하자면 친구로서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냥꾼이 자신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는 것조차 까맣게 눈치채지 못한 채 마음을 열고 그의 호의를 받아주었던 것이다.

마침내 남자가 카구야히메에게 용기를 내어 청혼했다. 동물의 뼈와 엄니를 깎아 만든 조촐한 목걸이를 나름대로 구혼 선물이랍시고 남자가 공주에게 내밀었다. 선물을 받아든 카구야히메의 낯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결국 올 것이 왔구나 라는 표정으로 크게 상심한 한숨을 내쉰 카구야히메가 그의 구혼에 답했다.

지금까지 소녀에게 잘 해주신 것은 이 청혼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저는 처음부터 진심이었습니다, 공주님.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저의 능력, 저의 시간, 저의 모든 것을 공주님께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동안 저는 단순히 제가 진정 하고 싶었던 일을 한 것뿐입니다. 공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죠. 그리고, 좋아하는 공주님께 한 점 숨기는 것이 없도록 하고자 오늘 용기를 내어 제가 유일하게 숨기고 있던 진심을 공주님께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사냥꾼님의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함께 보낸 시간은 짧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서로에 대해 충분히 알 정도로 길지도 않았던 것, 당신이 말한 것들이 진짜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난 진심인지, 죄송하지만 저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군요. 소녀를 찾아온 다른 분들도 다 자신의 진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떠들곤 했었죠. 얼마 못 가 본색을 드러내긴 했지만요.”

의심을 품으신다면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공주님께선 구혼자들에게 시련을 내려 그들의 진심을 증명하도록 시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게도 그 시련을 내려 주십시오. 저는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제 모든 것을 바쳐 진심을 증명하겠습니다.”

거기까지 이미 다 알고 계셨군요. 그렇습니다. 소녀는 처음부터 소녀가 말하는 물건을 가져오는 분과 혼약을 맺겠다고 할아버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이 말에 예외란 없습니다. 사냥꾼님이 정녕 소녀와 백년가약을 맺고자 하시거든, 그 마음이 진심이시거든 소녀가 말하는 물건을 가져와 주시지요.”

말씀만 해주십시오, 공주님. 사냥과 채집이라면 자신 있습니다. 텐구의 보물이든 용의 심장이든, 이 나라 끝에서 끝까지 전부 뒤져서라도 대령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하던 카구야가 이내 입을 열고 말했다.

이 계절만 되면 이 일대 산들에서 유키온나에 관한 이야기가 들려오곤 합니다. 눈보라를 일으키고 추위와 눈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길 잃은 나그네를 얼려 죽인다고 하는 사악한 요괴이지요. 본래 심장이란 따듯한 피를 끊임없이 내보내며 생명을 유지하는 따듯함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 하지만 몸도 마음도 차갑게 얼어붙어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유키온나는 그 심장조차 차갑다고 합니다. 차가우면서 따듯한 것, 이해가 되시나요? “

차가우면서 따듯한 것 이라니요?”

삶과 죽음, 유키온나의 심장은 양쪽의 성질이 모두 깃들어 있습니다. 즉 생명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유키온나의 심장은 어떤 병도 치료하는 약이나 어떤 약도 듣지 않는 독 모두 될 수 있으며, 그 심장을 잘게 찢어 흙에 뿌리면 꽃이 만발한 생명의 땅이 될 수도, 모든 생명이 죽어버린 죽음이 땅이 될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실로 진귀한 보물이 아닐 수 없지 않겠습니까?”

즉 공주님께선 제게 유키온나의 심장을 가져오라고 하시는 것이군요.”

유키온나를 만나고 살아 돌아온 분은 여지껏 볼 수 없습니다. 유키온나는 자신의 힘이 가장 강해지는 겨울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요괴, 전성기를 맞이한 그것을 평범한 사람은 상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냥꾼님이라면, 수많은 역경을 헤쳐 나오고 또 앞으로도 이겨낼 수 있다고 자신하시는 분이라면 유키온나의 퇴치가 가능하지 않으실까요?”

위험한 요괴의 퇴치와 그 심장의 회수, 까딱하면 죽음밖에 남지 않는 위험한 과제였지만 오히려 그 점이 남자의 도전정신을 자극했다. 샌님들은 엄두도 못 내는, 자연이라는 실전 속에서 실력을 연마해온 자신만이 도전할 수 있는 극악의 난제를 넘겨받은 남자의 눈이 반짝 빛났다.

물론입니다! 까짓 거, 요괴가 제아무리 무섭다 해도 그 실체는 고작해야 하찮은 잔재주로 요술 좀 부리는 정도겠지요 추위라면 산에서 수도 없이 많은 겨울을 보내며 익숙해져 있습니다. 잔재주 하나만 믿고 덤비는 요괴 따위, 집채만한 곰이나 굶주린 늑대 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요. 그럼 정말 유키온나의 심장을 가져오면 제 청혼을 받아주시는 것입니까?”

소녀, 한 입으로 두 말 하지는 않습니다. 허나 서두르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겨울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물러갈 터이고, 소녀에게 주어진 시간도 마냥 무한하지는 않답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서 카구야히메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남자 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 길로 곧장 움막으로 돌아온 남자는 자신의 사냥 도구들을 급히 챙겨 나와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진심에 감동한 카구야히메의 얼굴을 볼 생각에 남자의 표정은 비장함으로 가득했다.

먼 하늘로부터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겨울의 마지막을 장식한 거대한 눈폭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암시였다. 남자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때맞춰 운 좋게 다가온 천재일우의 기회를, 남자는 놓칠 수 없었다.

-7-

겨울의 눈 덮인 산은 숙련된 사냥꾼들도 함부로 발을 들이기 꺼려하는 곳이다. 변변찮은 사냥감이 없는 것은 둘째치고 공들여 장치한 덫과 함정이 눈 때문에 소실되는 것은 예삿일이요,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길 없는 발 밑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툭하면 꺼지거나 미끄러지기 일쑤여서 건장한 사람도 한 번 올라갔다가 몸 성히 내려오는 일이 드물었다. 거기에 눈이라도 오게 되면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 재수 없으면 방향조차 구분 안가는 눈보라 한가운데 갇혀 오도가도 못하다 꼼짝 없이 얼어 죽어 이듬해 봄에나 시체가 발견될 수도 있었다. 몸만 믿고 겨울 설산에 도전하는 놈은 정신이 나갔거나 죽고 싶어 환장한 녀석들뿐이라고, 그 지역 사람들은 하나같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설산을, 정면에서 몰아치는 폭풍을 헤쳐 나가며 남자는 근 2주 동안 벌써 3개째 넘어가고 있었다. 눈이 시야를 가리고 거센 바람이 걸음을 방해하고 있었지만 남자는 포기할 줄을 몰랐다. 동굴에서 휴식을 취하고, 겨울잠을 자는 산토끼부터 벌레까지 손에 잡히는 대로 잡아 영양을 보충하며 남자는 앞으로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고도 남을 목숨 내놓는 짓을 하는 와중에도 남자의 머릿속엔 설녀를 만나 퇴치할 생각만 가득했다.

길게 이어진 내리막길이 끝나고 다음 산등성이로 향하는 오르막길이 드넓게 펼쳐졌을 때였다. 눈보라 속에 주저앉아 있는 검은 그림자가 남자의 시야에 흐릿하게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자는 제대로 살필 생각도 하지 않고 허겁지겁 무릎까지 쌓인 눈을 양 손으로 걷어가며 눈 앞의 그림자를 향해 다가갔다.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지고 그림자의 정체가 드러났을 때 깜짝 놀란 남자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한 여인이 눈밭 한가운데 주저앉아 추위에 몸을 떨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바람에 날려 산발이 된 보랏빛 감도는 머리카락엔 성에가 잔뜩 얼어 있어 그녀가 이곳에 꽤 전부터 방치되어 있었음을 알려주었다. 흠뻑 젖어 버린 하얀 소복은 그녀의 몸에 차갑게 달라붙어 시시각각 체온을 앗아가고 있었고,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은 얼핏 보았을 때 아름답다는 인상이었으나 눈썹까지 얼어붙어 새파란 입술에서 떨리는 입김 흘러나오는 모습이 지금 구경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님을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남자가 말을 걸었다.

괜찮습니까? 이런 날씨 속에 이러고 있다간 얼어 죽을 수도 있어요!”

도와주세요……다리를다쳐서움직일수가어요…”

하반신을 하얗게 덮은 눈을 걷어내자 요상한 방향으로 뒤틀려 붉게 부어 오른 다리가 드러났다. 꽤 심각한 골절이었다. 마을이라면 모를까, 이런 산 속에서 다리를 못 쓰게 되는 것은 곧 사형 선고나 다름 없는 일, 남자의 발견이 조금만 늦었어도 여인은 싸늘한 시신이 되었을 것이었다. 급한 대로 자신의 겉옷을 벗어 여인에게 덮어준 남자가 몸을 숙여 상처를 살폈다.

이건 심한데당장 마을로 내려가 치료 받지 않으면 영영 다리를 못 쓰게 될 수도 있어요. 하마터면 큰일날 뻔 하지 않았습니까. 폭풍이 몰아치는데 첩첩 산중에 아무런 장비도 동행도 없이 홀로 들어오다니.”

아침 사냥을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서찾으러 나왔다가 그만……”

부군도 이 산 어딘가에 계시다는 말입니까?”

... 부탁입니다. 남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아니, 하지만 지금 당신의 상태도 좋지 않아 보이는데, 우선 마을로 내려가는 것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남편의 사냥터가 있어요. 거기까지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게 해주세요.”

여인의 무리한 부탁에 남자는 망설였다. 여인의 가녀린 몸이 이 추위를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위쪽으로 가도 좋을지 생각하던 와중 남자의 머릿속에 불현듯 자신이 잊고 있던 목적이 떠올랐다.

이 능선만 넘으면 금방입니다. 부탁 드려요. 마을은 그 뒤에 내려가도 괜찮으니까요.”

여인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계속 도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수상한 일이었다. 실력 있는 사냥꾼이라면 폭풍 속에 사냥을 나서지 않는 것이 정상일 텐데, 더욱이 이 폭풍은 벌써 며칠째 이어지고 있던 것이었다. 오늘 아침에 사냥을 나서는 사냥꾼이 있을 턱이 없었다. 거기다 이 주변은 암벽이나 절벽 하나 없는 탁 트인 평평한 능선, 그런 한가운데에서 다리에 이토록 심한 골절상을 입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믿기지 않았다. 폭풍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의 옷 치고 방한 준비가 너무 허술한 것도 한 몫 했다.

이것이 그 말로만 듣던 유키온나구나. 남자의 등골을 타고 서늘한 감각이 훑고 지나갔다. 필시 능선 너머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온정에 호소해 도움을 주는 선량한 이의 목숨을 노리다니, 참으로 간사하기 짝이 없는 요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생각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칼을 빼들어 심장을 빼내 공주에게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나 노련한 남자의 감각이 필사적으로 그 충동을 억눌렀다. 상대는 요술을 쓰는 요괴, 섣불리 정면에서 승부를 걸거나 뒤를 보였다간 역으로 자신이 당할 지도 모르는 일, 이는 맹수를 상대할 때랑 똑같았다. 위험한 사냥감을 상대할 때 가장 필요한 건 상대가 방심하게 만드는 것. 방심한 틈에 단숨에 급소를 찔러 반격의 틈을 주지 않는 것이 지금 같은 상황에서의 정석이었다.

남자가 짊어지고 있던 짐바구니에서 작은 천뭉치를 꺼냈다. 위급상황에서 붕대 겸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천을 풀어 여인의 다리를 조심스럽게 둘러싸며 남자가 여인에게 말했다.

우선 그리 합시다. 사냥터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면 곧바로 당신의 치료를 위해 마을로 돌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으로 자상하신 분이시군요.”

인간으로서 도리를 다하는 것뿐입니다. 아프지는 않으십니까? 움직이기 힘든 것 같으니 여기서부턴 이걸 이용하도록 합시다.”

짐바구니에 들어 있던 모든 물건들을 꺼내놓은 남자가 여인 앞에 빈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남자의 짐 전부를 담고 다니던 것인지라 함께 놓고 보니 바구니는 사람 한 명이 들어가도 좋을 정도로 꽤 컸다. 꼭 필요한 무기와 도구들은 어깨와 허리에 두르고, 필요 없는 잡다한 것은 눈 밭에 전부 버려 정리를 마친 남자가 여인을 바라보았다.

이 안에 들어가시죠. 조금 좁지만 눈과 추위를 어느 정도 막아줄 것입니다. 사람 한 명 무게쯤 거뜬히 둘러메고도 남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까지 하셔도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버린 물건들은 어떻게 하시려는지…”

물건들이야 다시 구하면 되지만 사람 목숨은 한 번 잃으면 다시 구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묻지 않아도 뻔한 것이 아닙니까.”

여인의 정체를 눈치챘다는 사실이 발각되지 않도록 남자는 최대한의 호의를 가장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동한 듯 남자를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남자의 연기가 제대로 먹힌 듯 했다. 마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남자가 바구니를 기울였다.

, 어서 출발합시다. 너무 늦으면 당신도 위험해지니까요. 제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말감사합니다.”

여인을 짊어진 남자는 그녀가 말하는 능선을 향해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함정인 것은 알고 있었다. 시간을 지체하거나 빈틈을 보이면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 그렇기에 남자는 전신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자기 등 뒤에 매달린 요괴의 동태를 살피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한참을 걸은 것 같은데 오르막길은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분명 아까 여인과 마주쳤을 때만 해도 능선은 코앞이나 다름 없는 가까이에 있었는데 걸어도 걸어도 그 끝에 도달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눈보라는 점점 더 거세어져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것조차 버거웠고 평소의 두 배나 되는 짐을 짊어진 몸의 체력은 시시각각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몸에 한계를 느꼈다. 요괴퇴치는커녕 이대로 길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이 스멀스멀 마음 안쪽으로부터 새어 나왔다.

문득 남자는 목덜미에 얼어붙을 것 같은 한기를 느꼈다. 좀 전부터 말 없이 가만 앉아있던 여인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거센 바람소리를 뚫고 선명하게 귓전을 때렸다. 그녀가 한 번 숨을 내쉴 때마다 서늘한 칼로 살점을 도려내는 듯한 통각이 덮쳐왔다.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선 남자는 그제야 방심하고 있던 것은 자신 쪽이었음을 깨달았다. 함정은 능선 너머에 기다리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진짜 함정은 그녀의 부탁 그 자체.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을 때부터 이미 그는 함정에 빠진 것이었다.

눈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들고 체력을 천천히 고갈시킨 뒤 무력해진 희생자를 덮쳐 죽게 만드는 것이 유키온나의 수법. 하지만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산으로 돌격부터 한 남자가 이를 알 리 만무했다. 알아챘을 땐 이미 늦은 상태,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진 상태에서 뒤늦게 무기를 꺼내 든다고 한들 바로 뒤에서 목을 노리는 요괴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서서히, 약해진 남자를 둘러싸고 불길한 기운과 함께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죽고 싶지 않아! 남자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1초라도 좋으니 요괴를 멈추게 할 방법이 필요했다. 반격이든 도망이든 다음 행동은 그 뒤에 정해도 될 일이었다. 살에 닿는 한기가 점점 강해졌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낀 그 때, 생각이 정리되는 것보다 한 발 먼저 남자의 입에서 그조차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 나왔다.

저기, 춥지 않습니까? 몸은 괜찮습니까? 힘들지 않으십니까?”

이 상황에서 걱정하는 말을 내뱉어서 어쩌자는 거냐, 스스로를 자책하며 남자는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라운 결과가 일어났다. 바로 직전까지 남자를 죽일 듯 압박하던 불길한 기운이 스르륵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싸고 맹렬히 불어 닥치던 눈보라가 잠잠해지더니 곧 이어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던 한기도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주위에 생긴 변화를 남자가 알아챘을 때, 그는 어느새 산의 정상에 올라와 있었다. 사나웠던 폭풍도 그 기세가 한풀 꺾여, 흐린 하늘엔 미약한 바람과 함께 진눈깨비만 휘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는 등 뒤에서 색색거리던 숨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음을 느끼고 황급히 짐을 내려 그 안을 확인했다. 여전히 묵직한 무게가 느껴지는 바구니 안엔 더 이상 다리를 다쳐 아파하는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대신 바구니를 가득 채운 하얀 눈 위에 남자가 여인에게 벗어주었던 겉옷이 살포시 얹어져 있을 뿐이었다.

 

 

-8-

눈보라가 그친 직후, 남자는 유키온나를 놓쳤다는 아쉬움보단 겨우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허겁지겁 산을 내려갔다. 처음으로 면전에서 느낀 요괴의 공포,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이때까지 사랑에 눈이 멀어 있던 남자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도 충분히 남는 것이었다. 카구야히메와의 결혼이니 난제이니 하는 것은 더 이상 남자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설산에서의 사건 이후 남자의 삶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자신의 집처럼 여겼던 산에 또다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고, 자신의 모든 것이나 다름 없었던 사냥도 더는 계속할 수 없었다. 자신이 쓰던 도구들을 볼 때마다, 나무가 빽빽히 들어선 고요한 산 속 풍경을 마주할 때마다 그 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순전히 요행에 가까웠던 생존, 왜 유키온나가 자신을 죽이지 않고 놔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라도 그녀가 다시 자신을 찾아와 몸을 얼려버릴 것만 같았다.

남자가 그 동안 남들보다 용감하게 사냥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두뇌와 능력이 언제나 사냥감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한 데 있었다. 사냥에 있어 그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으며 사냥감에게 역으로 당하는 일도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괴를 상대로 한 사냥은 짐승을 상대로 한 것과 전혀 차원이 달랐다. 요괴의 힘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이었으며 인간과 동등한 술책을 쓸 수 있었고, 무엇보다 가까이서 느껴지는 기운 자체가 압도적이었다. 요기라고 하는 탁한 기운을 바로 등 뒤에서 살갗으로 느낀 남자는 그것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너무나 잘 알아버렸다. 상식을 초월한 존재 앞에서 힘이 세다느니 기술이 있다느니 하는 인간 기준의 말들은 아무 소용 없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남자는 본업을 내팽개친 채 술에 의존하며 하루하루 망가져갔다. 카구야히메를 다시 보러 간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호언장담 해놓고 결국 다른 이들처럼 난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니 더는 그녀를 볼 면목이 없었고, 또 요괴 하나에게 겁먹은 자신의 처지가 지나치게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루하루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며 카구야히메를 거의 잊다시피 하고 삶을 보내던 와중 남자는 카구야히메가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는 것, 더는 그녀를 이 땅에서 볼 수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술에 절어 살다 보니 듬직했던 몸은 추레하게 망가지고, 출중했던 재능도 망가져 버렸다. 운명의 상대라 여겼던 여자도 떠나 버렸다. 자신을 지탱해주던 모든 것을 잃고, 모두에게 존경 받는 삶을 살고 있던 남자의 삶은 그렇게 요괴 하나와의 조우를 통해 무참히 짓이겨져 버렸다.

카구야히메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그 날 밤, 남자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죽림 깊숙이 들어갔다. 더 이상 숲이나 산이 두렵지 않게 된 것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무가치한 삶에 환멸을 느껴 그만 끝내고자 극단적인 선택을 하러 간 것이었다. 공주는 이미 떠나고 없었지만 공주와 처음 만났던 장소는 변함없이 쏟아져 내리는 달빛을 받으며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했다. 지금도 달을 올려다보던 카구야히메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한때의 달콤했던 추억을 회상하던 남자의 눈에 왈칵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무력함을 한탄하며 평생 흘릴 눈물을 전부 쏟아내며 실컷 오열한 남자가 달빛 한가운데 무릎 꿇었다. 남자가 품 안에서 꺼낸 것은 그가 늘 들고 다니던 작은 사냥칼. 사냥감의 살을 가르고 뼈를 발라낼 때 쓰던 칼이 지금 막 그의 심장을 파고들려 하고 있었다.

잠깐…! 당신, 뭐 하시는 건가요! 당장 그만 두세요!”

눈을 질끈 감은 남자가 거꾸로 쥔 날을 가슴팍에 박아 넣으려 할 때였다. 다급한 외침과 함께 나뭇잎이 사박거리는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손에 들어간 힘이 사르르 풀리고, 소리에 반응한 남자가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다 봤어요, 지금 죽으려고 하신 거죠?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함부로 주어진 삶을 끝내려 하면 안 되죠. 남겨질 가족과 친구들은 생각 안 해보셨어요?”

처음 보는 젊은 여인이 무릎을 짚고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그를 세게 질타했다. 늦은 이 시간까지 죽순이라도 캐고 있었는지 그녀의 옆구리엔 작은 소쿠리가 들려 있었다. 소쿠리가 텅 비어있고 그녀가 지나온 길에 듬성듬성 죽순이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자신의 하루 수확을 모두 포기하고서라도 남자를 구하기 위해 급히 달려온 듯 했다.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도……”

그렇다고 해서 자살하는 게 말이 되나요? 죽으면 편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 봤자 남는 건 싸늘한 시체 뿐이에요. 누구도 슬퍼해주지 않을 거고, 시체는 짐승과 요괴들의 밥이 될 거라고요.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만 있으면 친구든 가족이든 다시 만들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죽지 말아요.”

난데없이 등장해 자신에게 격려의 말을 건네는 여인을 향해 남자가 어안이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서민 출신으로 보이는 허름한 복장이었지만 귀족과 같은 기품이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어깨까지밖에 안 오는 머리를 수건을 둘러 단정히 정리한 여인이 남자에게 다가와 칼을 빼앗고 상처가 없는 지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달빛 아래 반반하고 고운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거기서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친근하고 익숙한 감정에 남자는 넋을 잃고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 보았다.

왜요, 이렇게 안심시키고 당신을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그러시나요?”

아뇨, 왠지 제가 아는 분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이전에감사 드리고 싶어져서요.”

살려 주니 바로 감사하다고 하는 걸 보니 역시 아주 죽고 싶지는 않으셨나 보군요.”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대로 죽고 싶어졌을 지도 모르죠.”

당신, 사냥꾼이죠?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 나누는 걸 들었어요, 실력 좋은 사냥꾼이 있었는데 요괴에게 죽을 번 한 뒤로 사냥 의뢰도 안 받고 술만 퍼 마시며 지낸다면서요.”

벌써 모르는 사람이 없나 보네요. 소문이란 참 빠르군요.”

요괴가 두려운 존재인 건 사실이지만, 그 요괴한테서 살아남았으면서 이렇게 겁쟁이로 지내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 우선 돌아가죠.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차근차근 시작해 보아요.”

여인이 남자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맞잡은 여인의 손은 보기보다 차가웠지만 그 손을 타고 전해지는 따스한 감정은 차마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남자가 다리에 힘을 주며 땅을 딛고 일어났다. 다 죽어가던 그의 눈엔 다시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낯선 이의 작은 배려가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순간이었다.

여인은 남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뭐라도 생계에 도움되는 일을 한다는 조건으로 같이 사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홀로 좁아터진 움막, 오두막에서만 지내다 난생 처음 발을 들인 번듯하게 구색을 갖춘 집은 아늑함 그 자체였다. 남자는 이제 막 처음 만난 자신에게 이토록 과한 친절을 베푸는 여인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듣기론 세상엔 타인에게 자비와 선을 베푸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종교도 있다고 하는 모양이니 여인도 그 종교를 믿는 신도라 생각하며 좋게 받아 넘겼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남자는 죽기 위해 들었던 칼을 다시 잡아 들었다. 그가 새로 시작하기로 한 일은 다름아닌 조각. 사냥이 끝난 후 종종 취미로 사냥감의 뼈를 깎아 부적이나 장신구 따위를 만들던 경험을 살려 아예 본업으로 삼기로 한 것이었다. 사냥을 하지 않으면 뼈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조각 재료는 주로 나무가 되었다. 처음엔 날에 와 닿는 감각이 달라 적응하는데 꽤 애먹었지만, 본래 손재주가 좋았던 남자인지라 그는 금방 재료에 적응하고 그럴 듯한 작품을 하나 둘 완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노력이 빛을 본 데에는 그때까지 그의 재활을 지지해준 여인의 도움도 컸다.

3년 뒤, 남자는 마을에서 제법 솜씨 좋은 장인으로 통하며 새로운 삶을 찾는데 성공했다. 귀족 가문의 상징이나 절에 놓을 불상 등 두둑한 보수가 딸려오는 의뢰들이 줄을 이었고 남자의 형편은 이전 사냥꾼으로서 살아갈 때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좋아졌다. 끼니 해결은 물론 새 집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돈이 모였지만 남자는 초심을 유지하고자 했다. 늘 똑같은 해진 옷을 입고 닳고 닳은 낡은 도구들을 쓰며 자신이 번 돈은 모두 여인에게 넘겨 주었다. 처음엔 남자가 힘들게 번 돈을 받을 수 없다며 화들짝 놀라 손사래 치던 그녀였으나, 남자의 고집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함께 3년간 동고동락하는 동안 남자의 마음 속엔 새로운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이전에 느낀 사랑이 불처럼 순식간에 타오르는 정열적인 사랑이었다면, 이번에 느낀 감정은 언 땅에 싹이 터 나무로 자라나는 과정 같은 느긋하게 무르익는 사랑이었다. 3년이라는 시간은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해주었고, 둘은 굳이 숨길 필요 없이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보름달이 하늘 높이 아름답게 걸린 그 해 동짓날 밤, 둘러앉은 자리에서 남자는 여인에게 정식으로 청혼했다. 올 것이 왔다는 것처럼 여인은 수줍게 볼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여인을 남자가 꼭 끌어안고, 그녀의 연보라빛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 어느 때보다 따듯했던 겨울 밤의 일이었다.

 

-9-

카구야가 손에 든 봉래의 가지가 빛을 뿜었다. 가지마다 달린 백옥 열매에서 오색찬란한 빛의 구체가 튀어나와 총알처럼 유키온나에게 파고들었다. 철구에 얻어맞은 것처럼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붕 뜬 유키온나의 몸이 마루 위에 나동그라졌다.

누군가를 죽이고자 한다면 무덤을 두 개 파라는 옛 말도 있지요. 당신에겐 자신의 무덤을 팔 준비가 되어 있는지요.”

일어설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후속공격이 이어졌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빛의 폭격이 쏟아져 내렸다. 유탄에 피격당한 눈더미와 얼음이 산산조각 나며 흩날린 가루들이 주위를 뿌옇게 흐렸다. 맞은 상대가 흔적도 남지 않을 정도로 무자비한 공격을 한바탕 퍼부은 카구야가 동작을 멈추고 눈안개 속을 살폈다.

한 줄기 돌풍이 날아들어 하얗게 시야를 가린 눈가루를 전부 날려버렸다. 군데군데 탄환이 꽂히며 부서진 바닥이며 기둥, 가구들의 처참한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 한가운데, 대부분의 공격이 집중적으로 꽂혔을 그 자리엔 휑하게 뚫린 구멍만 존재할 뿐, 유키온나의 시신도 모습도 온데간데 없었다.

방안으로 휘몰아치는 눈을 그대로 맞으며 카구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정도로 상대를 해치웠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에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하기 위해 카구야는 곧바로 소맷자락에 다음 보물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카구야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소맷자락에 손을 집어넣으려 팔을 들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팔에 닥친 위화감을 알아챘다. 아무리 팔을 휘저어도 소매 안의 보물을 꺼낼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물건을 잡고 꺼낼 수 있는 팔 자체가 팔꿈치 아래로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런 전조도, 감각도 남기지 않고 잘려나간 팔은 피 한 방울 흘리는 일 없이 거칠고 붉은 단면만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시선의 아래쪽, 발치까지 덮은 눈 위에 그녀의 잘려나간 팔 일부가 나뒹굴고 있었다. 이미 그것은 생물의 일부라고 보기 힘든 몰골로 단단하게 얼어붙어 산산조각 나있었다. 마치 도자기가 깨진 것을 보는 듯 했다. 분명 아무 느낌 들지 않았을 텐데, 이는 그녀가 인식하고 방어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몸이 얼었다는 뜻이 되었다. 대처하기 힘든 능력을 펼치기 시작한 상대가 번거롭다는 듯 인상을 쓴 카구야가 잘려나간 팔을 가만 만져보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등 뒤, 방 안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더니 날아온 눈송이들이 그녀 주위를 휘감았다. 공중에서 흩날리며 눈송이들은 서로 뭉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익숙한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 이런…”

각오라면, 되어 있어.”

한데 뭉친 사람 형상의 눈이 그대로 카구야를 덮쳤다. 얇은 벽과 문을 몇 개씩 부수며 저 멀리 날아간 카구야가 두꺼운 기둥에 그대로 처박혔다. 곧바로 대기 중에서 얼어붙은 수증기가 날카로운 얼음 결정으로 변화하여 화살처럼 날아와 카구야의 손발에 박혔다. 그 외에도 좌측 어깨에 하나, 폐와 복부에 하나씩, 허벅지에 둘, 부서진 나뭇조각들이 그녀 몸 곳곳을 꿰뚫고 있었다. 출혈은 없었지만, 이는 얼어붙은 상처가 곧장 얼어붙어 그런 것이었다. 몸 안쪽부터 몸을 얼리고 들어오는 차갑고 서늘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 고통은 금세 무뎌졌지만 그와 함께 신체의 감각 또한 마비되는 바람에 카구야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 하고 상처가 재생될 때까지 기둥 아래 주저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공중으로 흩어진 눈이 다시 모여 형체를 갖추고 그 안에서 유키온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빈 손이었던 아까와 다르게 이번엔 눈과 얼음으로 만들어진 나기나타와 함께였다.

믿었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을 너는 모르겠지. 그렇기에 너는 죽어 마땅한 거야. 네가 망쳐놓은 사람들의 삶, 얼어붙게 한 감정그런 짓을 저지르고 살아오면서 단 한번이라도 죄책감을 느껴본 적 있어?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돌아본 적 있기나 했냐고!”

“…재미있군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요괴가죄를 논하다니 이 얼마나 기이한 모순인가요…”

닥쳐!”

유키온나가 나기나타를 크게 휘둘렀다. 그 궤적을 따라 얼어붙은 공기가 가시덩굴처럼 삐죽삐죽한 선을 그리며 카구야의 몸 곳곳을 할퀴고 찢어발겼다.

네가 뭘 알아. 너만 아니었으면 모두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어. 절망에 빠지지 않아도 되었어. 사랑이란 감정을 몰라도 되었어. 진실을 알고 배신감을 느낄 일도 없었어. 그리고아무도 죽지 않아도 되었는데!”

콜록, 피 섞인 기침을 토해내며 카구야가 씩 웃었다. 궁지에 몰린 상황임에도 그녀의 표정은 신기할 정도로 평온했다. 마치 비장의 술수가 있는 것처럼. 혹은 닥쳐오는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세간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는 모두 두 가지가 있었지요. 하나는 차갑게 얼어붙은 요괴의 마음마저 녹인 남자의 이야기, 그리고 다른 하나는입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남자의 비극이었던가요?”

카구야의 말을 끊고 유키온나가 던진 나기나타가 카구야의 볼을 스치고 옆 기둥에 박혔다. 곧바로 새 무기를 만들어내며 유키온나가 험상궂은 얼굴로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가 말했지.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고 도망친 네 녀석에게 그 일에 대해 멋대로 지껄일 자격은 없어.”

카구야의 손이, 발이, 다리가, 몸통이, 말단부터 차례대로 눈으로 뒤덮였다. 몸을 덮고 두껍게 쌓인 눈은 곧바로 얼어붙어 그녀를 구속하는 단단한 족쇄로 변했다. 얼음에 전신이 구속되어 목만 내밀고 있는 카구야에게 유키온나가 칼날을 내밀었다. 차가운 날끝이 목덜미에 닿는 서늘한 감각이 신경을 타고 머리에 전달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처형. 카구야의 목을 베는 영광의 순간을 목전에 둔 유키온나의 얼굴이 흥분과 희열로 일그러진 웃음을 자아냈다.

남기고 싶은 말은 없겠지. 듣고 싶지도 않아.”

당신은 참으로 딱한 존재로군요. 연심을 품은 것도, 배신감을 느낀 것도, 비극을 저지른 것도 순전히 자기 의지로 저지른 것이면서 그 원인을 애꿎은 소녀에게 돌리고 있군요. 양심마저 얼어붙고 만 것인가요?”

끝까지……”

선택은 당신의 몫이 아니었나요? 당신과 그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는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 그가 털어놓은 진실을 받아들이고 그를 용서하는 길도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얼마든지 따듯한 피가 흐르는 인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걸 거부하고 끝내 그 손을 피로 다시 물들인 건 누구죠? 그러니까 당신은 어쩔 수 없는 요괴라는 것입니다. 본능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굴러들어온 행복을 걷어차 버리는, 더러움 가득한 지상의 요괴.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순백의 눈과 다르게 당신 마음은 뿌리 끝까지 검고 추악하군요. , 소녀의 목을 쳐 보시지요. 저의 죽음으로 당신의 죄가 씻겨 내려간다고 생각한다면. 과거에 벌어진 비극을 이렇게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요.”

그 입 닥쳐!!!!!!!”

카구야의 입에서 신랄하게 쏟아지는 비난에 유키온나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뭐라 반박하지도 못하고, 분을 이기지도 못한 유키온나가 결국 고함을 내지르며 긴 칼을 번쩍 들어올렸다. 서슬 퍼런 칼날이 빛을 반사하며 공중에서 파르르 떨렸다. 저항하길 포기한 카구야가 고개를 숙여 목을 내밀고, 새하얗게 드러난 그녀의 목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때

-콰앙!-

고막을 찢어버릴 것 같은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좁은 복도에 거센 폭풍이 밀려들어오더니 카구야의 목을 베려던 유키온나를 복도 끝으로 날려보냈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후끈 데워진 공기가 카구야의 볼에 닿으며 그녀를 구속하고 있던 눈을 스르륵 녹여버렸다. 얼어붙은 몸까지 함께 녹으며 그때까지 감각이 마비되어 있던 상처의 통증이 일제히 되살아났다.

아윽!”

뒤늦게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한 몸을 감싸며 카구야가 몸을 꿈틀거렸다. 죽지 않는 몸이 되었다 하여 고통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전신에서 일제히 덮쳐오는 살이 찣기고 신체가 잘려나간 고통은 제아무리 죽음에 익숙한 그녀라도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것이었다.

여기서 뭐하고 있냐. 요괴한테 얻어맞고 빌빌거리고 있다니, 너답지 않은데.”

시끄럽네이건 내 일이야.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거든.”

역시 도우러 오지 말 걸 그랬나. 참 나토끼 녀석이 다급하게 부탁하길래 와봤는데 태도가 영-. , 이거 뽑는다?”

잠깐, 아직 뽑지 마아아아앗!?!?”

카구야의 신음에도 아랑곳 않고 몸에 박힌 파편들을 덥석 잡아 뽑아내며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녀. 등에서 불타는 날개를 뿜어내며 그 열기로 주위의 추위를 모두 물러나게 하고 있는 그녀는 카구야의 또 다른 철천지원수, 후지와라노 모코우였다.   

뭐냐일단 좀 쉬고 있어라. 저 녀석은 내가 처리할 테니. 이 근방에서 자주 보던 유키온나 녀석이네. 아마 이름이 레티라고 했던가. 어쩌다가 저 녀석에게까지 원한을 사고 만 거냐, .”

너는 몰라도 돼. 말했잖아, 이건 내 일이라고. 모코우 너는 얌전히 옆에서 구경이나 하고 있으라고.”

, 아까처럼 또 되어도 난 모른다.”

금방 상처 일부가 재생된 카구야가 모코우의 앞을 가로막으며 섰다. 아직 잘린 팔은 다 돌아오지 않았고 베여나간 상처도 흉하게 벌어져 피를 흘리고 있었건만 그녀는 이 싸움을 자신이 계속 이어가길 원하고 있었다. 때마침 상대도 폭발의 충격에서 헤어난 모양이었다. 복도 반대편에서 몸을 일으키는 유키온나의 모습과 함께 다시금 맹렬한 한파가 온 복도를 순식간에 얼려 버리며 둘을 덮쳤다.

아아, 이제야 좀 따듯해졌군요. 방해꾼이 오기 시작한 모양이니 슬슬 이 복수극도 마무리 지어볼까요. , 당신의 죄를 저의 피로 씻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보시지요.”

유키온나가 긴 나기나타를 휘두르며 맹렬한 속도로 달려왔다. 그에 맞춰 카구야가 멀쩡한 팔의 소맷자락을 털어내며 그 안에 들어있던 작은 물체를 공중으로 내던졌다. 그녀가 가진 재보 중 하나인 부처의 석발을 멋들어지게 낚아챈 카구야가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다음 순간, 석발이 번쩍이며 주위 모든 것이 신성한 광휘로 뒤덮였다. 오색 탄환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강렬한 빛. 그 빛을 정면으로 바라본 유키온나가 순간 시력을 잃고 제자리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비틀거렸다.

헛된 복수는 그만 잊고 편히 잠드시길.”

팔을 번쩍 들어올린 카구야가 주먹을 꽉 쥐었다. 천지가 흔들리는 진동과 함께 천장이 내려앉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금빛으로 반짝이는 거대한 천정이 유키온나가 서있던 복도와 그 옆의 방들까지 전부 집어삼켰다. 유키온나와 함께 영원정 일부를 완전히 뭉개버린 천정은 이내 빛나는 입자의 덩어리로 변하더니 스르륵 흩어지듯 사라졌다. 무너진 잔해에서 피어오른 먼지들과 함께 뻥 뚫린 천장에서 내리는 눈이 어우러져 순백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성대하게 저질러 버렸네. 난 모른다, 이거. 너가 한 거야.”

에이린에겐 내가 잘 말해둘게. 걱정하지 말고.”

난처해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코우를 뒤로 물려두고 카구야가 성큼 잔해더미로 다가갔다. 한쪽밖에 없는 손으로 이리저리 무너진 기둥과 조각들을 치우며, 카구야는 그 아래 널부러져 있을 유키온나의 모습을 찾았다.

켜켜이 쌓인 잔해를 어느 정도 치우자 피투성이로 쓰러진 유키온나의 모습이 드러났다. 몸에서 흘러나온 즉시 얼어붙은 피의 결정이 전신에 엉겨 붙어 마치 보석의 물결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심각한 출혈, 인간이었으면 죽고도 남았을 테지만 요괴의 생명력은 그보다 끈질긴 것이어서 그녀는 미약한 숨이 겨우 붙어 있는 상태였다.

어떻게 할 거냐. 이대로 죽일 거야?”

죽일 기세로 싸우기는 했지만 완전히 죽일 생각은 없었어. 너나 나처럼 몇 번이고 되살아나는 녀석은 아니니까.”

하긴, 넌 그런 녀석이었지. 도전을 즐기는 건지 상대를 얕보고 있는 건지 원…”

그래야 복수하는 쪽에서도 복수하는 맛이 있으니까?”

.”

자기 들으라는 듯이 말하는 카구야를 보며 모코우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상황도 종료되었겠다, 굳이 모코우가 그 자리에 계속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기에 카구야의 능글맞은 소리를 더 듣기 싫었던 모코우는 몸을 돌려 바깥으로 나갔다.

그럼, 이제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카구야가 몸을 숙이고 쓰러져 있는 유키온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잔해에서 끄집어 내기 위해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딱딱한 무언가의 느낌이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가는 크기의 작고 매끄러운 그것은 끈이 달려 있어 팔이나 목에 거는 장신구를 연상케 했다.

꼭 쥔 그녀의 손을 펼치고 카구야는 그것을 집어 들어 자세히 살펴 보았다. 원랜 하얀색이었지만 낡고 오래되어 누런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작은 사람형태의 조각이었다. 곳곳이 반질반질하게 마모되어 원래 형태를 정확하게 알기는 힘들었으나, 적어도 긴 머리의 여성을 본 딴 모습인 것만은 확실했다.

“… … …”

조각을 빼앗긴 손이 꿈틀거렸다. 연약한 숨소리에 섞여 유키온나가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왠지 신경 쓰이는 단어가 들린 것 같아 카구야는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고 유키온나의 말소리에 집중했다.

…………”

카구야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굳어졌다. 놀란 그녀의 손에서 조각이 바닥에 툭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유키온나가 눈을 번쩍 떴다. 몸을 짓누르는 잔해를 밀어내고 몸을 일으킨 그녀가 카구야를 덮쳤다. 요란하게 바닥에 나뒹군 둘이 제자리에 멈춰섰을 때, 유키온나는 위에, 카구야는 그 아래에 깔려 있었다.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카구야의 목을 유키온나가 차디찬 손으로 움켜쥐었다. 꼭 쥐면 부러질 듯 가느다란 목을 힘주어 조르며, 유키온나가 원한에 가득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눈치챘어?”

차가운 눈물결정이 카구야의 얼굴 위에 똑 똑 떨어져 내렸다. 산소부족으로 괴로우허나느 카구야의 눈에 울고 있는 유키온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눈빛, 그것은 부모의 원수를 바라보는 자식의 눈빛이었다. 마치 300년 전, 후지와라노 모코우라는 소녀가 카구야를 찾아왔을 때처럼.

-10-

혼약을 맺은 남자와 여인은 마을 외곽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그간 모은 돈으로 작업장을 꾸리고 하루하루 행복한 삶을 보냈다. 그렇게 부유한 삶은 아니었지만 서로 믿고 의지하는 상대가 있었기에 살아가는데 부족한 것은 없었다.

새 터전에 정착한 지 1년 뒤, 둘 사이에 마침내 자녀가 태어났다. 어머니의 머리 색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귀여운 딸이었다. 대를 이을 자식을 얻는 것은 남자가 오랜 세월 염원하던 일이었고, 또 인생에서 제일 힘들었던 시기를 이겨내고 얻은 자식이었던 지라 득녀 소식에 남자는 뛸 듯이 기뻐했다. 남자의 기뻐하는 모습을 본 그의 부인 또한 얼굴에 환한 미소가 꽃피었음은 물론이다.

부부는 하나밖에 없는 딸을 금이야 옥이야 키우며 그녀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전해 주었다. 어느 정도 딸이 자라자 남자는 밖으로 나가 질 좋은 나무나 석고, 동물뼈 등을 구해 딸에게 작은 조각 인형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아버지가 정성 들여 만들어준 아기자기한 동물과 사람 인형 콜렉션은 어린 소녀에게 있어 보석함이나 비단옷보다 만족스러운 선물이었다. 어머니는 틈 되는 대로 딸을 데리고 나가 산에서 식량을 채집하는 법, 간단한 임시 거처를 만드는 법 등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쳤다. 자연현상을 이기려 들지 마라, 그대로 받아들여라 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은 몇 번이나 반복되면서 딸의 뇌리 속으로 깊이 각인되었다.

자상한 아버지와 굳센 어머니, 올바르게 자란 딸, 3자가 봤을 때 완벽하기 그지 없는 가정의 모습이었다. 누구도 그 가정의 평화와 화목이 계속될 것이라 믿었고 그들 또한 그러리라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성장한 딸이 어느덧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쯤, 조금씩 그들의 평화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소녀가 먼저 변화를 눈치챈 건 어머니 쪽이었다. 언제부턴가 어머니의 말수가 부쩍 줄고, 밖으로 나가는 일도 점차 줄어들었다. 늘 어딘가 지친 기색을 하고 이따금 아픈 신음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에선 이전의 기백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혹시 병이라도 걸린 것은 아닐까, 소녀는 종종 어머니에게 의원을 만나볼 것을 권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이상한 일은 또 있었다. 매 해 겨울만 되면 밤마다 자리에서 일어난 어머니가 훌쩍 어딘가 나갔다 돌아오는 것이었다. 달이 중천에 떠오를 때쯤 나가 새벽이 다 되어서야 돌아오는 어머니는 눈밭에 구르기라도 한 건지 항상 온 몸이 눈에 뒤덮여 있었고 그 피부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밤에 깊게 잠 못 드는 체질이었던 소녀는 이미 진작부터 어머니의 기행을 눈치채고 있었다. 아픈 몸으로 자꾸 겨울 바람을 맞으러 나가는 어머니가 소녀는 걱정되었지만, 어쩌다 밤에 보게 된 어머니의 눈빛이 너무나 싸늘했기에, 겁먹은 소녀는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집안을 지탱하던 기둥 중 하나인 어머니의 몸이 약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가세는 기울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부담이 아버지에게 옮겨갔으며, 아버지는 그 동안 어머니에게 신세 진 것이 많다며 불평 없이 이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그 또한 체력에 한계가 있는 사람이었던 지라 날이 갈수록 지쳐가는 기색이 역력했다.

몸이 힘드니 자연스럽게 아버지는 술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는 술을 마실 때 독특한 버릇이 하나 있었는데, 맑은 날이건 흐린 날이건 꼭 밖으로 술을 가지고 나가 달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가져간 술을 다 비울 때까지 몇 시간이고 거기 앉아있다 오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맑은 눈동자 안에 늘 부인과 딸만 담고 살아가던 아버지였는데, 술에 취해 흐리멍덩한 눈으로 아련하게 달을 쳐다보는 아버지의 모습은 소녀에게 마치 딴 사람처럼 느껴지곤 했다. 마치 저 달에 가족을 두고 내려온 사람처럼, 그 때의 아버지하고는 다가가기 힘든 거리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언젠가 소녀가 용기 내어 아버지에게 달을 보러 밖으로 나가는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는 그 물음에 답하는 대신 소녀에게 작은 조각을 끈에 꿰어 목에 걸어 주었다. 손바닥만한 크기였지만 옷의 무늬까지 정교하게 조각된, 귀족으로 보이는 듯한 여성의 조각이었다.

얘야, 그거 아니? 저 달나라엔 많은 존재들이 살아가고 있단다. 귀여운 토끼들도 있고, 죄를 지은 두꺼비도 있고, 그리고 달나라를 다스리는 공주님도 계시지.”

공주님이요?”

그래, 네게 준 이 조각, 이것이 그 달의 공주님을 조각한 것이란다. 이 나는 그 달의 공주님을 실제로 본 적이 있다. 이 세계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아름다움이었지. 공주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마치 무릉도원을 걷고 있는 것 처럼 기분이 둥실 뜨곤 했단다.”

어머니께서 그 말을 들으면 속상해 하실걸요.”

껄걸 너털웃음을 지으며 남자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그 공주님 덕분에 네 어머니를 만나, 지금의 네가 있을 수 있었단다. 잊지 마렴, 지금의 행복은 모두 달의 공주님 덕분이라는 것을.”

어머니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아직 비밀로 하고 있단다. 뭐랄까, 왠지 말하려고 하면 미안한 기분이 들어서 말이야. 그러니 너도 이 일은 비밀로 해주겠니? 언젠가 때가 되면 말해주마.”

소녀는 손에 든 조각을 뚫어져라 바라봤지만 그것이 그토록 아름다운 존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 기쁜 듯이 추억을 늘어놓는 아버지를 실망시키기 싫었던 소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소녀는 성인이 되었다. 한번 기울기 시작한 가세는 회복될 줄을 몰랐고 나날이 안 좋아지는 상황 속에 설상가상으로 화목했던 부모님의 사이도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갈등의 주 원인은 역시 아버지의 술 중독 때문이었다.

밖에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느 겨울 밤이었다. 그날도 술통을 들고 밖으로 나서려는 아버지의 앞을 막아 서며, 참다 못한 어머니가 언성을 높여 쏘아붙였다.

언제까지 술만 마시고 있을 건가요. 일도 거의 받지 않고, 이제는 끼니도 겨우 때우게 생겼어요. 또 우리 아이의 시집은 어떡하고요? 좋은 남자 한 번 만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이곳에서 평생 나무나 만지며 살게 할 건가요?”

미안해요. 하지만 이해 좀 해줘요. 나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늙어서 체력이 달리는걸. 혼례에 필요한 돈이라면 어떻게든 마련해 볼 게요. 먹고 살 돈도요.”

지난 번에도 그렇게 말하고선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잖아요. 매일 어딘가 훌쩍 나가서 술에 거나하게 취해 오고, 혹시 당신다른 사람이라도 생각난 건가요?”

,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내가 그렇게 할 남자로 보여요?”

그렇지만 아버지, 달의 공주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그리워서 가는 거잖아요.”

무심코 소녀에게서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 나왔다. 날이 갈수록 나아지기는커녕 더 안 좋아지기만 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소녀가 그 동안 쌓인 불만이 폭로의 형태로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소녀의 말에 어머니가 싸늘하게 아버지를 노려 보았다.

무슨 말이죠? 달의 공주라니.”

그게말 하기 어려운 이야기라……”

내게 무언가 숨기고 있는 거죠? 어서 말해 봐요, 말하기 겁나는 비밀이 아니라면!”

공기가 불안하게 일렁거렸다. 어쩐지 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가 조금 전보다 커진 것 같았다. 불을 때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한기에 소녀는 팔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어머니의 날이 선 목소리에 아버지는 죄책감을 느끼는 듯 시선을 피하며 말을 더듬고 있었다. 주저하는 아버지를 본 어머니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말 하라고 했죠!”

“…알았어요. 다 말할게요. 전부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의자에 걸터앉아 축 어깨를 늘어뜨리며, 소녀의 아버지는 달의 공주가 누구인지, 그녀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이야기했다. 그녀가 첫사랑이었다는 것, 그녀에게 난제를 제시 받아 유키온나의 심장을 가지러 산에 올라갔던 것, 거기서 유키온나를 만나 죽을 뻔 했지만 잘 속이고 빠져 나온 것, 그 리고 겁에 질려 살아가다 자살하기 직전 지금의 어머니를 만난 것까지.

이야기를 듣는 어머니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소녀는 눈치챘다. 첫사랑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그런 걸까? 아니면 아버지가 여전히 첫사랑을 잊지 못 해서? 그 때,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소녀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싸늘한 눈, 그것은 어머니가 매일 밤 가족들 몰래 집 밖으로 나설 때 하는 눈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한기가 더욱 강해지며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마침내 아버지의 긴 이야기가 끝을 맺었을 때, 뒤에 이어진 것은 차디차고 어두운 정적 뿐이었다.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문득 옛 생각에 그리워져서당신이 싫어지거나 한 것은 전혀 아니에요. 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당신을, 우리 딸을 사랑하고 있어요.”

속일 생각은 없었다그럼 그 때 내게 건넨 따듯한 말들은 뭐가 되는 거죠? 그것도 진심이었나요?”

라고요?”

! 모든 문과 창문이 일제히 열어젖혀지고 그 틈으로 눈과 찬 바람이 가득 들이닥쳤다. 깜짝 놀라 고개 돌렸던 소녀와 아버지가 다시 돌아본 그곳에 그들이 알던 아내의, 어머니의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불길한 기운이 집안을 집어 삼켰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길게 풀어헤치고, 하얀 소복 주위로 눈과 바람을 가득 휘감고 있는 창백한 몰골의 여인, 그것은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무시무시한 요괴, 유키온나였다.

당신은 요괴인 내게 끝까지 따듯한 마음을 보여준 유일한 사람이었어요. 당신의 배려가, 자상한말 한마디가 차가운 내 심장을 녹이고 처음으로 내게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게 해줬어요. 그래서 나는 당신을 찾아 산에서 내려 온 건데나 때문에 망가져 버린 당신의 삶을 원래 대로 돌려놓고자 평생을 바쳐왔는데그런데, 그 모든 것이 거짓된 것이었다니! 내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내 심장을 바치려 했던 남자였다니!!”

소녀는 어머니를 말리려 했지만 추위에 굳어버린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추위와 공포로 굳어버린 소녀의 눈 앞에서 상황을 파악한 아버지가 털썩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미안합니다! 당신의 심장을 가져가려 한 일은사랑에 눈이 멀어 그런 짓이었어요! 그 일은 그 뒤로 완전히 잊어버렸어요. 당신을 만나고 난 뒤 내가 보였던 모습은 전부 진심이었단 말입니다!”

진심이란 말을 당신은 너무나 쉽게 내뱉는군요.”

그 동안 살아온 정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저를 믿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럼 묻겠어요. 이런 저를, 지금도 당신은 사랑하고 있나요? 서로 죽이려 했고, 당신의 삶도 첫사랑도 산산이 부서뜨린 저를, 여전히 사랑하나요?”

“…, 물론…!”

아주 잠깐, 망설이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유키온나의 말에 답하려 했지만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무릎 꿇고 상대를 올려다보는 그 자세 그대로 남자가 얼어 붙었다.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 아마 고통을 느낄 시간조차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조각들에 둘러싸여 자신마저 조각이 되어버린 남자를 유키온나는 슬픈 눈으로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모두 어리석구나. 당신도, 나도, 모두 어리석었어.”

유키온나가 싸늘하게 굳은 남자의 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이 닿은 자리에서부터 남자의 몸이 산산히 부서져 흘러 내렸다. 이윽고 한 무더기의 고운 얼음가루로 변해버린 남자의 몸은 바람에 휘날려 문 밖으로,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눈앞에서 어머니가 변하고 아버지가 죽는 것을 그대로 지켜본 소녀는 그저 눈물을 흘리며 자신도 죽게 되지 않을까 입을 필사적으로 틀어막으며 비명을 삼킬 뿐이었다.

콜록, 추위를 견디지 못한 몸에서 정적을 깨고 기침소리가 새어나왔다. 유키온나가 홱 소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죽음을 직감한 소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유키온나를 피해 소녀는 뒷걸음질쳤지만, 이내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사시나무처럼 팔다리를 덜덜 떠는 소녀의 입에서 간신히 말이 새어나왔다.

, 어머….어머…….”

소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하다못해 마지막만큼은 고통스럽지 않길 바라며. 하지만 소녀의 예상과 다르게 그녀의 몸이 아버지처럼 얼어 붙는 일은 없었다. , 소녀의 뺨을 건드리는 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차가운 눈 요괴의 손이 아닌, 소녀가 어릴 때부터 손에 잡아온 자상한 어머니의 손이었다.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자 쓸쓸히 미소 짓고 있는 소녀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살려주세요……”

내 딸아, 내가 어찌 너를 해하겠니. 비록 그이와 함께 보낸 시간은 모두 거짓 투성이였지만, 너와 함께 보낸 시간만큼은 전부 진짜였단다. 그이도 나도, 너에 대한 사랑은 진심이었어.”

그럼 아버지는 왜 죽여야 했던 거죠?”

참을 수 없었단다. 내가 사랑했던 그이의 모습이 모두 거짓이라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어. 마지막에 그이의 눈을 보았니? 거기에 담긴 진심을 보았니? 그이의 눈동자 안은 온통 공포와 두려움 뿐이었단다. 이제 와서 그를 용서한다 해도, 우린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었을 거야. 그이도, 나도.”

파스스, 소녀를 어루만지는 어머니의 손이 손가락 끝부터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봄에 겨우내 쌓인 눈이 녹는 것처럼 어머니의 몸이 조금씩 녹아 무너지고 있었다.

어머니, 몸이…!”

유키온나는 몸도 마음도 얼어있지 않으면 안 된단다. 사랑, 온정, 그런 따듯한 감정은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고 몸을 안쪽에서부터 무너뜨리지. 자신의 본분을 지키지 않은 요괴의 최후란 이런 법이란다.”

하지만 지금까진 아무 일 없었잖아요!”

지금까진 요괴의 힘을 감추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지금보다 약해질 지 언정 인간의 몸이 되었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구나. 너무 많은 힘을 써버렸어. 더군다나 이제 와서 다시 얼어붙은 마음을 가지기엔 네가 있지 않니. 너를 사랑하고 있는 한 나는 더 이상 유키온나로 있을 수 없어.”

저 때문인 거예요? 저 때문에 아버지도어머니도모두 죽게 되는 거라고요?”

유키온나, 아니 소녀의 어머니가 소녀를 꼬옥 끌어안아 주었다. 차가운 몸 한가운데, 심장이 있는 곳에서 따듯한 온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왠지 그 온기가 어머니의 죽음을 앞당기는 것 같아 소녀는 목놓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소녀의 등을 다독여주며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네 탓이 아니란다. 내 너에게 자연 현상은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라 가르치지 않았니. 인간과 요괴는 이어질 수 없단다. 이어지게 된다 해도 남는 것은 비극 뿐이지. 그것이 자연스러운 거야. 네 아버지도 나도 사랑에 눈이 멀어 서로를 속였고, 자연이 정한 규칙을 어기고 이어졌기 때문에 그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는 것이란다.”

싫어요, 어머니. 떠나지 말아요. 날 혼자 두지 말아 주세요요괴라도 좋으니까, 날 싫어해도 좋으니까 제발……!”

“…너는 우리처럼 되지 말거라. 평범하게 인간의 삶을 살거라. 누구도 탓할 필요 없고 누구도 원망할 필요 없어. 오늘 있었던 일은 모두 잊고 부디 거짓 없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렴.”

어머니의 팔에서 점점 힘이 사라지고 있었다. 끊길 듯 말 듯 희미하게 들리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은 소녀가 다급한 마음에 어머니를 꼬옥 끌어 안으며 소리쳤다.

안 돼요! 제가 방법을 찾아낼 테니까, 조금만 더… …!”

말을 채 끝내기도 전, 어머니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남은 것은 어설프게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는 눈더미 뿐.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흘러 내리는 눈송이들을 보며 소녀가 절규하는 소리가 텅 비어버린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11-

죽지 않을 정도로만 손에 힘을 주며, 레티라 불리는 유키온나는 카구야의 귓가에 자신의 일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아버지는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어. 어머니는 한 줌 눈으로 돌아갔지. 눈보라가 그친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나, 그리고 두 분이 남긴 유품들뿐이었어.”

레티가 카구야의 눈앞에 아까 그 목걸이를 흔들어 보였다. 지금 다시 보니 그 형상은 카구야 본인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다.

행복한 삶? 눈 앞에서 부모를 모두 잃은 심정을 누가 알기나 해? 그런 일을 겪고서 평범한 삶을 살라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 그 때,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져 있던 내게 이 유품들이 눈에 들어온 거야. 그래, 이것은 계시였어. 이 모든 것의 원흉인 달의 공주, 너를 죽이라는 하늘의 계시였던 거야!”

유품들이라고?”

그래, 아버지가 남긴 것은 너를 찾을 단서. 그리고 어머니가 남긴 것은, 네가 그토록 염원하던 설녀의 심장이었다. 모든 것이 눈으로 변해버렸음에도 어머니의 심장만큼은 원래 모양 그대로 남아있었어. 그 또한 계시였던 거지. 인간을 포기해서라도 복수를 이루라고 말이야!”

당신반요였군요. 그런데도이렇게 강한 힘을 지닌 건……”

그래, 먹었다. 하루 전만해도 내 곁에서 웃어주던 어머니, 마지막까지 내 행복을 바랬던 그 어머니의 심장을내가 먹어 치웠다. 그렇게 난 온전한 요괴로 거듭났던 거야.”

어리석은짓을…”

어리석다고?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따듯한 마음을 포기하니까 되려 머리가 차갑게 식으며 침착해 지던걸! 나는 이렇게 불행해졌는데, 아버지도 어머니도 인생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는데, 이 모든 것의 원인을 제공한 너는 우리의 존재 따위 까맣게 잊은 채 희희낙락 거리며 살아갈 거라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 몇 년이 걸리더라도 네 녀석을 찾아 최소한 우리가 겪은 고통을 똑같이 갚아주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지.”

목을 움켜쥔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좁아진 기도를 수증기가 얼어붙으며 호흡의 경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앞으로 길어도 3분이면 카구야의 의식이 끊기고 죽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었다.

네게 내 어머니는 어떤 존재였지? 수집품으로 삼고 싶은 요괴에 불과했겠지! 그래, 요괴니까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치자, 그럼 내 아버지는? 그는 평범한 인간이었어! 가족에게 한없이 자상하고 끝까지 자기 일에 책임지려 노력한 그런 사람이었단 말이야! 근데 고작 네게 반했다는 이유로 넌 아버지의 삶을 거짓과 두려움 속에 몰아 넣었어. 대체 네가 무슨 자격으로! 아무 잘못 없는 아버지를!”

감정이 격앙된 레티가 카구야의 목을 쥐고 흔들며 그녀의 머리를 바닥에 쾅 쾅 내리 찍었다. 머리에 피를 흘리며 흐려지는 의식 속에 카구야가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저항했다.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있기는 해?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라도 해? 아무것도 모르겠지, 모두 네 심심함을 달래줄 장난감에 불과했을 테니까! 죽어죽어 버려! 마지막으로 네가 망가뜨려버린 모두에게 속죄하며 죽어!!!!”

비명소리에 가까운 외침이 이어졌다. 자신을 붙잡는 카구야의 팔을 가차없이 내치며 레티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목을 비틀어 숨통을 끊으려 했다. 그 때, 맥없이 바닥에 떨어져 내린 그녀의 팔에서, 잘그락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물체가 미끄러져 나왔다.

이건?”

카구야가 공격할 때 쓰는 보물이 아닌가 싶어 흠칫 놀란 레티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작은 목걸이였다. 화려한 보석 장식 같은 것 없이 초라하게 뼈를 깎아 꿰어 만든 조잡한 장식품, 거기엔 어떤 함정이나 술식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지만 부속품 하나하나 정성 들여 정밀하게 가공한 그 솜씨는 레티의 기억 속에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 있는 그것이었다.

어째서 네가 이런 걸…”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레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정신이 완전히 목걸이에 팔린 레티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 덕에 카구야는 의식을 잃기 직전 겨우 그녀의 손아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카구야가 어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그녀를 내버려 두고, 레티가 엉금엉금 목걸이 쪽으로 기어갔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서, 바닥에 떨어진 목걸이를 주운 레티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려 할 때였다.

“…?”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그녀의 가슴, 심장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입에서 쏟아져 나온 피가 하얀 빛깔의 목걸이를 불그스름하게 물들였다. 레티의 손에서 목걸이가 떨어져 내려, 그 충격으로 산산이 부서져 복도 여기저기에 흩어졌다. 뒤이어 그 위로 화살이 박힌 그녀의 육신이 무겁게 쿵 내려앉았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손에 활을 쥔 에이린이 복도 바깥에서부터 허겁지겁 카구야에게 달려와 그녀의 몸을 들어 무릎 위에 눕혔다. 한발 늦게 안쪽의 상황을 눈치챈 모코우와 레이센들이 그 뒤를 이었다.

공주님! 정신이 좀 드시나요, 공주님?”

에이린. 이나바. 다들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야?”

산소가 통하지 않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카구야가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걱정스럽게 그녀를 지켜보는 가운데, 카구야의 시선은 일행이 아닌 다른 인물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에이린, 그 녀석은 어떻게 되었어?”

유키온나 말씀이신가요. 제 뒤에 쓰러져 있습니다. 퇴마의 술식이 담긴 화살로 심장을 꿰뚫었으니, 아마 얼마 가지 못해 소멸하고 말테지요.”

소멸한다고?”

공주님의 몸에 손을 댄 녀석인걸요. 가볍게 넘어갈 리 없지요.”

카구야가 에이린을 뿌리치고 그녀의 뒤쪽으로 몸을 질질 끌며 이동했다. 붉은 피 웅덩이 한가운데 레티의 몸이 힘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설녀의 힘도 다했는지 그녀의 피는 더 이상 얼어붙지도, 차가운 냉기를 발산하고 있지도 않았다.

...…….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녀는 손을 휘적거리며 바닥을 휘젓고 있었다. 끈적한 피가 엉겨 붙은 목걸이의 파편이 그녀의 손 끝에 스치더니 맥없이 굴러가며 그녀로부터 멀어져 갔다.

다 죽어가는 요괴의 모습을 지켜보는 모두의 반응은 냉담했다. 어디까지나 자업자득인 일이었고, 난동을 부린 요괴가 퇴치되는 것은 흔히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하지만 카구야는 달랐다. 무언가 생각하던 그녀가 다 죽어가는 레티의 손을 꼬옥 움켜잡았다.

공주님?”

다 끝났잖아. 마지막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하게 해 줘.”

저리 가라는 손짓과 함께 카구야는 바닥에서 자신의 형상을 한 조각이 달린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모든 것이 부서지고 망가진 가운데 오롯이 제 형상을 유지하고 있던 그 유품을, 카구야는 레티의 손에 부드럽게 쥐어주었다.

당신도, 당신의 어머니도 잊지 않겠어요. 그 사람처럼…”

투명한 눈물 한 줄기가 레티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호흡이 멎었다. 싸늘하게 식은 유키온나의 시체는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한 무더기 눈으로 변해 녹아내려, 피웅덩이와 뒤섞여갔다.

영원정을 둘러싼 요기가 사라지고 맹렬하게 몰아치던 눈보라가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무너진 지붕 너머로 보이는 주홍빛의 저녁하늘이 모든 것이 끝난 영원정을 쓸쓸하게 비추고 있었다

-Epilogue-

영원정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다음날, 영원정은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파괴된 잔해의 수습과 복구 작업을 펼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에이린의 지휘와 레이센의 감독 하에 토끼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가운데, 정작 영원정을 무너뜨린 장본인인 카구야는 뒤쪽 정원에 느긋하게 걸터앉아 따듯한 오후의 햇빛을 만끽하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냐. 넌 안 도와줘도 돼?”

어머, 공주는 원래 저런 험한 일 안 하는걸.”

내가 저 토끼들이었으면 언젠가 자고 있는 네게 칼이라도 꽂았을 거다.”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돕지 그래?”

내가? 웃기는 소리. 애초에 널 도와주러 온 것만으로 감사하게 여겨야지, !”

발을 쿵쿵 구르며 성을 내는 모코우를 피식 비웃곤 카구야는 그녀에게 자신의 옆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그녀의 분위기에, 이를 거부할 수 없었던 모코우는 금방 짜증을 거두곤 그녀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서 하고 싶었던 말이 뭔데.”

그 아이, 너와 꼭 닮았더라. 날 찾아온 이유도 말이야.”

, 업보란 업보는 다 쌓고 다녔나 보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녀석을 도와서 같이 널 날려버릴 걸 그랬어.”

그래도 그쪽은 이유라도 납득이 갔지, 모코우는…”

지금 한 판 붙자고?”

어머, 농담도 못하니. 이래서 서민이란~”

네 그런 태도가 일을 더 키우고 마는 거야. 이번에도 그랬지? 분명 지금처럼 이리저리 깔보면서 상대를 도발했겠지.”

궁색한 변명은 상대의 마음을 망설이게 하며 더 힘든 처지로 몰아넣을 뿐인걸. 그렇게 해서라도 속이 후련해진다면, 악역쯤은 얼마든지 맡아도 좋아. 익숙하니까.”

그래서 인정사정 없이 상대를 두들겨 놓은 거냐?”

그래야 더 힘주어 날 찌를 테니까. 이번엔 조금 의외였어. 난 영락없이 그 녀석이 옛날 이야기 속 유키온나 본인인줄로만 알고 있었거든. 자신이 그 사람을 죽여놓고 애먼 곳에 화풀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조금 따끔하게 혼내줄 생각으로 싸움에 임했지.”

만약 처음부터 자기 정체를 밝히고 싸웠으면?”

그땐너와 만났을 때처럼 한 번? 아니 이쪽은 내 잘못이 더 크니까 다섯 번 정도 죽어줬을 지도.”

너 진짜 성격 더럽구나. 무슨 짓을 해도 복수할 상대를 죽일 수 없다는 걸 깨달으면 그것만큼 비참한 게 또 없는데도.”

대신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풀 수는 있잖니.”

말을 마친 카구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종종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정원으로 향하던 카구야가 별안간 뒤를 돌아보며 모코우에게 손짓했다.

? ?”

그래, 보여줄 게 있어.”

한숨과 함께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마당으로 내려온 모코우가 카구야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향한 곳은 정원 한구석에 작은 화단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 중 한가운데 봉긋 둔덕이 솟아 있는 화단 앞에 카구야가 멈춰 섰다. 화단 앞엔 조그마한 제단이 마련되어 있어, 불 붙인 지 얼마 안된 것 같아 보이는 향불이 그윽한 향내와 함께 타오르고 있었다. 

“…그 녀석을 위해 만들어 준 거야?”

그 아이와 그 아이의 아버지, 어머니, 3명의 몫이야. 그 아이 말대로 내가 쓸데없는 난제를 내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겐 아무 일 없었을 거야. 그 아이도 부모를 눈 앞에서 잃는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테고, 원한에 사무쳐 인간을 포기하고 유키온나가 되는 일도 없었겠지.”

뭐어애초에 태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아무튼 씁쓸하네. 한을 품고 마음이 얼어붙은 요괴라…”

다음 생에서도 다시 가족으로 만났으면 좋겠네. 이번엔 모두 평범한 인간으로서 말이야.”

품에서 카구야가 목걸이를 꺼냈다. 전날 산산이 흩어진 목걸이가 말끔한 모습으로 고쳐져 있었다.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목걸이 가운데 그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쥐었던 남자의 유품이 함께 걸려 있다는 것. 남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을 무덤 위에 올려 놓은 카구야는 향불 앞에서 조용히 합장 자세를 취하며 떠나간 이들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별 일이네. 네가 이렇게 고분고분 반성도 하는 모습을 보고.”

삼성오신이라, 사람은 늘 반성하는 자세를 갖추고 살아야지.”

나한테는?”

모코우 너는 예외.”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저거, 무덤 맞는 거지? 뭘 묻은 거야? 그 녀석은 그때 다 녹지 않았어?”

다 녹아 내리는 눈 안에 심장이 남아 있었어. 소문대로 아름다운 모양이더라. 따듯하게 맥동하는 보석이라고 할까.”

상상이 안 가는걸…”

아무튼, 이제 와서 그걸 내 수집품에 추가하긴 그러니 가족들의 유품과 함께 묻어준 거지. 쭉 함께할 수 있도록.”

그러냐. ? 카구야, 지금 아직 겨울인 거 맞지?”

동지가 엊그제 였잖니. 벌써 시간 감각마저 흐려진 거야?”

아니, 그 뭐냐에이, 아니다. 가자. 놀지만 말고 너도 뭐라도 좀 하라고.”

공주인데?”

투닥거리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모코우와 카구야, 묘비 주위에 어느 샌가 핀 세 송이 이름 모를 하얀 꽃이 바람에 흔들리며 둘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