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팬픽

몽중살의 ~ Does 'FURIES' Dream of Revenge?

교토대동방학과 2022. 5. 12. 19:27

https://youtu.be/rVUbfAA30Gc

 

유폐 새틀라이트의 보컬 어레인지, 胸の中で誰かが 를 모티브로 쓴 팬픽입니다.

 

-1-

 

사방이 순백으로 둘러싸인 텅 빈 공간.사방을 가득 메운 백색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다. 느껴지지 않는다. 다른 어떠한 형태도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무()의 공간. 나는 그 한가운데 홀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이곳은 나의 꿈 속. 몇 년, 아니 몇 십 년일까. 어쩌면 몇 백 몇 천 년 동안 계속 되어 온 걸지도 모른다. 얼마나 반복되어 왔는지조차 잊어버렸을 정도로 오래된 같은 내용의 꿈. 오늘도 변함없이 나는 똑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꿈을 꾸고 있다.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저 끝없이 반복되는 백색 공간 속에서 걷거나, 뛰거나, 눕거나... 혹은 생각에 잠기는 것 뿐. 어떤 외부의 자극도 없는 이 공간 안에선 나의 몸에서 일어나는 생리현상이 곧 세상의 현상 전부요, 나의 의지가 곧 이 세상의 의지와도 같다. 내가 곧 세상이고 세상이 곧 나와도 같나니, 나의 몸 구석구석까지 흐르는 뜨거운 혈액이 이 세상에 열기를 더하고 고동치는 심장박동 소리가 정적을 분노의 함성소리로 바꾸어놓는다. 무형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세상과 함께 나의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감정은 증오, 원망, 살의... 어렴풋이 떠오르는 단 하나의 이름과 함께 점점 고조된 나의 감정은 마침내 그 증오스럽기 그지없는 불구대천의 이름을 부르짖게 만들었다.

 

......... 상아!!!!!!!!!!!!! 그 저주스러운 이름이여!! 사지를 찢어 그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썩어가는 그 몸을 온갖 미물들에게 먹이로 던져 주어 두어도 시원찮을 그대여!! 오늘도 그대는 그 증오스러운 면상을 뻔뻔히 이 세상에 드러내고 지긋지긋한 명줄을 이어가고 있구나... 보고 있나, 상아여!! 내 그대를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찢어 죽이고 말겠다! 나의 몸과 네 년의 몸, 어느 한 쪽이 이 세상에서 핏방울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질 때까지, 이 세상 끝까지 네 년을 쫓아 갈기갈기 찢고 짓이겨 놓으리라! 상아!!!!!!!”

 

한 번 시작된 저주의 말은 잠에서 깰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그녀를 증오하고 저주하고, 또 죽여 버리고 싶은 건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분노를 이성으로 억누르고 냉정해지기엔 타오르는 순수한 감정의 격류가 지나치게 강력할뿐더러, 무엇보다 살의를 품은 이유 따위 진즉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이미 잊어버린 이유 따위에 연연할 필요가 있을까. 내 마음이, 나를 둘러싼 이 세상이 그녀를 죽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 아닐까. 아아, 그래. 다른 생각 따위 할 필요 없는 것이야. 나는 그저 마음이 외치는 대로 그녀를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 ... 것이냐? ......? ......”

 

처음으로 들려온,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목소리에 일순 저주의 말을 쏟아내던 입이, 타오르던 감정이, 증오로 들끓던 사고가 정지했다. 오직 나만이 존재하던 이 세계에 처음으로 끼어든 노이즈에 내 모든 의식이 그곳에 집중되었다. 그 때문일까. 작은 잡음에 불과했던 그 불순물은 순식간에 그 존재가 커져, 이내 나의 세계였던 곳을 그것의 울림으로 가득 메워버렸다. 마치 원래부터 그것의 세계였던 것처럼, 내가 불순물이었던 것처럼.

 

잊은 것이냐? 전부 잊어버린 것이냐? 잊은 것이냐? 전부 잊어버린 것이냐? 잊은 것이냐? 전부 잊어버린 것이냐? 잊은 것이냐? 전부 잊어버린 것이냐? 잊은 것이냐? 전부 잊어버린 것이냐? 잊은 것이냐? 전부 잊어버린 것이냐? 잊은 것이냐? 전부 잊어버린 것이냐? 잊은 것이냐? 전부 잊어버린 것이냐? 잊은 것이냐? 전부 잊어버린 것이냐? 잊은 것이냐? 전부 잊어버린 것이냐?”

 

귓전에서 반복되던 울림이 내 안에서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구더기에게 살을 파먹히는 것처럼 불쾌한 감각이 말단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머릿속을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에? 나는 무엇을 역겨워 하고 있는 거지?

 

흐윽...!!”

 

갑작스레 전신을 급습한 격통에 나는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피부를 도려내고 그 자리에 소금을 문지르는 듯 한 고통이, 내장마다 바늘을 천 개씩 쑤셔 박는 듯한 고통이, 젖은 종이로 숨통을 천천히 죄는 듯 한 고통이, 사지를 매달아 찢고 머리에 산을 붓는 듯 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을 전부 맛보는 것 같은 감각에 나는 탈피에 실패한 애벌레처럼 고꾸라져 꿈틀거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공간에 금이 가고 그 틈으로 칠흑빛 어둠이 안개처럼 천천히 퍼져 들어온다. 나의 세계를 잠식해나가는 검은 안개,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어떤 형체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저것이 불순물, 아니 이제 이 세계의 새로운 주인인가. 그것이 대담하게도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미 고통 속에 흐려질 대로 흐려진 내 시야는 그것의 정체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네가 채 이루지 못하고 잊어버린 숙원, 내가 이루어 주겠다.”

 

버둥거리는 내 귓가에 나지막이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나의 의식은 암전되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내가 있던 곳은 잠을 청하기 위해 누웠던 침대 위로, 몸을 쥐어짜는 고통도 사방에서 울리던 목소리도 모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 채였다.

 

악몽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했던 감각. 그것은 꿈속에서 내가 만들어낸 환상 같은 것이 아닌, 실재하는 누군가였다. 그것도 나를 밀어내고 내 순화된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정도로 강력한 존재.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입술이 절로 씰룩거리며 엷은 미소를 자아냈다. 나를 건드리는 것이면 몰라도, 나를 대신해 내 숙원을 이루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다. 상아를 죽이는 건 오직 여야만 하니까. 얼마나 강한 녀석이든 내 원한의 대상을 가로채는 녀석에겐 죽음뿐. 일그러진 증오가 나를 또다시 이끈다. 새로운 경유지 나의 마음을 가로막는 장해물이 있는 곳으로.

-2-

새하얀 솜털로 뒤덮인 양을 형상화 한 것 같은 구름방석 위에 도레미 스위트는 팔다리를 쭉 펴고 널브러져 느긋한 표정으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를 둘러싼 건 형형색색의 방울. 기포라 하기엔 끈적하게 늘어지는 것이 애매하고, 슬라임이나 액체 방울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가벼운 기묘한 형태의 방울들은 하나하나 제각기 다른 풍경을 담고 있었다.

 

민트빛으로 축축 늘어지는 방울 안에선 한 소녀가 그녀로부터 등돌린 연인을 붙잡고 엉엉 우는 모습이 보인다. 분홍빛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방울 안에선 추한 몰골의 남자가 양 옆에 미녀를 끼고 헤벌레 하는 모습이 보이며, 초록색으로 뽁 뽁 소리를 내며 튀어오르는 방울 안에선 30년 전 죽은 아내를 만나 기뻐하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각 방울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의 꿈. 마치 영사기처럼 사람들의 꿈을 실시간으로 재생하며 방울은 꿈 속 분위기와 감정에 맞춰 시시각각 변화해간다.

 

꿈 속 세계의 관리인, 도레미 스위트의 역할은 이렇게 다른 이들의 꿈을 모니터링 하며 꿈에서 생긴 일로 하여금 현실에 부정적인 영향이 없도록 관리하는 것. 여기엔 적당한 스토리의 꿈을 지어내 보여주는 것, 악몽을 먹어치우는 것, 그리고 꿈 속 세계와 현실 세계가 뒤섞이는 것의 방지 등의 작업이 포함된다.

 

꿈을 지어내거나 먹는 일은 오랜 세월 이 일을 해온 도레미에게 있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인간이든 요괴든 욕망은 솔직하기에 행복한 꿈이야 기억의 파편 속에서 적당한 내용을 찾아 짜 맞추면 되는 일이고, 악몽을 먹는 것은 인간으로 치면 식사와 다를 바 없으니까. 그녀에게 있어 진짜 골칫거리는 최근 들어 빈번하게 발생하는 꿈과 현실 세계의 충돌 건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빙의가 무슨 스포츠라도 되는 마냥 유행처럼 번졌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빙의를 통해 한 육체에 두 개의 혼이 깃들면 필연적으로 한쪽이 육체의 주도권을 잡은 사이 다른 혼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 그렇게 방황하는 혼이 흘러들어가는 곳이 바로 꿈 속 세계. 꿈 속 세계에 침입한 혼은 육체의 또 다른 주인인 꿈의 세계 주민을 내쫓아내고, 쫓겨난 꿈 속 세계 주민은 반대로 현실로 밀려나오게 된다.

 

꿈 속 세계 주민들은 현실에서 억압된 욕망, 기억, 본성 등을 품고 있어 현실의 인물보다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경우가 잦다. 그런 이들이 현실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어찌 되겠는가.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충족시키기 위해 날뛸 것이다. 개인의 이미지 실추는 문제 축에도 들지 못한다. 욕망의 경중에 따라 사상자도 얼마든지 날 수 있고, 심각한 경우 꿈 속 주민이 본체를 짓밟고 둘의 존재가 뒤바뀔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도레미의 역할. 이탈자가 발생할 때마다 탈옥수를 쫓는 경찰마냥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게 요즘 그녀의 일상이었다.

 

빙의 놀이는 유행이 끝나며 시들해졌지만, 인위적인 조작을 통해 꿈속 세계와 현실 세계를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다는 사실은 현실과 꿈속 세계 양쪽에 모두 알려져 새로운 사건의 방아쇠가 되었다. 꿈속 세계에 머물러 있는데 만족하지 않고 본체의 자리를 빼앗으려 나서는 꿈속 세계 주민이 늘어나게 된 것. 이들은 악몽과 가위부터 시작하여 유체이탈, 생령, 도플갱어 등 다양한 수법을 동원하여 본체를 쇠약하게 만들고 호시탐탐 육신을 빼앗을 기회를 노렸다. 원숭이 꿈이니 꿈속의 자신이니 하는 신종 도시괴담들도 모두 이로 인한 것. 예전 같았으면 편하게 남의 꿈을 주물럭거리다 배를 채우면 되었을 걸, 인요들의 장난질 때문에 졸지에 꿈이라는 감옥의 교도소장이 되어버린 도레미는 최근 몇 배로 불어난 자신의 일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 다들 꿈을 너무 얕보고 있다니까. 전부 악몽만 꾸게 만들면 반성하려나~?”

 

아무 이상 없음이 확인된 꿈 중 스파이시한 풍미가 느껴지는 악몽 하나를 골라 간식거리 삼으며 도레미는 손짓 하나로 휙 눈앞의 꿈들을 다른 꿈들로 교체했다. 밤이 지나기 전에 봐야 할 꿈이 앞으로도 수 천 수 만 가지. 흥미진진해야 할 타인의 꿈을 염탐하는 일도 그녀에겐 이제 다 지긋지긋한 일일 뿐이었다.

 

오늘따라 재미없는 꿈만 가득... 보다가 지쳐 잠들 것 같아.”

 

권태감에 빠져 있었기 때문일까, 꿈조각을 우물거리며 뒹굴거리는 도레미의 뒤로 접근한 검은 살의를, 그녀는 너무 늦게 알아채고 말았다.

 

“...? 잠깐, 당신 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도레미가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백옥같이 하얀 손이 뻗어나와 그녀의 목을 쥐고 바닥에 내팽개쳤다. !하고 유리가 깨지는 듯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도레미의 몸이 찌릿찌릿 떨려왔다.

 

...았다. 후후후...”

 

비릿한 웃음소리에서 느껴지는 낯익은 감각, 곧이어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도레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익숙한 얼굴. 순간 도레미는 이전의 그 사람이 또다시 같은 목적으로 찾아온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내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이전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생각을 고쳤다. 살아 움직이는 타르 덩어리를 보는 듯 상대를 감싼 끈적하고 음습한 욕망의 덩어리. 그리고 이전보다 확연히 체감되는 직접적인 위협을 통해, 곧바로 도레미는 눈앞의 상대가 꿈속 세계의 주민임을 확신했다.

 

당신...간도 크군요. 일개 꿈 속 존재가...꿈 자체를 만들고 지우는 바쿠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목을 졸려 괴로워하는 와중에도 여유롭게 상대를 비웃으며 도레미가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퐁퐁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생겨난 분홍색 덩어리가 목을 조르고 있는 손부터 시작해 습격자의 몸에 차례대로 달라붙었다. 몽중몽(夢中夢), 꿈속에 꿈을 만들고 또다시 그 안에 꿈을 만들길 반복해 최심부에 폭주한 꿈속 주민을 가두는 이 기술은 꿈을 마음대로 창조할 수 있는 그녀만이 가능한 최고의 포획기술이자 고문기술이었다. 무한히 반복되는 꿈의 내용은 대체로 끔찍한 악몽. 벗어날 수 없는 악몽에 갇힌 이는 미쳐버리거나 얌전히 투항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거의 대부분 후자를 택하지만 말이다.

 

얌전해질 때까지 무한의 악몽 속에서 무한히 헤매어 보시죠. 당신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꿈의 구체가 습격자를 완전히 감싸고 나서야 그녀의 목을 비틀려하던 손이 떨어져나갔다. 두둥실, 거대한 풍선처럼 떠오른 꿈의 감옥이 무한한 꿈을 생성하며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던 도레미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빠직...빠지직-

 

어라?”

 

-빠지직...우직...우지직...빠직..쨍그랑!!-

 

불가능한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무수히 많은 악몽으로 습격자를 둘러싼 꿈의 감옥이 일시에 전부 산산조각 나버린 것이다. 아무리 강한 요괴나 신이라도 겹겹이 둘러싼 꿈을 전부 깨고 나오려면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고, 그 시간 동안 새로운 악몽도 계속 생겨나니 이렇게 단시간에 탈출하는 것은 이론상 불가능하다..., 도레미는 생각했다. 눈앞의 상대라면 더더욱, 자신이 만들어낸 악몽에 휘둘리기 쉬울 터였을 텐데. 도레미를 더욱 혼란에 빠트린 건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이었다.

 

“!? 이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당신, 언제 이만한 힘을...?!”

 

주위의 풍경이 어느새 변해있었다. 은하수가 가로지르는 밤하늘의 전경이 펼쳐져 있던 몽환적인 꿈속 세상은 이제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여, 작은 별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몽실몽실 떠다니던 꿈방울들은 전부 사라진지 오래.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건 오래된 건물, 갑옷, 가구 등의 잔해들이었다. 최소 몇 천 년 전에나 쓰였을 법한 양식의 물건들은 도레미가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허공에서 솟아난 것처럼 생겨나 암흑 속 텅 빈 공간을 차곡차곡 채우고 있었다. 잔해에 불과했던 것들도 조금씩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마치 습격자가 자기 뜻대로 과거로 시간을 돌리는 것처럼 보였다.

 

놀라는 것도 거기까지, 곧바로 손을 푼 상대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도레미에게 덮쳐들었다. 바닥에 쓰려졌을 뿐인데 척추를 분지르는 것 같은 충격이 그녀의 몸을 덮쳤다. 짓눌리며 폐에 쌓인 공기가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 했지만 상대는 그럴 여유조차 주지 않고 곧바로 무자비하게 도레미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창백하고 여린 팔에서 나오는 거라곤 믿기지 않는 무시무시한 힘이 도레미를 짓이겼다. 한 대 한 대 맞을 때마다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찢어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곰에게 얻어맞는 인간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제아무리 요괴의 몸이라도 생명의 위협이 느껴지는 살기와 폭력이었다.

--

 

피투성이가 된 도레미의 목을 습격자가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아까보다 더욱 강한 완력으로, 이번엔 비트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목을 찢어버릴 기세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뿌득뿌득 이를 가는 소리가 양쪽 모두에게서 들려왔다. 한쪽은 고통으로 이를 악무는 소리, 한쪽은 분노로 이를 가는 소리였다.

 

... 선택을 잘못했어. 나를 악몽 속에 가두려 했지. 하지만 그거 알아? ...지금까지 단 하루도 악몽이 아닌 적이 없었어. 난 그녀와 달라. 모든 것을 기억하고 매일 이를 갈아왔어. 끝나지 않는 악몽 속에서 괴로워하고 또 괴로워하며 악몽으로부터 분노를, 분노로부터 힘을 얻었지. 네가 한 짓은 내 분노를 더욱 순수하게 만들어주었을 뿐이야.”

 

, 커윽.........”

 

괴롭니? 괴로워? 아니야. 내 아픔은 이 정도가 아니란다. 이 정도 고통으로도 날 죽일 수 없어. 그러니 너도 조금은 더 버텨주렴. 내가 느낀 고통에 더 가까워지려무나!”

 

손이 깊게 파고들어간 목의 살갗이 찢겨져나가며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지켜보며 습격자가 광기어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주면 걸레짝이 된 도레미의 목은 연약한 봉제인형처럼 무참하게 찢겨나갈 터였다.

 

-지직...지지직...콰직!

 

죽음을 목전에 둔 그 순간, 도레미 아래쪽 공간이 썩은 나무 바닥처럼 우지끈 쪼개지며 그녀의 몸이 빈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급히 습격자가 손을 뻗어 그녀를 낚아채려 했지만, 이미 한 발 늦어 도레미의 몸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형체조차 보이지 않게 된 뒤였다. 도레미가 선택한 최후의 발악. 그것은 이미 통제권을 잃은 꿈의 세계에서 탈출하는 것. 목숨이라도 보전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힘겹게 현실 세계로 통하는 통로를 연 것이었다.

 

“...상관없어. 나의 계획은 이제 막 시작일 뿐이니까.”

 

현실 세계와 이어져 있음이 분명한 구멍을 시큰둥하게 메워 버리며, 주인 잃은 꿈의 세계를 손에 넣은 꿈속의 습격자는 흡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3-

우와... 여기가 꿈의 세계 맞아? 분위기가 완전 딴판인데.”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집중해. 자칫 잘못하면 둘 다 죽는 거야.”

 

, 알고 있다니까. 내가 너보다 상황은 더 잘 알고 있다고.”

 

전쟁폐허처럼 건물 잔해들이 여기저기 널린 칠흑의 공간을 두 소녀가 가로질러 날고 있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시도 때도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쪽은 그녀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하듯 머리에 달린 기다란 한 쌍의 토끼 귀가 쭈글쭈글 우그러져 있었다. 전신에 부적을 두르고 이중 삼중으로 보호 결계를 친 홍백의 무녀 쪽은 그런 토끼 소녀에게 이따금 차가운 말투로 핀잔을 주면서 시종일관 앞만 보며 전진하고 있었다. 앞만 보고 있다고 했지만 그녀는 평소보다 배는 신경을 곤두세운 상태로, 영력과 직감을 총동원해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하쿠레이 신사의 무녀, 하쿠레이 레이무와 영원정의 달토끼, 레이센 우동게인 이나바. 이 둘이 이런 상황에 놓인 이유는 지금으로부터 이틀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틀 전]

 

약도 잔뜩 팔고, 테위녀석은 웬일로 얌전하고, 일도 빨리 끝나고! 흐흥~ 오늘은 운수가 좋네- 뭐 좋은 일이 생길 징조려나... ?”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마을에서 오키구스리 판매를 마치고 돌아온 레이센이 폴짝거리는 발걸음으로 영원정에 돌아가고 있던 와중이었다.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죽림 한가운데, 빽빽하게 자란 대나무들 사이 무언가 엎어져 있는 것이 그녀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맡아본 적 있는 역한 비린내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이건 피냄새? 설마?!”

 

경각심 없이 설렁설렁 죽림에 들어왔다 요괴에게 습격당한 인간이라도 있는 것일까, 사냥당한 야생동물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레이센은 한달음에 눈앞의 형체를 향해 달려갔다. 나무들을 젖히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피냄새가 한층 더 강렬히 풍겨왔다. 대량출혈이 아니고서야 이 정도로 피냄새가 진동할 수는 없는 일.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는 동시에 당장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응급조치들을 되새겨 보며, 레이센이 시야를 가린 마지막 잎사귀를 젖혔을 때였다.

 

꺄악!?”

 

앳된 비명소리와 함께 레이센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비명소리에 놀란 새들의 날개짓 소리와 잎사귀가 파스스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 뒤 곧바로 정적이 찾아왔다. 충격과 공포로 얼어붙은 레이센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나름 달의 도시에서 군인으로 활동하며 이런 저런 못 볼꼴에 익숙해진 그녀였지만, 눈앞의 상황은 그런 그녀가 견뎌낼 수 있는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모습이었다.

 

대지와 푸른 잎사귀를 붉게 물들이며 펼쳐진 피바다, 그 위에 도레미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달의 도시 침공 사건을 통해 안면을 트게 된 꿈 세계의 관리자. 그런 인물이 어째서인지 꿈의 세계도 아니고 죽림 한가운데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무엇에게 습격당했는지, 그녀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마디마디 부서져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뒤틀린 방향은 마치 망가진 마리오네트를 연상케 했으며, 일부 살을 뚫고 튀어나온 뼛조각과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피멍은 그녀의 장기조차 성한 곳이 제대로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멀쩡하다고 볼 수 있는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가냘픈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거칠게 베려다 만 목의 상처에선 지금도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 도레미씨, 괜찮으세요? ,지금 바로 응급처치를 할 테니 잠시만... 바로 스승님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쏟아져 나오는 피를 보고 퍼뜩 정신을 차린 레이센이 서둘러 자신의 옷소매를 찢어 피가 새어나오는 상처를 지혈했다. 가까이서 본 도레미의 몸은 아직 지식이 얕은 레이센조차 알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촌각을 다투는 상태였다. 쇼크가 일어나지 않게 가지고 있던 진통제를 투여한 뒤, 등에 짊어진 가방을 뜯어 들것으로 개조한 레이센이 도레미의 몸을 조심스럽게 들것에 옮겨 실었다. 요괴의 강인한 육체가 조금이라도 오래 버텨주길 기도하며, 도레미를 짊어진 레이센이 영원정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스승님, 상태는 어떤가요?”

 

장장 20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무사히 집도한 에이린이 피가 묻은 수술 장갑을 벗으며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냈다.

 

좋지 않아. 용케 살아남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야. 아무리 요괴의 몸이라 해도 이 정도까지 박살이 나면 버틸 수 없지. 정말이지 지독한 녀석한테 당했는걸. 이토록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마지막까지 죽지 않게 최소한의 힘조절은 했어. 즉 이건 고문이었다 이거지.”

 

...고문이요!? 누가 그런 짓을, 도대체 왜 했던 거죠?”

 

의식이 돌아오면 본인에게 직접 물어봐서 알아내야지. 하지만 어느 정도 짐작 가는 곳은 있어.”

 

도레미씨와 연관되어 있고 스승님께서 짐작 가는 곳이라면 설마 ... ...”

 

바로 그 설마란다. 꿈의 세계에서 날뛸 충분한 동기와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녀 하나 밖에 없지. 보렴. 우동게 너도 바로 나와 같은 생각을 했잖니. 어찌 되었든 넌 그녀를 직접 상대해 그녀의 계획을 성공적으로 저지한 인물이니까.”

 

그렇지만, 믿을 수 없어요. ...순호씨가 이런 잔혹한 짓을 벌이셨다니.”

 

착잡한 표정으로 레이센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달의 도시 침공 이변 당시, 순호는 꿈의 세계를 이용해 달의 도시 주민들을 인질로 삼는 동시에 달의 도시를 침공해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그런 그녀의 계획을 저지한 것이 레이센을 포함한 지구의 이변 해결사들. 도레미는 그 과정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던 그녀들에게 약간의 힌트를 흘려주기만 했을 뿐이었다. 제아무리 방해 때문에 원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해도, 달의 도시를 침공하는 데 꿈의 세계가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잔인한 고문을 일삼는 행위가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더군다나 순호는 이변 당시 레이센에게 당분간 달의 도시 침공을 멈추겠다고 본인 입으로 직접 말했었다. 뒤에 레이센이 마음에 들었다는 소름 돋는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약속은 약속인 법이다. 물론 당분간이라는 단어에 언제까지라는 기한은 정해져 있지 않았으므로 언제 다시 침공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으나 레이센은 자신을 바라보는 순호의 표정과 눈빛으로부터 그녀의 약속이 오랫동안 지켜질 것이라고, 직감적으로 믿었었다. 그래서 레이센은 순호가 이런 짓을 벌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약속을 어기고 살육에 미친 복수귀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레이센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우동게, 설마 그녀의 편을 드는 거니? 그녀는 달의 도시의 숙적. 그건 동시에 우리의 적이라는 뜻이야. 이야기를 나누었음 얼마나 나누어 봤다고 적을 이렇게 쉽게 믿어 버리다니. 너도 많이 물러졌구나. 알고 있니? 그 사건에 관계된 자들이 모두 복수의 대상이라면, 나와 너, 그리고 공주님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이런 꼴로 죽을 때까지 그녀는 멈추지 않을 거야. 모두가 다 죽고 나서 그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반성할 셈이니?”

 

물론 그건 아니지만... 저기, 스승님, 제가 이 사건을 조사 해봐도 될까요? 순호씨가 이런 짓을 벌였다는 건 결국 상황증거에 불과할 뿐이니 제 눈으로 직접 순호씨가 범인이 맞는 지 확인하고 싶어요. 그리고 만약 순호씨가 범인이 맞다면... 제 손으로 다시 한 번 그녀를 저지하고 싶습니다.”

 

에이린에게 항명했다는 생각에 자신의 뜻을 밝힌 레이센은 본능적으로 눈을 꾹 감고 따갑게 귀에 내리꽂힐 꾸중에 대비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예상과 달리, 돌아온 것은 에이린의 걱정어린 한숨소리였다.

 

하아... 미안하지만 이번엔 너를 내보낼 수 없겠구나. 순호가 범인이 맞든 아니든, 이번 사건의 범인은 상당히 진심이야. 자신에게 방해되는 이는 모두 끔찍한 고통과 함께 죽여 버리려 하겠지. 설득도 탄막놀이 같은 애들 장난도 통하지 않을 거야. 꿈의 세계에선 신이나 마찬가지인 바쿠조차 이렇게 당했어. 그런 상대를 네가 막아설 수 있겠니?”

 

할 수 있어요! ...,아니 그러니까- 해보기 전엔 모르는 거잖아요, 그쵸?”

 

이번엔 정말로 죽을 지도 모른단다.”

 

그래도 어쩌면...아마도...아니 일말의 가능성이... 아니아니, 할 수 있습니다! 해내볼게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겁먹긴 했지만 레이센의 붉은 눈동자는 그런 위협에도 강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더 이상 어떤 경고나 위협도 먹히지 않을 거란 생각에 마침내 에이린이 만류를 포기하고 레이센의 편을 들어주었다.

 

좋아... 어쩔 수 없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네가 무사히 돌아올 방법을 찾아보마. 대신 조건이 있어. 널 단독으로 보내지 않을 거야. 믿을 만한 조력자, 이전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충분히 강한 사람을 한 명 데려오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준비해 놓을게.”

 

! 문제없습니다! 파트너로 삼을 만한 믿음직한 사람이라면 한 명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그럼 바로 사정을 이야기하고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스승님!”

 

언제 겁먹었냐는 듯 결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경례의 손동작을 한 레이센이 영원정 밖으로 후다닥 달려 나갔다. 그런 레이센의 뒷모습과 도레미가 잠들어 있는 수술실을 번갈아 살피며, 에이린이 어두운 낯빛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녀의 단편밖에 보지 못한 네가 그녀의 전부를 보고도 여전히 그녀를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우동게. 여린 정신을 가진 저 아이가 견뎌낼 수 있어야 할 텐데... ...”

 

낮게, 조용히 중얼거린 그 목소리는 대나무 사이를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에 금방 지워져, 결코 레이센에게 닿지 못했다.

 

 

-4-

죽림에 저녁안개와 함께 땅거미가 짙게 깔린 늦은 시간, 에이린이 말한 파트너를 구하는 데 성공한 레이센이 영원정에 돌아왔다. 얼마나 서두른걸까, 가쁜 숨을 고르며 옷자락을 쥐고 부채질해 비오듯 흐르는 땀을 식히는 그녀의 뒤에서 귀찮음 잔뜩 섞인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기는 이 녀석한테 대강 들었어. 그런데 왜 하필 나인거람. 침공이변 관계자는 나 말고도 많지 않아?”

 

양아치처럼 어깨에 걸친 고헤이를 탁탁 두드리며 레이무가 신경질적으로 레이센을 쏘아보았다. 이미 오는 길에 질리도록 그녀의 볼멘소리를 들은 레이센은 그런 레이무의 눈총에 슬그머니 시선을 에이린 쪽으로 돌리며 말없이 도움을 구했다.

 

어쩔 수 없는걸. 평소처럼 탄막놀이로 적당히 치고받다 끝날 수 있는 상대라면 모를까, 이번엔 정말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니까.”

 

그럼 난 죽어도 좋다는 얘기?!”

 

우동게에게 제일 믿음직하고 강한 사람을 데려오라고 했어. 저 아이가 너를 택했다면, 네가 우동게가 아는 이들 중 가장 강한 사람이란 뜻이지. 극찬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좋아.”

 

, 아니 뭐... 나쁘진 않은데. 그래도 죽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변함없거든?”

이대로 놔뒀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무슨 짓을 벌이려는 지, 협력자가 누가 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의 희생될 것인지. 꿈의 세계뿐만 아니라 환상향도 위험해질 수 있어. 그런 위기라면 하쿠레이의 무녀가 나서야지?”

 

, 어쩔 수 없네. 이렇게 되면 함께 하는 수밖에. 대신, 그쪽에서 나한테 빚진 거야. 나중에 제대로 받아낼 거니까.”

 

좋아. 우동게가 자청한 일이고 우동게가 그쪽을 골랐으니, 빚은 우동게한테 받아내도록 해. 죽지만 않으면 무슨 노동이든 시켜도 좋아.”

 

!?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죠!?”

 

네가 해결하겠다고 선언한 거잖니?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네가 책임을 지려무나.”

 

으으으으윽...”

 

빚 청산은 나중에 얘기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어떻게 할 셈이야? 어디에서 녀석을 찾으면 되는 건데?”

 

좋은 질문이네. 마침 이쪽에서도 준비를 다 마쳐두었거든. 이쪽으로 따라 와. 우동게, 너도.”

 

복도를 따라 걸으며 에이린이 두 사람을 데리고 간 곳은 영원정의 안쪽, 미닫이문이 양쪽으로 굳게 닫혀 있는 큰 방이었다. 무엇을 준비해 놓았기에 이렇게 비장하게 장소까지 따로 마련한걸까,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에이린의 비장의 수가 궁금해진 레이무와 레이센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둘 다 왜 그래. 긴장이라도 했어? 지금이라도 발을 빼겠다면 늦지 않았는데.”

 

누가 쫄았다는거야.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준비했는지 궁금해서 그런 거거든.”

 

후후, 대단하다고 할 것 까지야.”

 

피식 웃으며 에이린이 양 옆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널찍한 다다미방 한가운데 떡하니 놓여져 있는 것, 그것은 가지런히 펼쳐진 두 벌의 이불과 자리끼로 보이는 물그릇이었다. 그 외 방에 놓여 있는 것들은 전부 평범한 가구들뿐으로, 특별한 장비나 무기 같은 것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뭐야, 이건?”

 

뭐냐니, 이불이잖니? 신사에선 이불 없이 맨바닥에서 자기라도 하는 거야?”

 

그 뜻이 아니라! 준비를 다 끝냈다며!? 근데 무슨 잠자리를 준비해 놓은 거냐고. 신혼 첫날밤이라도 보내라는 거야?”

 

어머, 무녀의 상상력은 굉장하구나. 우동게에게 그런 마음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농담이 아니야. 지금부터 너희 둘은 잠을 자 줘야겠어.”

 

잠이라면, 꿈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것인가요? 그런 것이라면 지난 번의 통로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요?”

 

그 통로는 지금 혼수상태인 바쿠가 열어준 통로잖니. 바쿠가 의식도, 통제권도 잃은 지금 꿈의 세계는 온전히 고립된 세계야. 그곳과 현실을 연결하는 통로는 오직 바쿠, 혹은 지금 통제권을 쥔 녀석만이 가능하지. 그러니까- 깨어있는 상태에서 억지로 들어갈 수는 없다는 이야기. 알아들었어? 그러니 꿈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선 둘 다 잠을 잘 필요가 있다는 거야.”

 

거기에 순호씨가 계시다는 거죠...?”

 

가능성이 높아. 바쿠를 제일 먼저 습격한 것으로 보아 꿈의 세계를 어떤 식으로든 이용하려는 속셈이 분명하고, 부상 상태로 보아 습격당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어. 그렇다면 아직도 그쪽 세계에 머물러 있겠지.”

 

그래서 결국 잠자리가 그쪽에서 준비한 전부야? 꿈이니까 다쳐도 죽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 잘 들어. 지금 꿈의 세계는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갔어. 그 안의 법칙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지는 나조차 예상할 수 없는 영역이야. 예상대로 순호가 범인이라면 그녀의 능력 또한 작용하고 있을 테니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안전을 보장할 수 없지. 순화의 힘을 얕보지 마. 지난 번 싸움에서 너희는 운이 좋았던 것뿐이니까.”

 

진지하게 목소리를 내리깔고 둘에게 경고한 에이린이 베개 옆에 놓인 자리끼를 집어 둘에게 건넸다. 달콤하면서도 헌 책에서 나는 것 같은 콤콤한 향이 뭉근히 풍겨 나오는 투명한 액체였다.

 

잠들기 전에 이걸 마셔둬.”

 

, 이건 지난번의 그건가요.”

 

그 약을 개량했단다. 진심으로 폭주하는 순호를 상대할 경우 너희들 몸에서 더러움을 없애지 않으면 곤란해. 하지만 그것만으론 모자라. 꿈은 원래 수시로 끊기고 변하는 것이잖니? 드넓은 꿈의 세계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일이 없도록 이 약은 너희들의 혼을 단단히 고정해 줄 거야. 말하자면 안전 로프 같은 것이라고 해야겠지. 겸사겸사 꿈에서 입은 상처가 현실에 적용되지 않게 해주는 효능도 있고. 더 이상 설명해봤자 알아듣지 못할 테니, 그냥 마시도록 해. 공주님이 평소 어떤 싸움을 즐기고 계시는 지 다들 잘 알지? 곧 그 기분을 체험하게 될 거야.”

 

누구들처럼 죽음을 즐기는 취미는 없는데 말이지-.”

 

레이무가 먼저 입으로 잔을 가져가 시원하게 원샷했다. 깔끔히 비운 잔을 휙 털어내며 미묘한 표정으로 레이무가 중얼거렸다.

 

유카리가 가져다 준 감기약 시럽이랑 비슷한 맛인데. 뭔가 거북한 맛이야.”

 

, 저도 그럼.”

 

레이무를 따라 레이센이 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역시 입에 맞는 맛은 아니었는지 표정을 잔뜩 찡그린 채였다.

 

다 마셨으면 자리에 누워 손을 잡도록 해. 만에 하나 둘이 서로 다른 장소로 가게 될 경우 합류하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니까. 덧붙여 말하지만, 이 방법으로 꿈의 세계에 들어가면 안에서 따로 통로가 열릴 때까지 너희는 깨어날 수 없어. 몇 만 번을 죽더라도, 포기하고 깨어나고 싶어 미칠 것 같아도 깨어나지 않아. 미치거나 사건의 주모자를 제압하거나, 둘 중 하나 뿐이야. 걱정 마렴. 너희들의 육체는 내가 지켜 줄 테니, 너희들은 정신 단단히 붙잡도록 해.”

 

잠깐, 제일 중요한 사실을 이제 말하면 어떡......”

 

아무렇지 않게 엄청난 사실을 털어놓는 에이

린에게 레이무가 울컥하여 항의하려 했지만 갑자기 느껴진 현기증에 그녀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이불 위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는 레이센도 마찬가지로, 나른한 표정으로 반쯤 감은 눈으로 끔뻑거리는 그녀는 에이린의 말조차 제대로 듣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이런 말을 들으면 잠을 못 잘 것 같아서 수면제도 섞었지. , 잠들기 전에 손 잡는 것 잊지 말고.”

 

너어... 일어나서 두고 봐아... ...”

 

흐으... 스승님, 저 잘할게요오...”

 

픽 손을 잡고 이불 위에 쓰러져 잠든 둘을 끝까지 지켜보곤, 둘에게 맞힐 수액을 준비하기 위해 방을 나선 에이린이 조용히 미닫이문을 다시 닫았다.

 

-5-

따스한 태양빛이 연녹색 잔디밭을 감싸 반짝이게 하고 있다. 사박사박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른 풀잎이 바스라지는 소리가 기분 좋게 귀를 간질인다. 잔디밭을 다 건너면 나오는 것은 흐드러지게 만개해 고개를 겸손하게 숙인 흰 백합이 가득한 아름다운 꽃. 내가 가장 좋아했던 꽃으로 이루어진, 그이가 나를 위해 만들어준 우리들만의 장소. ‘변함없는 사랑이란 꽃말을 간직한 이 정원은 그이와 나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주듯, 더러움 한 점 없는 순수한 흰색 빛으로 봄바람에 산들거리고 있었다.

 

꺄르르 천진난만하게 웃는 소리가 나의 뒤에서부터 점점 가까워져 온다. 곧이어 느껴지는 작고 여린 팔이 나를 끌어안는 감각. 자기 쪽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그 힘은 연약하기 그지없었으나 나는 굳이 그 자리에 멈춰 뒤를 돌아본다.

 

아아, 잊을 수 없는 얼굴이 거기에 있다. 그이와 꼭 닮은 어린 아이가, 그이와 똑같은 눈망울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싱글싱글 웃는 입은 꾹 닫혀 아무 말 없었지만 나는 그 아이의 눈을 통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아이가 바라는 대로, 나는 허리를 숙이고 아이를 꼬옥 안아 품는다. 짓이겨진 잔디와 흙먼지에 옷이 더러워지는 것 쯤 아무렇지 않았다. 가식 하나 섞이지 않은, 진심에서 우러난 행복한 웃음과 함께 나는 다정하게 그 아이의 귀에 속삭인다.

 

어서 오렴, ‘나의 아들...”

하나 뿐인 나의 보물. 세상 모든 금은재보를 준다 해도 맞바꿀 수 없는 나의 사랑. 너는 나의 전부요, 나의 삶이요, 나의 미래다. 너를 위해서라면 내 살과 뼈라도 내어주마. 나의 혼이 지옥불에 미래영겁 불타올라 재조차 남지 않게 될 지라도 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지옥불에 발을 담글 것이다. 아아, 백봉(伯封). 나의 백봉아. 목이 다 쉬도록 불러도 아깝지 않을 그 사랑스러운 이름을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부른다. 보드랍고 따스한 그 아이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못 말리겠다는 듯이 껄껄 웃는 그이의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다. 그 웃음소리에, 나의 포옹에 그 아이도 괜히 기분이 좋아져 꺄르륵 소리내어 웃는다. 웃음소리가 가득한 낙원. 나는 지금 최고로 행복하다. 이 행복이 언제까지 이어지면 좋으련만, 미래에도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 다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쇄액-

 

정원에 가득 찬 웃음소리는 이내 바람을 날카롭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뚝 끊겨버린다. 대체 무엇이 벌어졌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뒤돌아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헛된 일말의 희망조차 사라져 버리고 마니까. 너무 많이 반복되어 이젠 조금의 놀라움조차 섞이지 않은 차가운 눈으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다.

 

방금 전까지 흐뭇하게 웃으며 나와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이의 몸을 아이의 키만 한 커다란 화살이 꿰뚫고 있었다. 나와 그이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먼 거리에서 날아온 화살이 정확히 그이의 급소에 박혀 상처 부위에서 피를 철철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아이를 품에 묻어 그의 눈을 가린다. 아비의 몸이 꼬챙이에 꿰여 축 늘어져 죽어가는 모습을 어찌 자식에게 보여줄 수 있으랴. 몇 번을 봐도 처참한 광경에 새파랗게 질린 나와 흐릿해져 가는 그이의 눈이 마주치고, 그이의 입이 뻐끔거린다. 여기까지 들리지 않는 소리없는 발악이었지만 그이가 마지막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내겐 너무나 명백했다.

 

......... 어서.......... ............”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화살이 날아와 그의 주변과 그의 몸에 무서운 기세로 처박혔다. 열 발, 스무 발,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수많은 화살들. 그것을 신호로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이를 안은 채 달리기 시작한다. 끝없이 이어진 백합 정원을 헤치며,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면서 나는 그저 달리고, 또 달린다. 하나 둘, 화살이 스쳐 지나가며 살을 찢고 몸 여기저기를 꿰뚫는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참을 수 없는 격통이 몸을 엄습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 내가 존재하는 이유 그 자체만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

 

어깨를 잡아 뜯는 고통과 함께 강한 충격을 받은 몸이 균형을 잃고 바닥에 무너져 내린다. 남편을 죽인 것과 똑같은 대화살이 내 어깨를 비스듬하게 관통해 내리꽂혀 있었다. 화살이 박혀 너덜거리는 팔이 금방이라도 찢겨져 나갈 것 같았으나 내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품 안을 확인하며, 나는 다급하게 외친다.

 

아가! 아들아...무사하느냐! 다친 곳은 없느냐!!”

 

텁 숨이 막히며 목구멍까지 구역질이 올라왔다. 나의 어깨를 관통한 기다란 막대가 내 몸에서 아이의 가슴으로 이어져 있었다. 꿰뚫린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내 품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더 이상 아까 같은 온기도, 맥동도 느껴지지 않는 차갑게 식은 아이의 몸. 마치 잠에 빠져든 것처럼 평화롭게 눈을 감고 있는 아이의 얼굴만이 유일하게 그가 살아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그날과 똑같은 감정이, 그날의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한치의 다름 없이 똑같이 반복된 감정이 내 안에서 폭발하기 시작했다.

 

안 된다! 정신 차리거라! 여기서 잠들면 안 된다! 눈을 뜨거라, 어서! 제발...눈을 떠 보란 말이다...백봉아......”

 

이미 부서져 버린 심장이 다시 뛰는 일 따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아이의 몸을 흔들어도 보고, 뺨을 건드려도 보고,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다 하려 한다. 결국 아무 소용없음에도. 이미 일어난 과거가 바뀔 리 없음에도.

 

그럴 리 없다고, 죽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이자, ‘부정은 곧 이런 현실을 만든 이를 저주하기 시작했다.

 

왜 하필 이 아이여야 했는지, 왜 내가 아니라 아이를 데려가야 했는지 화가 치밀었다. 끓어오르기 시작한 분노는 멈출 줄 모르고 나의 마음을 뒤덮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나의 목숨을 이 아이의 목숨과 교환할 수 있다면,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바치겠다 신에게 기도했다. 하지만 그 잘난 신들은 내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고, 나는 신과 세상 모두를 원망하고 증오하기 시작했다.

 

울부짖는 목소리는 쉬어 갈라졌고, 눈물은 진즉 말라버려 충혈 된 눈의 실핏줄에서 터져 나온 피가 눈물을 대신했다. 검붉은 피눈물을 철철 쏟아내며 나는 짐승 같은 목소리로 울부짖고, 또 울부짖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고통, 절망, 슬픔, 저주, 좌절, 후회, 모든 감정이 하나의 감정으로 모여든다. 이윽고 나를 가득 채운 감정은 거대한 분노. 이제까지의 나는 여기서 나의 행복, 나의 미래와 함께 죽어 없어졌다. 아니, 빼앗겼다. 분노가 곧 나 자신이요 나 자신이 곧 분노의 화신일지니, 그 자리에서 나는 곧바로 세상천지에 대고 맹세했다. 앞으로 평생 복수만을 위해 살아갈 것을. 이 기억과 분노를 평생 잊지 않고 간직할 것을.

 

폐하, 아직 숨이 붙어있는 이가 있습니다!”

 

내 확실히 대를 끊어놓으라 명하지 않았더냐. 꼭 일일이 보고해야 하겠느냐?”

 

그게... 직접 폐하께서 확인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시시한 것으로 나를 직접 오가게 한 것이라면 내 너의 목을 직접 치리라. 안내하거라.”

 

멀리서부터 웅성거리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절그럭절그럭, 갑옷 입은 자들 특유의 금속음 섞인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보십시오, 폐하. 후기(后夔)의 처입니다. 아직 숨은 붙어 있지만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의 부상입니다.”

 

뭔가 안고 있군. 보나마나 녀석의 자식이겠지. 확인해 보거라.”

 

거만한 남자의 턱짓에 그의 부하들이 내게 손을 뻗는다. 나의 그이를 죽이고, 내게서 모든 것을 통째로 앗아간 것도 모자라, 이젠 내 아들의 안식마저 방해하려 하고 있다. 용서할 수 없다. 용납할 수 없다. 내 여기서 죽어야만 한다면, 마지막으로 너희들 모두를 길동무 삼아 아이의 안식만은 지켜주고 말리라.

 

녀석들에게 보이지 않게, 너덜거리는 손으로 나는 몸에 박힌 화살을 움켜쥔다. 빠직, 부러진 화살의 뾰족한 파편이 손에 박혔지만 아랑곳 않고 나는 불쌍한 아이의 가슴에서 부러진 화살을 힘주어 뽑아낸다. 동시에, 녀석의 부하들이 내게 손을 뻗어왔다.

 

무엄한 것, 누구 안전이라고 발악하느냐. 어서 그 안에 품은 것을 폐하께 보여드리지 못할까!”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죽는 것보다 더한 치욕을...끄아아아악!!!!”

 

먼저 내게 얼굴을 들이댄 녀석의 눈알에 화살을 힘주어 박아 넣는다. 녀석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이 또한 수없이 반복된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는 일. 옆의 녀석이 칼을 뽑아들기 전 나는 그 녀석의 목을 입으로 물고 그대로 잡아 찢었다.

 

흐악!!! 크헉......! 그르르륵......”

 

머리를 관통당해 괴로워하던 녀석도, 목의 절반이 찢겨 나간 녀석도 피를 있는 대로 쏟으며 괴로워하다 이내 곧 잠잠해졌다. 쉴 틈 따윈 없다. 녀석의 부하는 모두 넷, 앞으로 두 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녀석을 길동무로 삼으면......

 

--

 

하지만 나의 생각과 무관하게 몸은 내 계획을 따라주지 못했다. 이미 한계에 도달해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 머리론 알고 있어도 날아오는 공격을 걸레짝이 된 몸으로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곧바로 날아온 화살 단 한 발에 나의 몸은 아들의 시체와 함께 처참히 나동그라졌다.

 

미친 년... 폐하, 애새끼는 이미 죽었습니다. 이렇게 된 거, 이 계집도 같이 죽여버리시죠.”

 

아아, 나는 또 실패했구나. 수십 수백 만 번 같은 기억을 반복하면서 단 한 번도 나는 아이를 구하지도, 녀석을 죽이지도 못했구나. 원망스럽다. 한심하다. 후회스럽다. 꿈속에서조차 나는 왜 이다지도 무력하단 말인가.

 

, 좋은 생각이 떠올랐도다. 무기를 거두거라. 그리고 이 여자를 궁으로 데려가 모든 명의를 불러 정성스럽게 치료해주도록. 시체는 돼지우리에 던져 버리거라. 제를 올릴 묘지라도 생기면 곤란하니 말이다.”

 

폐하, 외람되오나 그 계집은 폐하의 장수를 둘이나 죽인 미친년입니다. 폐하께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왜 살려두시려는 겁니까.”

 

하하, 어리석은 질문이구나. 이 내가 하찮은 계집에게 당할 리 없지 않느냐. 그리고, 이대로 이 여자를 죽이면 결국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이 되니 소원을 이루어주는 꼴이 되지 않겠느냐. 나는 이 여자를 내 곁에 둘 것이다. 잿밥 한 그릇 못 주게 평생을 감시하며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삶을 죽을 때까지 구경하며 즐길 것이다.”

...그렇군요. 역시 폐하십니다. 어이, 뭐하고 있나! 어서 이 여자가 또 정신 차리기 전에 옮기자고.”

 

병사들이 나를 들어 올리려는 찰나, 나와 아들의 피로 붉게 변한 백합을 짓밟으며 그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고개를 들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내겐 그의 발 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그 증오스러운 얼굴이 짓고 있을 표정은 보지 않아도 빤한 것이었다. 그의 발치에 시선을 고정한 나의 속에서 복수의 감정이 꿈틀거렸다.

 

저 자를 죽여 버리고 말리라. 가장 행복할 순간에 가장 처참한 방법으로 죽여 버리겠다. 그와 관련된 자들도 모두 죽여 시체조차 남지 않게 하리라. 네가 사랑하는 이 모두 내 손으로 숨통을 끊을 것이며 네 대는 나에 의해 멸문당하리라. 나에게서 빼앗아간 미래, 평온한 삶, 모두 똑같이 빼앗아 줄 것이다. 천지 아래 네놈과 관련된 모든 흔적을 지워 버리는 것이 나의 숙원이요, 그러기 위해서 나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또 갈 것이다. 설령 복수에 눈이 멀어 미친 괴물이 되어버린다 해도, 복수를 위해 이 세상 전부를 희생시킨다 해도 네 놈을 내 손으로 기필코...

 

그가 허리를 숙여 내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의 의식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눈을 뜨자 그곳은 나의 침실이었다. 이전의 기억을 토대로 이 세계에 재현한 나의 고향, 나의 집, 나의 방. 모든 것이 그때와 똑같았지만 웃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텅 빈 방과 암흑으로 가득한 바깥 풍경이 아직 이 세계가 불완전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매일 밤 반복되는 그 날의 기억을 담은 꿈.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게 내려진 벌이자 포상. 꿈속 세계에서 끊임없이 같은 비극을 반복하고 괴로워하며 나는 점점 더 순수한 분노의 화신에 가까워졌다. 기쁨, 고독, 절망, 복수와 관계없는 감정은 하나 둘 지워지고 그때마다 강해진 살의는 내게 힘을 가져다주었다. 언젠가 인간을 초월해, 정말 내가 바라던 괴물이 될 정도로 강력한 힘을.

 

하지만 어느 순간 는 제일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 날의 기억, 그 날의 맹세, 그 날의 감정. 모든 것을 잊어버린 에게 복수는 더 이상 숙원이 아니라 그저 본능이 시키는 일. 가야할 곳을 잃고 바람과 타륜이 흔들리는 대로 나아가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가 잊어버린 기억과 감정은 여전히 의 의식 한구석에 남아 이렇게 나를 괴롭히고 있는데. 기억을 가진 내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육신이란 감옥에 갇혀 들리지 않는 악을 쓰는 동안 는 방황만 하며 시간을 허비했지.

 

방 밖으로 나선 내 앞에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하얀 들판이 펼쳐졌다. 이제 막 기억의 파편 속에서 복원된 그 날의 정원. 사랑하는 그이와 나의 전부가 나를 기다리던 곳. 이제 멀지 않았다. 모든 조각이 모이는 순간, 마침내 나의 계획은 실현되고 숙원 또한 이루어질 것이다. ‘의 동의는 구하지 않겠다, ‘. 순수라는 이름으로 더럽혀진 복수를 내가 이루리라. 진짜 순수한 살의를 담아. 나를 이렇게 만든 이 세상 모든 것을 대상으로.

 

 

-6-

풍경 속 폐허 같았던 건물들이 조금씩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나무와 꽃밭 같은 자연물들도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왠지 점점 더 적의 본거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에 레이센과 레이무는 바짝 긴장한 상태로 기척을 죽였다.

 

이 건물 양식들, 달의 도시에서 월인분들이 지내는 건물과 비슷한 느낌이야. 그렇다는 건 역시...”

 

달과 관련된 녀석이 범인이라는 게 분명하다는 거지?”

 

순호씨가 범인이어도 문제지만, 달의 분들이 범인이어도 곤란한데...”

 

뭐가 되었든 위험요소는 배제하는 게 옳아. 너도 네가 좋아서 데려왔으면 쓸데없는 정에 휘둘리지 말고 똑바로 정신 차려. 애시당초에 달의 적이라며. 뭐 때문에 넌 그런 사람을 신뢰하는 거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레이무가 레이센을 타박했다. 그 말에 레이센은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 없는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며 답했다.

 

뭐랄까, 직감? 눈을 보면 알 수 있잖아. 그렇게 순수한 눈빛은 본 적이 없어. 물론 순수한 심연이었기에 본능적으로 무섭다고 느껴버리긴 했지만. 적어도 그런 눈빛을 한 사람이 고작 나 같은 녀석의 눈속임을 위해 얄팍한 거짓말을 지어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그 녀석 또한 유력한 용의자지. 네 직감도 믿을 게 못 되는 것 같아.”

 

아직 모르는 거잖아! 좀 더 알아보면 확실해질...?!”

 

 

레이센의 입을 틀어막으며 레이무가 담벼락 뒤로 몸을 숨겼다. 고래 등 같이 넓은 대궐, 이를 둘러싸고 둘의 모습을 가려준 높은 담장이 자로 꺾이는 곳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마치 눈이 쌓인 듯 한 하얀 빛깔의 바닥이 펼쳐져 있었다. 광원이라곤 아무 것도 없음에도 선명한 순백색으로 빛나는 평지. 그 안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레이무들로부터 등을 돌린 채 서있었다. 사건의 범인이 확실한 것으로 생각되는 인물의 모습에 레이무가 들키지 않도록 레이센에게 수신호로 지시를 내렸다.

 

레이센의 능력으로 존재를 완전히 지운 둘이 조용히 그 인물에게 다가갔다. 눈밭인줄로만 알았던 벌판은 가까이서 보니 새하얗게 펼쳐진 꽃밭이었다. 꽃은 전부 하얀 백합. 제철을 맞이한 것처럼 활짝 만개한 백합이 무한히 넓은 것처럼 보이는 공간을 잔뜩 덮고 있었다. 레이무가 다시 수신호를 보냈다.

 

여기서부터, 둘로, 갈라져. 동시에, 공격. OK?'

 

고개를 끄덕인 레이센이 레이무로부터 멀어져 꽃밭 한가운데 인물을 양쪽에서 덮칠 수 있는 위치까지 이동했다. 조금씩, 맹수가 먹잇감에게 접근하듯 둘은 천천히 이동과 정지를 반복하며 상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선명하게 보이는 샛노란 머리카락. 전신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는 대륙의 복식. 눈앞에 있는 상대는 틀림없는 순호 본인이었다. 환각이나 다른 인물의 변장일 가능성은 살이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그녀의 살의를 느끼는 순간 깔끔히 지워졌다. 믿고 싶지 않았던 범인의 정체를 확인한 레이센이 충격으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진형이 갖춰지고 레이무가 수신호로 공격을 알렸지만, 배신감과 공포에 입을 틀어막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레이센에게 그녀의 지시는 더 이상 닿지 않았다.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단다. 지상의 아이들이여.”

 

파장 때문에 기척이란 기척은 다 지웠을 텐데도, 심지어 그녀는 계속 정면만 보고 있었는데도, 마치 그녀들의 행동을 전부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 순호가 입을 열어 말했다. 몸을 일으켜 부적을 날리려던 레이무가 흠칫 놀라며 공격을 멈추었다.

 

언제부터 알아챈 거지?”

 

너희들이 이 세계에 왔을 때부터. 줄곧 기다리고 있었어. 누군가 나를 막기 위해 이 곳에 뛰어들기를 말이지.”

 

처음부터 바쿠를 죽기 직전까지만 공격하고 풀어준 건 그 때문이었던 거야?”

 

도리도리, 차분한 표정으로 순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로 죽일 셈이었단다. 너희들도, 그 녀석도, 나의 복수를 방해했잖니? 너희도 다른 녀석들과 다를 바 없어. 나의 행복을 앗아가고, 내 앞길을 방해한 너희 모두 죽어도 싼 녀석들이야. 그 요괴가 도망친 건 예상 밖의 일이었지. 쫒아가서 숨통을 끊어놓을 수도 있었지만, 내겐 더 중요한 계획이 있으니 봐주기로 했어. 어차피 늦든 빠르든 모두 죽게 될 테니까.”

 

모두 죽다니... 순호씨, 설마 당신. 지상까지도 어떻게 할 속셈이신가요?”

 

증오스러운 녀석들만 없애버릴까 했었지만, 생각이 조금 바뀌었단다. 내가 이렇게 된 건 사실 모두에게 책임이 있지 않을까? 그깟 태양을 이겨내지 못해 쩔쩔매기만 한 녀석들도, 그런 추잡스러운 인간말종에게 중요한 임무를 내리고 벼슬을 하사한 옥황도, 억울한 내 아이의 죽음을 쉬쉬한 모두도, 죄 없는 아이의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도움의 손길 하나 내려주지 않았던 신들도. 그래...모두 죄인이야. 모두 원망스러워. 증오스러워. 전부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또 배제하고 배제하고 배제하고 배제해서 이 세상을 나와 사랑하는 내 가족들의 낙원으로 만들 거란다.”

 

평온한 말투였지만 그녀가 말하는 단어 하나하나엔 강력한 힘이, 살기가 어려 있었다. 단어에 서린 분위기 만으로도 심장이 짓눌리는 갑갑함에 두 사람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제게 말한 약속은 어떻게 된 거죠? 전부 거짓말이었나요? 순호씨는 처음부터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로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죽이려 하는 미치광이였던 건가요?”

 

나는 너와 약속 같은 거 한 적이 없단다. 미천한 달토끼가. 그들이 먹고 남긴 찌꺼기를 주워 먹고 사는 가축 주제에 가식을 떨며 나를 이해하려는 척 하는 모습이 보기 역겹구나.”

 

이봐, 말이 심하잖아. 아무튼 레이센, 이제 이걸로 확인 됐지? 이 녀석은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 되는 녀석이라는 거.”

 

“...당신, 순호씨가 아니군요.”

 

대답 대신 둘 앞의 순호는 빙그레 섬뜩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순호가 아니라니 무슨 소리야?”

 

비슷한 상황, 겪어본 적 있어. 나면서 나와 다른 녀석. 이건 순호씨가 아니야! 꿈속의 주민인 순호씨지.”

 

말이 길었네. 그럼 시작해볼까. 모든 조각이 모였으니, 보아라, 불구대천의 원수들이여! 모든 것을 기억하고 끝없는 원한과 살의를 축적하며 얻은 나의 힘을!”

 

조심해, 레이센! 공격이 시...”

 

-푸슉-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를 감싸고 여우의 꼬리처럼 살랑거리며 타오르던 보랏빛 불꽃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촉수처럼 레이무를 덮쳤다. 그 레이무조차 미처 반응하지 못한 공격, 일점사로 쏟아진 공격은 그녀의 보호결계를 단번에 무력화시키고 배를 꿰뚫어 머리통만한 구멍을 레이무의 몸에 남겼다. 살점과 내장파편을 흩날리며 날아간 레이무가 피를 토하며 지면에 엎어졌다.

 

레이무!!”

 

한눈을 팔 때가 아니잖니?”

 

어느새 레이센의 앞으로 다가온 순호가 그녀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그대로 땅에 처박았다. 움직이지 못하게 다리를 짓이겨 밟고 올라탄 순호가 천천히 움켜쥔 손에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아각....아가각....!!!!”

 

두개골에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격렬한 고통이 몰아쳤다. 격통에 발버둥치는 레이센이었지만 마치 인간에게 밟힌 개미처럼 그녀의 저항은 순호의 행동을 단 1초도 저지하지 못했다. 점점 더 강해지는 으깨고 짓누르는 힘. 마침내 퍼석, 레이센의 머리가 터져나가며 사방에 체액과 내용물이 흩뿌려졌다.

 

정적이 찾아왔다. 널브러진 참혹한 시체 두 구와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서있는 순호. 누가봐도 상황은 완전히 종료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순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깔깔 웃으며 서있는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지옥이었어. 내 모든 것을 앗아간 남자의 아내가 되어 하루하루 능욕당하고 감시당하는 삶. 죽은 남편과 아들의 시체조차 찾지 못하고, 제사 한 번 지내주지도 못하면서 매일 밤 반복되는 같은 기억 속에 고통 받는 기분을 너희들이 알 수 있을까? 차마 다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이란다. 아니, 어차피 말로 할 필요 없었지. 똑같이 갚아주면 되었으니까.”

 

순호가 서있는 바닥 아래에서 황금색 빛이 뿜어져 나와 그녀를 가두었다. 피할 수 없게 갇힌 그녀를 향해 사방에서 벼락이 내리치는 것 같은 강렬한 전격이 덮쳐오고, 멀리서 급소를 노린 봉마침 여러 개가 동시에 날아왔다. 그러나 모두 소용없었다. 전격을 무시하고 순호가 팔을 휘두르자 빛의 결계는 너무나 허무하게 깨져 버렸고, 그 충격파에 봉마침은 힘을 잃고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흘긋 순호가 시선을 향한 곳에 레이무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느새 배에 뚫린 구멍도, 핏자국도 말끔히 지워진 모습이었다.

 

예상 했었지. 처음부터 너희들은 더러움을 순화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나의 힘이 통하지 않았으니까. 달의 두뇌의 도움을 받은 거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죽음의 개념을 아예 지워버리다니, 정말 성가신 숙적이로구나. 역시 진작 제거했어야 했어.”

 

젠장...아픔은 여전하잖아. 이런 게 뭐가 좋다고 봉래인들은 날뛰었던 거람. 두고 봐. 나중에 고통받았던 만큼 빛을 받아내고 말 테니.”

 

열 받은 표정의 레이무가 순호에게 달려들었다. 또다시 보라색 불꽃이 덮쳐들었지만 아까와 달리 레이무는 공격이 들어오기 전 살짝 몸의 각도를 트는 것만으로 순호의 공격을 전부 비껴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제법이구나. 공격의 궤도를 미리 읽고 피한 것이더냐. 인간답지 않게 영특하고 또 강력하구나. 네 녀석도 살아있는 것이 거슬리는군.”

 

네 감상따위, 알 바 아냐!”

 

추진력을 실어서 날린 발차기를 순호가 허리를 꺾어 피했다. 공중에서 타겟을 잃은 레이무가 휘청한 잠깐의 시간, 이번엔 지면에서 불꽃의 촉수가 동시다발적으로 그녀를 덮쳐들었다. 하나를 막아도 다른 촉수에 꿰뚫린다. 공중이기 때문에 몸을 움직여 피하는 것도 불가능. 명백한 데드존...으로 보였으나,

 

-!-

 

다음 순간, 레이무의 손에서 생성된 거대한 음양옥이 레이무를 위로 튕겨 올리는 동시에 순호와 불꽃을 한 번에 짓눌렀다.

 

일부러 공중에서 빈틈을 보이면 강한 공격을 날릴 줄 알았지. 너무 뻔하잖아?”

 

공중에서 빙글 반 바퀴 회전한 레이무가 부적을 휘감은 고헤이를 고쳐 쥐었다. 음양옥에 금이 가는 동시에 낙하하기 시작하며 고헤이를 치켜드는 레이무. 곧이어 음양옥이 산산조각나며 멀쩡한 모습의 순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낙하하는 가속도를 이용해 내리 찍으려는 레이무와 그녀를 향해 저지하듯 팔을 뻗는 순호. 두 사람이 정면으로 충돌하기 직전이었다.

 

-!!!-

 

순호의 어깨가 무언가가 베어 문 듯 크게 파이며 뒤늦게 묵직한 발포음이 이어졌다.

 

원호할게, 레이무!”

 

어느새 멀쩡히 머리가 돌아온 레이센이 앉아쏴 자세로 거대한 대전차 저격총 모양의 라이플을 들고 있었다. 총의 구경에 비해 순호에게 들어간 건 하찮은 수준의 데미지였지만, 제아무리 그녀라도 묵직한 총알이 선사하는 강렬한 충격까지 온전히 버텨낼 수는 없었다. 어깨가 날아간 순호가 일순 휘청이고, 레이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우직 두개골을 깨부수는 소리와 함께 운석이 충돌하는 것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충격파에 뿌리 뽑혀 날아간 백합꽃이 눈송이처럼 하늘하늘 공중에 흙먼지와 함께 흩어져 내렸다. 흙먼지가 가라앉길 기다리며, 레이무의 공격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레이센은 얼른 다음 광탄을 총 안에 장전하고 충전했다. 흙먼지가 가라앉는 동시에 추가타를 날려 레이무에게 공격할 시간을 벌어줄 속셈이었다.

 

말도 안 되는 맷집이야. 상반신이 통째로 날아가고도 남았을 텐데 겨우 그 정도 상처와 충격으로 끝나다니. 내가 조준을 잘못한 건가? 아냐, 그럴 리 없어. 그 상황에서 총알을 보고 피한 건가? 설마, 음속보다 빠른 탄을 소리를 듣기 전부터 눈치 채고 피했다고? 그런 게 가능해? 만약 가능하다면 어쩌면 레이무도...”

 

불안에 떨며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레이센. 또다시 머리가 박살나는 고통은 피하고 싶었지만 에이린의 말대로 여기까지 온 이상 도망칠 방도는 없었기에 결국 계속 싸울 수밖에 없는 그녀였다. 어느덧 스코프 너머로 흙먼지가 가라앉는 것이 포착되었다. 방아쇠에 손을 걸며 레이센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윽고 드러난 한 그림자. 명백히 키가 큰 어른의 형태를 띈 그림자를 본 레이센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

 

너희들의 살의는 너무나도 연약해. 불순물이 잔뜩 낀 그런 공격은, 이 나에게 닿지 않아.”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레이센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다급히 몸을 굴러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려 하며 레이센이 들고 있던 총기의 모드를 전환했다. 철컥거리며 대전차 라이플 형태의 라이플이 조립과 분해를 반복하며 컴팩트한 소드-오프 샷건의 형태로 변형되었다. 제대로 된 조준도 없이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총구를 겨누며, 레이센이 공포에 질린 고함소리와 함께 샷건을 마구 난사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철컥..철컥...-

 

총알이 떨어진 샷건의 펌프를 연신 당겨대며 레이센이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제발 한 발이라도 제대로 먹혔기를 간절히 바란 레이센이었으나, 그런 그녀의 바람이 무색하게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건 철통같이 순호를 지키고 하늘거리고 있는 불꽃의 꼬리들. 그녀가 발사한 광탄은 전부 불꽃에 휩싸여 형체도 없이 사라져, 순호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가엾게도. 잔뜩 겁에 질렸구나. 이젠 일말의 분노조차 네게 느껴지지 않아. 하다못해 네 손으로 네 동료를 날려버렸을 때처럼 살의를 품었어도, 이렇게 허무하게 공격이 막히지는 않았을 텐데.”

 

...내 동료를...내 손으로?”

 

레이센의 목을 움켜쥔 순호가 그녀를 멀리 집어던졌다. 철퍽 흙바닥에 얼굴부터 처박힌 레이센이 피투성이 얼굴로 몸을 일으켜 상황파악이 덜 된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녀의 앞에 키 큰 형체가 우뚝 서있었다. 아까 그녀가 그림자를 확인하자마자 날려버린 그것. 분명 그것은 순호였다. 아니, 순호여야 했다. 키가 그 정도로 큰 건 여기서 순호 한명 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녀 앞에 놓인 그것, 그녀가 살의를 가득 담아 날린 총탄이 향했던 곳엔 솟아오른 바닥이 우뚝, 기둥처럼 높게 치솟아 있었다. 불안한 예감이 머리를 스친 레이센이 떨리는 눈동자를 움직여 위를 확인했다.

 

,싫어어어어!!!!”

 

검붉은 피로 물든 뾰족한 기둥. 높이는 순호의 키랑 비슷한 정도일 것이다. 기둥의 뾰족한 끝, 거기에 가슴을 꿰뚫린 레이무의 몸이 힘없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부터 쇄골 위까지는 깨끗하게 날아간 채로, 선명한 단면을 드러낸 채 시뻘건 선혈을 뚝 뚝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를 이토록 깨끗하게 날린 공격이 무엇인지, 레이센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하쿠레이의 무녀와 힘을 합쳐도 이 정도. 몇 천 만 번을 살해당해도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압도적인 무력 차이 앞에 패닉에 빠진 레이센이 천천히 힘 풀린 모습으로 주저 앉고, 그런 그녀의 뒤로 순호가 조용히 다가왔다. 순호의 손엔 나무를 깎아 만든 듯한 긴 막대 하나가 들려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체념한 듯 그 녀석에게 상냥하게 굴기 시작했지. 고분고분 순종적인 모습에 어리석기 짝이 없는 그 녀석은 내가 결국 자기를 선택한 줄 착각하기 시작했어. 몸도, 마음도 얼마든지 내어주며 녀석이 권력의 정점에 오르기를 기다렸다. 녀석이 진정 사랑하는 여자를 찾고, 끔찍이 아끼는 자식을 가져 그 자식이 무럭무럭 자라기를 기다렸다. 행복이 절정에 달했을 때 모든 것을 앗아가기 위해...”

 

순호의 말은 정신이 나간 레이센의 귀에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멍청하게 등을 돌리고 주저앉은 그녀의 뒤통수를 향해, 순호가 막대를 휘둘렀다.

 

-!-

 

그토록 사랑하던 여자에게 녀석의 실체를 고발하고 이간질했어. 결국 녀석이 사랑한 여자는 그를 배신하고 도망쳤다. 상심에 빠진 녀석에게 내가 있으니 걱정 말라며, 평생 입에 담지 않기로 했던 당신이란 단어로 그를 회유했지.”

 

-!-

 

내게 휘둘린 녀석은 그저 폭정만 일삼는 주정꾼으로 전락해 권력도 부하도 모두 잃었다. 남은 것은 아들과 폐인이 된 녀석뿐이었지. 마침내 때가 왔다고 생각했어.”

 

-!-

마지막으로 녀석을 당신이라고 불렀던 날, 녀석도 너처럼 이렇게 내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어리석게도, 자신이 파멸시킨 이를 신뢰하고서. 그런 녀석에게 다가간 나는 이렇게 말했다. ‘죽어라고.”

 

-!-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녀석의 머리를 깨부쉈어! 녀석의 늑골을, 녀석의 갈비뼈를, 녀석의 성기를, 녀석의 사지를! 형체가 남지 않을 때까지 부수고 짓이기고 다지고 터트렸지! 이렇게 말이다!”

 

-! ! ! ! ! ! ! ! !-

 

무자비한 구타 아래 피와 살점, 뼛조각과 내장 파편이 폭죽처럼 솟아 흩어졌다. 더 이상 사람의 형체였다고 믿기 어려울 지경까지 레이센의 몸을 다져버리고 나서야 겨우 순호의 손이 구타를 멈추었다. 다진 고기가 된 레이센의 살점을 한 움큼 집어 입으로 가져가며 순호가 희열가득한 웃음과 함께 충혈 된 눈을 번득였다.

 

녀석의 살점은 정성껏 긁어모아 푹 삶아 녀석의 아들에게 먹였다. 맛있게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아이의 귀에 속삭여 주었지. 이것은 네 아비의 고기라고 말이야. 너와 같은 표정을 지은 녀석은 이내 스스로 목을 매달았어. 이것으로 나의 복수는 끝난 줄 알았다. 지옥 같은 나날도, 반복되는 꿈도, 끓어오르는 증오도 이젠 전부 사라질 줄만 알았어. 하지만 그렇지 않더구나. 여전히 꿈은 계속되었고, 내 안의 분노는 사라질 줄 몰랐지. 왜 그런 걸까?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 녀석의 부하들도, 그들의 가족들, 하인들까지도 전부 내 손으로 죽였다. 그래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어. 결국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녀석이 사랑했던 여인 상아’, 그리고 그녀의 관계자들도 죽여야 이 한이 풀릴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이 와 나의 운명을 갈라놓았지.”

 

꿈틀, 기둥에 꽂힌 레이무의 손이 꿈틀거렸다. 날아간 머리는 어느새 재생을 거의 마친 뒤였지만, 여전히 암석에 꿰뚫린 가슴은 재생을 못하고 있었다. 죽을 만큼 아프지만 죽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조금씩 의식이 돌아온 레이무가 이를 갈며 순호를 응시했다.

 

현실의 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자신을 잊어버리고 말았지. 안타까운 일이야. 자신이 왜, 무엇 때문에 복수를 하는 지도 까먹고 여자 하나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고 있지. 가엾은 것. 그 아이가 이런 어미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슬퍼할까. 그 아이가 진정 바라는 것은 따로 있는데.”

 

네 사정 따윈 관심 없어... 결국 현실의 자신이 마음에 안 들어서 모조리 날려 버리려는 거잖아. 미쳤어... 분노의 화신? 웃기지마, 너는 그저 이기주의자일 뿐이야. 자기가 제일 불쌍한 줄 알고, 자신만의 사정을 강요하며 세상을 망가뜨리려는 미친놈일 뿐이라고.”

 

그 아이는 나의 모든 것이었어. 그 아이를 위해 나는 무엇이든 할 거란다. 그날의 기억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도, 내 가슴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분노가 넘실대는 것도 다 그 아이가 바라기 때문인 것이겠지.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이유,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도덕, 윤리, 규율, 섭리, , 그 모든 것을 넘어 나는 내 모든 것을 여기에 바치겠어.”

 

순호가 손을 뻗어 레이무의 양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또다시 고문이 시작 될 거라 예상한 레이무는 눈을 질끈 감았으나, 그녀의 몸엔 아무런 고통도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피부를 타고 심상치 않은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자신이 아닌, 자신을 제외한 이 공간에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레이무가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움직여 주위를 살폈다.

 

“!?”

 

꽃밭과 건물을 제외하면 암흑뿐이었던 공간에 색이 입혀지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하늘과 눈부신 태양. 상쾌한 흙내음. 코를 간질이는 산들바람. 따듯하게 데워진 공기, 그리고 향긋한 꽃향기. 그녀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세상의 변화는 주변으로 뻗어나가 저 멀리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졌다. 이것이 꿈인가 현실인가. 구분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낙원이 레이무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대체 무슨 계획인거야?”

 

곧 알게 될 거란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

 

화사한 풍경과 대비되는 속이 뒤집힐 것 같은 불안함에 레이무가 입술을 악물고 그녀의 손아귀로부터 빠져나가려 할 때였다.

 

거기까지다. 불순하기 짝이 없는 가짜여.”

 

허공이 갈라지고, 그 안에서 또 한명의 순호가 걸어 나왔다.

 

 

-7-

순호와 순호, 똑같이 생긴 두 명의 인물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경계의 시선을 교환하는 동안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그 정적을 먼저 깬 건 꿈속의 순호 쪽이었다.

 

어떻게 들어온 거지? 내 손으로 직접 널 이 세계에서 쫓아냈거늘.”

 

이 세계와 연결되는 통로가 한 군데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나 자신이면서 나의 친우가 누구인지 까먹고 있나보군. 그녀를 설득하고 먼 길을 돌아오는데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지옥과 이계를 오가는 건 꽤 흥미로운 경험이었어.”

 

복수의 이유를 잊은 것도 모자라 이젠 남의 도움이나 받고 다니는 처지인 것이냐. 한심하기 짝이 없어. 불순물이 섞인 건 네 쪽이다. 어느 순간부터 정체된 약해빠진 살의를 가지고 어리석은 방황만 계속할 뿐인 너 따윈, 내 계획이 가지는 의미를 절대 이해하지 못하겠지.”

 

내막을 몰라도 알 수 있는 것도 있지. 내 힘을 가 어떻게 쓰고 있는지 보면 노리는 것쯤 훤히 들여다보이지 않을까.”

 

하하...아하하하! 그럼 말해 보거라! 내가 나 자신을 쓰러뜨려가며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텅 비어 버린 머리로 무엇을 알 수 있겠느냐. 보아라, 이곳이 어디인지 알겠느냐? 이 장소가 가지는 의미를 알겠느냐?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잊어버린 네가 무엇을 알겠느냔 말이다!”

 

거센 도발에도 현실의 순호는 무표정하게 꿈속의 자신을 응시하기만 했다. 자신을 둘러싼 풍경에, 거기에 담긴 의미에 일체의 관심도 없다는 듯이.

 

그 말대로,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왠지 모르게 그리운 기분이 드는 것으로 보아 내가 잊어버린 기억, 그리고 내가 이렇게 된 이유와 깊게 연관된 곳이겠지.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 중요한가. 그런 것은 네 목적을 파악하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어. 무의미한 고찰은 불필요하다.”

 

무의미하다고? 이 모든 것이 네게 무의미하다는 말이냐? 그 아이도! 그 아이의 죽...”

 

이상이에요!! 꿈속의 순호씨는... 이상을 순화시켜 여기에 이상적인 세계를 건설하시려는 거죠? 그쵸?”

 

꿈속 순호의 말을 끊는 확신 가득 찬 목소리에 두 명의 순호가 동시에 반응해 돌아보았다. 다진 고기에서 겨우 재생을 마친 레이센이 갈기갈기 찢어진 피투성이 옷자락을 붙잡고 초조함이 담긴 표정으로 꿈속의 순호를 주시했다.

 

꿈은 수많은 이의 기억을 포함해 희망, 슬픔, 분노 등 다양한 것들이 담긴 세계. 그 중엔 물론 개개인이 바라는 이상도 있어요. 순호씨는 그 이상으로 이 세계를 가득 채워 자신이 꿈꾸던 세계를 만들어내려던 속셈이셨죠. 그래서 방해가 되는 도레미씨를 먼저 습격해 제거한 거에요.”

 

후후, 보아라. 우리 우동게도 네 계획을 훤히 꿰고 있지 않느냐. 자신이 농락한 아이에게 모든 것을 간파 당하다니, 참으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계획이야.”

 

쓸데없는 참견을...”

 

이를 으득 갈며 꿈속의 순호가 레이센의 머리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그대로 레이센의 머리를 쥐어 터트려버리려는 찰나, 또 다른 순호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꿈속 순호의 팔을 아슬아슬하게 낚아챘다.“

그것은 내 것이다. 내 것을 건드리거나 앗아가는 것은 가만 두지 않아.”

 

이 녀석은 네 숙적과 한 패다. 적과 정분이라도 난 것이냐? 그런 불순한 감정이 너를 숙명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이 아니더냐!”

 

불순한 감정?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은 내 것에 손을 대려 한 에 대한 살의 뿐이거늘.”

 

꽈악, 현실의 순호가 꿈속 순호의 팔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꿈속 순호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레이무와 레이센의 공격에도 끄덕도 않던 그녀가, 단순한 팔의 악력만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괴로워하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이런 힘이... ...”

 

분노가 가져다 준 이 힘을 허술하기 짝이 없는 군주놀음 따위에 사용하고, 정제되지 못한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휘두르기만 하는 네가 정녕 나의 힘을 압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느냐. 불쌍한 것.”

 

군주놀음이라고? 이건 그 아이가 바라는 것이야! 내가, 그리고 네가 존재하는 이유. 평생에 걸쳐 이루어야 할 숙원이란 말이다! 그게 겨우 소꿉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이냐!”

 

자신의 상상 속 복수가 끝난 세상을 만들어 현실에 옮겨다 놓는 것이 소꿉장난이 아니면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야말로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모든 것을 마무리 짓고자 하는 불순한 생각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현실에...옮겨요?”

 

잠깐, 그거 무슨 뜻이야? 그보다 나부터 좀 빼주지 않을래, ?”

 

정곡을 찔린 꿈속의 순호가 아무 반박 못하고 시선을 내리깐 사이 레이센이 바위기둥을 부수고 레이무를 내려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해주었다. 여전히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지 못한 둘과 분해하는 또다른 자신을 번갈아 보며, 현실의 순호가 피식 코웃음치며 말했다.

 

자신의 이상 속 왕국을 건설하는 것은 계획의 전반부에 불과했단다. 굳이 조용히 꿈속에서 소꿉장난을 하는 것으로 만족했다면 소란을 키울 필요도 없었겠지. 꿈속의 내가 노린 건 너희같은 현실의 존재들이 이변을 눈치 채고 꿈의 세계로 찾아오게 하는 것. 너희들의 존재로 인해 이 꿈의 세계에 현실성이라는 작은 불순물이 생겼지. 우주 속 점 하나에 불과한 작은 현실성이라도 나의 능력을 이용하면 이 세계 전체를 뒤덮을 수 있어. 그러니까, 조금만 더 늦었으면 여기 만들어진 세계가 곧 현실이 되었을 거라는 뜻이란다.”

 

그렇게 되었다면 이 세상은...”

 

꿈속의 내가 바란 이상적인 세계가 되었겠지. 내가 죽여 버리고 싶었던 이들이 모두 죽어 없어진, 다시는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말이야.”

 

꿈속의 순호는 분명 이 세상 전부를 증오하고 저주한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바란 이상적인 세계란 곧 모든 존재가 죽어 없어지고 그녀만 남은 텅 빈 세계. 아니, 어쩌면 그녀는 가족 또한 되살리려 했을 지도 모른다. 모두가 죽고 없어진 텅 빈 세상 속 추억의 장소에서 가족들과 함께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그녀가 바꾸려 했던 세상의 모습이리라. 환상향 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 그리고 달의 도시까지 사라질 뻔 했던 초유의 위기 앞에 두 사람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말했지. 내 것을 건드리는 것은 용서하지 않겠다고. 상아는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야 해. 상아의 목숨은 내 것이야. 그걸 멋대로 가로챈다면, 설령 나 자신일지라 해도 똑같이 고통스럽게 죽여 버리겠어.”

 

움켜쥔 팔을 휙 꺾자 꿈속의 순호가 무력하게 풀썩 무릎을 꿇었다.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게 생긴 그녀의 얼굴은 초조함과 수치스러움, 그리고 분함으로 붉어져 있었다. 이전의 순호가 이변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보여준 초연한 태도와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폐를 끼쳤구나, 우동쨩. 그리고 하쿠레이의 무녀여. 이곳에 뿌려진 나의 힘은 전부 내가 거두어들이지. 나 자신이 저지른 실례는 내가 수습하겠어. 그리고 이 허술한 는 다신 같은 짓을 하지 못하게 철저히 관리하도록 하마.”

 

죄인을 호송하는 것처럼 꿈속 순호의 팔을 단단히 쥔 채로 현실의 순호가 성큼 자신이 나왔던 균열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뭐어...그래준다면 고마운데, 딴 생각 품고 있는 건 아니지?”

 

... 의심이 많은 것도 곤란하구나.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그런 식의 유치한 복수를 원하지 않아. 철저히 고통스럽게 만들어 가지고 놀다 내 눈앞에서 숨이 끊어지는 걸 보고 말거니까...?”

 

레이무를 돌아보며 현실의 순호가 한마디 하는 사이, 갑작스레 꿈속의 순호가 그녀를 덥썩 감싸 안았다. 원한에 가득찬 귀기 어린 표정으로 이를 악문 꿈속의 순호가 현실 순호의 머리에 손을 얹은 순간 순식간에 주위 공기가 불안하게 일렁이며 레이무 일행의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용서할 수 없어. 인정할 수 없어. 길고 길었던 수모의 기간을, 손에 묻힌 수많은 피를, 영원히 반복되는 악몽을, 그 아이의 마지막 순간, 마지막 미소, 이름! 모든 걸 잊어버린 네 분노가 나보다 순수하고 강하다고? 진짜 순수한 분노를 떠올리게 해주겠어. 내가 가진 기억 전부! 네가 내게 떠넘기고 잊어버린 그 전부를 네게 돌려주겠다! 떠올려라, 그 날 네가 스스로에게 했던 맹세를! 그 아이의 복수를 위해 네가 무엇이 되려 했는지! 무엇을 하려 했는지! 전부 떠올려!”

 

검게 물든 눈동자에서 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검은 액체를 줄줄 흘리며 꿈속의 순호가 원망의 말을 퍼부었다. 손에서 머리로, 꿈속 인물에게서 현실의 본인에게로 잊히고 봉인되었던 기억이 전부 흘러 들어간다. 천지가 진동하고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압박감, 그리고 내장이 뒤집히는 구역질이 느껴졌다. 똑바로 서있기조차 힘든 거대한 살의가 순호를 중심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비디오를 되감는 것처럼 기억이 하나둘 돌아오고 그때마다 살의가 한층 더 팽창하며 요동쳤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거대한 시한폭탄에 화약을 계속 쏟아 붓는 것 같은 불안 속에, 둘은 순호 곁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그녀의 생각이 폭주하는 모습을 지켜만 볼 뿐이었다.

 

이제 알겠느냐! 네 원한이 향해야 할 대상을! 너를 저버린 이 세상 전부를 저주해라! 그 아이가 바라는 것을 떠올려!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죽이고 그 아이만을 위한 세상을 만들었을 때 나의 숙원은 풀릴 것이다! , 더 분노를 발산해라. 살의를 드러내라! ! !”

 

병아리가 껍질을 깰 때처럼 하늘과 땅에 금이 가며 그 틈으로 또 다른 푸른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동시에 일시적으로 멈추었던 세상의 변화가 가속되었다. 두 명의 순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순화의 힘이 세상을 아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하나로 합치고 있었다.

 

...험해. 이거 막지 않으면 모두 죽....”

 

막아야 하는데...움직일 수가 없어. 힘이 빠지고 있어. 숨을 쉴...수가......”

 

쩌적 하고 하늘이 갈라진다. 우주의 모든 생명체의 소멸이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이었다.

 

...?”

 

언제 나타난 것일까, 영체처럼 불투명한 몸을 가진 조그마한 꼬마아이가 순호 앞에 서 그녀를 불렀다. ‘엄마라고, 순호를 그렇게 부른 소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아...거의 다 되었어. 이제 조금만 있으면...! 기다리거라 백봉아. 나의 아들아. 이 어미가 이제 곧 네 소원을 들어주마. 네가 다시 웃을 수 있는 새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 그곳에서 셋이서 영원히 함께 살자꾸나. 그러니까...무서워도 조금만 참거라. 다 너를 위한 것이다.”

 

우두커니 서서 폭주하는 현실의 순호를 놔두고 꿈속의 순호가 터덜터덜 눈앞의 아이에게 다가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검은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꿈속 세계에서 본체보다 더한 고통에 시달리며 쌓인 한을 풀 기회가 마침내 그녀의 목전까지 찾아왔다. 원수가 모두 사라진 순수한 세상에서 사랑하는 그이, 그리고 아들과 함께 웃는 모습이 아련하게 그녀의 눈앞에 그려지던 순간이었다.

콰득, 둔탁하면서 동시에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정지했다. 살기에 요동치던 공기도, 개벽하던 천지도, 낙원도, 재회의 기쁨을 나누던 모자도, 모든 것이 멈추었다. 뚝 뚝 무언가 액체가 떨어지는 소리만이 정지한 세계 속에서 조용히 들려오고 있었다.

 

“......? ...째서...”

 

가슴에서 느껴지는 뜨겁고 쓰라린 감각에 꿈속의 순호가 당황하는 시선을 급히 아래로 내렸다. 가슴을 뚫고 하얀 팔 하나가 살갗 밖으로 삐죽 솟아나와 있었다. 덩굴 같은 혈관이 얼기설기 얽힌 팔 끝, 손이 쥐고 있는 것은 지금도 두근거리며 뛰고 있는 그녀의 심장. 조금만 힘을 줘도 터질 것 같은 부드러운 심장을 움켜쥔 손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내 것...돌려줘......”

 

음산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파고들었다. 목소리의 정체는 자신의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꿈속의 순호는 온 몸이 얼어붙는 한기를 느꼈다. 자신이 기억 속, 여태껏 자기 자신이 내뿜은 분노 중 가장 차가우면서 무겁고, 또 소름 끼치는 분노. 눈앞에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들이 서있는데도, 낙원의 도래가 코앞인데도 상대에게선 어떤 다른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이 세상에 두 명의 순호 단 둘만 남겨진 기분이었다. 이토록 순수한 감정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세상 모든 것을 초월한 듯 한 분노의 결정 앞에, 꿈속의 순호는 뒤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레이센이 그랬던 것처럼, 패닉 상태로 얼어붙었다.

나의 추억, 복수, 맹세. 나의 모든 것을 이번엔 내 자신이 앗아가려 하고 있구나. 더 이상 빼앗기지 않아. 그러니까 설령 그게 나 자신일지라도, 죽여버리겠어.”

 

, 기다려... 여기서 모든 걸 수포로 돌릴 셈이냐? 네 아들이, 우리의 아이가 지켜보고 있어! 아이가 보고 싶지 않은 거냐? 그이와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냐!”

 

네가 전부 기억나게 하지 않았더냐. 그이도, 아이도 모두 죽었다. 네 앞에 있는 것은 내 아이가 아니다. 네 망상이 만들어낸 조잡한 인형. 그런 모형 정원에 내 모든 것을 내어줄 것 같으냐. 말하지 않았더냐. 처음부터 불순물이 섞인 것은 너였다고. 너의 그 나약함이, 불순한 감정들이 너를 복수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고 이런 인형에 마음을 빼앗기게 한 것이다. 너라는 불순물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구나. 나의 복수를 위해, 얌전히 사라지거라.”

 

잠깐...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줘! 이제 겨우 만났어! 하다못해 마지막으로 한 마디라도...!”

 

철퍽, 말이 끝나기도 전 꽉 움켜쥔 손이 심장을 터트렸다. 피투성이가 된 꿈속 순호의 몸이 쓰러짐과 동시에 아이의 몸은 점점 더 투명해져, 마침내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아이가 있었던 곳엔 가슴이 뻥 뚫린 꿈속 순호의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와 검은 눈물이 뒤섞인 웅덩이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원흉이 죽자 곧 세상도 모두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깨부숴질 것 같이 균열 투성이였던 하늘과 땅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해졌고, 꿈속 순호가 만들어낸 낙원은 다시 우주 공간을 형상화한 원래 꿈 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움직이기는커녕 호흡조차 힘들게 만들었던 살기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바로잡힌 세상, 거기에 레이무, 레이센, 순호 단 세 명만이 우두커니 서있을 뿐이었다.

 

, 순호씨...?”

 

잠깐, 다가가지 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순호에게 다가가려는 레이센을 레이무가 서둘러 저지했다. 심장을 터트린 자세 그대로 등 돌린 채 가만있는 순호에게선 겉보기에 아무런 낌새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지만 레이무는 여전히 그녀를 경계하고 있었다.

 

, 순호씨가 아니었음 큰일날뻔 했는데.”

 

잊었어? 기억이 돌아왔잖아. 꿈속의 녀석을 미치게 만들었던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이 전부. 아직 다가가지 마. 어쩌면 저 녀석은 더 이상 네가 알고 있는 순호가 아닐지도 모르니까.”

 

“......”

 

순호가 팔을 거두고 천천히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레이무와 레이센이 각각 숨을 삼키며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마침내 완전히 돌아선 순호와 둘의 시선이 정면으로 교차했다.

 

“...우동쨩? 다친 곳은 없니? 하쿠레이의 무녀여, 그쪽도 괜찮은 것인가?”

 

어라?!”

 

순호씨? 실례지만 제정신이 맞으신 거죠? 막 저흴 죽이거나 하실 건 아니죠?”

 

우문이로구나. 아무 잘못 없는 너희들을 내가 왜 죽이려 하겠니.”

 

그렇지만, 저기...기억이 돌아오셨으니 말이죠. 혹시나 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이제부터 어쩔 셈이야? 똑같은 방식으로 난리를 치려고?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방금 녀석처럼 또 일을 벌일 셈이라면 지금 여기서 퇴치하겠어.”

 

“...그게 과연 가능할까? 후후, 농담이란다, 농담. 우동쨩과 약속한 것도 있고, 당분간은 정말 아무도 건드리지 않을 거니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소맷자락으로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순호, 그런 그녀를 레이무는 여전히 못 믿겠다는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쿠궁, 작은 흔들림과 함께 허공에 작은 균열이 둘 생겼다. 하나는 처음 순호가 나왔던 바로 그 균열이었다. 방금 전 순호의 폭주로 세상이 뒤집힐 뻔 했을 때 사라졌던 것이 상황이 안정되자 다시 나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완전히 처음 보는 균열. 어디로 연결된 건지 모를 균열 사이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쏙 들이밀었다.

 

- 여기들 있었네요. 제가 없는 동안 상황이 말도 아니었던 것 같군요.”

 

붕대를 둘둘 감은 도레미가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모습으로 폴짝 균열을 넘어 들어왔다. 에이린의 치료와 요괴의 치유력 덕분에 빨리 낫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몸 여기저기가 불편한지 움직일 때마다 작은 신음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 겨우 정리했어. 도대체가, 바쿠가 되어서 꿈속 세계 하나 통제 못하고 뭐하는 짓이람. 네가 없는 사이 세상이 멸망할 뻔 했던 거 알고는 있어?”

 

~~ 너무하네요. 저도 나름 필사적으로 노력한 건데. 힘의 차이가 있는 걸 어쩌겠어요. 결과적으로 잘 해결되었으니 다행이죠. 감사의 뜻에서 당분간 두 분껜 좋은 꿈만 꾸게 해드릴 테니까요? 이걸로 어떻게든 용서를.”

 

될까보냐!”

 

, 아무튼 전부 해결되었구나. 이제 안심하고 돌아갈 수 있겠어. 우동쨩도, 무녀도 조심해서 돌아가려무나. 너희들 통로는 그쪽에서 열어줄 테니.”

 

, ...순간 착각했네요. 당신은 이쪽주민이 아닌 거죠? 가슴이 철렁했어요.”

 

순호를 본 도레미의 표정이 순간 창백해졌다가, 그녀가 본체임을 깨닫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안심하려무나. 그 녀석은 다시 날뛰지 못할 테니.”

 

어머, 완전히 처리하신 건가요.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안심하긴 일러요. 본체가 꿈을 꾸고 억압된 욕망을 품고 있는 이상, 언제든 꿈속의 나는 다시 생겨날 수 있답니다?”

 

그거 주의해야겠는걸. , 잘 관리하라는 뜻이겠지?”

 

네에, - 그렇네요. 자아, 그럼 두 분은 이쪽으로. 꿈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제가 안내해 드리죠.”

 

잘 지내렴, 우동쨩. 또 보자꾸나.”

손을 흔들곤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갈라져 균열 너머로 순호가 빠져나가려던 찰나, 황급히 달려온 레이센이 그녀의 소매를 붙잡아 멈춰 세웠다.

 

잠깐만요, 순호씨! , 마지막으로 물어볼 것이 있어요.”

 

은밀한 질문이라면 단 둘만 있을 때 물어봐도 되는데? 후후.”

 

그런 게 아니라요! ..., 정말 괜찮으신 거 맞는 거죠? 그러니까, 기억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힘들거나 괴로우신 건 아닌지 해서......”

 

어머, 내가 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는 순호를 레이센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오히려 두근거리는걸. 지금까지 나는 상아를 쳐죽여버려야겠다는 생각만 했을 뿐, 그 이유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어. 단순히 상아에게 화가 나있었다, 그 뿐이었지. 하지만 이제 자세한 이유를 알게 되었잖니? 그래, 지금 나는 너무 상아를 죽여 버리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겠단다. 상아를 떠올릴 때마다 아픈 기억이 떠올라,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고 살의가 끓어올라서 가슴이 뛰어. 이제 더 열심히, 힘차게, 다양한 방법으로 복수의 칼날을 갈 수 있게 되었구나. 살아갈 이유가 더욱 명확해진 기분이야.”

 

뭔가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심리에 우동게는 굳게 입을 다물고 적당히 이해한 척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달의 도시에 위협적이었던 순호가 더욱 위험한 적이 되었다는 것. 상냥하게 눈웃음 짓는 그녀의 평온한 얼굴도 레이센에게 근원을 알 수 없는 미지의 불안감을 느끼게만 할 뿐이었다.

 

뭐 해, 레이센. 안 돌아갈 거야? 혼자 가버린다?”

 

, 기다려! 금방 간다니까!”

 

, 그럼. 또 언젠가 인연이 닿는 곳에서.”

 

그 말을 끝으로 순호는 자신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여전히 풀리지 않은 찝찝한 기분을 떠안고,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본 레이센은 임무 성공을 보고하기 위해 레이무와 도레미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Epilogue-

 

선계 어딘가, 아는 이도 거의 없고 안다 해도 들어갈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숨겨진 장소. 안개와 울창한 침엽수로 둘러싸인 공터 한가운데 아담한 집 한 채가 홀로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짐승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집 주변, 침묵을 깨고 작은 노랫소리 하나가 집 안쪽으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小宝贝快快睡

(귀엽고 작은 아가, 얼른 자거라)

梦中会有我相随

(꿈 속에서 엄마가 따라 갈 거야)

陪你笑陪你累

(네가 웃을 때도, 지쳤을 때도 함께 있어)

有我相依偎

(나에게 꼭 기대렴)

你会梦到我几回

(꿈 속에서 엄말 몇 번이나 볼 거야)

有我在梦最美

(꿈에서 가장 아름다운 엄마가 있을거야)

有我在梦最美......“

(꿈에서 가장 아름다운 엄마가 있을거야......)

 

어설픈 솜씨로 직접 만든 것 같은 투박한 솜인형을 소중히 끌어안은 순호가 침대 위에 걸터 앉아 인형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여주고 있었다.

 

오랜만에 머릿속에 떠오른, 언젠가 누군가에게 밤마다 들려주던 자장가. 마지막 소절을 흐리는 순호의 얼굴엔 서글픈 미소가 가득했다.

 

대답이 없는 인형을 고이 요람 위에 뉘이고 순호는 다시 침대에 앉아 인형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그녀는 웃음 짓고 있지 않았다. 슬픈 눈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얼어붙을 듯 차가운 분노가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눈보라치고 있었다.

 

잘 자렴, 우리 아가.”

 

불을 끈 순호가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오늘 밤도, 내일 밤도 앞으로도 평생 그녀는 꿈속에서 그녀의 아이와 함께할 것이다. 영원히 같은 죽음을 반복하는 아이를, 죽는 순간까지 품 안에 꼭 안아주면서. 그렇게 그녀는 매일 밤 더욱 순수하게 정제된 분노와 살의로 복수의 칼날을 단련할 것이다. 마음속에서 그녀를 옭아맨 무언가의 존재가 사라지는 그 날까지.