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팬픽

한 잔의 가치

교토대동방학과 2022. 2. 1. 00:42

[동방홍룡동 치마타 텐큐 주연의 중편 팬픽입니다]

한 잔의 가치

 

새해를 보름 앞둔 연말의 어느 날, 짐승도, 요괴도, 심지어 신까지도 추위를 피해 죄다 보금자리에 틀어박혔는지 요괴의 산은 그날따라 유난히 조용했다. 이는 최근 참배객이 뚝 끊긴 모리야 신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밥줄인 신앙이 뚝 끊겨버리긴 했지만 모처럼 찾아온 조용하고 느긋한 연말에 신님들은 별다른 아쉬움 없이 모자란 잠을 채우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달콤한 늦잠을 만끽하는 두 신을 내버려두고 동쪽 지평선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스한 햇귀가 신사를 감싸는 이른 아침의 일이었다.

 

두 신과 달리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진 사나에가 어슬렁어슬렁 본전 앞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간밤에 내린 눈이 사방에 소복이 쌓여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온통 새하얗게 뒤덮인 풍경을 만끽하며 개운하게 기지개를 편 후, 빗자루를 집어든 사나에는 나지막히 콧노래와 함께 참배길에 쌓인 눈을 쓸어내며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참배객의 방문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모리야의 신님들, 자리에 계십니까! 월홍시장의 프로 마케터인 제가, 한 해의 대미를 장식할 최고의 이벤트 기획을 마련해 왔습니다. , 곧바로 회의를 시작하시죠!󰡓

 

󰡒흐아아아아!$$%$!#$?!?!󰡓

 

갑작스럽게 위에서 들려온 요란스런 외침에 깜짝 놀란 사나에가 쥐고 있던 빗자루를 떨어뜨렸다. 자기가 실례를 저지르고 있단 자각이 없는 건지, 난데없이 튀어나온 인물은 허둥거리는 사나에의 모습에도 아랑곳 않고 그녀의 어깨에 차가운 손을 턱 얹으며 말을 이어갔다.

 

󰡒차갓-!?󰡓

 

󰡒아침부터 부지런하네, 무녀씨. 마침 잘 됐어. 꿈자리에서 완전, 끝내주는, 대박 아이디어가 떠올라 눈뜨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왔지 뭐야. 곧바로 너희 신님들과 기획 회의를 하고 싶은데, 그 분들은 지금 어디 계시니?󰡓

 

하이텐션으로 쉴 새 없이 떠드는 방문객의 입을 사나에가 다급히 틀어막고 따갑게 쏘아보았다. 쉬이잇, 하며 검지를 입으로 가져다 댄 사나에의 시그널을 눈치 챈 상대가 그제야 목소리를 낮추고 얌전해졌다. 상대의 입에서 손을 뗀 사나에가 땅에 떨어뜨린 빗자루를 집어 들며 투덜거리는 어조로 눈앞의 상대에게 말했다.

 

카나코님과 스와코님은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 용건이 있으시다면 제게 말해주세요, 가급적 조용히부탁드리죠, 치마타님.”

 

네가 내용을 이해하고 두 분들 대신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겠어? 의사결정을 미룬다거나 해선 안 돼. 난 오늘 이 자리에서 곧바로 두 분의 허가를 받아 일을 진행하려고 이렇게 찾아온 거라고? 확실한 대답을 듣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을 거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자신의 뜻을 사나에에게 밀어붙이는 방문객. 일곱 빛깔 무지개 색 천을 조잡하게 끼워 맞춘 독특한 패션의 소유자인 그녀의 정체는 바로 시장의 신이자 현 모리야 신사의 비즈니스 파트너 중 하나인 텐큐 치마타였다. 한때 환상향에 한차례 파란을 불러일으킨 어빌리티 카드 이변의 주모자 중 하나였던 그녀는 이변이 끝난 후, 현재 모리야 신사와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해 신사와 마을 등지에서 정기적으로 시장을 여는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시장에 손님을 끌어 모으기 위해 그녀가 새 기획안과 마케팅 전략 따위를 들고 모리야 신사에 방문하는 일은 최근 들어 꽤 익숙한 풍경이 되었으나, 오늘처럼 요란법석을 떨며 강경하게 밀어붙이는 일은 협약을 맺은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의사결정이 몇 시간 미뤄진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고, 일찍 일어난 장사꾼이 돈을 더 벌어들이는 법이지, 치열하게 열정을 불태우는 자만이 성공적으로 시장을 주도할 수 있어. 미뤄뒀다가 다른 누구에게 선수를 빼앗기면 어쩌려고?”

 

󰡒그 말씀, 젊은 사업가 분들이 인터뷰 하는데서 자주 들어본 말 같은데요. 이러다 나중에 '성공의 비결' 같은 자기계발서라도 써내시는 거 아니에요?󰡓

 

󰡒괜찮은걸. 이왕이면 좀 더 임팩트 있게 '나는 이렇게 다시 일어섰다 시장의 신이 알려주는 101가지 성공 비결' 이라고 지으면 좋을 것 같아.󰡓

 

비꼼 섞인 농담에 진지하게 답한 치마타의 반응에 사나에가 어색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아무튼, 두 분도 곧 자리에서 일어나실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안에서 기다리시겠어요? 날이 추우니, 따듯한 차라도 내오겠습니다.”

 

좋아. 11초라도 빨리 회의를 시작하고 싶지만, 일단은 기다리지.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으면 말하나마나 무용지물이니까.”

 

손님방으로 치마타를 안내한 사나에는 곧바로 화로에 따듯하게 불을 지피고 부엌으로 향했다. 잠시 후, 치마타의 앞에 따듯한 녹차가 담긴 찻잔과 바삭한 전병이 담긴 그릇이 놓여졌다. 그녀의 대접에 가벼운 손짓으로 감사를 표한 치마타가 막 받쳐 든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려 할 때였다.

 

아침부터 신들의 안식을 방해하는 불경한 자는 누구냐~!”

 

, 스와코님.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일 것 같냐! 눈도 많이 왔겠다, 손님도 없겠다, 간만에 푹 자고 있었는데 아침 댓바람부터 매너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녀석이 잠을 다 깨워버렸잖아. 무슨 신문쟁이 텐구 녀석들도 아니고! 에잇, 사나에. 이런 민폐 덩어리에게 차를 내주다니, 차가 아깝구나.󰡓

 

... ... 사업 이야기는 좀 더 냉정하고 말이 잘 통하는 분과 하는 편이 좋은데 말이죠.”

 

지금 은근슬쩍 무시 했겠다? 진짜 대화와 협상이 뭔지 보여줄까, !”

 

자자, 스와코님. 진정해 주세요. 지금까지 회의는 카나코님이 주도해 오셔서, 치마타님도 악의를 담고 하신 말씀은 아닐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반응하시면 더욱 말이 안 통하는 분처럼 느껴질걸요.”

 

씩씩거리며 발을 구르는 스와코를 사나에가 겨우 탁자 앞에 끌어 앉히고 나서야 그들은 이야기의 본론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치마타가 그렇게 애타게 말하고 싶어하던 내용인즉슨, 연말연시를 기념하여 지나가는 해와 함께 떠나보낼 물건을 팔고 새해와 함께 새로 들일 물건을 살 수 있도록 특별 시장을 주최하자는 것이었다. 덧붙여 물건을 구매한 액수에 비례하여 포인트를 지급하고, 포인트를 소모해 경품 추첨에 응모할 수 있게 하자는 것. 사람들의 소비 심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 대목을 제대로 저격하자는 취지의 아이디어였다.

 

, 괜찮은 아이디어네. 해가 넘어가기 직전에 신년맞이 행사를 겸해서 성대하게 주최하면 신년참배객들을 모으는데도 도움이 되겠지. 카나코도 한동안 뜸해진 참배객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으니 두 팔 벌려 환영할 거야.”

 

치마타의 아이디어를 들은 스와코가 그녀의 생각에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카나코한텐 내가 잘 전달할 테니 오늘부터 곧바로 추진하도록 하지. 그런데... 이게 아침부터 쳐들어 올 정도로 급한 일이었던 거야?”

 

앞으로 연말까지 보름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산의 요괴들에게 협조를 얻고, 참가 희망자들의 신청을 받고, 경품을 구하고, 그렇게 준비하려면 최소 일주일은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 기획은 말씀하신 것처럼 해가 넘어가기 직전에 해야 의미 있는 것. 우물쭈물하다 해가 넘어가 버리면 흥이 식어 버립니다. 그럼 애써 특별 시장을 개최한 보상을 챙기지 못 할 지도 몰라요.”

 

그래도 쓰읍... 다음부턴 때를 가려서 최소한의 매너는 지켜 달라고. 좋아, 그럼 오늘 회의는 끝! 이만 해산!”

 

󰡒스와코님, 치마타님. 죄송하지만 지금 말씀 나누신 기획, 지금으로선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때까지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나에가 손을 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

 

어째서? 신님도 인정한 나의 완벽한 계획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야?”

 

믿기지 않는다는 듯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반발하는 치마타에게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사나에가 말을 이었다.

 

두 분은 마을의 일을 아직 모르시는군요. 사실, 지금 마을의 상황이 썩 좋지 않아서요. 축제니 시장이니 즐길 분위기가 아니랍니다. 최근 참배객이 뚝 끊긴 이유도 어느 정도 거기에 있고... 그 정도로 심각하거든요.”

 

󰡒무슨 일인데 그래? 한동안 밖에 나가본 적 없어서 산 아래 근황을 알래야 알 수가 있어야지.󰡓

 

󰡒지금 마을에 대대적인 술 부족 사태가 벌어졌다는 모양이에요. 마을의 양조장들이 하나같이 술을 생산하지 못하게 되어서 연회는커녕 장사에 쓸 술조차 부족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 때문인지 요식업뿐만 아니라 다른 가게들도 다 장사가 안 된다고 하던걸요. 장사를 하시는 분들은 완전 울상이 되고, 겨우내 끼니를 챙기는 것조차 힘들어진 분도 계시대요.󰡓

 

󰡒혹시 흉년? 그런 일이 있었다면 가을신 자매가 미리 얘기를 해주었을 텐데?󰡓

 

󰡒흉년이 든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풍년도 아니었어요. 그리고 술 생산이 끊긴 건 다른 이유로, 무슨 일에선지 올해 불행한 사고가 곰비임비 발생해서 양조장마다 크고 작은 사고가 있었답니다. 다른 가게들도 아니고 양조장들만 골라서요. 덕분에 지금 한창 망년회니 신년회니 준비해야 할 이 시기에 술이 전부 동나게 생긴 거구요.󰡓

 

󰡒곤란하네. 술이 없어도 시장을 열 수는 있겠지만 공급과 소비 모두 위축되어 있는데다, 또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돈을 펑펑 쓰며 즐기고 싶어 하는 녀석은 거의 없겠지. 이래서야 누가 참가나 제대로 해줄지.󰡓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지 않나요. 동시 다발적으로 일이 벌어져 재화 공급이 차단되는 사태로 번지다니. 이쯤 되면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 개입했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치마타 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레이무씨하고 이야기 해봤는데, 그쪽에선 아직 확실한 게 없다며 개입을 거부했어요. 요괴의 소행이라고 확실히 판명되면 그때 나선다고 하더군요. 으음어떻게 해야 할까요.󰡓

 

󰡒뻔하지 않은가. 하쿠레이의 무녀가 나서지 않는다면, 우리가 대신 나서야지!󰡓

 

당찬 목소리와 함께 장지문이 힘차게 열리며 방 안에 장신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걸까, 모리야 신사의 주신 야사카 카나코가 근엄한 모습으로 복도에 서서 방 안의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일어났어? 일어났으면 나 대신 회의에 들어오지 그랬어.”

 

󰡒가끔은 스와코에게도 어른들의 비즈니스를 체험할 기회를 주고 싶어서 말이지. 후후, 냉정하지 못한 우리 쪽 인원이 공에게 실례를 끼치지는 않았나?󰡓

 

󰡒저거 처음부터 다 듣고 있었네. 능구렁이 같은 녀석.󰡓

 

󰡒아뇨, 의외로 제 말을 잘 들어주셔서 이야기가 빨리 진행되었습니다. 혹시 못 들으신 내용이 있다면 설명을 한 번 더 해드릴까요?󰡓

 

󰡒그러지 않아도 되네. 저 녀석, 저래 보여도 한 나라를 다스렸던 녀석이니 사리분별 정도는 할 줄 알거든. 터무니없는 얘기였다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 스와코가 오케이 했으면 공의 아이디어는 그대로 추진해도 괜찮다만, 사나에의 말에 따르면 상황이 영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나 보더군.󰡓

 

󰡒시장의 신이면서 정작 시장 상황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제 불찰이네요. 아쉽지만 이 기획은 내년으로 미뤄야겠어요.󰡓

 

󰡒아니, 우린 이대로 간다. 장소 선정부터 이벤트 준비까지 필요한 사전 작업은 모두 나와 스와코가 책임지고 진행하지. 대신, 텐큐공은 마을에 벌어지고 있는 혼란을 조사하고 수습해주었으면 하네.󰡓

 

󰡒... ...?󰡓

 

󰡒사나에, 너는 텐큐공의 조사를 옆에서 도와주려무나. 이변 해결이라 생각하여 네가 앞으로 나설 필요는 없다. 이번 일의 적임자는 텐큐공일지니, 사나에 너는 성심성의껏 지원하는데 힘쓰도록.󰡓

 

󰡒잘 이해되지 않는군요. 저보고 시장을 기획하는 일에서 물러나 마을에 닥친 재앙을 조사하고 수습하라니요. 풍년이니 재앙이니, 그런 건 두 분의 소임 아니었나요?󰡓

 

󰡒농사에 필요한 비바람을 불러 주거나 재앙을 미연에 막을 수는 있어도,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선 우리들의 힘도 어쩔 수 없어. 그대는 시장의 신이 아닌가? 지금 마을에 필요한 건 무너진 경제를 안정화 시키고 사람들이 다시 활발하게 거래를 하도록 만드는 것. 그런 거라면 그대만한 적임자가 없지. 잘 생각해 보게. 그대는 시장의 신이지 축제의 신이나 홍보의 신이 아니지 않나.“

 

... 그건 그렇죠.”

 

정곡을 찔린 치마타가 입술을 깨물며 입을 다물었다.

 

, 이쪽도 그대 말처럼 이 일이 단순 재해로 인한 소란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것도 있어. 그렇기에 구태여 어떻게 된 일인지, 상세하게 조사를 부탁하지. 그대 손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한 건수라 생각된다면 그때 가서 기획을 취소해도 늦지 않아.󰡓

 

󰡒신님도 이 일에 무언가 인위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이 일은 제가 책임지고 해가 바뀌기 전에 진상을 규명하고 수습할 수 있도록 하죠. 시장이 취소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일을 해결하고 올 때까지 시장의 준비를 부탁드리죠.󰡓

 

󰡒하하, 이쪽은 내뱉은 말은 반드시 책임진다고. 사나에, 다녀오거라.󰡓

 

󰡒,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카나코님.󰡓

 

제안을 받아들인 치마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고, 그 뒤를 사나에가 뒤따랐다. 둘이 신사를 떠난 것을 확인하곤, 그때까지 전병만 아작 아작 깨물어 먹고 있던 스와코가 카나코를 넌지시 불렀다.

 

󰡒…있지, 카나코. 저 녀석 오늘 따라 힘이 넘쳐나지 않아?󰡓

 

󰡒너도 느꼈구나, 스와코. 확실히 신격이 높아졌어. 지난번에 시장을 개최했을 때도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야.󰡓

 

󰡒수상하지 않아? 경기가 침체되었다면 녀석의 힘은 약해져야 정상일 터. 그런데 어째서 저 녀석은 오히려 더 강해진 거지? 우리가 모르는 데서 또 무언가 꾸미고 있는 거 아니야?󰡓

 

, 그녀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군.”

 

전과가 있는 녀석이니까.”

 

안심해도 좋아. 텐큐 공은 그런 사악한 짓을 벌일 신이 아니야. 신앙을 얻기 위해 뭔가 벌일 거였으면 진작 다른 형태로 이변을 저질렀었겠지. 자신을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는 건 악신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재앙신인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텐큐 공을 믿는다.”

 

, 그러셔~. 재앙을 뿌리는 녀석이라 미안하게 됐네요.”

 

󰡒또 우연찮게 강해진 그녀의 힘이 어쩌면 이 사태를 해결할 열쇠가 되어 줄지도 모르지. 아무리 약해졌어도 그녀는 신이야, 스와코. 권능이 닿는 영역 내에서라면 충분히 자신이 맡은 일을 해치울 수 있을 테지. 그러니 그녀를 믿고 맡겨 보자고.󰡓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아무튼 그럼 다 해결 된 거지? 조사는 그 녀석이, 행사 준비는 네가. 딱 좋군. 나는 다시 겨울잠이나 자야겠어.”

 

어허, 어딜 내빼려 그러시나. 사나에의 빈자리까지 생각해서 두 배로 일해야지. , 바로 우리 일을 하러 가보자고.”

 

뱀에게 목덜미를 덥석 낚아채인 개구리의 처절한 절규가 경내에 울려 퍼졌다.

 

-2-

 

사나에를 대동한 치마타가 곧장 향한 곳은 인간의 마을이었다. 신이 인간들의 고민거리를 해결해주기 위해 직접 발로 뛰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나, 치마타는 다른 신들의 식신이나 신의 사자처럼 앉은 자리로 정보를 물어다 주는 수족 같은 존재가 없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시간은 곧 금과도 같나니, 바로 현장 탐문조사부터 시작하죠! 무녀씨, 피해를 입었다는 양조장이 어딘지 안내를 부탁해.”

 

, , 그게... 치마타 님?”

 

대로변 한가운데에서 의욕을 불태우며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치마타를 사나에가 조심스럽게 부르며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저희 둘,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요...?”

 

그녀로부터 한 걸음 거리를 두며 민망하게 얼굴을 붉히는 사나에를 본 치마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느껴지는 흘끔거리는 시선, 수군거리는 소리.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나 기인이오.’하고 어필하는 치마타 때문임이 자명했다. 경계심으로 가득 차 급격히 어색해진 분위기의 거리에서 오직 치마타만이 태풍의 눈처럼 초연하게 서있을 뿐이었다.

 

그렇네. 확실히 이대로라면 탐문이 어렵겠어. 시장을 열고 닫을 때 몇 번 연설을 한 적 있으니, 누군가 날 알아볼 지도 모르니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잖아요!?”

 

걱정 말렴. 신성력은 최대한 억눌러 드러나지 않게 하고 있으니까.”

 

자각이 전혀 없으시네요, 이 패션계의 재앙신!”

 

아니, 지금 뭐라고... ...!”

 

치마타가 미처 대꾸할 틈도 없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챈 사나에가 빠른 걸음으로 큰 길에서 벗어났다. 골목 안쪽, 어느 작은 옷가게로 들어가 적당히 평범해 보이는 옷들을 골라 치마타에게 입혀주고 난 뒤에야 비로소 사나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 이 정도면 눈에 안 띄겠죠. 입고 계셨던 옷은 제가 맡아 두고 있을게요.”

 

이런 옷은 전혀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데.”

 

그런 옷에서 위엄이 느껴질 거라는 발상 자체가 이해되질 않는데요! 그리고 여기저기 탐문하고 다니는 걸 흑막에게 들키면 그대로 숨거나 도망쳐 버릴 수도 있다구요? 당분간은 평범한 인간인 것처럼 행동해주세요. 덧붙여 저도 무녀씨라고 부르지 말고, 사나에 라고 이름으로 불러 주시구요. 그러면 누가 봐도 아는 사이처럼 보일테니까요.”

 

그쪽도... 아니, 사나에도 힘이 들어가 있네. 이변 해결이라 그런 걸까.”

 

아하하~ 그것도 있지만 왠지 두근두근하잖아요? 현장조사부터 단서를 하나하나 찾아 진실을 추리해야 한다니, 꼭 탐정 소설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에요. 치마타님이 홈즈, 제가 왓슨! , 조사하는 동안엔 실례지만 저도 치마타 님을 친근하게 불러도 될까요?”

 

그 편이 조사에 도움이 된다면 상관없어. 우리 둘 다 이렇게 의욕이 넘치니 어쩌면 사건 해결도 금방일지도 모르겠네.”

 

사나에와 치마타가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 그녀들에게 다가온 옷가게의 주인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야~ 이거 오랜만입니다. 모리야의 무녀님. 오늘은 일행분도 함께이군요.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어디 다른 곳에서 오신 분이십니까?”

 

안녕하세요, 지로씨. 이쪽은 치마타 양이에요. 그러니까~ 얼마 전에 알게 되고 친해졌는데, 사정이 있어서 케이네씨가 맡아 키워주셨거든요. 그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서당에서 지내는 동안 바깥 구경을 거의 못해봤다고 해서, 이번 기회에 제가 마을을 좀 안내해 주려고 합니다. 아차, 지금 치마타 양이 입은 옷은 제가 전부 살게요.”

 

오오~ 그렇구만요. 어쩐지 누덕누덕 기운 옷을 걸치고 있더라니, 딱한 처자였구만. 옷이 필요하면 언제든 오십쇼. 싸게 해드리리다. 아마 마을에서 우리보다 좋은 옷을 싸게 파는 곳은 없을 거요.”

 

하하... 배려 감사합니다.”

 

표정이 굳어진 치마타를 얼른 가게 밖으로 빼내고, 사나에는 옷값의 지불을 위해 지갑을 꺼냈다.

 

, 지로씨. 요즘 술 품절 건으로 마을 상황이 말도 아니라고 들었는데, 어떤가요?”

 

아이구, 말도 마쇼. 덕분에 한탕 크게 벌어야 할 시기에 다들 죽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양조장 쪽 사람들은... 겨우내 굶어 죽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나마 딱 한 곳, 게코우카와 주조(金光川酒造) 거기는 차질 없이 술 생산이 가능하다고 하던데, 그럼 뭐하나요. 너도나도 다 거기서 술을 주문하려고 하니 지금 술값이 거의 금값이랍니다. 저 같은 사람은 꿈도 못 꾸죠.”

 

다행히 생산이 가능한 곳이 남아 있었군요. 술값이 금값이라면 얼마나 오른 건가요?”

 

예전에 3천엔이면 살 수 있던 술 한 병을 사기 위해 지금은 만엔짜리가 몇 장씩 필요하답니다. 이것도 며칠 전 이야기였으니 지금은 더 올랐을거요. 너도나도 웃돈을 주고 구매하려고 하다 보니 이리 된 겁니다.”

 

이상하네요. 값이 지나치게 많이 오르면 팔기도 곤란해질 텐데. 술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물건도 아니고, 웃돈을 얹어주며 술을 사 마시려는 분도 없을 테고요.”

 

저야 술을 좋아하지 않으니 알 수 없죠. 마을에 무슨 술을 못 먹으면 죽는 역병이 도는 것도 아니고, 쯧쯧... ...”

 

정보 감사합니다. 게코우카와 주조는 멀쩡하다고 하셨죠? 상황이 어떤지 한 번 가봐야겠네요. 그리고 여기 옷값입니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다녀오시고 또 이용해 주십쇼~!”

 

껄껄 웃으며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하는 주인장을 뒤로 하고 사나에는 밖으로 나와 평상 앞에 앉아 있던 치마타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주인장의 말에 뒤끝이 좀 남았는지 부루퉁한 표정의 그녀가 고개를 돌려 사나에를 쳐다보았다.

 

여긴 다시 안 올 거야.”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악의를 가지고 하신 말은 아니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고... 어흠, 그리고 새로운 정보를 얻었어요. 다른 양조장들이 전부 술을 못 만들고 있는 와중에 딱 한 곳만 멀쩡하다고 하네요. 거기로 수요가 몰려 지금 술 시세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고요. 듣기론 거의 열 배 가까이 뛴 모양이에요.”

 

가격은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데서 양쪽의 합의 하에 결정되는 거니까. 공급이 줄고 소비가 늘면 자연스레 가격이 오르기 마련이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품귀 현상이 그리 오래 된 것도 아닌데 열 배라니, 이상한걸. 게다가 마을에 와서 줄곧 느낀 건데, 마을 인간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뭔가 달라. 경기가 침체되었다는 네 말과 달리 마을 곳곳에서 모종의 거래가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어. 실로 어마어마한 양의 돈이 오가고 있네. 네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는 모양이야.”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치마타가 진지한 눈빛을 빛냈다. 치마타의 시선을 따라 주위를 살폈지만, 사나에의 눈엔 그냥 평상시와 똑같은 마을의 풍경만이 들어올 뿐이었다.

 

암시장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다른 나라에선 금주령이 내려지니 범죄 조직에 의한 술 생산이 급등했다고 하니까요. 여기선 아무리 봐도 야쿠자 같은 분은 안 보이는데-”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 일단 조사를 계속 하는 수밖에 없나. 사나에, 아까 멀쩡한 양조장이 한 곳 남았다고 했지? 그곳으로 먼저 가보자. 내 두 눈으로 직접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해 봐야겠어.”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이름을 들어서 위치는 어디인지 알고 있답니다. 그럼 같이 가실까요?”

 

사나에가 내민 손을 잡으며 치마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마을을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규모의 거래의 흐름을 계속 신경 쓰고 있었다. 그 덕분에 자신에게 들어오는 신앙의 양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것까지도.

 

그런가, 최근 힘이 솟아나는 기분이었던 건 이 영향이었나.’

 

신앙이 늘어나는 건 신의 입장에서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지만 직접 마을의 상황을 본 치마타는 뭔가 탐탁지 않았다. 그녀에게 흘러 들어오는 신앙은 마치 오염된 강물처럼 탁하고 퀴퀴했고, 지금도 발생중인 거래의 흐름은 사상누각처럼 불안정했다. 전체적으로 마을 어딘가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거대한 시한폭탄이 있는 기분이었다.

 

생각만큼 단순한 사건이 아닐지도 모르겠네. 다른 의미로 서두르는 편이 좋겠어.’

 

초조해진 치마타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3-

너 이 새끼, 지금 어디서 슬쩍 끼어드는 거야?”

 

누가 새치기를 했대, 아까부터 일행이 맡아두고 있었거든?”

 

일행이고 뭐고 알게 뭐냐! 늦게 왔으면 뒤로 꺼지라고!”

 

그래, 누군 한가해서 2시간씩 줄 서 있는지 아쇼!!”

 

이봐, 그 자리 내게 팔지 않겠어? ? 값은 제대로 쳐줄테니까!”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룬 양조장은 우글거리는 인파로 인해 가게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밖에서 전혀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행렬 여기저기서 언성을 드높인 말다툼이 벌어지고 있었고, 사람들의 분위기는 하나같이 조금만 자극해도 폭발할 것처럼 날이 서 있었다.

 

“...우와, 인파가 어마어마한데요? 이래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지금부터 줄은 서도 몇 시간은 걸리겠어. 혹시 여기에 뒷문은 없을까?”

 

물론 뒷문이야 있겠지만, 그쪽으로 사람이 드나들면 도난 문제도 있고 혼란이 가중될 테니 아마 잠겨있지 않을까요?”

 

뭐가 되었든 이 인파 속에서 몇 시간씩 줄을 서는 것보단 낫겠지. ! 이 골목이 뒤쪽으로 돌아서 가는 길인가 보네. 사나에, 이 쪽으로.”

 

치마타가 가리킨 쪽을 보자, 높은 담장으로 양쪽이 가로막힌 으슥한 골목길이 펼쳐져 있었다. 한쪽 벽은 양조장을 둘러싼 외벽에서 이어져 나온 것이었고, 이를 통해 봤을 때 이 골목을 따라가면 양조장의 뒤편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해 보였다. 지금 여기서 죽치고 기다린들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결국 사나에도 치마타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두 사람이 담장 사이의 어두운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 골목길을 반 정도 지났을 때였다.

 

거기 두 사람, 술을 사러 온 거지? ? 이쪽에서 합리적인 가격에 증서를 팔아줄 수 있는데. 어때~?”

 

담장이 자로 꺾여 골목 바깥에선 확인하기 어려운 사각지대 안, 그 안쪽 구석에 추레한 차림의 남자가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 기름이 번들거리는 머리카락, 거기에 며칠은 안 씻은 듯 코를 찌르는 악취까지. 원래 여기서 지내는 건진 몰라도 최소 며칠은 길바닥에서 지낸 듯 한 행색이었다. 누가 봐도 상대하기 싫어지는 차림의 수상한 남자, 그가 처음 보는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며 두 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그냥 가죠, 치마타 양. 도움이 필요하신 분 같지만, 저희는 지금 조사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어이쿠, 이게 누구야. 산 위쪽의 무녀님 아니신가! 귀티 나는 아가씨까지 모시고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는지. 신사나 어디에서 술을 구해오라는 의뢰라도 받은 건가? 그럼 더더욱 나와 거래하는 게 좋을걸. 지금 줄서 봤자 줄선 놈들의 절반은 아무 것도 못 건지고 빈손으로 돌아갈 테니 말이지.”

 

아뇨, 저희는 술을 사러 온 게 아닙니다. 다른 용무가 있어 여기 관계자 분과...”

 

잠깐. 이 사람, 지금 무슨 증서를 팔겠다고 하지 않았어? 당신, 무슨 증서를 말하는 거지?”

 

치마타가 관심을 보이자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기분 나쁘게 웃음지은 남자가 때가 가득한 손가락으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남자의 발치, 손가락 끝이 가리키고 있던 건 한 장의 화선지. 거기엔 대충 휘갈긴 듯 거친 붓글씨체로 무언가가 적혀있었다.

 

<오늘의 판매가>

다이긴죠 - 장당 30

긴죠 - 장당 15

혼죠조 - 장당 8

일반주 - 장당 5

*판매 수수료 10% 추가*

 

<오늘의 매입가>

다이긴죠 - 장당 25

긴죠 - 장당 12

혼죠죠 - 장당 5

일반주 - 장당 3

 

이건 가격표인 것 같네. 당신, 물건이라곤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제대로 된 상인 맞아?”

 

으아... 술 한 병이 몇십 만엔씩이나 하다니, 이건 정상이 아니에요.”

 

~? 뭐야, 둘 다 하나도 모르는 거냐. 세상 물정 어두운 녀석들 같으니. 생각해보라고, 마을 전체 술 생산이 뚝 끊긴지 벌써 몇 주가 지났는데 이미 한참 전에 만들어둔 재고가 남아날 것 같아? 이제 이 마을에서 술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고. 어디 꿍쳐두지 않고 팔려고 내놓은 술이 있다면 이쪽도 구경 한 번 해보고 싶군 그래.”

 

그럼 지금 사람들이 사들이려 하는 건 뭐지?”

 

펄럭, 다시 한 번 남자가 손에 든 종이를 펼쳐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 본 종이엔 술의 등급이 손 글씨로 적혀 있었고, 등급에 따라 각각 다른 색깔의 색띠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연말에 곧 출시될 게코우카와 술들의 예약 구매 증서다. 크크크, 모두가 술을 애타게 찾는 와중에 무턱대고 가게를 열어봐. 몰려든 손님들로 폭동이 일어나고 가게는 난장판이 될 걸? 그래서 거기 주인장이 묘안을 하나 냈지. 술의 예상 생산량을 정하고, 그 수량만큼의 증서를 만들어 사람들이 미리 예약을 할 수 있게 해둔거지. 즉 이게 없으면 올해는 더 이상 술을 구할 수 없다고.”

 

가격이 급등한 이유가 여기 있었군. 필시 마을 사람들 사이에선 이 증서가 따로 거래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겠지. 언제 증서의 판매가 끊길지 모르고 증서의 수는 한정되어 있으니까, 그걸 노리고 이 증서를 비싼 값으로 되팔아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 끼어들며 판이 커지고 비정상적인 가격대가 형성된 거야. 이건 투기야. 돈의 망령들이 서로 한 푼이라도 재미를 보려고 피 튀기며 싸우는 전쟁터지.”

 

똑똑한 아가씨군. 그래, 살 마음은 들었나?”

 

한 가지 더, 어째서 당신은 이렇게 많은 증서를 혼자 가지고 있는 거지?”

 

보면 모르겠어? 이 좁아터진 길바닥에서 먹고 자고 한 지 벌써 보름은 되었다고. 여긴 사람들의 눈에 안 띄어서 참 좋단 말이지. 난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첫 손님으로 저기에 방문해 증서를 챙길 수 있는 만큼 챙겨오고 있지. 그리고 매일 수수료를 붙여 필요로 하는 녀석들에게 팔고 있고. 이제 곧 해가 바뀐다. 해가 넘어가기 직전이 되면 그쪽 말대로 이 증서의 가치도 최고조에 달하겠지. 크흐흐...그럼 전 재산을 털어 이 증서를 사 모은 나는 벼락부자가 되는 거야! 현명하지 않나? 이것이 미래를 보는 눈이라고!”

 

비열한 방법이에요, 그건.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혼란이 가중된 거잖아요?”

 

비난조로 사나에가 남자에게 한마디 던졌지만 남자는 오히려 코웃음칠 뿐이었다.

 

비열? 이봐, 무녀님. 나는 이 장사를 위해 전 재산을 내던질 각오도, 차가운 길바닥에서 며칠씩 밤을 샐 각오도 하고 여기에 왔어! 시류를 미리 읽고 남들보다 앞서 한 수를 던졌다고. 이게 거저먹는 걸로 보이나? 난 정당한 노력을 통해 돈을 버는 거야!”

 

물건을 독차지하고 사람들의 절박한 마음을 이용해 비싼 값을 붙여 파는 건 정당하다고 볼 수 없어요!”

 

그건 게코우카와 녀석들도 마찬가지야! 이 시국에 슬쩍 편승하여 슬금슬금 값을 올려 받기 시작한 건 그쪽이 먼저라고. 난 저 녀석들만 재미 보는걸 두 눈 뜨고 볼 수 없어서 거기에 살짝 얹혀가는 것뿐이라고. 이보쇼 무녀님, 장사는 하나의 전쟁이야, 전쟁. 돈을 벌고 살아남는 과정에서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이 바닥은! 내가 잘못되었다? 그걸 누가 정했지? 마을의 규칙이 금지하기라도 했나? 지금도 저기 줄 서서 싸우는 녀석들도 전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나?”

 

그건 아니지만......”

 

사나에, 이 자의 말도 일리가 있어. 터무니없이 비정상적인 가격일지라도, 타인의 불행을 이용해먹는 사람들이 나타나더라도, 모두의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상 아무도 그 사이에 개입할 순 없어. 분명 환상향엔 독과점이나 가격 프리미엄을 제한하는 규제가 따로 없었지. 규칙이 그렇다면 이런 행위도 용납할 수밖에 없어.”

 

치마타 님의 힘으로...! 아니, 치마타 양의 도움으로 어떻게 가능하지 않을까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소유권을 없애는 정도. 내가 가진 힘을 이용해 강제로 이 자가 가진 증서를 모두 넘겨받거나 할 순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시장에 강제로 개입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까? 오히려 주인이 없어진 대량의 증서가 시장에 풀리며 가격은 폭락, 술 부족에 이어 또 한 번의 경제쇼크가 마을을 덮칠 거야. 결국 또 누군가 피해를 입고 길거리에 내앉는 결과는 변하지 않아. 오히려 지금보다 심각해질지도 모르지. 단 한명이라도 시장에 개입해 강제로 힘을 행사하는 순간, 하나 둘 시장에 간섭하는 손이 늘어나고 결국 시장 자체가 붕괴되게 돼. 일전에도 말했었지. 시장에 개입하는 행위는 시장을 모욕하는 행위. 그렇기에 나는 더더욱 이 자를 건드릴 수 없어.”

 

거기 너희들, 무슨 소리들 하는 거냐. 강제로 넘겨받아? , 날 협박하거나 털어보시려고? 어디 해보시지. 무녀든 뭐든 봐주지 않는다. 돈 주고 안 살 거면 썩 꺼져! 네녀석들에게 구차하게 사달라고 빌빌거리지 않아도 웃돈 주고 살 녀석들은 천지에 있다고!”

 

신경질을 내며 남자가 팔을 붕붕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여차하면 해코지 하는 짓도 서슴지 않을 법한, 독기 오른 모습이었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네. 우린 범죄자가 아니야. 당연히 당신의 물건을 강탈해가는 일은 없을 거야. 물론 그렇다고 비열한 방법으로 끌어 모은 그 증서를 사주지도 않을 거니, 아무 것도 사지 않고 그냥 가는 점은 양해 해주길 바라지.”

 

! 입만 아프게 고생한 꼴이군. 이래서 시시콜콜 따지기 좋아하는 계집들이란!”

 

으음... 어서 가죠, 치마타 양. 게코우카와 주인분께 캐물어야 할 것이 하나 더 늘었어요.”

 

더 있으면 화를 입을 새라, 사나에가 찝찝한 표정으로 치마타의 팔짱을 끼고 종종걸음으로 골목을 빠져 나갔다. 사람들이 죄다 정문 줄에 몰려 있는 탓일까, 인적이 뚝 끊긴 골목길 반대편을 담벼락을 따라 조금 걷자 사람 한두 명 정도 드나들 수 있는 작은 후문이 두 사람의 눈앞에 나타났다.

 

예상대로 잠겨 있는 것 같네요.”

 

문손잡이를 쥐고 가볍게 흔들어본 사나에가 잠긴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문을 세차게 여러 번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안쪽에서 밖을 엿볼 수 있도록 작게 뚫린 구멍의 덮개가 뽈칵 열리며 너머에서 이쪽을 살피는 두 눈동자가 드러났다.

 

누구시죠? 상품의 예약구매는 가게 앞쪽에서 받고 있는데요. 아침 댓바람부터 줄 서 계신 분들도 많은데 멋대로 이쪽으로 찾아오시면 곤란합니다.”

 

카랑카랑한, 상당히 앳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사나에와 비슷하거나 조금 어린 나이 정도일까, 이 양조장의 종업원인 듯 했다. 아무래도 이렇게 뒷문으로 찾아오는 편법을 써먹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나 보다. 상대가 누군지 확인하는 제대로 확인하는 낌새도 없이,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엔 짜증과 귀찮음이 잔뜩 묻어나오고 있었다.

 

, 저흰 술을 사러 온 게 아니구요! 모리야 신사에서 왔습니다. 여기 주인분을 만나 뵐 수 있을까 해서요. 조금 여쭤보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새치기를 하러 온 게 아니에요.”

 

성큼 자기가 나서려는 치마타를 만류하고 사나에가 서둘러 자신들이 찾아온 사정을 설명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선 조금이라도 마을에서 유명한 쪽이 나서는 게 나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사나에의 선택이 옳았던 건지, 그녀를 알아본 상대가 눈살을 찌푸리며 무언가 고민하는 듯 앓는 소리를 작게 내었다.

 

좋아요. 곧바로 사장님께 안내해 드리죠. 조용히 들어오세요. 혹여 남들 눈에 띄어서 모리야의 무녀가 부정 입찰을 했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양쪽 다 곤란해질 테니까요.”

 

소리 나지 않게 문이 열리고 안에서 한 소녀가 빨리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둘이 문을 통과하자마자 그녀는 잽싸게 다시 문을 닫고 빗장까지 단단히 걸었다. 종업원으로 보이는 복장을 차려입은 소녀. 목소리를 통해 상상한 그대로 사나에 또래 정도로 보이는 그녀는 이마를 훤히 까고 양갈래로 땋은 머리에 두꺼운 동글뱅이 안경이라는 촌스럽기 그지없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스타일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주홍색으로 물들인 머리며 안경으로도 감추지 못한 화려한 화장이 촌티 가득한 겉모습과 충돌하며 보는 이들로 하여금 생경한 느낌을 안겨주고 있었다.

 

어디 양갓집 규수가 홧김에 가출이라도 하고 여기서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일까? 어울리지 않긴 했지만, 주변에 키리사메 마리사 같은 케이스도 있었기에 사나에는 그녀의 사정에 대해 그냥 그러려니 넘기기로 했다. 그 때, 치마타가 팔꿈치로 사나에를 툭툭 건드리며 조용히 속삭였다.

 

저 여자 아이,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아?”

 

글쎄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저는 마을에 자주 오는 편이라 어디선가 마주친 기억이 있을 지도 모르지요. 치마타 님이 아는 분이신가요?”

 

처음 보는 인간이지만, 왠지 낯익은 느낌이 들어. 장터가 열렸을 때 봤으려나? 이상하네.”

 

기분 탓일지도 몰라요. 그보다 저희는 지금 사건의 조사가 더 중요하니까요. 주인 분께 치마타 님에 대해선 제가 잘 둘러대겠습니다. 말만 잘 맞춰주세요.”

 

그래. 중요한 건 따로 있었지. 일단 알겠어.”

 

속닥속닥 대화를 마치고 고개를 돌린 치마타와 종업원 소녀의 눈이 순간 마주쳤다. 아무래도 자기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다는 걸 들킨 모양인지, 그녀가 거칠게 고개를 돌리며 불쾌하다는 듯 치마타의 시선을 피했다. 무례를 저질러도 단단히 저지른 모양이다. 여기까지 와서 일이 틀어지지 않도록, 치마타는 소녀를 포함한 다른 종업원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용히 사나에와 함께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양조장의 안쪽, 종업원들과 주인 내외를 위해 마련된 주거 공간 중에서도 최심부, 커다란 장지문으로 가로막힌 방 앞에 세 사람이 멈춰 섰다. 둘을 밖에 세워둔 소녀가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남녀가 작은 소리로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린 뒤 문을 열고 나온 소녀가 둘에게 방 안쪽으로 손짓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모리야 신사에서 술의 공급에 관한 상담을 청하고자 이렇게 찾아뵙습니다. 이쪽은 텐...코 치마타 양입니다. 서당에서 카미시라사와씨의 일을 돕고 있는 학생 중 한 명이며, 술의 공급 건 관련하여 카미시라사와씨로부터 조사를 명받아 저와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마을에서 술 생산이 가능한 건 이곳 게코우카와 주조밖에 없다 하여,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야~ 카미시라사와 선생과 모리야의 요청인가. 그럼 거절할 수 없지요. , , 편히 안으로 드십시오. 두 분께 마을 사람들이 입은 은혜가 크니, 필요하신 것이 있다고 하면 이쪽에서 얼마든지 지원해 드리리다. , 밖은 춥지 않으셨습니까. 얘야, 가서 우리 술 한 병만 가져오거라. 제일 좋은 걸로, 따듯하게 데워서. 손님맞이는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

 

방 한가운데 풍채 좋은 중년의 남자가 곰방대를 뻐끔거리며 둘을 맞이했다. 밖에선 저렇게 많은 이들이 시간과 재산을 할애해가며 치열한 경쟁을 치르고 있는 와중에 그만큼은 혼자 마을의 시간까지 독점한 듯 말과 태도에 여유가 가득했다. 허나 방심할 수는 없었다. 넉살 좋게 껄껄 웃으며 친근한 태도로 둘을 맞이하는 그였지만, 그의 눈은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차갑게 둘을 탐색하고 있었다. 한껏 지원해주겠다는 말도 아마 진심이 아닐 것이다. 그는 이런 상황마저 이용해 먹는 천부적인 장사치. 지금도 사나에와 치마타로부터 어떻게 하면 손해 보지 않고 이권을 취할 수 있을지, 방법을 모색하는 중이리라.

 

잠시 후 다른 종업원들이 방에 들어와 세 명의 앞에 술상을 내려놓았다. 둘의 앞에 놓인 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도쿠리와 잔, 그리고 견과류로 이루어진 간단한 안주 한 접시. 병에서 올라오는 향긋한 술의 향기를 맡은 순간 사나에도, 치마타도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최고의 재료를 이용해 최고의 기술로 빚은 최고의 술. 지금도 많은 이들이 억만금을 들여서라도 사고 싶어 하는, 보석보다 귀한 존재가 지금 둘의 앞에 놓여 있었다.

 

이렇게 융숭한 대접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 감사합니다.”

 

먼저 귀하의 배려에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그럼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수고했다, 너희는 나가 일을 보거라. 어흠, 뭐 그리 급할 것이 있습니까. 귀한 술을 눈앞에 두고 일 얘기라뇨. 시간도 넘쳐나는데, 먼저 건배부터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옻칠에 금박까지 입혀진 고급스러운 술잔에 가득 담긴 술을 찰랑거리며 남자가 껄껄 웃었다. 신중하자, 환대에 눈이 멀어 저 자의 페이스에 넘어가선 안 된다. 치마타는 경계심을 곤두세우며 일단 남자에게 맞춰주기 위해 잔을 들어올렸다.

 

건배사는 제가 하도록 하지요.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내려주신 자비로우신 신님들께, 그리고 많은 돈을 벌게 해주신 고객 여러분들께 감사드리며, 건배~!”

 

“... ...”

 

어색한 침묵 속에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만이 작게 들렸다. 확실히 주인장의 말대로 좋은 술이었다. 혀 전체를 감싸는 맑고 깨끗한 감미는 올해 맛 본 어떤 술보다 황홀한 맛이었으며 코를 자극하는 술의 향기는 눈앞에 절로 곡식이 가득 자란 황금빛 들판이 그려질 정도였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감각은 마치 최고급 비단이 입 안을 훑고 지나가는 듯 부드러웠으며 한 발 늦게 올라오는 알딸딸한 알콜 기운은 추위와 긴장으로 얼어붙은 몸을 사르르 녹여주었다. 실로 최고의 맛이었다. 이게 마을에 남은 유일한 술이라면 열 배 이상의 값을 지불하더라도 아깝지 않다고,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떻습니까. 다음 주에 출시 될 우리의 신상품, 월광주의 맛이? 가히 마을 최고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경쟁자들이 없어져서 아쉽군요. 굳이 망하지 않아도 이 술의 맛을 보면 자연스럽게 꼬리를 말고 알아서 나가떨어졌을 텐데요. 하하하!”

 

실로 훌륭한 맛입니다. 다른 곳의 술도 맛보고 차이를 느껴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게 된 게 아쉽습니다. 그런데, 기이하군요. 마을에 양조장이 한두 곳이 아닐 텐데, 그들이 같은 해, 같은 시기에 몽땅 마비되다니.”

 

운이 없었지요~. , 엄밀히 따지자면 같은 시기는 아닙니다. 저기 긴바시라 주조는 곡식을 대주는 곳에서 올해 농사를 쫄딱 망쳐, 받기로 한 것을 못 받았다고 하지 뭡니까. 히노아지 양조장은 한창 술을 빚던 중 불씨 관리를 잘못하여 화재로 홀딱 타버렸고 말이죠. 이야~ 아무도 죽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습니다, 그거. 로쿠스이젠 도가는 여름철 내린 비로 창고 나무가 썩었다고 하던가요. 상품을 저장하는 창고가 와르르 무너져 내려 쫄딱 망했죠. 모쿠비와는 주인이 병환으로 쓰러져 올해는 휴업. 안타깝지만 어쩌겠습니까. 다 자기 팔자 아니겠습니까.”

 

하나하나 자세히 알고 계시는군요. 마치 직접 경쟁업체들을 꾸준히 감시해 오신 것 같습니다?”

 

경쟁 업체의 동향은 항상 주시해야죠. 설마 제가 뭔가 저질렀다고 의심하시는 겁니까? 방화라면 몰라도, 딱 상품을 쟁여놓은 시기에 창고가 무너지게 하거나, 농사를 망치거나, 병으로 쓰러지게 하는 건 어떻게 조작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게 가능했다면 제가 이렇게 술이나 팔고 있었겠습니까? 재앙을 내리는 신이 되었겠죠.”

 

사나에가 일순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연거푸 잔을 채우고 들이키길 반복했다. 아무래도 그녀가 모시는 신님 중 한 분이 재앙신이기에. 모리야를 잘 아는 마을의 주민이라면 이 또한 모를 리 없을 터인데, 아무래도 눈앞의 남자는 다 알면서 일부러 그녀들을 자극하는 듯 했다.

 

딱히 의심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들렸다면 사과드리지요. 그냥... 마치 다른 양조장들이 그렇게 몰락하길 기다려 왔다는 것처럼 느껴져서 말입니다.”

 

부정하진 않지요. 내가 잘되지 못하면, 다른 이들이 안 되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 심리이니.”

 

그건 그렇고, 꽤 수완이 좋으시더군요. 경쟁 업체들이 일제히 몰락하고 술 공급에 차질이 생기자 곧바로 예약 구매 제도를 만들어내고 증서를 발행하기 시작하셨으니까요.”

 

예약 구매는 어쩔 수 없는 조치였습니다. 저 많은 마을 사람들이 신상품이 출시되자마자 일제히 몰려들면 가게가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저흰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 밖에 없습니다만~? 혼란 속에 질서 잡힌 체계를 구축했으니 오히려 칭송받아 마땅한 일 아닐까요?”

 

질서라뇨, 지금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을 모르는 척 하시는 겁니까!”

 

사나에, 진정해.”

 

술이 들어간 채 자극받은 사나에가 인내심을 잃고 언성을 높였다. 상황이 곤란해졌다. 이대로 사나에가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눈앞에서 단서를 쥔 인물을 놓치는 꼴이 된다. 아직 이 남자가 무언가를 꾸몄다는 증거도, 이 불안정해진 경제 상황을 해결할 방법도 찾지 못했다. 대화를 좀 더 이어가야 했다. 협상 테이블에선 언제나 먼저 침착함을 잃는 자가 지는 법. 치마타는 사나에를 제지하는 손짓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술의 값을 터무니없이 올린 귀하의 선택이 혼란을 가중시킨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터무니 없다뇨. 흔해빠진 물건의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처럼 귀해진 물건의 값은 오르는게 당연한 현상 아닙니까? 그리고 뭔가 좀 잘못 알고 계신 것 아닙니까? 제가 먼저 가격을 올렸다뇨. 먼저 몇 배의 돈을 지불하더라도 술을 사겠다고 아우성이었던 건 저기 밖에 서있는 고객님들입죠.”

 

콧구멍과 입으로 연기를 후욱 뿜어내며 남자가 탐욕스럽게 씨익 웃었다.

 

저는 말입니다. 그저 찾아오신 고객님들께 중요한 공지를 전달했을 뿐입니다. 우리 양조장 혼자 마을에 필요한 술을 전부 공급하는 것은 무리다, 예약 구매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니 하루에 조금씩 나눠서 팔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돈에 눈이 먼... 아나아니,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 아시는 분들이 우리 양조장에서 사간 증서를 다시 돈을 받고 팔기 시작했죠. 그것도 두 배 세 배 높은 값으로 말입니다. 판매 가능한 물량이 동나면 값이 천정부지로 뛸 거라나요? 웃긴 건 그렇게 덤터기를 씌워도 좋다고 사는 분들이 생겨났단 말입니다. 자기가 다시 비싸게 되팔려고 말이죠. ~ 사람들 욕심이란 끝이 없나 봅니다.”

 

암시장 말씀이시군요. 오는 길에 비슷한 이를 만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여기서 술값을 올릴 이유는 안 되지 않습니까?”

 

왜 안 됩니까. 똑같이 1만엔 짜리 술을 팔아도 이쪽이 고작 3천엔 남짓의 이득을 보는 동안 누군가는 1만엔, 15천엔의 이득을 보고 있는뎁쇼. 나리, 저는 자원봉사자가 아닙니다. 먹고 살기 위해 장사하는 장사치란 말입죠. 그런데 눈앞에서 파렴치한 놈들이 저희 상품을 가지고 저희들의 몇 배나 되는 이득을 보고 있는 꼴을 그냥 눈 뜨고 보고 있어야 합니까?”

 

그래서 그들과 똑같아지기로 결정하신 거군요?”

 

그래도 저흰 양심적인 편입니다. 종업원들을 시켜 매일 마을에서 변동하는 증서의 시세를 알아오게 한 뒤, 그 시세와 비슷하게 판매가를 맞춘 것뿐이니까요. 두 배, 세 배, 다섯 배, 열 배, 이 모든 건 고객님들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요. 우린 손해 보지 않게 처신한 것뿐이죠.”

 

끝까지 선량한 척, 양심적인 척 하고 있지만 장사를 하는 이가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예약 구매를 굳이 장부에 기록하는 형태가 아니라 2차 판매가 가능한 증서의 형태로 진행한 점, 고객들의 불안해하는 심리를 부추겨 품귀 현상을 가속시킨 점 등 남자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심증은 차고 넘쳤다. 다른 건 몰라도 마을에 벌어진 모든 경제적 혼란의 근원은 이 탐욕스러운 장사치로부터 비롯되었음이 확실했다.

 

이런, 술이 다 떨어졌군요. 어떠십니까, 나으리. 궁금하신 건 모두 해결되셨는지? 아니면 술을 더 내올깝쇼? 이대로 거래를 진행해도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분명 신사도 서당도 신년 행사로 술이 필요하겠지요. 필요하시다면 두 분껜 특별히 정가의 절반 가격으로 팔아드릴 수 있습니다. , 결정은 빨리 하셔야 할 겁니다. 아까 보니까 오늘 정해둔 판매량의 반 이상이 벌써 소진되었다고 하더군요. 늦으면 내일까지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그 때 가격이 얼마나 오를지는~ 저도 장담할 수 없군요.”

 

아뇨, 배려는 감사하지만 거래는 괜찮습니다. 술이 필요하다면 모리야 신사의 연줄을 통해 구하면 되니까요.”

 

요괴 나부랭이들 말씀이십니까? 그 녀석들이 마을의 상황을 모를 리 없을 텐데요. 안 그래도 어디서 요괴들이 요 한탕 장사에 뛰어들 거란 소문이 돌던데, 어디서 사든 비싼 건 마찬가지일겁니다? ”

 

상관없습니다. 그건 이쪽에서 알아서 할 일입니다. 오늘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에 가격이 안정화 되고나면, 그 때 가서 거래를 고려해 보지요. 사나에, 이만 가자.”

 

자리에서 일어난 치마타가 사나에의 손을 잡고 일으켜 주었다. 능글맞게 웃고 있는 저 표독스러운 장사꾼에게 치마타가 예의상 인사를 건네고 사나에와 함께 방을 나서려 할 때였다.

 

“... 눈앞의 돈이 아니라 사람들을 먼저 생각해 주실 순 없었던 건가요?”

 

방을 나서기 전 고개 돌려 말한 사나에의 한 마디에 나머지 두 사람이 동시에 흠칫했다.

 

? 잘 못 들었습니다. 뭐라 말씀하셨는지요?”

 

분명 상황이 이렇게 되지 않게 만들 방법이 있었어요. 암시장도, 가격 폭등도, 거리의 혼란도 모두 막을 수 있었던 일이라구요! 그런데 돈에 눈이 멀어 뒤틀린 시류에 편승하고, 혼란을 이용하고, 자신이 잘 되기 위해서 이 곳의 수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어도 상관 없다는건가요!”

 

“... ... 뭐라는 겁니까. 새파랗게 어린 년이.”

 

지금 뭐라고 ...”

 

무녀님은 산구석에 틀어 박히셔서 모르시겠지만, 이 바닥은 원래 이런 법입니다요.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하던가요? 거래가 이루어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본인이 직접 나서서 뭔가를 해야지, 우리 같은 장사치에게 자비를 바래선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아니꼬우면 직접 술을 빚어 먹든가, 아님 다른 양조장에서 다시 상품을 만들어 낼 때까지 술을 끊는 방법도 있겠죠. 굳이 몇 배나 되는 값을 지불하면서까지 술을 입에 대보겠다고 난리칠 건 없다고요? 나 참, 전부 암묵적으로 합의한 일에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가 이러쿵저러쿵 토 달기는. 그렇다면 무녀님이 직접 신님들께 빌어서 기적이라도 내려주는 건 어떻습니까. 지금이라도 다른 양조장들이 벌떡 재기하면 다 좋게 좋게 해결될 텐데 말이죠.”

 

그만하세요! 신성 모독입니다!”

 

저 같은 장사치가 의지하는 신은 돈의 신 뿐입죠. 아니면 거래의 신? 최근엔 그런 신님도 있었다는 모양이지만. 뭐 아무튼. 그 신님도 이 상황을 보시면 잘 하고 있구나~ 하고 넘어갈 게 분명합니다.”

 

대놓고 둘을 비웃는 폭언을 내뱉으며 게슴츠레 눈웃음 짓는 주인장을 치마타가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를 노려보는 치마타 머릿속에선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여기서 자신이 그 시장의 신이라는 것을 밝히면 어떻게 될까? 신의 위엄으로 눈앞의 남자를 무릎 꿇리고 당장 가격의 안정화와 독과점으로 얻은 수익의 재분배를 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까도 치마타가 본인 입으로 말했듯 이는 그녀가 절대적 금기라고 여기는, 시장에 무력이 개입하는 짓이다. 자신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 여기서 그녀가 힘을 사용한다면 사태가 수습되든 되지 않든, 시장의 신이 마을 경제에 간섭했다는 사실이 이내 만천하에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치마타는 기껏 끌어 모은 신앙을 잃고 다시 이전의 영락한 신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윤리를 지키기 위해 사나에와 마을 인간들을 위해 한 몸 희생할 것인가, 자신의 신념과 신격을 지키기 위해 이 상황을 관망하고만 있을 것인가. 짧은 고민 끝에 치마타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죄송합니다. 사나에 양이 조금 흥분했군요. 술기운 때문에 그런 것이니 너무 과한 말씀은 삼가 주시길. 실례가 많았군요. 저흰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렇죠, 그렇죠. 이런 건 나이 많은 어른이 참고 넘어가야지. 아까 얘기한 거래는 상품이 출시되는 날까지 유효하니 돌아가서 천천히 생각해보쇼. 이쪽은 돈이 된다면 지난 일 따윈 싹 잊고 팔아드릴 수 있으니.”

 

방을 나선 둘은 다시 동일한 소녀에게 후문까지 안내 받았다. 안에서 불편한 언쟁을 벌인 탓에 둘을 대하는 종업원의 태도는 아까보다 훨씬 쌀쌀맞았다. 조용히, 그러나 퉁명스럽게 후문의 빗장을 연 소녀가 둘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다음번엔, 살금살금 뒤쪽으로 오지 마시고 앞쪽에서 줄을 서주세요.”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다시 올 일은 없을 거야. ...?”

 

문짝을 지탱하고 있는 소녀의 손, 긴 소맷자락에 가려져 있었지만 한 순간 안쪽에서 뭔가가 늦은 오후의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손가락 안쪽 끝에서 작게 반짝일만한 물건, 그런 건 반지 말곤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반지가 한 개가 아니었던 것 같았는데, 이런 곳에서 일하는 종업원 월급으로 손가락에 반지를 주렁주렁 달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바쁘게 일하는 다른 종업원들 사이에서 그녀만큼은 안내 외에 다른 일을 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손도 수작업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양조장에서 일하는 것 치곤 지나치게 고운 느낌이다. 설마 이 녀석, 사실 종업원인 척 하는 관계자가 아닐까? 치마타가 의심하는 눈으로 그녀를 흘깃 보았다.

 

, 아무튼 용건이 끝났으면 어서 돌아가세요! 영업 방해입니다!”

 

치마타의 따가운 시선에 뭔가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소녀가 다급히 문밖으로 둘을 떠밀었다. 둘을 쫓아내자마자 그녀는 문을 쾅! 세차게 닫곤 건물 안으로 서둘러 뛰어 들어갔다. 남은 것은 길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사나에를 부축하고 있는 치마타와 굳게 잠긴 문뿐이었다.

 

일단 오늘 조사는 여기까지 할 수밖에 없겠어. 무녀 쪽도 더 돌아다닐 체력은 없어 보이니,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할까.”

 

알아낸 정보는 좀 있었지만 사건 해결이란 측면에서 보면 결국 제자리걸음뿐. 모리야의 신들이었다면, 다른 권능을 가진 신들이었다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 이런 상황을 방치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한숨을 폭 내쉬며 치마타는 터덜터덜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4-

 

비굴해요! 강약약강! 잉여신! 자본주의의 노예!”

 

시끄러워! 신이라고 짠 하면 다 되는 지 알아?!”

 

카나코님이나 스와코님이 오셨으면 분명 그 자리에서 담판을 지으셨을 걸요!”

 

그럼 돌아가서 두 분께 부탁하지 그래! 협박을 하든 힘을 쓰든 해서 해결 하시겠지!”

 

그렇게 무식하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분들이 아니거든요? 아니... 맞나. 아무튼, 아무 것도 못하는 신님보단 도움이 되었을 거예요!”

 

연이어 쏟아지는 사나에의 폭언에 치마타가 귀를 틀어막고 욕탕 구석을 향해 등 돌리고 앉았다. 사나에가 술이 깰 때까지 쉬는 시간도 가지고 마을을 감시할 거처도 마련할 겸 치마타가 향한 곳은 근처 여관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술도 어느 정도 깨었을 즈음, 지친 심신이라도 달래줄 겸 여관에 딸린 온천탕에 데려왔더니 오자마자 하는 짓이 이거였다. 신인데 무녀에게 이렇게 갈굼 당해도 되는 걸까, 홍백의 무녀도 막무가내로 무력을 휘두르더니 환상향의 무녀란 신에 대한 존중이 없는 걸까. 가뜩이나 찝찝한 기분에 폭언까지 얹어져 더욱 비참해진 치마타였다.

 

그래서 정말 해결할 방법이 없는 건가요?”

 

등을 돌린 치마타의 뒤로 따듯한 물을 찰박찰박 끼얹으며 사나에가 보채듯 말했다.

 

더럽고 치사한 방법이지만 빈약한 규제의 허점을 파고든 거라 나도, 인간들도 어찌 할 도리가 없어. 공급 부족이 해결되거나 소비자들 스스로 증서의 거래를 관두지 않는 이상 이 현상은 계속될 거야. 일단 동향을 계속 지켜볼 수밖에.”

 

그 때까지 여기서 지내실 거예요?”

 

산에선 마을의 상황을 살필 수 없으니까. 여기 방은 창밖으로 바로 게코우카와가 보여서 감시하기 편하잖아?”

 

정신을 차리니 지갑의 돈이 더 줄어 있던데... 활동 경비는 나중에 일괄 치마타 님 앞으로 요청할 거니 그리 알아두세요. 옷값도 포함해서요.”

 

신에게 돈을 뜯어내겠다고?!”

 

자기보다 훨씬 어린 사람에게 의지하는 게 더 보기 안 좋거든요! 그리고 시장의 신님이라면 계산은 확실히 해주세요. 평소에 늘 돈주머니 하나 큰 거 들고 다니시잖아요?”

 

... 알았어. 일이 끝나면 한 번에 정산해서 줄게.”

 

어빌리티 카드 판매로 얻은 수익금 일부가 남아 있으니까 괜찮아, 코 밑까지 물에 담그며 치마타는 생각했다. 보글보글, 수면 위로 그녀가 내쉰 숨이 기포가 되어 올라왔다.

 

하아... ... 저는 끝까지 이해할 수 없어요. 마을 분들도, 치마타 님도.”

 

“... ...”

 

누군가 힘들어 하고 있는데 그걸 돈벌이 기회로 삼질 않나, 더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되어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그런데 점점 그 행위에 동조하는 분은 늘어나고 있고요. 마을의 혼란에 일조하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셈인데도, 전부 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 같아요.”

 

인간의 탐욕은 끝을 모르는 법이니까. 하지만 시장도, 거래도, 경쟁도, 전부 그런 인간의 욕심이 있었기에 발달할 수 있었던 거야.”

 

그래서 더욱 이해가 안 된다구요! 누가 봐도 비정상인 상황이잖아요? 너도나도 이성을 잃고 폭주하고 있는데, 사람들도 치마타님도 당연한 현상이라며 받아들이고 있잖아요! 분명 치마타 님은 누군가 개입하는 순간 시장이 붕괴할 거라고 하셨죠. 그럼 치마타 님은 지금 이 상황이 정상적인 시장으로 보이시나요? 이미 무너져 내린 게 아니고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폭리를 취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이번 일로 벌어들인 자와 잃은 자, 양쪽의 빈부격차는 점점 커질 것이다. 겨우 사태가 끝난다 해도 또 누군가 같은 방식으로 다른 재화를 독과점 하려 할 것이고 비슷한 일이 반복될 것이다. 수많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무너져 내리고 장기적으론 지나친 부의 불균형으로 인해 경제는 물론 사회 구조마저 붕괴 하고 말 것이다.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

 

치마타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다. 인간들은 언제나 합리적인 선택을 할 것이며 서로 경쟁을 반복하며 자연스럽게 시장의 질서를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인 자신은 그 거래가 금기를 어기지 않고 올바르게 진행 되는지 지켜보면 될 뿐이라고, 그저 시장의 활성화를 돕고 다른 손의 개입을 막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참상은 완전한 실패 아닌가. 균형을 맞추고 있던 저울에 생긴 작은 흔들림으로 인해 인간은 자유의지를 잃고 돈을 쫓아다니는 탐욕스러운 아귀로 전락했고 자신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던 보이지 않는 손은 통제력을 상실해 버렸다.

 

정말 아무도 개입하지 않는 게 맞는 건가? 인간들 스스로 시스템을 수복하고 다시 균형을 잡을 때까지 방관하고만 있는 게 맞는 건가? 설령 그게 맞는 선택이라 치자. 그렇다면 자신의 존재의의는 무엇인가. 인간들이 시스템을 만들고 보이지 않는 손이 시스템을 유지한다면 거기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고 방관만 한 자신은 뭐하러 존재하고 있는가? 이미 치마타는 그렇게 모든 것을 자유경제에 맡긴 결과를 알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루하루 소멸할 위기를 겪으며 비참하게 생을 이어온 그녀가 아닌가. 자신이 세상에 최소한으로만 개입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의의에 맞는 행동이라 여긴 것이 그녀를 영락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같은 결과가 이어지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을까?

 

문득 치마타는 자신의 추한 내면을 깨달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니 뭐니 하고 있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이 신격을 유지하고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인간들의 원성을 사는 것이 두려웠다. 섣불리 나섰다 신앙을 잃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인간들이 고통 받아도, 자신과 동료과 눈앞에서 모욕을 당해도, 다시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기 싫어 비굴하게 모른 체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좇아 끊임없이 저울질을 하고 그때마다 시장경제를 핑계 삼아 자신을 합리화하며 유야무야 넘어갔다. 이래서야 오늘 자신이 만난 탐욕스러운 장사치들과 전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모습에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이제는 달라져야 할 때였다. 모리야의 신들이 그녀에게 맡긴 일은 혼란에 빠진 시장의 재건이지 막연히 사태를 파악하고 기다리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치마타는 카나코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행사를 열며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급급한 그런 신으로 남을 것인가, 이름에 걸맞게 시장을 수호하는 시장의 신이 될 것인가. 결단은 그녀의 몫이었다.

 

직접 나서게 되면 자신이 지금까지 금기라 여긴 사항을 어겨야 할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인간들의 반발을 사고 기껏 얻은 힘을 도로 잃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감수하고 책임지는 것 또한 신의 사명이다. 더 이상 도망치지 말자고, 어떤 결과라도 당당히 마주하고, 이제부턴 행동으로 나설 때라며 치마타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자 조금씩 그녀 마음속에서 용기가 솟아나며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발목을 잡고 있던 잡념이 사라지며 낮에 있었던 일들이 더욱 선명히 떠오르고 있었다. 치마타는 맑아진 머릿속으로 상황을 다시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원흉을 찾아냈으니 남은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 그때였다. 치마타의 머릿속을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정말 그 남자가 원흉이 맞을까? 사태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행동했다기에 남자의 행동은 지나치게 계획적이었다. 질병도, 기근도, 사고도, 마치 한참 전부터 이런 일이 올 것을 확신한 것처럼. 누군가 미리 언질을 준 것처럼.

 

힘겹게 머리를 굴리는 치마타의 코와 입에서 뽀글뽀글 더 많은 양의 거품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뽀얀 빛깔의 온천수 속에서 솟아나 터져나가는 기포의 모양이 꼭 작은 진주알들이 흩어지는 것 같아 보였다. 진주알, 보석, 재난, 경제적 파탄, 보석, 그리고 공범의 존재.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씩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래, 그거야!”

 

아아앗, 갑자기 일어나시면 물이 튄다구요!? 그보다 몸부터 가리셔요!”

 

벌떡 일어난 치마타에게 다가온 사나에가 허둥지둥 타월을 건네주었다.

 

사나에, 그쪽에서 조사해 주었으면 하는 게 있어.”

 

조사라니, 아직 탐문해야 할 게 더 남았나요? 사건의 전말은 대충 알아냈잖아요?”

 

아까 사장이 언급했던 네 군데의 양조장 있지? 불행한 사정으로 술 생산을 못하게 된 곳들 말야.”

 

, 그랬죠. ... 저마다 다른 시기에 우연히 일어난 사고들이었으니 게코우카와에서 저지른 일이라고 보긴 어려웠죠? 수상할 건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요.”

 

저마다 다른 시기에, 하나씩 순서대로 재앙이 발생했다는 그 점이 수상한 거야. 그 네 곳 중 가장 최근에 사고가 발생한 곳이 어디지?”

 

으음~ 한 곳은 농사가 망했으니까 농번기, 한 곳은 주인분의 병환이 도졌다고 했으니 최소한 그보다 오래되거나 했겠죠? 한 곳은 술을 생산하던 시기에 화재가 일어났고, 한 곳은 상품을 쌓아둔 창고가 무너졌으니... 거기네요! 로쿠스이젠인가 하는 곳이었어요.”

 

날이 밝으면 그곳으로 가도록 해. 며칠이 걸려도 상관없으니, 그 근처를 샅샅이 뒤져서 뭔가 수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찾아보는 거야. 다른 불행한 사건이 있었는지도 알아보고. 사소한 거라도 좋아. 내 생각이 맞다면 언젠가 꼬리가 반드시 드러날 거니까.”

 

그 말씀은 일련의 사고들이 실은 사고가 아니었다는 말씀이신 거죠?”

 

그 탐욕스러운 인간, 자신이 과했어. 스스로 답을 알려준 거나 마찬가지야. 난 여기서 게코우카와의 동향을 계속 감시할 테니, 너는 그쪽 일을 부탁해. 어리석은 인간, 자신이 비웃은 상대가 그 신이라는 존재일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탕에서 나와 젖은 몸을 타월로 감싸며 치마타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방금 전까지 풀이 죽어 있다가 갑자기 돌변한 그녀의 모습에 사나에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곧 알게 될 거야. 증거만 잡으면 그 남자를 몰아세울 수 있어. 기뻐해도 좋아! 이젠 우리 차례야. 모든 진실을 밝히고 엉망이 된 시장을 원래대로 돌려놓아주마!”

 

-5-

 

다음날부터 사나에는 치마타의 지시대로 로쿠스이젠 양조장 일대를 돌아다니며 탐문 및 현장 조사를 하러 다녔다. 물론 치마타라고 그 시간에 가만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투기에 끼어들어 한몫 챙겨보려는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고 증서의 시세와 거래량을 조사하고 다녔다. 그 와중에 틈틈이 게코우카와 양조장의 동태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으나, 그녀들이 다녀간 후 묘하게 삼엄해진 양조장의 보안 탓에 얼굴이 관계자에게 알려진 그녀는 감시는커녕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탐문을 시작한 첫째 날, 아쉽게도 사나에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저쪽도 이쪽에서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눈치 챈 모양이었다. 양조장의 경비를 강화하는 동시에 자취를 완전히 감추려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좁은 마을 안에서 모습을 숨겨봤자 독 안에 든 쥐, 치마타는 사나에에게 역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 상대가 거처를 옮길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압박하라고 지시했다.

 

치마타는 하루에 풀리는 증서의 양과 가격 변동 추이를 조사하는 동시에 마을 여기저기에서 증서를 되파는 2, 3차 판매자들을 슬쩍 떠보며 그들의 거래 관계를 파악해냈다. 이를 정리하여 지금까지 증서가 어떤 흐름으로 거래되고 있었는지, 특히 증서를 많이 가진 이들이 누구인지 특정 지을 수 있었다.

 

한나절 만에 마을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요약, 정리한 치마타의 성과에 사나에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녀에게 진심 어린 존경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지 않을까, 치마타는 생각했다. 그렇게 전날의 오명은 씻은 듯 잊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수사 첫째 날은 순조롭게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둘째 날부터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증서의 거래는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지만, 치마타는 그 이면에서 새로이 생겨난 또 다른 거래의 흐름을 감지했다.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여러 판매자들의 손을 거쳐 퍼져나가는 증서의 매매와 다르게 이 거래는 한 곳으로 수렴하는 형태의 것이었다.

 

양조장에서 다른 수를 두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심각하게 여기기엔 새로운 거래를 통해 오가는 현금의 양은 증서에 비하면 새 발의 피나 마찬가지인, 매우 적은 양이었다. 이 때문에 처음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치마타였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날수록 점점 불어나는 거래의 양에 그녀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눈치 챘다.

 

본격적인 수사 개시 5일째, 이 날 치마타는 증서 거래 대신 새로 생겨난 거래의 흐름을 추적하기로 했다. 정보를 사고, 사람들의 뒤를 쫓고, 머리 위에 높이 뜬 태양이 정남쪼겡서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시각, 마침내 치마타는 거래의 근원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치마타가 조우한 인물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웃도는 자였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또 만났구만, 아가씨.”

 

와글와글 사람들이 몰려 있는 한가운데, 그녀를 알아본 남자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말끔히 단장한 몸, 금 자수가 놓인 고급스러운 비단옷, 이전엔 없던 도수 없는 안경까지, 생긴 건 이전과 딴판이었지만 낯익은 걸걸한 목소리와 비싼 옷으로도 감출 수 없는 저급한 태도는 그가 얼마 전 길거리에서 만난 노숙자 암상인과 동일인이 분명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전과 다르게 버젓이 가게처럼 보이는 건물을 세우고 들어앉은 그의 앞엔 타츠키 신용금고라는 글씨가 또박또박 정자체로 적혀 있었다.

 

당신, 이번엔 무슨 꿍꿍이지?”

 

, 잠깐잠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것 같은데, 잠깐만 기다려 주지 그래. 뒤쪽으로 좀 가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옆의 부하로 보이는 듯 한 다른 덩치 큰 남자를 불러 자기 자리에 대신 앉혔다. 자세히 보니 힘깨나 쓸 것 같은 덩치가 여럿 그의 주변에 포진해 있었다. 아마 새로 고용한 호위인 것 같았다. 그렇게 비루한 차림이었던 사람이 며칠 사이에 이렇게 사치란 사치는 있는 대로 부리며 판을 벌리고 있다니 무슨 노릇인지 몰라도 요 며칠 사이 한 몫 단단히 챙긴 것이 분명했다.

 

호위를 전부 가게에 남겨둔 뒤 남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치마타를 가게 뒤편으로 데려갔다. 호위를 단 한 명도 데려 오지 않은 건 치마타가 덤벼봤자 자기 상대가 되지 않을 거란 판단에서였을까. 어쩌면 호위에게조차 들려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치마타가 해야 할 일은 남자의 꿍꿍이를 알아내고 그가 양조장과 또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 이 또한 저지하는 것. 그를 위해선 당장 한낱 인간에게 얕보이는 정도의 굴욕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른 녀석들에게 들었다. 요즘 여기저기 들쑤시며 우리들의 거래를 캐내고 다닌다면서?”

 

만약 그렇다면 어쩔 거지? 순순히 지금 하는 짓을 그만 두기라도 하려고?”

 

서운하구만~ 지금은 더럽게 폭리를 취하는 짓에서 손 뗐다고? 난 이제 깨끗한 장사꾼이야. 난 그저 그쪽에게 나와 손을 잡자고 제안하려던 것뿐이라고.”

 

이제 와서? 그러기 위해선 그쪽이 뭘 계획하고 있는지부터 말하는 게 먼저일 것 같은데. 신용할 수 없는 녀석은 상대하고 싶지 않군. 정보라면 다른 데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어.”

 

변함없이 까다롭기는. 좋아, 이쪽에서 하는 일은 평범한 창고보관업이다. 증서의 시세가 지나치게 높아지다 보니, 이제 구매를 포기하고 범죄에 손을 대는 녀석들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도둑, 강도질은 물론 살인까지. 다들 돈 욕심에 미쳐 돌아가고 있는 거지. 크크크...”

 

네가 할 말이 아닐 텐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치마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교섭에서 멋대로 흥분하고 상대를 자극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

 

그래서 이 내가 나선 것이다.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하는 금고를 잔뜩 사들여 보관료를 받고 강도가 무서워 벌벌 떠는 녀석들의 증서를 맡아주기로 한 거지. 이거면 쓸데없이 길바닥에 앉아 양조장의 눈치를 보며 수수료를 떼먹지 않아도 돼. 거기에 다른 녀석들에게 피해를 주는 장사도 아니니 이 정도면 깨끗하다고 할 수 있지 않나?”

 

제법 머리를 굴렸군. 과연, 썩어도 장사꾼이라 이건가.”

 

약간의 도움이 있었지.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니 그 정성에 감복한 모양이야. 내게 신이 찾아왔더군. 장사의 신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신님들이 버젓이 인간들과 어울리는 곳에서 장사의 신이 인간을 돕는 일쯤 충분히 있을 수 있잖아?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내게 그 분이 몸소 찾아와 알려주셨다. 미래에 대한 예지를, 내가 나아가야할 길을!”

 

당연히 남자가 하는 말이 진실일 리 없다. 복신이면 모를까, 장사의 신이라고 할 만한 존재는 환상향에서 치마타 단 한 명 뿐. 신의 이름을 사칭하여 자신이 움직일 시기에 맞춰 새로운 수를 둘 수 있는 존재, 그건 이 모든 상황의 뒤에서 암약하고 있는 흑막뿐이라고 텐큐는 생각했다.

 

그 신님의 예지가 꽤 잘 들어맞은 듯 하네.”

 

아아, 물론이지. 폭력사태로 점철될 지금의 상황도, 보관업이 큰돈을 만지게 해줄 거라는 것도 그 분의 조언대로이지. 그리고 한 가지 더, 그 분이 말해 주신 것이 있다. 네 녀석, 그냥 귀한 집 딸내미 같은 게 아니라면서? 너도 인간이 아닌 거냐? 달콤한 돈 냄새를 맡고 무녀에게 달라붙은 요괴라도 되는 거냐? 무녀야 참견을 좋아하는 족속들이니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 보려고 나서는 거겠지. 하지만 네가 무엇이고, 뭣 때문에 이 판에 발을 들였는지는 모르겠단 말이야.”

 

돈 좀 만지게 해줬다고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넙죽 받아들이다니, 그 잘난 머리가 이럴 땐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야.”

 

발뺌해도 소용없어. 그 분의 말씀이 틀릴 리 없으니까.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으면 움직여라. 마을 전체에 네가 인간들을 등쳐먹으려는 야비한 요괴년 이라는 소문을 퍼뜨려주지. 네가 노리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내 동료들이 널 가만 놔두진 않을 거다. 그게 싫으면 나와 손을 잡는 수밖에 없어.”

 

눈살을 찌푸린 치마타가 분한 듯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상대가 선수를 친 건가. 양조장을 끼고 농성전을 벌이는 것만으론 자신을 저지할 수 없다고 생각해 직접 다른 인간을 이용한 감시와 견제에 나선 모양이었다.

 

상대가 먼저 신임을 자청하며 이쪽을 요괴로 몰아간 이상, 섣부른 힘이나 능력의 사용은 감시자들의 의심만 부추길 것이 뻔했다. 시간을 들여 자신이 진짜 시장의 신임을 증명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천박한 남자에게 시간을 빼앗겨 흑막의 감시를 소홀히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감시자들을 무시하고 강경하게 나서자니 이들이 마을에 어떤 소문을 퍼트릴지 모르고, 참 이러기도 저러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치마타는 감시자들이 경계가 느슨해지길 바라며 일단 남자의 말에 맞춰주는 척 할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더러운 방식밖에 모르는 자군... 뭘 원한다는 거냐.”

 

내일 자정, 게코우카와 양조장의 뒷문으로 찾아와라. 실은 진짜 중요한 예지가 따로 있었거든. 조만간 증서 값은 크게 폭락할 거다. 값을 더 올릴 생각에 싱글벙글하던 다른 투기꾼 녀석들도, 양조장 녀석들도 모두 새파랗게 질리겠지.”

 

값이 폭락할 거라니,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다는 건가?”

 

그것까진 알려줄 수 없지. 우리가 손에 쥔 비장의 패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있다고? , 지금 이야기도 어디 가서 흘리고 다닐 생각은 하지 마라. 우린 널 계속 감시하고 있을 테니, 네가 조금이라도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바로 마을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들어 주겠어. 어차피 요괴가 지껄이는 말 따위 아무도 믿어주지 않겠지만.”

 

좋아. 그 예지가 사실이라고 치고, 계속 얘기해봐.”

 

우린 녀석들과 거래를 할 생각이다. 가격 폭락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녀석들을 동요시킨 다음, 적당한 값을 쳐서 남은 기간 동안 발행될 증서는 전부 이쪽에서 사들일 예정이야.”

 

그리곤 또다시 투기꾼들에게 팔아넘길 셈인가?”

 

한 번 떨어진 가격을 다시 올려 받으려 한들 누가 미쳤다고 그걸 사겠나! 그 분은 더 먼 미래를 내다보신 거다. 투기꾼 녀석들은 한순간만 활개 치는 녀석들이야. 더 이상 돈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녀석들은 판에서 손을 떼겠지. 하지만 지금 장사를 하지 못해 울상이 된 가게 녀석들은 달라. 그 녀석들은 굶어죽지 않으려면 앞으로도 계속 장사 수단인 술을 확보해야만 해. 누가 불쌍한 그들에게 술을 납품해 줄 건가? 이 내가 그 역할을 맡는다. 그들이 오직 나를 통해서만 술을 납품 받을 수 있도록 계약서를 쓰고 거래 관계를 구축할 것이다. 쪼잔하게 종이 쪼가리에 수수료를 붙여 팔아넘기는 것보다 이쪽이 장기적으로 더 이득이 되지 않겠어?”

 

그렇다면 그 거래에 제 3자인 내가 굳이 참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중요한 비밀을 말해주면서까지 날 끌어들이려고 하는 걸 보니 필시 그 장사의 신이란 존재가 나를 지명하기라도 했나보네..”

 

역시 머리 회전이 빠르군. 그쪽 녀석들과 넌 이미 안면이 있다고 들었다. 사실 우리 둘이 한패였다고 할 계획이야. 마을에서 가장 많은 증서를 가진 나와 녀석들의 뒤를 캐고 다닌 너, 둘이 짠 판 위에서 녀석들이 지금껏 놀아났다고 착각하게 만들 셈이지. 그럼 거래를 좀 더 수월하게 끌고 갈 수 있지 않겠나.”

 

네놈을 도와 내가 얻는 이득은 뭐지? 내 발을 묶지 않는 것, 그게 전부인가?”

 

순순히 협조하면 우리가 최종적으로 확보한 술 재고의 30%를 주겠다. 너도 봐서 잘 알겠지. 내가 모은 증서가 얼마나 많은지. 거기에 거래로 뜯어낼 양까지 합하면 그 양은 상당할 거다. 네 녀석이 뭘 꾸미고 있든, 어차피 너도 술이 필요한 거 아닌가? 30%면 충분히 급한 불은 끌 수 있어. 그걸 팔아서 이익을 독차지 하든, 불쌍한 녀석들을 구제하든 이후는 네 자유다.”

 

솔직히 눈앞의 남자를 100% 신용하기란 불가능했다. 원체 비열한 인간이고, 흑막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니까. 그의 제안이 사실이라고 해도 결국 치마타가 얻게 되는 건 흑막에게 동조한 대가로 받는 입막음 비용에 불과했다. 이용당하거나 똑같이 손을 더럽히거나, 혹은 이대로 앞길을 가로막혀 주저앉거나. 어느 쪽을 봐도 썩 마음에 드는 선택지가 없었다.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거래에 응함으로서 한 번 더 게코우카와 주인장과 대면할 수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잠깐, 어쩌면 이게 역으로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반짝 하고 상황을 뒤집을 아이디어가 치마타의 뇌리를 스쳤다. 주인장도 이 남자도 모두 흑막이 조종하는 사람들, 흑막과 얽힌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두 모이면 흑막도 반드시 그 자리에 끼어들어 상황을 살피려 할 것이다. 그 때 흑막의 정체를 까발리고 이 사건에 얽힌 음모를 그녀의 입으로 낱낱이 파헤친다면? 여론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는 것은 물론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사태를 중재할 찬스가 생길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썩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치마타를 자기 손 안에 붙잡아 두려다가 오히려 자신의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낼 단초를 제공하다니, 교만에 빠져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고 치마타는 마음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좋아. 거래에 응하겠어. 내일 양조장 뒷문에서, 맞지?”

 

그래, 그렇게 나와 주셔야지.”

 

재수 없게 이죽거리며 남자가 청한 악수를 치마타가 단호히 뿌리쳤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 거리곤 남자는 작별의 말과 함께 다시 자신의 가게로 돌아갔다.

 

그럼 늦지 말라고. 늦으면 여러모로 곤란하니까.”

 

이야기가 길었던 탓인지 하늘이 서서히 붉은 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남자의 일행이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오늘 이 이상 수사를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거래일까지 쓸데없이 튀는 행동은 삼가자는 판단을 내린 치마타는, 최소한 양조장의 동태만이라도 감시하기 위해 곧장 여관 방으로 되돌아 갔다.

 

-----------------------------------------------------------------------------------------------

 

? 그럼 그 사람이랑 손잡기로 결정하신건가요!? 거래 자체가 속임수일 수도 있잖아요?”

 

여관으로 돌아온 치마타는 사나에에게 남자와 했던 거래에 대해 털어놓았다. 처음엔 그녀를 걱정하여 극구 나서지 말라고 만류하던 사나에였지만, 먼저 행동에 나선 흑막에게 꼬리를 잡혀 협박당했다는 말을 듣자 어쩔 수 없다는 투로 결국 그녀의 결정에 순응했다.

 

다 제 탓이에요. 그 때 술기운에 발끈해서 상대를 자극하지만 않았어도...”

 

아냐, 스스로를 탓할 필요는 없어. 그 녀석들은 내가 누군지, 우리 목적이 무엇인지 처음 보자마자 알았을 거야. 그러니 대담하게 나를 사칭해서 거래 테이블에 앉힌 거지.

 

치마타님, 역시 흑막은 주인분이 아니라 그 소녀인거죠? 저희를 안내해주었던 종업원 아이요.”

 

어머, 눈치 채고 있었구나. 역시 너도 거기 방문했을 때 뭔가 수상한 점을 느낀 거지?”

 

, 아뇨. 오늘 조사를 하다가 전에 갔던 옷가게의 지로씨에게 들었는데요. 시세의 절반 가격으로 증서를 파는 여자아이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시세의 절반이라고?”

 

멍하니 턱을 괴고 창문으로 양조장 쪽을 바라보던 치마타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사나에를 돌아보았다. 처음 접하는 정보였다. 새롭게 성행한 보관 장사에 신경을 빼앗겨 증서 거래 추적에 조금 소홀해졌던 탓일까, 아니면 상대가 이쪽을 경계하여 극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인 걸 수도 있다.

 

치마타는 곧바로 자신이 지난 5일간 조사한 내용을 정리한 자료들을 살폈다. 공식적인 시세의 변동은 없었다. 증서의 총 거래량도, 양조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증서의 수량도 변동이 거의 없었다. 누군가 새로이 투기판에 뛰어들었다면 거래의 흐름 어딘가에서 이상이 감지되었을 터, 하지만 마치 유령이 개입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정리한 데이터엔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 가게에서 일하는 중에 누군가 찾아와 절반 가격에 증서를 사지 않겠냐고 권하더래요. 앳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망토 같은걸 푹 뒤집어쓰고 있었다나요. 처음엔 어린애가 장난치는 줄 알고 무시하려 했는데, 곧 그 아이가 증서가 한가득 담긴 가방을 열어서 보여주었답니다. 당연히 전부 양조장 직인이 박힌 진품이었구요. 뭔가 찜찜하게 여겨져서 그 분은 거래를 거절했다는데, 잠깐 고개를 돌린 사이 여자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대요.”

 

그 정도로 싸게 팔아 넘겼으면 시장 상황에도 변화가 생기는 게 당연했을 텐데...!”

 

영문은 모르겠지만 굉장히 비밀스러운 거래라는 모양이래요. 일종의 구제? 라고 하기도 하고... 증서가 너무 비싸 살 엄두도 못 냈던 사람들만 찾아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싸게 판다고 해요. 아하하... 저는 거기 단골이기도 해서 친분을 이용해 슬쩍 귀띔으로 들었지만요.”

 

우리가 조사한 사재기를 한 사람 중에 그런 여자아이는 없었을 터. 그럼 사나에 너는 그 아이가 양조장에서 우릴 안내해준 아이랑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한 거구나?”

 

그렇죠. 한정 판매된 물건을 사재기 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들고 다닐 수 있는 건 양조장 관계자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남자가 말한 시세가 떨어질 것이라는 예지는 이걸 의미하는 것이었구나, 치마타의 머릿속에서 흑막이 그린 그림이 무엇인지 그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흑막은 아마 증서 매매가 충분히 활발해져 개개인간 발생하는 모든 거래를 일일이 추적하는 것이 불가능해 질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 내부에서 대량의 증서를 유출시켜 시세보다 훨씬 싼 값에 판다면? 당장 겉보기 시세에 변동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비밀 유지라는 거래 조건도 있고, 싼 값에 증서를 샀다는 사실이 퍼지면 그대로 증서 가격도 폭락할 것이 뻔한데 누가 좋다고 자신의 거래 사실을 떠벌리고 다니겠는가. 시세와 거래 물량에 빠삭한 투기꾼들 대신 이런 것에 눈이 어두운 소시민들을 노리고 다닌 이유도 여기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숨기려 해도 결국 언젠가 물량을 초과한 양의 증서가 시중에 풀렸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증서의 가치는 실제 재화인 술과 교환이 가능할 때 성립되는 것. 증서를 가지고도 술을 얻을 수 없다면 그건 그냥 아무 가치 없는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늦게 증서를 처분하는 사람이 손해를 떠안게 된다. , 상황은 하나의 거대한 폭탄 돌리기 게임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너도나도 폭탄을 떠안기 전에 증서를 팔아 조금이라도 현금을 보전하려 할 것이고, 수요에 비해 급격히 증가한 공급량으로 인해 자연스레 증서 시세는 하락할 것이다.

 

두 번째로 끌어들인 남자에게 보관업을 시킨 이유도 수많은 밑작업 중 하나였을 것이다. 수많은 증서의 행방을 묘연하게 만들어 거래량이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한동안 내부 유출 건을 양조장에서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 것. 동시에 아마 남자는 양조장에서 증서를 매입하는 역할도 맡고 있었을 것이다. 호위라고 했던 덩치 큰 사람들, 그들을 이용해 매일 정해진 양의 증서를 양조장으로부터 시세대로 구입하도록 지시했겠지. 자금 출처는 당연히 흑막이 양조장으로부터 직접 빼돌리거나 빼돌린 증서로 벌어들인 부당 이익이다. 그렇게 실질적인 돈의 이동은 전혀 없는 채, 매일 꾸준한 양의 증서가 시장에 유통되는 것처럼 속인 것이다. 말인즉슨, 모든 건 양조장 주인과 치마타, 양쪽 모두에게 들키는 일이 없도록 신중에 신중을 가해 펼친 흑막의 치밀한 물밑 작전이었다는 것이다.

 

남자는 아마 이 사실을 가지고 양조장 주인을 협박할 셈이었을 것이다. 주인장이 남자의 거래에 응할 것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시세 폭락은 전부 유출범의 소행으로 돌리면 되니 주인장은 얼마든지 책임을 피해갈 수 있고, 사리사욕을 우선시하는 그라면 떨어진 시세로 인해 손해를 보느니 한 푼이라도 건질 수 있을 때 건져두려 할 테니까.

 

문제는 마을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유출된 물량의 판매는 계속 이루어지고 있을 테니, 거래 성사 여부와 관계없이 증서의 시세 폭락은 예정된 현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두 남자, 그리고 흑막을 제외한 투기판에 뛰어든 마을 사람 모두가 크나큰 손실을 입고, 그로 인한 피해는 한동안 마을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길 것이다. 경제적 기반도, 재산도 몽땅 잃고 이 추운 겨울을 온전히 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의 고혈을 짜내 자기 배를 불리는 데 쓰다니, 정말이지 교활하고 잔혹하기 짝이 없는 계획이었다.

 

치마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은 잠자코 거래일까지 기다릴 때가 아니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마을을 덮쳐올 재앙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막기 위해 그녀는 지금 바로 행동에 나서야 했다.

 

사나에! 지금 바로 로쿠스이젠 쪽으로 다시 가도록 해! 무력을 쓰든 주변을 몽땅 헤집고 다니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단서를 찾아!”

 

이렇게 늦은 시간에요?! 벌써 며칠째 허탕이었는데, 무슨 단서를 찾으라는 말씀이신지...”

사건의 공범이 분명 그 근처에 숨어 있어. 아마 나처럼 기척을 죽이고 꽁꽁 숨어 있을 거야. 시간이 없으니 설명은 나중에 할게. 네가 가진 모든 걸 이용해 숨어있는 공범을 잡아서 게코우카와로 데려와주렴.”

 

치마타 님, 지금 게코우카와로 가시려구요?”

 

어느새 치마타는 원래의 옷으로 환복을 마치고 방을 나서려 하고 있었다. 더 이상 그녀는 인간으로 위장한 모습이 아니었다. 감추어 두었던 신의 위광을 드러내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그녀가 사나에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녀석들이 더 이상 시장을 욕되게 하도록 두지 않을 거야.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6-

 

자시 정각을 앞둔 시각, 보통 때라면 늦은 시간까지 한 잔 걸치는 취객들과 그들을 맞이하는 가게들로 아직은 어수선해야 할 거리가 쥐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최근 발생했다는 강도사건들 때문일까, 증서를 구입한 사람들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다들 무슨 해코지를 당할까봐 무서워 집에 꼭꼭 틀어박혀 있는 듯 했다.

 

조용한 거리를 지나 서둘려 달려온 치마타가 게코우카와의 후문 앞에 당도했다. 그 앞에서 제일 먼저 그녀가 느낀 감각은 위화감. 그렇게 엄중한 보안을 유지하고 있던 양조장이 이날따라 지나치게 조용했다. 물론 시간상 모두가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대긴 하지만, 도둑이 돌아다닐 지도 모르는 시국에 경비도, 어디 불 켜진 방도 하나 없이 넓은 건물 전체가 침묵에 잠겨 있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히 수상한 상황이었다.

 

치마타가 조심스럽게 후문을 손으로 밀어 보았다. 두꺼운 빗장이 걸려 있어야 할 문이 저항 없이 스르륵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안에서 벌써 뭔가 벌어졌음을 짐작한 치마타가 다급히 문을 박차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문에 걸려 있어야 할 빗장이 흙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누군가 내부에서 문을 열고 그대로 내던져 둔 모양이었다. 살금살금 기척을 죽이고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양조장 전체에 퍼진 그윽한 술향기에 섞여 이질적인 비릿한 냄새가 훅 코를 찔렀다.

 

이 냄새는...?’

 

설마 강도가 침입한 걸까, 피냄새를 쫓아 치마타는 방문 하나하나씩 열어보며 안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안의 상황은 생각 이상으로 참혹했다. 경비를 서던 보초들도, 늦은 시간까지 술의 상태를 살피던 일꾼들도, 저마다의 방에서 휴식을 취하던 다른 사람들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전부 참혹하게 살해당해 있었다. 물건을 뒤진 흔적은 없었다. 어수선하게 건물 내부를 헤맨 흔적도, 창고에 보관댄 상품에 손을 댄 흔적도 없었다. 단순 금품을 노린 강도라기엔 지나치게 깔끔하고, 또 잔혹한 수법이었다. 이건 계획범죄다. 돈을 노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침입자들은 이들의 목숨을 노리고 안에 숨어든 것이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시신과 굳지 않은 핏자국들이 학살극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아직 내부에 침입자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 치마타는 더욱 숨을 죽이고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하며 건물의 가장 안쪽, 주인의 방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본 적 있는 얼굴도,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사람의 시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흑막으로 점찍은, 주홍빛 머리의 앳된 소녀. 그렇다는 건 이 참상 또한 그녀의 계획인 걸까? 분명 거래는 내일로 예정되어 있었을 텐데, 그 사이 내분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 속,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불안과 함께 마침내 주인방 앞에 도달한 치마타는 미닫이문의 양손잡이를 움켜쥐고 양쪽으로 조용히 밀어젖혔다.

 

“... ...”

 

역한 냄새가 가득한 어두컴컴한 방 한가운데 누군가 등을 돌리고 주저앉아 있었다. 아담한 체구, 옷은 여기 종업원들이 입는 옷과 비슷해 보였다. 주저앉은 인물 앞엔 무언가 큰 덩어리가 놓여 있었는데, 어둠이 너무 짙어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긴 어려웠다.

 

마침 옆에 불 꺼진 양초가 놓여 있는 것을 본 치마타가 거기에 불을 붙이고 집어 들었다. 방 안 유일한 광원으로부터 퍼져나간 환한 빛이 치마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 방 안 곳곳에 길고 짧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와 동시에 인기척을 느낀 상대가 경직된 움직임으로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역시 당신이었군요.”

 

어스름한 불빛을 받아 드러난 파랗게 질린 얼굴, 그 얼굴의 주인은 치마타가 이곳에서 줄곧 찾아다닌 자이자 이 사건의 진범으로 지목한 인물, 바로 종업원 소녀 본인이었다.

 

너는... ...!”

 

당신이 이곳에 숨어 무슨 흉계를 꾸몄는지는 이미 전부 알아냈습니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어요. 순순히 정체를 밝히시죠. 아니, 이쪽에서 밝혀 드릴까요? 당신이 가는 곳마다 파멸과 빈곤을 불러오는 사악한 존재. 역병신이라는걸!!”

 

말을 잇지 못하는 소녀에게 성큼 다가간 치마타가 그녀의 안경을 휙 낚아채 집어던졌다. 풀어헤친 주홍빛 머리 아래 반반하게 화장한 그녀의 본얼굴이 드러났다. 촌스럽기 그지없는 변장으로 본모습을 감추고 흉계를 꾸며온 흑막의 정체는 바로 인간에게 빌붙어 재산을 탕진하게 만드는 역병신, 요리가미 조온이었다.

 

사치스러운 물품으로 잔뜩 꾸미고 시장을 열 때마다 찾아와 물주를 탐색하던 모습, 시장의 관리자로서 아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이런 허접한 변장을 좀 더 일찍 알아채지 못한 내 불찰이에요. 더 빨리 눈치 채고 행동에 나섰어야 했는데. 그랬더라면 이런 참극까진...! 말해 보세요. 왜 죄 없는 목숨들을 빼앗은 거죠?”

 

잠깐! 잠깐 기다려봐! 나 아냐!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이건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 내 말 좀 들어봐, ?”

 

조온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치마타의 앞을 막아섰다. 애원하듯 바라보는 죠온의 이마엔 식은땀이 흥건했고, 그녀의 손과 옷은 진득한 검붉은 액체가 가득 묻어 있었다. 그 액체의 출처는 그녀가 막아서고 있는 무언가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것. 들을 가치가 없는 변명이라 여긴 치마타는 조온을 거칠게 밀쳐내고 그녀 뒤의 물체에 촛불을 가까이 들이댔다. 짙은 냄새와 함께 역겨운 죽음의 기운이 훅 하고 올라왔다.

 

역병신과 손을 잡고 최초로 이 일을 꾸민 공범, 게코우카와의 주인장이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널브러져 있었다. 단단한 물건으로 머리를 몇 번을 맞은 건지 피투성이 머리는 움푹 함몰되어 있었고, 기다란 나무막대가 하나, 그의 복부를 관통하여 사방으로 피와 살점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 나뒹굴고 있는 피와 살점이 엉겨 붙은 나무 조각 하나. 형태로 보아 술통을 휘젓는데 쓰이는 도봉 파편임이 틀림없었다.

 

주인은 도봉이 부러질 때까지 머리를 수차례 얻어맞고 그것도 모자라 부러진 봉으로 꿰뚫려 살해당한 것 같았다. 이 얼마나 잔혹한 살해 방법인가. 금품을 노린 강도도 이런 식으로 살인을 저지르진 않을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소행에 분노한 치마타가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며 서있는 조온을 노려보았다.

 

결국 자신이 이용해 먹은 인간까지 죽여 버렸군요.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지른 건가요! 돈 욕심이 나서? 부정을 저지른 게 들통날까봐? 다른 사람들도 다 당신이 저지른 짓인가요? 아무리 악신이라지만 당신,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어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쏘아붙이며 치마타가 팔을 휘둘렀다. 형형색색의 부적이 그녀의 손끝으로부터 날아가 마치 밧줄처럼 조온을 옥죄며 날려버렸다. 우당탕 세차게 가구들에 부딪히며 튕긴 그녀의 여린 몸이 부서진 가구 잔해와 함께 바닥에 뒹굴었다.

 

시장경제질서를 어지럽히고 마을을 혼란에 빠뜨린 죄, 속임수 거래로 폭리를 취하고 시장의 신인 나의 이름을 사칭하여 피해자를 늘린 죄, 자신이 저지른 부정을 무마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은 죄. 더 볼 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이 자리에서 제가 즉석으로 심판하도록 하겠어요.”

 

그러니까!!! 난 아니라고 했잖아!!”

 

여기까지 와서 자신이 저지른 짓을 부정할 셈입니까?”

 

아아아아악...!!”

 

부적이 더욱 강하게 조온을 옥죄었다. 뼈가 우둑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날카롭게 벼리어진 부적 모서리가 그녀의 보드레한 살갗에 파고들어 살점을 찢어 발겼다. 하지만 고통 속에 비명 지르고 신음하면서도 조온은 끝까지 자기변호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 내가 한 것도 있어! 언니를 시켜서 다른 곳들의 장사를 싹 망치고 여기 인간에게 달라붙어 돈을 벌게 해주겠다고 이런저런 조언을 해줬어! 마을의 술을 동나게 한 건 내가 한 일이 맞아! 하지만 영문을 모르겠다고! 사칭이니 부정이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살인도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야! 난 억울해!!”

 

태연하게 타인을 속이는 악신의 말을 신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요?”

 

진짜 모르는 일들이야! 난 이제 막 언니랑 만나고 여기 돌아왔을 뿐이야. 그랬더니 다 죽어 있었다고! ...그래! 당신, 모리야 신사의 무녀를 시켜 언니를 찾고 있었지? 그치? 언니가 그것 때문에 밥도 못 먹고 숨어 있어야 한다고 매일 징징거렸단 말이야. 그래서 오늘도 남은 밥을 가져다 줬어. 못 믿겠으면 언니가 있는 곳을 말해줄게, 직접 물어보라고!”

 

둘이 짜고 거짓말을 할 가능성도 있겠죠. 어찌 되었건 당신의 자매도 공범이니까요.”

 

...진짜!! 생각해 봐! 난 역병신이라고? 달라붙은 인간이 내게 돈을 펑펑 쓰게 만드는 녀석이란 말이야! 그런데 빌붙을 녀석을 죽여서 무슨 이득이 있다는 건데? 여길 망하게 해서 뭐 좋을 게 있다고. 부정을 저질러? 그랬다가 기껏 붙잡은 봉에게 들켜서 쫓겨나면 어쩔 건데!”

 

거의 울부짖는 목소리로 조온이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그래봤자 치마타의 말대로 쓰레기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렇게 자존심을 내버리면서까지 그녀는 변호에 필사적이었다.

 

옭아맨 오라를 조금 느슨하게 하며, 치마타가 슬쩍 떠보듯 물었다.

 

이미 새로운 봉을 찾아둔 거 아니었나요? 내일 저와 거래하러 오기로 한 남자 말입니다.”

 

“...남자라니, 방앗간 주인을 말하는 거야? 아니면 촌장 아들? 이쪽의 단골들은 손도 대지 않았어. 어차피 돈을 멋대로 쓰고 가난해질 녀석들인걸! 그리고 거래라니 무슨 소리야, 그런 얘긴 여기 주인한테도 들은 적 없다고!”

 

진심으로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것처럼 대꾸하는 그녀의 반응에 치마타가 동요했다. 정말 모르는 건가? 아니면 여전히 거짓말을 하는 건가? 말하는 투로 보아 연기하는 것 같진 않았으나 여전히 그녀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녀가 부정한 혐의들은 누가 저지른 것이 되는가?

 

조온의 말이 진실이라고 가정할 때, 치마타가 그동안 한 추리는 뿌리부터 뒤흔들리게 된다. 지금까지의 추리는 모두 조온이 모든 이득을 독차지 한다는 전제하에 짜 맞춰진 이야기. 그렇기에 정황 증거만 가득할 뿐, 물증은 없었다. 즉 이는 정황만 잘 짜 맞추면 치마타의 추리 외에 다른 추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그녀들이 모르는 제3자의 난입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

 

치마타는 제일 먼저 자신에게 접근해 거래를 제안한 암상인을 떠올렸다. 자신을 사칭한 존재, 그 존재가 말해준 예지들, 손 씻고 깨끗한 사업으로 전향했다는 남자의 선언, 그리고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거래 이야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분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남자가 모종의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는 건 확실했다. 즉 그가 이 사건 중간에 개입해 조온의 소행으로 위장하고 또 다른 사건을 일으킨 3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암상인이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이 학살극까지 계획의 일부였다 한다면, 그는 그렇게 증서를 긁어 모아놓고 역설적으로 양조장을 망하게 할 속셈이었다는 것이 된다. 가진 돈을 전부 쏟아 부어놓고 이제 와서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보관업은 왜 시작한 것일까. 시세의 절반으로 대량의 증서를 팔아치운 비밀스러운 소녀는 누구였으며 남자와 무슨 관계였던 것일까. 하나하나, 머릿속에 떠오른 단서 조각을 연결하고 그 안에서 거래의 인과관계를 추적해 나간다.

 

손해를 보며 장사하려는 인간은 없다. , 게코우카와에서 벌어진 학살극은 그 남자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행위였다는 것이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로 인한 결과가 존재한다.

 

거리의 치안이 나빠지면? 사람들은 재산을 안전하게 맡아줄 이를 찾는다.

 

타인의 증서를 맡아주게 되면? 누구의 소유인지와 상관없이 내 손 안에 융통 가능한 막대한 양의 증서가 쌓인다.

 

게코우카와가 망하게 되면? 모든 증서는 휴지조각이 된다. 더 이상 증서가 누구의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원인, 결과, 원인, 결과, 퍼즐이 맞춰지며 그 안에 감춰진 진실이 윤곽을 드러낸다.

 

왜 비밀리에 구매자를 늘려야 했는가? 양조장을 습격하기 전까지 시세가 하락해선 안 되었기 때문이다.

 

왜 시세보다 한참 낮은 가격으로 팔아야 했는가? 빨리 팔아치우지 않으면 곤란했기 때문에. , 곧 증서의 가치가 휴지조각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남자가 그린 그림이 치마타의 눈앞에도 그려졌다. 마침내 모든 것을 알게 된 치마타가 진실을 꿰뚫는 하나의 단어를 나지막이 읊조렸다.

 

공매도...인가.”

 

뭐어? 어디서 들어본 단어인데. 아니 이제 의심은 풀렸지? 내가 나쁜 짓을 저지른 건 맞지만 살인은 저지르지 않았다는 거, 믿어 주는 거지?”

 

그때, 방안에 감도는 역한 냄새가 한층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피 냄새에 섞여 있을 땐 잘 구분가지 않았던 향이 지금은 피 냄새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것은 연료용 기름의 냄새. 눈치를 챘을 땐 이미 방 안 가득 기화한 연료로 채워진 상태였다. 술과 나무가 사방에 널린 공간을 채운 인화성 물질, 아직 이 안에 남아있을지 모르는 진짜 살인자의 존재, 이 두 가지 사실이 시사 하는 바는 명확했다.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치마타가 조온에게 몸을 던졌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뜨듯한 바람이 불어오나 싶더니 이내 복도를 가득 메운 화염의 격류가 매서운 속도로 방 전체를 덮쳤다.

 

-콰아아아아앙!!!!!!-

 

-7-

 

“... ...! .........!!”

 

복부에 느껴지는 격한 통증에 치마타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부적에 사로잡혀 있는 조온이 새파랗게 질려서 자신을 퍽퍽 걷어차고 있었다. 그녀의 뒤엔 활활 불타고 있는 큼직한 기둥이 금방이라도 그녀들을 덮치며 쓰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진 채 겨우 버티고 있었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와 건물이 붕괴하는 굉음이 지금 결코 여유롭지 않은 상황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치마타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폭발의 충격으로 잠깐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보통 인간이었으면 그 충격과 열기에 숯덩어리가 되었겠지만, 다행히 그녀가 힘을 되찾은 신이었던 덕분에 옷과 망토 일부가 불타고 찰과상을 조금 입는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 조온 또한 치마타가 몸을 날려 그녀를 보호해준 덕분에 폭발로부터 멀쩡할 수 있었다.

 

언제까지 쓰러져 있을 거야. 빨리 날 풀어주던가, 데리고 나가달라고! 이러다 다 죽...진 않겠지만 아픈 건 싫단 말이야!”

 

염치도 없네요, 당신... 자신이 지금 어떤 처지인지나 알고 ... ...”

 

잘못은 했지만 산채로 구워질 정도로 잘못하진 않았어! 너도 다치는 건 싫을 거 아냐?”

 

머리가 띵하고 손발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머리를 세게 부딪혀서 그런 듯했다. 조금 쉬면 금방 회복할 수 있겠지만, 빠르게 번지는 불길은 그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을게 분명했다.

 

육신이 있다는 건 불편하네... 이런 비참한 기분, 얼마 전까진 당연한 거였는데.’

 

빙글빙글 도는 머릿속에서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른 치마타가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주린 배를 붙잡고, 추위에 떨며, 쉽게 상처 입는 몸을 간수하느라 힘겨웠던 영락의 세월들. 그건 보이지 않는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행동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가 겪은 실패였다.

 

겨우 힘을 되찾은 뒤에도 그녀는 자신이 품은 모순을 깨닫지 못하고 단순히 시장을 주최하는데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고 신앙을 회복하려 했다. 그 결과 그녀는 또다시 실패를 겪고 말았다. 그녀가 좀 더 인간들에게 관심을 가졌더라면, 신으로서 본분에 충실했더라면 사태는 조기에 진압되고 이런 학살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봐야할 것을 보지 않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고,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은 그녀의 불찰. 미숙한 성찰로부터 비롯된 망설임이 이렇게 큰 결과를 낳고야 말았다.

 

허나 그렇다고 지금 여기서 과거의 자신을 꾸짖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망설임으로 일을 그르쳐 놓고 또 여기서 망설임을 반복할 것인가. 이젠 나아갈 수밖에 없다. 나아가는 것만이 과오를 바로 잡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후회, 자책, 탄식, 마음속에 스멀스멀 기어 들어오는 나약한 생각들을 떨쳐내며 치마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그녀에겐 모든 것을 돌려놓을 힘이 있다. 올바른 성찰을 통해 얻은 뚜렷한 의지와 행동할 용기가 있다. 거듭된 실패를 마주하며 마침내 텐큐 치마타라는 독립된 신으로 거듭난 그녀, 그런 치마타의 두 눈에선 더 이상 어떠한 주저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옆으로 물러나도록 하세요. 벽을 부수고 탈출하도록 하겠습니다.”

 

뭐가 됐든 빨리 꺼내줘! 천장이 무너지고 있다고!”

 

대들보가 타버리며 지지할 곳을 잃은 천장이 우르릉거리며 내려앉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불타는 기둥에 둘 다 깔려버리고 말 상황. 치마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신 안에 남아있는 힘을 한 곳으로 집중시켰다. 두꺼운 벽 하나 쯤 문제없이 날려버릴 수 있는 빛의 구체, 손에 구체를 쥔 치마타가 벽을 향해 팔을 휘두르려 할 때였다.

 

개해모세의 기적!!!!

 

벽이 갈라지며 대량의 물이 그 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어디선가 기적처럼 솟아난 대량의 물은 주위의 불을 진압하고 열기를 식히며 치마타와 조온이 있는 곳부터 바깥까지 안전한 대피로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 대피로의 끝, 환한 달빛 아래 숨을 헐떡이며 이쪽을 살피는 낯익은 인물이 치마타의 눈에 들어왔다.

 

치마타 님! 무사하셨군요! 이쪽으로 어서 빠져 나오세요! 곧 건물이 무너질 거예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묶여있는 조온을 들쳐 업은 치마타가 바닥을 박차고 전력으로 돌진했다. 그녀들이 바깥으로 빠져나옴과 동시에, 겨우 버티고 있던 벽이 무너지며 취약해진 지붕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시체, , , 증서, 모든 것이 한줌의 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후아...아슬아슬 했어요. 갑자기 폭발음과 함께 불꽃이 치솟아서 깜짝 놀라 달려왔지 뭔가요. 하마터면 치마타 님이 큰일 날 뻔 한 이런 상황에서 말하기 뭣하지만, 덕분에 성과도 있었답니다.”

 

사나에의 등 뒤에서 빼꼼 수척한 얼굴의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땟물이 질질 흐르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조온과 왠지 닮은 듯 한 인상을 주는 소녀. 조온의 언니이자 빈곤신인 동시에 사건의 최초 원인 중 하나인 요리가미 시온이었다.

 

조온, 무사했구나!”

 

언니... 날 구하러 와 준거야?”

 

아니, 나도 잡혔어. 조온이 돌아간 곳에서 갑자기 불이 나서... 조온이 걱정되어 뛰쳐나왔다가 여기 무녀한테 딱 붙잡혀 버렸어.”

 

울상을 짓는 시온 또한 자세히 보니 몸 여기저기 차압딱지 대신 부적이 붙어 있었다. 함부로 힘을 쓰지 못하도록 봉인 당한 후 여기까지 끌려온 모양새였다.

 

사정은 다 들었답니다. 시온 씨가 다른 양조장들을 돌아다니며 재앙을 옮기는 동안 조온 씨가 여기 주인 분을 꼬드겨 증서를 발행하고 폭리를 취하도록 했다면서요? 정말 최악이에요.”

 

조온은 새해가 지나면 다시 괜찮아질 거라 해서... ...”

 

이게 괜찮아질 상황으로 보이시나요?”

 

사나에, 지금 취조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야. ... 마을 사람들이 소란을 눈치 채고 모여들고 있군. 곧 관리자급 되는 인간들도 여기 오겠지?”

 

조온을 흙바닥 위에 털썩 내려놓은 치마타가 주위를 빙 둘러보곤 급한 어조로 말했다.

 

, 곧 케이네씨와 모코우씨가 사람들을 이끌고 화재 진압을 도우러 와주실 거예요. 다행히 다른 건물로 불이 번지진 않았으니 날이 밝기 전까진 진압 할 수 있을 겁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범인도 잡았으니 이제 나머진 마을 분들에게 넘기면 되는 일 아닌가요?”

 

아니,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사나에. 넌 일단 여기서 화재 진압을 돕고, 불길이 어느 정도 잦아들면 믿을 만한 사람 대여섯 명에게 도움을 청해 지금 내가 적어주는 위치로 와줘. 건물 주변을 포위하고, 쥐새끼 하나 나가지 못하게 감시해주렴.”

 

? 어라, 끝난 게 아니라구요?”

 

설명은 나중에!”

 

또 혼자 해결하러 가시려고...! 이미 가셨네. 하아~ 어쩔 수 없지. 이게 조수의 일이니까.”

 

치마타가 망토자락을 뜯어 급하게 휘갈긴 약도를 전달 받은 사나에가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치마타는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진 뒤였다.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된 사나에였지만 치마타가 이렇게 행동하는 덴 반드시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믿었기에, 그녀는 두 역병신을 데리고 현장 어딘가에 나와 있을 케이네를 찾기 시작했다.

 

-------------------------------------------------------------------------------------------------

 

화재 현장으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타츠키 신용금고, 이미 영업시간이 한참 지나 가게 문은 굳게 잠기고 불도 꺼져 있었지만 그 안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그림자들로 가득했다.

 

이 건물은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손님을 맞이하는 창구가 있고 그 뒤 칸막이로 가로막힌 공간에 열쇠로 잠글 수 있는 무쇠금고들이 줄지어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금고는 증서 같은 서류를 보관하는 소형 사물함과, 커다란 보물을 보관하는 대형금고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들은 전부 똑같은 무쇠 금고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장 안쪽에 존재하는 대형 금고 하나는 가벼운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타츠키란 남자와 그의 일당들 뿐. 그가 가게 안에 가짜 금고를 비치한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그 아래 일당의 도주용 은신처까지 이어지는 땅굴 통로를 감추기 위함이었다.

 

가게 안에선 땅굴을 통해 돈자루를 옮기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암상인에게 고용된 호위들이 일부는 망을 보고, 일부는 자루에 돈을 담아 비밀통로 아래로 던지는 작업을 분주히 실행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 돈은 보관 장사를 통해 벌어들인 정당한 돈이 아니었다. 타인이 맡긴 증서를 빼돌려 팔아 비밀리에 대량으로 팔아 얻은 막대한 부정 수익이 돈의 주요 출처였다. 비록 절반 가격으로 팔긴 했지만 끝을 모르고 치솟는 시세를 보고 투자 욕심에 눈이 돌아간 사람들이 저마다 가진 재산을 죄다 털어 준 덕분에 남자는 이만큼의 돈을 벌 수 있었다.

 

이렇게 벌어들인 액수로만 보면 성공적인 한탕 장사였지만, 이를 지켜보는 남자 - 암상인 타츠키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지 창밖을 계속 흘끔거리며 남자는 계속하여 호위들을 재촉했다. 옆에 있는 부하들조차 신경 쓰일 정도로 남자가 손톱을 딱딱 물어뜯으며 극도로 불안해하고 있을 때, 별안간 아무 것도 없던 어둠 속에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기에 제가 얌전히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나요?”

 

뭐야! 누구야! 대체 어디로 ... ... , 신님!”

 

충혈 된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고함치던 남자가 급격히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시선을 향한 어둠 속에서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조그마한 체구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망토를 깊숙이 뒤집어 써 얼굴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간드러진 목소리의 소녀, 그런 정체불명의 소녀를 신님이라 부르며 가까이 다가간 남자가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분명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다른 건 전부 분부대로 했습니다! 강도 사건을 일으키고, 이 신용 금고를 열고, 무녀와 그 일행인 요괴가 눈치 채지 못하게 증서를 사고파는 짓도, 전부 성공적으로 해내지 않았습니까!”

 

전부는 아니죠~. 저는 분명 둘을 속여서 시간을 벌어 달라고 했지, 이런 식으로 살인을 저지르라곤 안 했다구요? , 그리고 제법 화려하게 저질러 주셨던데요. 덕분에 온 마을이 소동을 눈치채버렸어요.”

 

타오르는 불꽃으로 인해 환해진 바깥을 창문 너머로 곁눈질하며 소녀가 얄밉게 이죽거렸다.

 

장사 쪽으론 재능이 꽤 있어서 이용 가치가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머리가 나쁘실 줄은. 이제 어쩌실 건가요? 설마 비밀 통로를 타고 은신처로 도망가 사건이 잠잠해지기 전까지 무작정 숨어 지내겠다는 한심한 생각은 아니겠죠? 그럼요. 이미 얼굴도 패거리도 전부 알려졌는데 수 년 수십 년 동안 숨어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멍청이가 있을 리가요.”

 

사고...사고로만 처리 되면 문제없을 겁니다! 개미 한 마리 남기지 않고 싹 다 죽이고 불태웠습니다요. 여차하면 침입할 때 거기 종업원을 매수해 문을 열게 만들었으니 그 녀석의 소행으로 몰아가 버리면 될 겁니다.”

 

정말 남김없이 죽었다고 생각하시나요?”

 

물론……. , 어이! 어떻게 된 거냐! 분명 싹 다 죽여 버렸다고 하지 않았어!”

 

소녀의 말에서 의심하는 낌새를 느낀 남자가 뒤에 있던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안에 있던 녀석은 샅샅이 뒤져서 전부 죽였슴다. , 방해꾼이 있었긴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요, 대장?”

 

방해꾼? 지금 방해꾼이라고 했나?”

 

아니, 그게 ... 그 무녀 일행 녀석 있지 않슴까. 원래라면 내일 와야 할 그 녀석이 오늘 갑자기 양조장에 쳐들어 왔다구요. 대장이 살인 혐의를 뒤집어씌우자고 한 녀석이요. 그래서 급한 대로 불을 질렀는데 ... 에이, 기름을 잔뜩 뿌려서 화려하게 폭발까지 일으켰는데 그 상황에서 살아남진 못 할 검다. 아마 지금쯤 새카만 숯덩이가 되어서 나뒹굴고 있을 걸요.”

 

이런, 당신을 닮아서 부하들도 쓸데없이 일을 벌이길 좋아하는 모양이네요.”

 

멍청한 녀석들! 그런 사실을 왜 말하지 않은 거야! 불은 갑자기 왜 질렀나 싶었더니만!”

 

그치만 대장, 목격자는 남김없이 처리하라고 했지 않슴까?”

 

그건 마을 녀석들일 때 이야기지! 그 녀석은... ...!”

 

-!!!-

 

남자가 마룻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동시에 굉음이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물론 이는 남자의 주먹이 낸 소리가 아니었다. 남자의 눈앞에서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던 부하가 휙 날아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을 때 이미 부하는 뜯어진 나무문과 벽 사이에 끼여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갑작스레 벌어진 사태를 눈치 챈 모두가 입구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뭐야! 누가 감히 겁도 없이!”

 

아아, 이런 ... 곤란해졌네요. 이럴 줄 알았다니깐.”

 

문짝이 뜯겨나가 휑해진 구멍으로 성큼 치마타가 발을 들여놓았다. 망토와 옷 곳곳이 불에 타고 그슬리긴 했지만 사이사이로 보이는 피부는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고, 사건의 주모자들을 노려보는 그녀의 서슬 퍼런 두 눈엔 온 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차가운 분노가 어려 있었다.

 

뭣들 하고 있어! 얼른 처리하지 않고!”

 

깜짝 놀란 남자가 바닥에 나동그라지며, 벌벌 떠는 손으로 치마타를 가리켰다. 그 말을 신호로 가게 안에 있던 부하들이 저마다 손에 연장이나 각목 따위를 들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안쓰럽기 그지없구나. 그 작디작은 손안에 모든 것을 담고 싶어 끝없이 죄를 범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죄인들이여. 분수를 모르고 신과 다른 생명을 능멸한 죄, 오늘 이 자리에서 단죄하도록 하겠다.”

 

손가락 하나 꿈쩍 않았는데 그녀의 망토가 펄럭이나 싶더니, 이내 어마어마한 기세의 돌풍이 가게 안으로 들이닥쳤다. 어찌나 거센 바람이던지, 그 거구의 부하들조차 제자리에 멈춰 서 한 걸음도 떼지 못할 정도였다. 그와 함께 찰칵, 찰칵, 연쇄적으로 걸쇠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가게 안에 있던 모든 금고가 일제히 열려 젖혀졌다.

 

대장! 저기, 우리 돈이...!!!!”

 

남자가 숨겨놨던 돈들이, 금고 안에 들어 있던 대량의 증서들이 돌풍을 타고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허공에 흩날리는 수많은 종이는 이내 바람의 흐름 속에 한데 뭉쳐 하늘을 헤엄치는 사나운 용처럼 변하더니 그 기세를 몰아 제자리에 우뚝 멈춰선 거한들을 하나씩 덮치기 시작했다.

 

크악!!!”

 

뭐야 이건... 요괴?! 이런 건 듣지...흐억!?”

 

, 살려줘!!!”

 

아비규환이 된 어둠 속, 차례차례 몸뚱이들이 종이다발의 격류에 휩쓸려 날아가 천장, 벽 할 것 없이 건물 여기저기에 처박혔다. 커다란 덩치도 무기도 소용없었다. 누가 봐도 인간이 아닌 상대의 분위기에 완전히 압도당해 버린 사내들은 죄다 갓난아이가 된 마냥 다리를 덜덜 떨며 멍청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비명과 고함소리가 가득하던 실내가 어느새 잠잠해졌다. 구석에 틀어박혀 자기보다 한 척은 작은 소녀의 망토를 잡고 벌벌 떨던 남자가 슬며시 고개를 들고 안의 상황을 확인했다. 돈과 증서가 한데 뒤섞여 종잇장들이 사방을 뒤덮은 난장판 가운데 자신의 부하였던 이들이 정신을 잃고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부딪힐 때 충격으로 타박상을 좀 입기는 했어도 다들 생명에 지장은 없는 듯 했다. 하지만 남자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저 여자의 전력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만 먹으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목숨을 거둬가고도 남았을 것이란 사실을. 감당할 수 없는 상대를 건드렸다는 사실에 얼어붙은 남자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 어떻게 된 겁니까. 그냥 약해빠진 요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붙잡은 소녀의 망토를 붙잡고 흔들며 원망하듯 다그치는 남자, 그런 남자의 말에 소녀는 난처하다는 듯 볼만 긁적일 뿐이었다.

 

설마요~. 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고 했을 뿐, 만만하게 본 건 그쪽이라구요. 그보다 손 좀 놓아주실래요? 이래서야 도망치려야 도망칠 수가 없게 되잖아요.”

 

어딜 도망가! 난 당신이 해달라고 한 걸 다 했는데! 신이라며! 신이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아냐! , 거기! 난 아무 잘못 없어! 난 이 장사의 신이라는 녀석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끝까지 추레한 자로군. 자신의 죄를 반성할 줄 모르고 떠넘기기에 급급하다니. 그리고 당신, 당신이 이번 일에 개입하여 사건을 크게 만든 장본인이로군? 내 이름을 사칭해 사람들을 이용해 죄를 저지르도록 부추기다니, 이 중죄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야.”

 

아하-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요. 저는 어디까지나 컨설턴트로서 조언만 해드렸을 뿐이라고요? 일을 키운 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치마타가 일곱 빛깔 부적 다발을 그녀에게 날렸다. 낡은 망토를 꿰뚫은 부적이 연달아 벽에 박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지만, 어느 새 소녀는 그 위치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가차 없으시네요. 다른 분들은 살살 봐주셔 놓곤 저는 단칼에 죽일 생각이셨는지.”

 

그 간사한 목소리가 왠지 낯익어서 말이지. 역시 당신이었구나.”

 

허물을 벗듯 날렵하게 그녀의 공격을 피한 소녀의 뒤로 복슬복슬한 꼬리가 살랑거렸다. 바람결에 나부끼는 그녀의 단발머리 위론 인간의 것이 아닌 이질적인 동물의 귀가 쫑긋거리고 있었다. 치마타는 이 자의 얼굴을 잘 알고 있다. 아니, 모를 리 없다. 얼마 전까지 동업자 관계였던 자의 수하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쿠다마키 츠카사, 사람을 홀리고 마음대로 조종해먹는 이 간사한 여우가 바로 사건의 표면 뒤에서 또 다른 사건을 일으킨 또 다른 흑막의 정체였다.

 

그나저나 용케 알아채셨네요. 역병신이 저지른 일에 묻혀 안 들키고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덕분에 깜빡 속을 뻔 했어. 아까 전까지만 해도 그 자매의 단독 소행으로 착각했었으니까. 하지만 꼬리가 이렇게 길어져 버리면 아무래도 밟힐 수밖에 없는 법 아니겠어?”

 

~ 그렇군요. 역시 이 남자가 저지른 짓 때문에 들킨 거네요. 하아... 쓸모없기는.”

 

제법 머리를 굴렸어. 치안이 불안정해진 틈을 타 증서를 보관해준다고 기존 구매자들을 꼬드기고, 그 증서를 따로 빼돌려 시세니 뭐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꼬드겨 반값으로 팔아치운 거지? 나에게 들키지 않도록 상당히 신중하게 일을 진행했더군. 그리고 너희들은 어느 정도 증서를 팔아치웠을 때 증서의 값을 폭락시킬 셈이었어. 그걸 위해 택한 방법이 양조장의 모두를 죽이고 상품을 불태워 증서의 값어치를 0으로 만드는 것. 휴지조각이 된 증서를 굳이 찾아가려는 사람은 없을뿐더러 혹여 있더라도 싼값에 사들일 수 있으니 당신들을 막대한 이익을 건지는 셈이지. 그렇지 않아?”

 

사람을 죽이라고 한 적은 없지만요. 그저 치마타 님이 알아채지 못하게 시간을 벌라고 했더니, 멋대로 괘씸한 생각을 한 모양이더라고요. 저는 그 건과는 무관하답니다?”

 

도대체 넌 무슨 꿍꿍이가 있었던 거지? 이즈나마루의 명령? 그 녀석이 시키던가?”

 

그것도 맞춰 보시는 건 어떠신지.”

 

잘 들어. 난 여기 스무 고개나 하러 온 게 아니야. 신으로서 내 권역을 어지럽히는 너희들을 벌하러 온 거지. 문답무용으로 이 자리에서 널 처단하고 이즈나마루에게 캐물으러 갈 수도 있어.”

 

농담이 안 통하는 분은 재미없다고요~. 단도직입적으로 이즈나마루님은 관계없답니다. 하지만 연말을 맞아 잔치를 벌이려고 텐구들이 빚어놓은 술이 꽤 되거든요~. 그걸 내다 팔면 꽤 돈이 될 것 같아서, 기왕 버는 김에 이익을 더 많이 취하는 방법을 택한 것뿐이죠. 비즈니스 파트너를 잘못 만나 다 틀어져 버렸지만요?“

 

많은 이들이 재산과 생계를 잃을 뻔하고, 네 녀석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그 모든 게 겨우 네 알량한 이익을 위해서였다고? 참으로 더럽기 짝이 없는 마음이로구나.”

 

다 아시는 분이 왜 그러십니까, 치마타 님. 요괴는 원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법이라구요. ,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야말로 저 같은 약해빠진 요괴들이 먹고 살기 더 좋은 환경 아니겠어요? 그리고 몇 번이나 말하지만 저는 조언만 해줬을 뿐, 이후 벌어진 일은 모~두 여기 있는 인간의 선택이랍니다. 이쪽도 모처럼 세운 계획이 허사가 되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픈데요. 그거 아시나요, 치마타 님? 이 녀석들이 살인을 저지른 건 모~두 치마타님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서였다는 걸.”

 

낯빛 한번 바뀌지 않고 츠카사는 능글거리는 미소와 함께 아래 무릎 꿇은 남자를 가리켰다. 요괴인 줄 알았던 신, 그리고 신인 줄 알았던 요괴.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남자는 완전히 패닉에 빠져 대체 뭐가 무언지 상황을 이해하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저는 죄가 가벼우니 이 건은 이즈나마루님과 이야기 하시는 건 어떤지. , 이 인간은 더 이상 볼 일 없답니다. 치마타 님 마음대로 처리하셔도 좋아요.”

 

시끄럽다, 간사한 것. 네 녀석 또한 이 남자들과 다를 바 없는 녀석이란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아? 분명 네 계획에 방해만 안 되었어도 이들이 살인을 저지르건, 방화를 저지르건 넌 모른 체 했겠지. 앞서 말했던 강도 사건, 그것도 네놈들의 소행이지? 아니, 네 조언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나? 물론 이들 또한 용서받지 못할 악인들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몇 사람의 삶이 파괴되더라도 눈 하나 꿈쩍 안 할 녀석들이지. 하지만 계획적으로 그런 녀석들을 찾아 악한 마음을 부풀리고 부추기는 넌, 이들 보다 더 한 사악한 존재야.”

 

치마타가 두 죄인을 향해 성큼 다가갔다. 그녀의 손에 빛나는 구체가 생성되더니 불안한 진동음을 내며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히익...살려줘! 잘못했어! 아니, 잘못했습니다! 죗값은 치를 테니 제발, 목숨만은!!”

 

분명 당신이 목숨을 빼앗은 이들도 그렇게 빌었겠지. 그렇지 않아?”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잠깐, 치마타 님? 이러시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츠카사가 식은땀을 흘리며 치마타를 불러 세웠다. 표정은 능글맞은 미소 그대로였지만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녀의 이마엔 식은땀이 송골이 맺혀 있었다.

 

실례지만 치마타 님은 시장의 신님이 아니셨는지요. 그리고 시장에 외부의 힘이 개입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된 사항이라고 누누이 말씀하셨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그러니까~ 애초에 이 일에 치마타 님은 이 이상 개입해선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요. 이 일로 쫄딱 망한 사람도, 다치거나 죽은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그것은 모두 인간이 시장 상황을 조작하고 거기서 비롯된 탐욕으로 인해 생긴 결과. 즉 치마타 님이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던 보이지 않는 손의 뜻으로 이루어진 거라구요? 치마타 님의 노력으로 진실에 도달하신 것은 감축드릴 일이옵니다만, 이 이상 사건을 수습하려 나서시면 그 보이지 않는 손을 스스로 제지하는 꼴이 되는 게 아닌지요? 치마타 님은 본인 스스로 본인의 말을, 본인의 존재를 부정하시려는 겁니까?”

 

모든 것은 자유시장논리에 의한 것이라는 그럴싸한 궤변으로 상황을 무마하려는 츠카사. 분명 얼마 전까지의 치마타라면 그녀의 말에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달랐다. 더 이상 방관하지 않는다. 망설이지도 않는다. 이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기에, 무엇이 신의 역할인지 깨달았기에 그녀는 츠카사의 말에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대꾸했다.

 

틀렸어. 보이지 않는 손이란 건 추악한 욕심을 가진 자들이 시장을 조작하더라도 방치하는 그런 이기적인 손이 아니야. 이것은 올바르게 시장이 돌아갈 수 있도록 관리하는 동시에, 약자들을 배려하는 동감의 손이자, 자본주의가 병들고 썩어빠졌을 때 치료하는 정의의 손’, 그리고 실패한 시장에 내밀어주는 구원의 손이지. , 네 녀석 같은 녀석들을 단죄하는 것도,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도 보이지 않는 손이 해야 하는 일이자 이 내가 해야 하는 일. 그러니 오늘 밤, 이 나의 손으로 모든 것을 끝내고 네놈들을 무로 돌려놓겠어!”

 

... 제법 언변에 능숙해지셨군요. 제 완패입니다.”

 

으아아아아!!! 살려줘!!!!!!”

 

치마타가 팔을 앞으로 휘두르자 빛의 구체가 쏜살같이 둘을 향해 날아가 꽂혔다.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거센 충격파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금이 간 바닥 위에서 춤추듯 휘날린 흙먼지가 천천히 가라앉고 움푹 구멍이 파인 벽 아래 널브러진 두 그림자가 치마타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츠카사는 정통으로 광탄을 얻어맞고 뻗어버렸다. 헤롱헤롱한 표정으로 뻗어 있는 모습이 제대로 맞긴 했어도 위력이 그다지 세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남자는 광탄에 스치지조차 않았다. 당연히 인간의 몸으로 그런 걸 정통으로 맞으면 죽어버릴테니 치마타가 고의로 빗맞춘 것이었다. 그러나 가뜩이나 겁에 질려 있었던 탓에 충격파를 느낀 것만으로 남자는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기절해 버렸다. 사이좋게 기절한 두 악당을 내려다보며 치마타가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다 해도 내게 사적 제재를 할 권리는 없으니 이 정도로 봐주지. 얌전히 법의 심판을 받으며 반성하도록.”

 

기절한 악당들을 한데 모아 부적으로 묶고 있자니, 점점 주위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치마타의 말대로 사나에가 사람들을 이끌고 여기 온 모양이었다. 밖을 보니 어느새 화재는 진압되었는지 붉은 불빛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저 멀리 보랏빛 하늘이 점점 밝아지며 동이 터오는 것이 보였다. 화재 소동으로 일어난 사람들 말고 밤잠에서 일어난 사람들도 하나둘씩 소란이 벌어진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해, 어느덧 가게 앞은 가득 찬 군중의 무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포박을 마친 치마타가 창문 너머로 몰려든 사람들의 무리를 둘러보았다. 잠시 가만있던 그녀는 이내 무언가 생각 난 듯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밤 중 있었던 소동으로 지붕 여기저기 돌풍과 충격파가 만들어낸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중 가장 넓은 곳을 찾아 치마타가 지붕 위로 날아 올라갔다. 소란이 일어난 건물 위로 튀어나온 무지개빛 신의 존재에 모두의 이목이 일제히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인간들이여, 요괴들이여, 모두들 들어라!”

 

우렁찬 목소리가 차가운 새벽 공기를 뚫고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시장의 약점을 이용하여 질서를 어지럽히고 약자들을 착취한 죄인들이 지금 이 아래에 있다. , 텐큐 치마타는 앞으로 이와 같은 일을 용납하지도, 방관하지도 않을 것이다. 시장의 신으로서 언제 어디서나 정의롭고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놓인 모두를 보살피겠다! 더 이상 시장이 실패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 앞에서 또다시 시장을 모욕하는 이들이 생긴다면 그들이 부당하게 획득한 모든 것을 무로 돌려놓을 것이다! 다른 이들의 자유를 빼앗는 자유엔 혹독한 대가가 있을 것임을 지금 이 자리에서 경고하노라!”

 

새벽안개와 찬란한 아침햇살이 때맞춰 만들어낸 무지개가 치마타의 머리 위에 떠올라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했다. 그 신성하고 장엄한 모습에 모여든 사람들이 하나 둘 제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신의 이름 아래 모든 사건이 끝났음을 알리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치마타를 향한 수많은 이들의 신앙과 경외와 함께, 그렇게 마을을 떠들썩하게 달군 술 고갈 소동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Epilogue-

 

"그럼, 무사히 연말 시장을 열게 된 것을 축하하며~“

 

“”“건배~!!!”“”

 

모든 사건이 마무리 되고 맞이한 한 해의 마지막 날, 인간, 요괴, , 모두가 한데 모여들어 어느 때보다 성대하게 시장이 열렸다. 치마타의 기획대로 물건을 사고파는 것뿐만 아니라 경품 추첨, 공연 등 다양한 이벤트까지 곁들인 이 시장은 해가 넘어가는 것을 기념하여 늦은 밤까지도 행사가 끊임없이 이어 졌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 본격적으로 노상 식당과 주점들이 성황을 이루고 제각기 모인 참가자들이 뒤풀이를 시작하는 동안, 높은 곳에 마련된 행사의 주최석 에서도 성대한 연회가 벌어졌다. 대텐구, 모리야의 신들, 인간 마을의 케이네, 명련사의 히지리 등 이번 사건의 관계자 되는 사람들이 한데 모인 자리였다. 물론, 여기엔 사건 해결에 큰 공을 세운 치마타와 사나에도 함께였다.

 

그래도 어찌저찌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네요. 너무 일이 크게 벌어져서 어쩌나 했는데.”

 

면목 없습니다. 제 가르침이 부족하여 저희 식구가 흑심을 품고 악행을 저지르는 걸 사전에 막지 못하다니요. 다 제 불찰입니다.”

 

본인의 잘못이 아님에도 히지리는 마치 대역 죄인이 된 마냥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었다. 술 대신 준비한 차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죄책감에 안절부절 못하는 그녀의 어깨를 카나코가 툭툭 두드리며 격려해주었다.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자식을 키우다 보면 아무리 노력해도 한 번씩 어긋나는 때가 있지 않나. 주지 입으로 그 역병신 자매를 엄중히 벌한다 했었고, 또 명련사 쪽에서 이번 일로 피해 본 이들의 구제를 돕겠다고 했으니 그걸로 그대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보네.”

 

, 그녀의 죄가 크니 벌을 벌대로 내리고, 수행 강도를 올리는 것은 물론 피해 복구에도 앞장서도록 시킬 예정입니다. 악업을 쌓았으니 최소한 그 열배는 선업을 쌓도록 해야죠.”

 

그래, 그대가 그리 말한다면 우리도 믿고 안심할 수 있지. , 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되었다고 했지?”

 

그 물음에 케이네가 담담하게 답했다. 이 일로 어지간히 골머리를 썩였는지 그녀의 표정도 썩 좋지만은 않아 보였다.

 

사기, 절도도 모자라 살인과 방화까지 저질렀으니, 그 일행의 죄는 매우 무겁습니다. 주모자도 그 패거리고 전부 감옥에 가둬 놓았고, 취조와 재판은 해가 넘어가면 천천히 진행할 예정입니다. 남자가 벌어들인 부당 이득은 전부 환수하여 명련사와 마찬가지로 피해자들을 구제하는데 쓸 예정이고요.”

 

~ 이쪽도 면목 없네. 아무리 부하라고 해도 자유롭게 풀어 주자는 게 내 신조였는데 말이지, 제멋대로인 녀석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저지를 줄은 몰랐군.”

 

머쓱하게 웃으며 술잔을 쭉 들이켠 대텐구, 이즈나마루가 모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대텐구나 되는 요괴가 자존심을 굽히고 고개를 숙이는 일은 흔하지 않다. 그런 그녀의 정중한 사과는, 아무리 부하의 단독 소행이었다 해도 이번 사건에 그녀 또한 막중한 책임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여우는 버르장머리부터 다시 교육시켜야 하겠더군요. 잠시 못 본 사이 태도가 많이 거만해졌던데, 주인의 모습을 보고 배운 게 아닌지.”

 

하하, 이번 일로 네게 미움만 잔뜩 샀나 보군. 내 교육이 잘못 되었다고 인정하지. 그래서 책임지고 마을에 필요한 술을 우리 텐구들이 당분간 대주기로 하지 않았나.”

 

그건 부정하지 않을게요. 마침 운이 좋았어요. 텐구들이 넉넉하게 쟁여둔 술을 공급한 덕분에 마을의 재고 문제도 해결하고 시장도 무사히 열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넉살 좋게 대응하는 메구무의 말에 퉁명스럽게 답하는 치마타를 보며 이번엔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인 카나코와 스와코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텐큐 공, 며칠 사이에 꽤 의젓해졌군. 신앙의 힘인가? 날이 갈수록 격이 올라가는 게 느껴져.”

 

그러게. 얼마 전까지의 모습은 지금에 비하면 완전 사춘기였지. 어른 다 됐구만?”

 

이번에 치마타 님 활약이 엄청났답니다. 뭔가 팟- 하고 샥샥 처리해서 빰- 하고 증거를 찾아내서 쨘- 하고 범인을 잡아내시는데, 진짜 탐정 같았다니까요! 엄청났어요!”

 

...그래. 뭔가 굉장했다는 건 알겠구나.”

 

후후, 사나에 양의 도움도 컸답니다. 사나에 양의 따끔한 조언과 서포트가 없었으면 전 아마 아무 것도 못했을 거에요.”

 

조언이라~ 그런 걸 했었던가요. , 잉여신님이라고 했던 거요? 역시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고, 따끔한 독설이 효과를 본 거네요!”

 

“... 그렇다고 해두죠, 일단은.”

 

어찌 되었건 잘 된 일이야. 신이란 게 원래 죄다 고리타분한 녀석들뿐이라, 마음을 고쳐먹고 변화하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거든. 설령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더라도 달라질 결심을 하는 녀석들만이 지금보다 더 높은 자리로 나아갈 수 있지. 넌 그 시련을 통과한 셈이고. 축하해.”

 

호오, 그 말은 경험자의 조언인가, 스와코? 남 일 같지 않은 이야기로군.”

 

, 시끄러워.”

 

이번 일로 전 무엇이 올바른 일인지, 무엇이 제가 해야 되는 일인지 명확히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저는 너무 안일했어요. 시장의 신이니 사람들이 거래를 할 수 있도록 판을 마련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죠. 성스러운 시장에 결코 누구도 개입해선 안 된다고, 설령 일이 잘못 돌아가더라도 그건 자연스러운 시장의 선택일 뿐이라고요. 하지만 이번 일로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방관은 시장을 실패하게 만든 다는 것을.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면 항상 정의롭고 공정하게 시장을 이끌어주는 다른 손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을요.”

 

그것이 텐큐 공이 깨달은 교훈이란 말이군. 나로선 그게 옳은 선택인지 아닌지 확신할 방법은 없어. 하지만 그대가 그렇게 느끼고 결심했다면, 같은 신으로서 그대의 앞길을 응원하도록 하지.”

 

좋아, 그럼 깨달음을 얻었으니 새벽 댓바람부터 회의 하자고 소리치는 일도 이젠 없겠지?”

 

스와코님! 이런 진지한 분위기에 정말...”

 

일동의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연회장 안을 떠들썩하게 채우는 가운데, 메구무가 손뼉을 치며 모두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 . 이제 일에 관한 이야기는 잊고 슬슬 한 번 더 잔을 들지 않겠나, 모두들. 곧 올해의 마지막 이벤트가 시작된다네.”

 

각자 잔을 가득 채우게 한 메구무가 야외로 통하는 문을 열고 모두를 탁 트인 전망대로 안내했다. 넓은 시장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일동이 모여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아래에 모인 군중들이 입을 모아 소리치기 시작했다.

 

“10!”

 

나무아미타불, 부디 부처님의 인도 아래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이 없기를.”

 

“9!”

 

모쪼록 마을 일의 해결에 도움을 주신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8!”

 

연말에 이렇게 고생했으니 연초엔 푹 쉬어도 되겠지?”

 

“7!”

 

어림없는 소리. 곧바로 바빠질 테니 각오하고 있으라고.”

 

“6!”

 

여러모로 손해가 큰 한 해였군. 내년엔 잘 되길 바랄 수밖에.”

 

“5!”

 

, 치마타 님. 고생 많으셨어요. 전에 했던 말, 정정할게요. 치마타 님은 능력 있고 멋있는 분이세요, 정말로.” (4!)

 

이쪽이야 말로 고마워, 사나에 양. 넌 최고로 우수한 조수였어.” (3!)

 

후후, 새삼스럽지만 내년에도 잘 부탁드릴게요.” (2!)

 

그래, 나도 잘 부탁 해. 언제든 같은 위기가 생기면 이번엔 망설이지 않고 도와줄테니.” (1!)

 

“”새해 축하드립니다!!!!“”

 

사나에와 치마타가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누는 동시에 아래쪽에서 거대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곧바로 펑 펑 발사된 폭죽이 형형색색 아름다운 불꽃으로 밤하늘을 수놓았다.

 

화려한 정초 밤하늘 아래, 경쾌하게 잔을 맞댄 둘은 새해를 축하하는 첫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인간이 빚은 것과는 또 다른 고풍스럽고 그윽한 향이 목을 타고 넘어가며 지친 몸과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것이 느껴졌다. 한 해를 기분 좋게 시작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명주, 하지만 이 한 잔이 사람의 생명보다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한 잔을 맛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희생시켰는가. 덕분에 이 술은 가격이 없으면서 동시에 값을 매길 수 없는 그런 물건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렇게 술을 잔뜩 쌓아두고 벌컥벌컥 마시는 행위에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술이 인간의 가치보다 높아진 것인가, 인간이 술보다 가치가 낮아진 것인가. 어찌하여 인간은 스스로의 가치를 낮추면서까지 이 한 잔에 집착한 것인가.

 

이미 잃어버린 생명은 되돌리지 못 하는 법. 사건은 해결했지만 뒷맛이 쓰구나. 마치 이 술처럼...’

 

불꽃 그림자로 얼굴이 가려진 틈에서 치마타는 잔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동시에 그녀는 생각했다. 인간들의 시장엔 아직도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변화의 선두에 자신이 서서 인간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저 아래 시장의 축복 아래 모든 근심 걱정을 잊고 환호하는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치마타는 새로운 각오와 함께 남은 술을 들이켰다.

 

깨달음을 얻고 강해진 신의 한 신의 비장한 각오와 함께, 세상 그 어떤 기준으로도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특별한 정월 초하루가 이렇게 막을 올렸다.

 

-Epilogue 2-

 

해가 넘어가기 조금 전, 산 아래에서 한창 장터와 연회가 떠들썩하고 벌어지고 있는 동안 마을 구석에 마련된 임시 감옥은 시장과 정반대로 우중충하고 무겁기 짝이 없는 분위기였다.

 

마구간을 개조하여 철창살과 튼튼한 나무격자로 막아둔 감옥 안, 사람이 겨우 얼어 죽지 않을 정도로 지푸라기를 적당히 채워 넣기만 한 그곳은 빈말로도 사람이 지내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감시하는 사람들도 딱딱한 나무의자와 모닥불 하나로 불편하게 밤을 지새워야 하는 곳인데 하물며 그 안에서 추위와 사투를 벌여야 하는 죄인들은 어떻겠는가. 그런 환경을 이유로, 감옥 안은 서로 내보내 달라고 아우성인 죄수들과 잔뜩 성이 난 간수들 사이 말다툼으로 저녁 내내 훤훤효효 하였다.

 

제발 여기서 꺼내줘!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게!”

 

그래! 꿍쳐둔 돈이 있으니까! 우린 저 새끼가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라고! 사람들을 털고 양조장 녀석들을 죽이라고 지시한 건 다 저 새끼였다고!”

 

시끄러워, 다 똑같은 새끼들이... 네놈들 감시하느라 새해 첫 날부터 축제도 못 가고 이게 뭐냐, ? 얌전히 닥치고 있지 않으면 거기 깔려 있는 지푸라기도 싹 다 치워버릴 줄 알아.”

 

어이, 너무 그러지 말고 우리끼리 한 잔 하는 게 어때. 어차피 탈출하지도 못 할 거고, 제 풀에 지치면 알아서 닥치겠지.”

 

오오...그럴까? 하루 종일 이 녀석들 상대하느라 마침 따끈한 뭔가 마시면서 쉬고 싶어졌는데,좋지.”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간수들이 나름대로 평화로운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제풀에 지친 죄수들도 하나 둘 나가 떨어져 말없이 탄식하는 한숨 소리나 내뱉는 동안 암상인 타츠키는 감방 구석에 미동도 없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다른 죄수들과 달리 그는 자기 잘못을 부인하거나 선처를 사정하는 일 없이 얌전했다. 요괴에게 홀린 탓일까, 아니면 신의 역린을 건드려 목숨을 빼앗길 뻔한 탓일까, 퀭한 눈을 부릅뜨고 멍하니 입을 벌린 그의 얼굴은 몰라보게 수척해진 상태로 누가 봐도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반성하고 후회하고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그런 정상적인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된 모양이었다.

 

살랑살랑, 남자의 귓가에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한겨울 차가운 쇠창살을 타고 넘어왔다고 생각되지 않는 포근한 온기였다. 처음에 남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 내일 추방당하거나 사형 당할지도 모르는 판에, 얼마 전 있었던 기괴한 일로 넋이 나간 판에 그깟 따듯한 바람이 대수일까. 귓가를 간질이는 바람에도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곤소곤, 속닥속닥, 그러자 이번엔 귓가에 누군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움츠러든 어깨가 벌떡 펴지며 꼼짝 않고 정면만 응시하던 시선이 도르륵도르륵 좌우로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감옥 문은 굳건히 잠겨 있어 누군가 몰래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당연히 주위에 사람의 모습이 보일 리도 만무했다. 하지만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점점 더 크게, 또렷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남자는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다. 그때와 똑같았다. 길바닥에 앉아 하루하루 독점한 증서로 수수료나 떼먹고 있던 자기에게 어느 날 갑자기 달콤한 속삭임이 찾아 왔을 때랑.

 

[불쌍해라. 이 추위 속에서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고 푼돈을 벌기 위해 이렇게 고생하시다니. 지금도 저기 사람들은 폭리를 취해서 편하게 찍어낸 상품으로 떼돈을 벌어들이고 있다구요? 나쁜 짓으로 배를 불리는 저 녀석들이 얄밉죠? 혼내주고 싶죠? 후후... 저 사람들을 혼내주면서 큰돈을 벌어들일 방법이 있는데, 한 번 해보시지 않으실래요? 이건~ 고생하는 당신에게만 특..히 말씀드리는 귀중한 찬스랍니다? 제 말만 들으면 당신은 부자가 될 수 있어요. ...제 말대로 한다면 말이죠~.]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났다. 장사의 신이라 자신을 속이고 홀린 사악한 여우 요괴 녀석. 무슨 이유에선지 몰라도 그 녀석이 지금 자신을 또다시 꼬드기려 하고 있었다.

 

...저리 가! 이 요괴! 요괴 녀석! 난 네 녀석에게 속지 않아... 속지 않을 거라고!!!”

 

닥치지 못해! 뭐가 잘났다고 시끄럽게 난리야!!”

 

놔 둬. 저 새끼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제정신이었으면 진작 여기 빵에 처박히기 전에 한 대 패버렸을 텐데. ...어쩌다 저런 놈을 믿고 따라가지곤.”

 

죄수들이 성을 내자 그 목소리는 스르륵 사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죄수들이 조용해지자 금방 다시 재잘거리는 속삭임이 들리기 시작했다.

 

[불쌍하네요. 안타까워요. 순간의 실수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순식간에 만인의 적이 되어버렸네요. 억울하지 않나요? 자신은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래요, 나쁜 건 당신이 아니에요. 나쁜 건 당신을 속인 요괴, 당신을 방해한 신님, 그리고 모자란 부하들... 당신은 죄가 없어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죠. 그쵸?]

 

귀를 틀어막아도 들리는 매혹적인 목소리. 고막을 통과하여 뇌에 직접 단어를 하나하나 심는 듯 한 그녀의 목소리는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가 없었다.

 

.... 나는 잘못이 없어... 나쁜 건 다 너희들이야. 너희들만 없었어도 나는... 적당히 벌어서...적당히 행복하게... ...”

 

[하지만 모두들 당신이 나쁘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수십 명의 목숨을 빼앗고 물건을 도둑질한 중죄인이라고 여기고 있어요. 어떡하죠? 사람들은 당신의 말 따윈 귀담아 듣지 않을거에요. 아무리 항변하고, 저항하고, 변호해도, 모두들 침뱉고 무시할 거에요. 날이 밝으면 당신은 저잣거리에 목이 매달리겠죠... 어쩌면 요괴들이 득실거리는 숲으로 추방당할지도 모르겠네요. 아무 죄 없는 당신을 죄인으로 몰아서, 원한 가득한 마을 사람들이 당신을 죽여버릴 거에요. 딱해라~ 불쌍해라~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죠?]

 

싫어... 왜 내가 죽어야 돼? 나는 아무 잘못 없는데! 왜 내가... 살해당하고 싶지 않아! 죄인이 되고 싶지 않아!”

 

[제가 알려드릴게요. 죄인이 되지 않고 여기서 빠져 나가는 방법을. 당신은 제 말을 잘 들어주는 착한 분이니까, 당신에게만 알려드리는 거랍니다? ...]

 

정말이야? 이번엔 속이는 게 아닌 거지? 날 꺼내주겠다고? 여기서 나갈 수 있어?”

 

여우의 꼬드김은 그때와 같이 남자의 나약해진 혼의 틈새에 파고들어 그의 판단력을 마비시킨다. 남자가 원하는 것, 남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골라 , 미끼로 물고기를 유혹하는 낚시꾼처럼 천천히 남자를 자신의 페이스로 끌고 온다. 남자는 자신이 나름 저항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깊숙이 여우에게 이끌릴 뿐이었다. 그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럼요. 나가는 방법은 물론 있죠. 그 조건으로 육신을 포기해야 하지만요?]

 

...? 그게...무슨 소리야?”

 

[간단하잖아요? 남들이 당신을 처형하기 전에 스스로 자결해버리면 돼요. 그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히지 않아도 돼요. 억울하게 살해당할 필요도 없어요. 명예롭게, 자신의 목숨을 자기가 마무리 짓는 거랍니다. 그러면 다음날 당신의 시체를 본 모두가 후회할 거예요. 결백한 사람을 가뒀구나, 우리가 죄 없는 사람을 죽였구나. 모두 후회와 비탄 속에 새해를 맞이하겠죠. 당신을 괴롭힌 모두에게 복수하고 당신은 결백해지는 방법이랍니다. 물론... 육신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진 당신의 영혼과 함께 말이죠. 후후...]

 

제정신이야? 나보고 지금... 자살 하라는 거야?”

 

[어차피 가만있어도 당신은 죽는 걸요. 죄인으로서 마지막까지 자유를 구속당하고 살해당해 지옥에 떨어지느냐, 스스로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동시에 복수를 달성한다, 어느 쪽이 더 좋은 선택지인지는 뻔하지 않나요? ...제 말대로 해서 언제 안 좋게 된 적 있었던가요? 모든 게 다 잘 될 거랍니다.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제 말...믿으시죠? 마침 저 쇠창살, 꽤 높은 곳에 있네요. 당신이 사들인 이 비싼 옷도 꽤 튼튼해 보이고요.]

 

이를 딱딱 부딪치며 남자가 흔들리는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머리보다 조금 위에 있는 조그마한 쇠창살. 손이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었지만 사람이 통과하기엔 너무나 작았고, 손이 통과하기엔 적당히 큰 사이즈였다. 이번에 남자는 자신의 옷을 더듬거리며 매만졌다. 자신이 벌어들인 돈으로 산 최고급 비단 옷. 이리저리 구르며 잔뜩 더러워지긴 했지만 비싼 옷이라 그런지 그 난리통을 겪었음에도 실오라기 하나 나간 흔적 없이 깨끗했다. 이렇게 튼튼한 옷이라면 아마 사람 한 명 정도의 체중은 거뜬히 버티고도 남을 것이다.

 

[당신이라면 할 수 있어요. , 어서... 모두에게 당신의 결백을 보여주세요~]

 

남자가 벌벌 떠는 손으로 천천히 겉옷을 벗어 쇠창살에 가져갔다. 쇠창살에 옷을 단단히 동여매고, 머리보다 높은 위치에 고리를 만든다. 머리를 걸었을 때 바닥에 발이 닿지 않도록. 그 과정을 실시하는 내내 귓가의 목소리는 쉴 새 없이 그의 행동을 응원하고 있었다.

 

[화이팅, 앞으로 조금만 더. 마침 저기 밟고 서기 좋은 짚단이 있네요. 한 걸음만 더. 저와 함께 자유로워지도록 해요. 죄 없는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요. 당신을 욕보인 모두에게 복수를...!]

 

짚단을 아래에 두고 이를 밟고선 남자가 멍한 표정으로 고리를 목에 걸었다. 더 이상 그의 표정에선 공포도, 절망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남은 것은 믿음, 그리고 안도. 귓가의 목소리가 자신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해줄 것이라고, 그에게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어느새 남자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요괴든 신이든 상관없다. 그 목소리는 언제나 옳았으니까.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 주었으니까.

 

[하나~~~!]

 

덜컹!

 

! ! !

 

짚단을 걷어찬 남자의 몸이 돌벽에 세차게 부딪히는 동시에 밖에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성대하게 울려 퍼졌다. 체중이 실린 쇠창살이 격렬히 덜컹거리고, 매달린 육신이 줄이 엉킨 마리오네트처럼 뒤틀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불꽃이 수놓은 밤하늘 아래 펼쳐진 죽음의 왈츠, 남자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보인 끔찍하고도 아름다운 춤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다. 마침내 불꽃놀이가 끝나고 다시 밤하늘에 정적이 왔을 때, 그의 감방 안엔 힘없이 늘어져 끼익 끼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추레한 고기 덩어리만이 외롭게 남아 있었다.

 

-----------------------------------------------------------------------------------------------------

 

, 그럼 불꽃놀이도 끝났으니 다시 안에 들어가서 마시도록 할까. 역시 밖에 오래 있기엔 너무 추운 날씨야.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사실 난 불꽃놀이도 꼭 나와서 봐야 했나 의문이었어...”

 

, 신님들조차 그리 말하니 어쩔 수 없군. 다들 안으로 들어가지. 아직 다 마시지 못한 술이 이만큼이나 쌓여있네. 오늘은 밤을 새워서라도 다 마셔야하지 않겠나! 이제 본격적으로 즐겨보도록... ...?”

 

술병을 들고 즐겁게 소리치는 메구무에게 텐구 한 명이 다가와 조심스레 그녀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그 말을 전해들은 메구무의 표정이 잠깐 심각해졌으나, 그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으로 자리에 있던 누구도 그 표정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이런, 갑자기 부하 녀석이 중요한 보고가 있다는군. 잠깐 나는 자리를 비워야겠어. 미안하지만 나 없이 즐겨주겠나. ,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필요한 게 있으면 다른 부하 녀석들에게 얼마든지 말하고.”

 

일 얘기를 하지 말자고 한 건 당신이면서, 일거리가 생기니 제일 먼저 반응하는군요?”

 

사회생활이란 게 원래 그런 법 아니겠어, 치마타? 이번 일에 대해 반성하고 뒤처리하기 위해 이쪽도 무진장 애쓰고 있다고. ,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대는 연회를 좀 더 즐겨주길 바래. 이번 일로 제일 많은 고생을 한 사람에게 포상이 없어서 쓰나.”

 

“... 정말 반성하고 있는 거 맞죠?”

 

그럼~. 하하하, 아무렴 내가 또 그대를 속이려고? 아무튼 서둘러 다녀오지.”

 

다정하게 치마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격려의 말을 건넨 뒤 메구무는 건물 밖으로 나가 사라졌다. 치마타는 산 위로 날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석연치 않은 듯 응시하다, 그녀의 형상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모두가 기다리는 술자리로 돌아갔다.

 

------------------------------------------------------------------------------------------------

대텐구 이즈나마루의 집무실, 보고를 받고 막 도착한 메구무는 주위의 텐구들을 물린 뒤 홀로 집무실에 들어섰다. 흐릿한 촛불 몇 개가 힘겹게 안을 밝히고 있는 집무실은 한쪽이 긴 커튼으로 막혀 있었고, 커튼 뒤에선 정체모를 역겨운 냄새가 흘러나와 방 안을 메우고 있었다. 방의 주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지만 말이다.

 

그래, 왔느냐.”

 

“... 죄송합니다, 이즈나마루님.”

 

스르륵 기둥을 타고 하얀 그림자가 움직이나 싶더니 이내 소녀의 형상으로 변해 메구무 앞에 무릎 꿇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츠카사의 꼬리는 돌돌 말려 있었고 귀 또한 기가 죽은 듯 축 처져 있었다. 큰 죄를 저질러 어쩔 줄 모르겠다는 태도로 사죄하는 츠카사를 내려다보며 메구무가 입을 열었다.

 

일어나거라. 넌 최선을 다했다. , 인간 따위를 믿고 협조를 맡긴 게 잘못된 판단이었지. 그래, 마무리는 제대로 했느냐?”

 

쫑긋 귀를 세우며 고개를 든 츠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확실히 숨통이 끊어진 걸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

 

잘했다. 취조를 받다가 쓸데없는 말을 내뱉어서야 곤란하지. , 싸구려 인생에 걸맞는 싸구려 최후였으니 나름 괜찮지 않은가. 한심한지고. 동족들을 내다 팔면서까지 돈을 원했으면서, 결국 손에 쥔 돈은 육문전이 전부로군. 그런 녀석한테도 노잣돈을 쥐어줄 이가 있다면 말이지.”

 

에고~ 중간까진 전-부 이즈나마루님 말씀대로 잘 되었는데 말이죠. 하필 슬슬 이쪽에서 술을 꺼내오려는 타이밍에 그런 짓을 저질러 버려서... ...”

 

말하지 않아도 안다. 이번 일로 얼마나 손해가 컸는지 아느냐. 사죄의 대가로 팔아먹기 위해 쟁여둔 술을 전부 무상으로 헌납해버렸으니. 애초에 시작은 인간들이 제멋대로 벌인 일인데, 결국 우리 텐구들이 인간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해준 꼴이 되어 버렸군. 이 손해를 메우려면 더 큰 사업을 벌일 필요가 있겠어.”

 

다음 사업이라면~ 괜찮은 물주를 알아볼까요?”

 

어딜. 너도 당분간 근신이다. 표면상 네 책임으로 되어 있으니 그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나. 걱정하지 말도록. 때가 되면 또다시 네게 일을 맡기도록 할 테니.”

 

... 알겠습니다. 그때를 기다리고 있지요.”

 

시무룩해진 츠카사를 지나쳐 메구무가 뚜벅뚜벅 커튼이 처진 곳으로 걸어갔다. 잽싸게 일어난 츠카사가 그녀의 뒤에 촐싹 달라붙으며 물었다.

 

, 치마타 님과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저 때문에 독기를 제대로 품으신 것 같던데요?”

 

그것도 곤란하게 되었지. 반쪽자리 신이었던 녀석이 이번 일로 제대로 성장해 버렸어. 앞으론 녀석의 간섭이 더 심해질 거다. 더 이상 편법이나 꼼수를 쓰려다간 이번에야말로 그 녀석에게 제대로 들통 나 곤욕을 치르게 될 걸.”

 

건방지네요. 누구 덕분에 재기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고.”

 

결코 노렸던 건 아닌데 말이다. 자꾸 이쪽의 계획이 녀석을 키워주게 되더군. 이용해먹기 좋은 만만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엄청난 녀석을 끌어들이고 말았어.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메구무가 커튼을 휙 옆으로 젖혔다. 커튼 아래 감춰진 물건들이 드러나며 역겨운 냄새가 한층 더 강하게 주변으로 퍼졌다. 얼마나 그 냄새가 독하던지, 코가 예민한 츠카사가 코를 틀어막고 인상을 찌푸릴 정도였다.

 

캐캥!? 이건 무슨 냄새인가요, 이즈나마루님!”

 

넓은 테이블 위에 즐비하게 놓인 플라스크, 비이커, 그리고 쇠로 된 용기들. 그 중심엔 기다란 철탑이 격렬히 불타오르는 램프 위에서 쉭쉭 김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철탑에서 삐져나온 가느다란 관들이, 또다시 수십 개의 관, 플라스크, 용기들을 거치며 저마다 다른 색깔의 액체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참기 힘들 정도로 역겨운 냄새는 바로 그 흘러나온 액체들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우리의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다. 아직까지 이걸 장사에 활용할 생각을 한 녀석들은 이 환상향에 거의 없겠지. 있더라도 이걸 상품으로 가공하진 못할 것이다.”

 

이 냄새나는 액체가 사업 아이템이라구요?”

 

씨익 웃으며 메구무가 작은 병 하나를 집어 들고 츠카사에게 보여주었다. 저기 흘러나오는 투명한 빛깔의 액체들과 다른, 시커멓고 걸쭉한 기분 나쁜 액체였다.

 

그래, 최근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온 일명 검은 물이지. 아둔한 녀석들은 불길한 것이라 여겨 눈길조차 안 줬지만, 나는 알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환상향에 새 패러다임을 불러일으킬 새로운 상품의 원료라는 걸. 이것만 있으면 장사의 신 나부랭이가 간섭을 하든 말든 상관없어. 얼마든지 간섭해보라지. 그녀석의 눈앞에서 당당하게 부를 긁어 모아주마. 그리고 거슬리는 신이나 다른 요괴 녀석들을 제치고 우리 텐구가 이 일대의 패권을 도로 독차지 하는 거지! 하하하하하!!”

 

오오~ 과연 이즈나마루님이시네요~. 신에게 굴하지 않는 당당하신 모습,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 치마타여. 벌써부터 궁금해서 견디지 못하겠구나. 그대의 손과 나의 손, 어느 쪽이 시장을 조종하는 손이 될지. 그 결과를 어서 빨리 보고 싶어지는군!”

 

시장을 둘러싼 서로 상반된 두 각오가 조용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시장을 조종해 이익을 취하려는 자, 그런 이들을 막고 약자들을 보호하려는 자, 끊임없이 힘이 충돌하는 환상향에서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그 결과는 설령 신이라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욕, 과시욕, 소비욕, 독점욕 ... 수많은 욕심을 연료 삼아, 오늘도 시장은 그 열기를 더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